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제87장아리아의 시점나는 마음껏 무너져도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곳에 도착할 때까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도서관이었다.이곳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문이 쾅 닫혔지만, 머릿속의 소음을 잠재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가슴이 너무 빠르게 오르내렸다.분노와 굴욕감이 파도처럼 온몸을 휩쓸었다.나는 지쳤다.이 임신이 무슨 마법 같은 축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도 지쳤다.카메라 앞에서 웃는 것도 지쳤다.몸이 무겁고, 메스껍고, 내 몸 안에 갇힌 것처럼 불편한 것도 지쳤다.가끔은 그냥 내 몸에서 이 아이를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다시 가벼워지고 싶어서.그저 자유로워지고 싶어서.하지만 가장 아픈 건 그것이 아니었다.내가 정말 견딜 수 없었던 건 그 냄새였다.아직도 기억 속에서 그 향이 느껴졌다.내가 너무나 잘 아는 부드러운 꽃향기.내 동생의 향수였다.어렸을 때 동생이 매일 아침 뿌리던 것과 같은 향이었다.그녀의 드레스에 늘 은은하게 배어 있던 바로 그 향.알리나.나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정말 그가 그녀와 몰래 만나고 있었던 걸까?모든 일이 있었는데도?내가 이야기를 완벽하게 뒤틀어 놓은 뒤에도?그녀를 거짓말쟁이로, 배신자로, 악역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도?내가 그의 곁에 있을 자리를 확실하게 차지한 뒤에도?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쫓아갔다.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래.내가 상대해야 할 게 이런 거였구나.단순히 한 명의 자매가 아니었다.단순히 과거의 실수 하나가 아니었다.나는 그가 끝내 묻어버리지 못한 유령과 싸우고 있었다.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빛은 거칠었으며, 눈가의 마스카라는 살짝 번져 있었다.언론이 사랑하는 차분하고 우아한 여자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알리나가 이 도시에 계속 남아 있는 한, 나는 절대로 평온할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나는 이렇게까지 싸워 놓고 패배할 생각이 없었다.제국.이름.권력.미래.나는 그 모든 것
제86장에드릭의 시점나는 너무 빠르게 차를 몰았다.엔진은 내 가슴속에서 몰아치는 폭풍에 맞추기라도 하듯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운전대를 움켜쥔 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가로등 불빛이 금빛과 흰색의 줄무늬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그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그녀가 나를 거절했다.그 생각이 엔진 소리보다 더 크게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됐다.모든 일이 있었는데도.거짓말을 한 것도 그녀였다.나를 모욕한 것도 그녀였다.내가 내 정신까지 의심하게 만든 것도 그녀였다.그런데도 감히 나를 밀어냈다.마치 잘못한 사람이 나인 것처럼.나는 씁쓸하게 혼자 웃었다.나는 그녀 때문에 미쳐가고 있었다.정말로 통제력을 잃고 있었다.집착에 빠진 십 대처럼 클럽 밖에 앉아 있고, 자존심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를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나에게 가라고 했다.“아리아가 임신했어.”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단호하면서도 동시에 떨리던 목소리.나는 손바닥으로 운전대를 세게 내리쳤다.아리아가 임신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나는 매일 그 현실과 함께 살고 있었다.그 사실은 나를 직장까지 따라왔고, 잠자리까지 따라왔으며,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 속에 함께했다.하지만 알리나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달랐다.비난처럼 느껴졌다.내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상기시키는 말처럼 느껴졌다.집 앞에 차를 세웠을 때쯤, 내 분노는 다른 감정으로 변해 있었다.수치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집의 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당연한 일이었다.나는 차에서 내려 셔츠를 바로잡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표정을 정리하려 애썼다.거실에도 복도에도 아무도 없었다.다행이었다.누구와도 잡담을 나눌 기분이 아니었으니까.나는 곧장 계단을 올라 나와 아리아의 침실로 향했다.문을 닫는 순간, 아리아의 강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늦었네.”그녀는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표정은 굳어 있었다.웃고 있
제85장알리나의 시점공포가 온몸을 관통했다.숨이 턱 막혔고, 손으로 벗어나려 애썼다.그런데 그 순간 열기가 느껴졌다.익숙한 그의 향기.날카롭고 강렬한, 언제나 내 심장을 제멋대로 배신하게 만들었던 그 특유의 향수 냄새.에드릭.그의 입술이 거칠고 집요하게 내 입술을 덮쳤다.두려움과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뒤엉켜 소용돌이치는 와중에도 나는 그를 받아들였다.나도 이 해방감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영원히 묻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혼란스럽고 벅찬 연결을.그의 손이 나를 더듬듯 움직이며 나를 움켜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긴 순간 동안 세상은 그의 손길과 그의 존재, 그리고 머리로는 이건 잘못됐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그를 알아보는 내 몸의 감각만으로 좁아졌다.마침내 우리의 숨이 빠르고 얕아졌을 때, 나는 살짝 몸을 떼어 그의 눈을 찾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나는 경외감과 두려움 사이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 역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짙은 눈동자는 폭풍처럼 흔들렸고, 턱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알리나?”그의 목소리는 쉰 듯 거칠었다.마치 그 말들이 몇 주 동안 목구멍을 긁어대며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왜 나는 널 그리워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는 거지?”나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에드릭…… 이건 잘못됐어. 너…… 너는 가야 해.”나는 손을 그의 가슴에 대고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거리를 만들 수가 없었다.“못 가.”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를 스쳤고, 나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나는 답답하고 무력한 마음에 소리쳤다.“에드…… 아리아가 임신했잖아! 나 좀 내버려 둬야 해!”내 말이 그의 뺨을 후려친 것처럼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하지만 그의 눈에 타오르던 불길은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아, 알리나!”그가 내 이름을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뜨거운 숨결
제84장에드릭의 시점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애드리언이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집중할 수 없는 서류를 바라보며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단어들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머리가 지끈거렸다.가슴이 답답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잘못된 것 같았다.그렇다고 이곳에 계속 있는 건 더 끔찍했다.그래서 나는 차 키를 집어 들고 모든 것을 정리한 뒤, 그저 운전하기로 했다.아무것도 심각한 건 아니었다.그냥 머리를 식히기 위해 조금 멀리 운전하는 것뿐이었다.그게 계획이었다.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높게 솟은 철문.세련된 외관.건물 곳곳에서 조용히 뿜어져 나오는 부유함.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차는 속도를 늦추더니 길 건너편에서 완전히 멈췄다.속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그 아파트 건물을 바라보았다.마치 그곳이 개인적으로 나를 배신하기라도 한 것처럼.여기였다.애드리언이 말해준 곳.절대로 가까이 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곳.그런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이곳까지 차를 몰고 와버렸다.이곳.알리나가 지금 살고 있는 곳.나는 차를 세웠다.왜 그런지는 나도 몰랐다.운전대를 잡은 채 멍청하게 철문을 바라보았다.마치 내 생각만으로 그녀를 불러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반쯤 기대하면서.떠나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이건 한심한 짓이라고 말했다.나는 결혼한 남자고, 책임이 있으며,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하지만 그 어떤 말도 소용없었다.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날카롭고 추악한 분노였다.이렇게 나약한 내 자신에 대한 분노.내 빌어먹을 발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내 머릿속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형편없는 남편이자 남자로서 수치스러운 인간인 나 자신에 대한 분노.나는 좌석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숨
제83장에드릭의 시점알리나가 달아난 뒤에도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시간보다 훨씬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주차장은 지나치게 탁 트여 있었고, 지나치게 밝았다. 마치 모든 것이 내가 얼어붙은 모습을 지켜본 것 같았다.나는 결국 억지로 다리를 움직여 차에 올라탔다.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그 순간, 아리아의 존재와 그녀의 향수 냄새, 그리고 조용히 무언가를 기대하는 그녀의 기척 속에 나 자신이 갇힌 기분이 들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아리아는 이미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주차장에 시간제한이라도 있는 줄 몰랐네, 에드릭.”“내가 시간 맞춰 움직여야 하는 줄은 몰랐어.”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시동을 걸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집으로 가는 길은 지옥 같았다.내 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정신은 도로에 있지 않았다.알리나의 얼굴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창백하고 충격에 빠진 얼굴.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맞기라도 한 듯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나는 그 순간을 계속해서 되감았다.그녀가 병원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아픈 건 아닌지.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왜 아직까지 가슴이 이렇게 아픈 건지.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나는 내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첫 번째 차의 사이드미러를 스쳤다.“에드릭!”아리아가 소리쳤다.“괜찮아?”“괜찮아.”나는 중얼거리며 핸들을 바로잡았다.이 분 뒤, 신호등 앞에서 또 다른 차의 뒤를 거의 들이받을 뻔했다.경적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조심해!”아리아가 날카롭게 말했다.그녀는 대시보드를 움켜쥐고 있었다.“우리 죽이고 싶어? 아기 생각 좀 해!”‘아기’라는 말은 나를 현실로 끌어내려야 했다.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야 했다.하지만 오히려 죄책감만 더 무겁게 만들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과한 뒤 속도를 늦췄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머릿속의 생각을 잠재울 수 없었다
제82장알리나의 시점그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나도 마찬가지였다.너무 길면서도 너무 짧게 느껴지는 그 순간, 세상은 우리 둘만 남겨둔 채 좁아졌다. 주차장의 소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졌다. 지나가는 차들, 멀리서 들려오는 경적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까지. 모든 것이 사라졌다.그저 내 눈을 무겁게, 무언가를 찾듯 바라보는 그의 눈과,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는 내 심장만이 남아 있었다.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충격은 분명 있었다.하지만 다른 무언가도 있었다.내 속을 고통스럽게 뒤틀어 놓을 만큼 날것 그대로인 무언가.내 머리가 따라잡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가락이 떨렸고, 가슴이 조여 왔다. 몇 주 동안 억지로 묻어두려 했던 아픔이, 한 번도 떠난 적 없었던 것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다.나는 그를 미워하고 싶었다.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내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처럼.하지만 정말로 이름을 부른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미안해.내 잘못이 아니었어.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알리나!”리라의 목소리가 그 순간을 가로질렀다.위험한 꿈에서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았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억지로 에드릭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리라는 이미 흰색 지프의 문을 열고 있었고, 얼굴 가득 걱정을 드러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빠르게 움직였다.거의 달리다시피 했다.여기서 단 일 초라도 더 머문다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나는 조수석으로 미끄러지듯 올라탔다. 문을 닫는 손이 떨렸다.리라는 곧바로 차에 올라탔고, 그들이 있는 쪽을 다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동을 걸었다.차는 부드럽게 출발했고, 병원이 점점 멀어졌다.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돌아볼 수가 없었다.몇 분 동안 우리 둘 중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침묵은 무겁게 느껴졌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