Share

제7화

Author: 도도보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요즘 뜬 연예인인가?”

“아냐, 지금 잘나간다는 신인들보다 훨씬 예쁜데?”

다들 피터 옆에 선 여인에게 시선이 쏠렸다.

피터 곁에 선 여자는 존재감이 굉장히 강했다.

블랙 벨벳 소재의 스트랩리스 드레스는 지나윤의 몸선을 고급스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올려 묶은 웨이브 헤어에는 FY주얼리 피아노 시리즈의 최고가 액세서리가 달려 있었다.

흑백 다이아의 강렬한 반짝임이 모든 조명 아래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으로 빛났다.

그때, 얼마 전까지 단 한 번도 여자를 제대로 보지 않던 유시진의 시선이 멈췄다.

“지나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채연서, 송려화, 오희나는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피터 옆에서 고개를 돌려 막 미소 지은 지나윤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세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유시진은 숨조차 고르게 쉬지 못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고, 그 눈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낯설만큼 선명하면서 어딘가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것 같은 눈빛이었다.

이때 채연서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 생각도 못 했네. 벌써 새 남자를 찾았나 봐.”

부드러운 톤이었지만 말끝엔 시린 기류가 섞여 있었다.

그 말에 유시진의 눈빛이 일순 어두워졌다.

지나윤은 피터에게서 빌린 선물을 착용하고 있었다.

또한 유시진과 채연서가 꽁냥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이 자리를 피하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한 이상 고개를 숙이고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홀 전체에서 퍼지는 시선들 속에서 오직 유시진만이 지나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채연서 곁으로 걸어갔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 아래 감춰진 미세한 긴장과 억눌림은 지나윤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결혼 내내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보여준 적이 없던 얼굴이었다.

그 사실에 마음이 더 아팠다.

그녀의 마음속에 피어난 잠깐의 승부욕은 곧 허무함과 싸늘한 상실감으로 바뀌었다.

잠시 뒤, 지나윤은 그저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어서 천천히 연회장 한쪽으로 몸을 돌려 화장실로 걸어갔다.

고개를 숙여 발 뒤꿈치를 확인하는 순간, 날카롭게 파고드는 통증이 다시 올라왔다.

익숙하지 않은 하이힐이 뒤꿈치를 심하게 찍은 모양이었다.

발이 흔들리며 중심이 무너질 뻔한 그때, 누군가가 재빨리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감사...”

고개를 들자마자 눈앞에 선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다름 아닌 유시진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듯 깊은 유시진의 눈빛이 그대로 지나윤을 향해 있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미소 선 입술은 묘하게 불편할 만큼 부드러웠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건 오랜만이었다.

지나윤은 황급히 팔을 빼려 했지만, 유시진이 잡은 손목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굳이 나한테 질투심 심어주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담담한 목소리, 그리고 얼굴에 비웃음이 실렸다.

“이런 서투른 밀당은 별로야.”

말을 끝내자마자, 유시진은 손을 놓고 마치 준비된 듯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건넸다.

그 안에는 투명한 밴드가 들어 있었다.

이름도 부르지 않고 다른 설명도 없이, 그저 건네고 돌아서서 화장실로 사라졌다.

지나윤은 잠시 놀란 채 서 있었지만 결국 유시진이 준 밴드를 붙였다.

뒤꿈치는 조금 편해졌지만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

홀로 돌아온 뒤,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든 접시만 바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송려화와 오희나가 다가왔다.

“음식이 너무 많아서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죠? 처음이면 원래 그래요.”

“그렇죠. 이건 고급 캐비어에요. 러시아 블리니랑 같이 먹는 거죠.”

송려화가 잘난 듯 말하자, 오희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지나윤 씨는 캐비어가 뭔지도 모를 걸? 시장 다니는 게 유일한 외출이라며.”

지나윤이 대꾸도 하기 전에 채연서가 다가와 길을 막았다.

“둘 다 그러지 마. 나윤 씨도 요즘 세상 사람인데 캐비어 정도는 들어봤겠지.”

채연서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캐비어를 블리니 위에 올렸다.

그 모든 행동들은 친절해 보였지만 눈빛은 그 반대였다.

“그래도 먹어보는 건 처음이겠네요? 그럴 만하죠. 시진이가 워낙 바빠서 밖에 데리고 나갈 일도 없을 테니까요.”

“쪽팔리니까 그런 거겠지. 예전엔 대표님이랑 너랑 여기저기 많이 다녔잖아. 근데 지금은 뭐 고작 고졸 가정주부가 아내니까.”

“그러니까. 한 명은 해외 유학파 박사고, 다른 한 명은 일개 가정주부잖아. 그런데 이런 자리에 와서 이렇게 쪽팔리게 있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지.”

세 명이 지나윤을 둘러싸고 공격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채연서 씨, 가방끈이 그렇게 긴 분이 본인이 뜬 캐비어가 흰철갑상어 캐비어고 그냥 먹거나 샴페인이랑 곁들여야 한다는 걸 모르시나 봐요?”

지나윤의 말에 순간 채연서의 미소가 굳어버렸다.

“이런 오세트라 캐비어가 블리니랑 잘 맞죠.”

그렇게 말하고는 지나윤은 옆 접시에서 블리니를 한 장 들어 연어, 사워크림, 오세트라 캐비어를 순서대로 올리고는 채연서에게 건네줬다.

“이게 제대로 된 블리니예요.”

지나윤의 손에 들린 가벼운 블리니와 자신의 손에 있는 두툼한 블리니를 보자, 채연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오희나가 급히 나서며 채연서의 편을 들었다.

“뭐가 그리 대단해서 그렇게 으스대요? 본인이 한 게 무조건 맞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그래요. 그리고 본인이 말이 맞다 한들 어쩔 건데요? 그래 봤자 다른 사람보다 밥을 더 많이 해서 환심을 산 것뿐이잖아요.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송려화가 채연서 대신에 말을 하자, 지나윤은 블리니를 접시에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잘난 건 없어요. 그래도 최소한 여러분보단 나아요.”

말을 끝내고 뒤돌아 나왔다.

그 순간, 유시진이 다시 채연서 옆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채연서는 얼른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시진의 시선은 이미 캐비어와 블리니 쪽으로 향한 상태였다.

“캐비어 먹고 싶어?”

유시진은 직접 블리니 하나를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리고 유시진이 만든 블리니는 방금 전 지나윤이 만든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잠시 후, 옆에서 한 남성이 중얼거렸다.

“종류가 이렇게 많은데 뭐가 뭔지 구분도 안 되네.”

채연서는 바로 방금 들은 설명을 그대로 따라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블리니엔 오세트라 캐비어가 더 맞아요. 향이 과하지 않아서요.”

이에 남성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데 뭘 많이 아시네요. 대단하세요.”

“다 이 사람 덕분이죠.”

채연서는 유시진 팔짱을 끼며 사랑스러운 척 웃자 사람들은 둘을 향해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네요.”

“완벽한 한 쌍이네요.”

유시진은 무표정이지만 입술 끝이 아주 살짝 올라가며 말했다.

“반대로 말해도 괜찮죠.”

“반대로요? 반대로면 여자가 재능이 많고 남자가 외모가 출중하다는 거네요. 대표님은 참 칭찬도 잘하시네요.”

송려화와 오희나가 옆에서 분위기를 띄우자, 채연서는 약간 부끄러운 듯 배시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지나윤은 채연서가 자신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마치 자기의 생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설명을 해봤자 유시진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고, 자신에게 돌아올 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마음은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왜 약속을 지킨 건 나뿐이었을까?’

‘왜 3년 동안 지켜온 결혼보다 외국에서 돌아온 첫사랑이 더 중요할까?’

지나윤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고 원샷을 하자, 기도에서부터 뜨거워지는 술에 잠시 정신이 맑아졌다.

그녀는 빈 잔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제145화

    지나윤의 생일은 지나 있었다.[지나윤, 회사를 차렸다면 이제 대표가 된 거야. 이 원석은 내가 수업 하나 해 준 셈으로 생각해.][비즈니스에는 먼저 왔다고 해서 우선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정함도, 도리도 없어. 남는 건 경쟁뿐이니까 그렇게 순진하게 굴지 마.]유시진의 목소리는 다시 예전처럼 냉정해져 있었다.지나윤은 창문도 열지 않은 채 차 안에 앉아 있었고 휴대폰을 쥔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그리고 보상은 이미 했어.]그 말을 남기고 유시진은 전화를 끊었다.마지막에 남은 ‘보상’이라는 두 글자가 지나윤을 단번에 현실로 이끌었다.알고 보니, 유시진이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 자신의 생일을 챙긴 이유는 할아버지의 압박 때문도 아니었고, 두 사람의 과거를 떠올렸기 때문도 아니었다.그저, 자신이 점찍어 둔 원석을 빼앗아 채연서에게 넘겼기 때문이었다.“보상이라니...”핸들을 세게 움켜쥔 지나윤의 손등 위로 핏줄이 또렷하게 드러났다.A시, 바 거리.우원재가 룸에서 나왔을 때, 이곳에서 지나윤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지나윤은 술을 꽤 많이 마신 상태로 보였고 완전히 인사불성이었다.소파에 누워 있지 않았다면, 테이블에 엎드린 채였다면 아예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다.유시진에게 전화를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가 곧장 그만뒀다.“내가 미쳤지.”우원재는 혼잣말로 자신을 욕했다.‘법적으로는 형의 아내라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형은 좋아하지도 않잖아.’‘어쩌면 지금쯤 채연서와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지도 모르는데.’이에 우원재는 고개를 저으며 모른 척 지나치려 했다.어차피 지나윤이 혼자 마시다 이렇게 된 것이지 자기가 술을 먹인 것도 아니니 책임질 일도 없었다.우원재는 술에 취한 지나윤 앞을 지나쳤다가 다시 발길을 돌리고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여자를 부축했다.생각보다 가벼워 부축하는 데 큰 힘은 들지 않았다.“진짜 팔자 좋네. 하필 나한테 걸려서. 나도 참, 왜 이렇게 쓸데없이 참견하는지 모르겠네.”우원재는 투덜

  •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제144화

    밤이 깊어 고요했다.밤하늘에는 별만 떠 있었고 불꽃놀이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HF그룹 저택 바깥 열기구는 땅 위에 내려앉아 있었고 본채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유시진은 막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C시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는 흰색 BMW 3시리즈가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고 있었다.가로등과 숲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고 그 운전석에는 지나윤이 앉아 있었다.시간이 부족했다.지나윤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AOD 측에 전화를 걸었다.“그 원석, 제가 살게요. 지금 가는 중이고 곧 도착해요.”[죄송해요, 지나윤 씨. 그 원석은 이미 판매되었어요.]“뭐라고요?”지나윤은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오늘까지 보관해 주기로 하셨잖아요.”[지나윤 씨 남편분께서 구매하셨어요. 생일 선물이라고 하시더군요.]지나윤의 머릿속에 오늘 밤, 평소와 달랐던 유시진의 모습이 떠올랐다.갑자기 양심이 생긴 건지 아니면 할아버지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어쨌든 오늘의 유시진은 자신에게 유난히 잘해 주고 있었다.신사적이었고 배려심 있었고 지나치게 로맨틱했다.유시진이 저택에서 하룻밤 묵고 가자고 했을 때, 지나윤은 그 모든 행동이 결국 그 목적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유시진은 한동안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하지만 유시진에게 욕구를 해소할 상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채연서와 함께 살고 있었다.정말로 자신과 자고 싶어서 그런 수고를 했는지 지나윤은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지나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유시진의 성격과 방식이라면 억지로라도 붙잡을 거라 생각했고, 열기구가 내려올 때까지 계속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유시진은 그러지 않았다.조심히 운전하라는 말, 안전하게 가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길가에 차를 세운 지나윤의 머릿속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유시진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혹시 정말로, 나를 떠올린 걸까? 소년원에 있던 시절의 나를?’지나윤은

  •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제143화

    유시진은 거대한 열기구 뒤편에서 세 층짜리 케이크를 밀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영어 버전의 생일 축하 노래를 반주 없이 낮게 흥얼거리고 있었다.그 노래는 유난히 귀에 맴돌았다.아무래도 반주가 없어서인지, 오히려 더 선명하고 깊게 들렸다.순간, 지나윤은 13살이던 그해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지나윤은 지금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고,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바라봤다.대학교 시절, 유시진이 먼저 다가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조차도, 이런 식의 로맨틱한 이벤트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곧 유시진은 지나윤의 앞에 멈춰 섰다.미소를 띤 얼굴과 파도처럼 잔잔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이에 지나윤은 그 시선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애써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고르려 했지만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생일 축하해.”유시진의 목소리는 마치 콘트라베이스 현이 울리는 것처럼 낮고 깊었다.두 사람의 머리 위로는 수많은 풍선이 흩날리고 있었고, 옆에 늘어선 대저택과 거대한 열기구는 마치 무대 장치처럼 배경이 되어 있었다.지나윤은 놀람과 혼란이 뒤섞인 눈빛으로 유시진을 바라봤다.이윽고 유시진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정갈한 선물 상자를 꺼냈다.“이거 받아.”지나윤은 상자를 받아 들었지만 바로 열지는 않았다.이 상황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이 모든 것이 정말로 나를 위해 준비된 걸까? 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지나윤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설령 이 모든 준비가 유시진의 손에서 나왔다 해도, 그 시작은 유희봉의 뜻일 거라 생각했다.“고마워...”지나윤은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유시진이 그 팔을 붙잡았다.“여기 있는데 어디 가?”목소리는 낮았지만 어조는 부드러웠다.지나윤은 손이 맞닿은 부위가 타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할아버님을 뵈러 가려고.”“여기엔 다른 사람 없어. 우리 둘뿐이거든.”“어?”지나윤이 놀라자 유시진은 그 생각을 읽

  •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제142화

    지나윤은 하루 만에 보석 공급업체 다섯 곳을 돌아다녔다. AOD보다 원석 상태가 더 좋은 곳도 없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개성이 부족했다.어느덧 내일이면 AOD가 약속한 원석 보관 기한의 마지막 날이었고 더는 미룰 수 없어 선택해야 했다.예전의 지나윤은 수백억대 자산을 가진 자신을 꽤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회사를 차리고 나서야 알게 됐다. 돈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없어졌고 특히 주얼리 제작은 더 그랬다.‘만약 프리미엄이 붙은 그 원석을 사들였는데 채연서에게 밀리기라도 한다면.’차 안에 앉아 있던 지나윤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시작도 하기 전에 겁부터 먹을 수는 없었다.굉장히 심란한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유시진에게서 걸려 온 전화라 지나윤은 전화받느냐 마느냐 고민하느라 잠시 망설였다.그러나 결국 전화받았다.[뭐 하고 있었어? 왜 이렇게 늦게 받아?]수화기 너머의 유시진 목소리는 추궁이 아니라 묘하게도 걱정에 가까운 어조였다.이에 지나윤은 순간 멈칫했다.같은 창업이라고 해도 채연서에게는 유시진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고, 자금 문제로 고민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었다.지나윤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다시 유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있는 거야?]이에 지나윤의 심장이 움찔 내려앉았다.“없어.”있다고 해도 유시진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설령 말한다 해도 유시진이 도와줄 리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내일 준비해.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본가로 가.]“왜?”지나윤이 되묻자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자기 생일도 잊은 거야?”그제야 지나윤은 내일이 자기 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할아버지가 본가에서 생일상을 차려주시겠대.]“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할아버지 마음이야.]이렇게까지 말하자 더 거절하는 건 유희봉에게 무례한 일이 될 것 같았다.결혼 후 매년 생일이면 선물을 받았다.하나는 유희봉이, 하나는 유시진이 준비한 것이었다.

  •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제141화

    주성훈에게 아첨하려는 디자이너는 셀 수 없이 많았고, 주성훈은 그 사람들 모두에게 기회를 줄 수는 없었다.다만 지나윤이 입고 있는 드레스가 FY주얼리의 대표 컬렉션이라는 점에서, FY 주얼리 상층과 어느 정도 연이 있어 보이기는 했다.“이쪽은...”주성훈이 말을 꺼내자, 지나윤은 곧바로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명함에 적힌 이름과 브랜드를 본 주성훈은 고개를 끄덕였다.“피터 상무가 지나윤 씨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지나윤은 잠시 놀라며 본능적으로 피터를 바라봤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피터를 향한 고마움이 차올랐다.피터는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지나윤의 시선을 느끼자 잔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유시진은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는 지나윤과 피터를 보고 있었고 잔을 쥔 손에 힘이 점점 실렸다.곧 노승철이 옆에서 주성훈에게 덧붙였다.“지나윤 씨는 피터 사장님의 연인이에요. 실력은 분명히 뛰어나지만, 개인적으로는 채연서 씨의 디자인이 더 마음에 들더군요.”공개적으로 또다시 채연서와 비교되자 지나윤의 속은 편치 않았다.하지만 이미 결과는 나온 일이었기에 지금 와서 마음이 상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지나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고, 그 기회를 끝까지 붙잡는 일이었다.노승철의 평가는 이어졌다.“지나윤 씨는 기술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요. 다만 디자인이라는 건 영감의 충돌이 중요한데 작품은 다소 교과서적이에요.”“반면 채연서 씨의 디자인은 훨씬 유연하고, 마치 타고난 감각처럼 자연스러워요. 디자이너의 영혼과 끝없는 가능성이 보였어요.”지나윤은 그 말을 차분히 듣고 있었다.그 순간, 유시진이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끌어올리는 것이 보였다.채연서가 칭찬받을수록 유시진이 예전에 했던 말들이 하나씩 현실이 되는 듯했다.유시진은 노승철의 말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고 시선은 오직 지나윤에게 가 있었다.그저 이 평가를 들은 뒤, 지나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고 있었다.지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

  •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제140화

    심장이 거세게 짓밟힌 것 같은 느낌이 든 지나윤은 갑자기 유시진을 밀쳐냈다.곧 유시진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기울어지며 술이 쏟아졌고, 그대로 몸 위로 흘러내렸다.흰 셔츠에는 얼룩이 번졌고 정장도 흠뻑 젖었다.그러나 입가에 걸린 담담하고 자신감 있는 미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지나윤은 유시진을 노려보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늘 그랬다.유시진은 아주 쉽게 지나윤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언제나 태연했다.이러한 사실이 분한 지나윤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이쪽의 소란은 피터와 채연서의 시선을 끌었고, 박시현은 함께 있던 이준혁이 몇 차례나 무의식적으로 발코니 쪽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렸다.마치 그곳에 몹시 신경 쓰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아니면 누군가일지도 모르지.’그렇게 생각한 박시현 또한 시선을 옮겼다.피터가 지나윤 곁에 서 있고 채연서가 유시진 곁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채연서는 곧바로 손수건을 꺼내 유시진의 옷을 닦아주고는, 장우영에게 연락해 새 옷을 준비하라고 했다.피터는 지나윤을 위아래로 살폈는데 유시진이 혹시라도 지나윤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했을까 걱정이 됐다.다행히 지나윤은 옷차림도 단정했고 머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얼굴빛이 좋지 않았고 두 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괜찮아요?”피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그러나 괜찮다는 말이 무색하게 지나윤의 가슴은 여전히 거칠게 오르내리고 있었다.이 분노가 유시진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피터는 잠시 지나윤을 살펴본 뒤 유시진에게 말했다.“유 대표님 옷은 제가 보상하죠.”유시진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먼저 지나윤을 한 번 바라본 뒤, 피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괜찮아요. 나윤이 제 옷을 깨끗하게 빨아 줄 거예요.”피터의 얼굴이 굳어졌고 지나윤이 곧바로 받아쳤다.“요즘 사업이 잘 안돼? 이렇게까지 아껴야 할 정도야?”“이 정장은 우리 연서가 사 준 거라서 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