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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아내가 있는 남자

Author: 루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1 18:18:58

“네.”

겨우 한 글자였다. 그런데 그 한 글자에 조금 전까지 남자친구라 부르던 사람이 낯선 남자가 되었다. 나는 태준의 왼손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그의 달력에 막 생긴 하트 하나가 떠올랐다. 하트는 하나만 넣자고 했던 나, 나중에 더 붙이자며 웃던 그 사람. 겨우 몇 분이 지났는데 그때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농담이죠? 오늘부터 1일인데, 첫날부터 이러는 거 너무 심한데요.”

“농담 아니에요, 채린 씨.”

“그럼 예전에 결혼했다는 거예요? 지금은 끝난 거고요?”

그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 짧은 망설임에 대답이 먼저 도착했다. 나는 손끝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짚었다. 그가 내 손을 놓을 때마다 아쉽다고 투정을 부렸던 일이 떠올랐다. 비 오는 골목에서 우산 손잡이를 함께 쥐었고, 맑은 날에도 만나자며 그를 놀렸다. 이제는 뭘 잘못 알고 있었는지조차 차례대로 세어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전 이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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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3화. 사랑은 퇴근하지 않는다

    “기다리란 말도 못 하겠어요. 그래도 사랑은 이미 시작됐습니다.”카페 문을 닫고 나온 뒤에도 그 말이 따라왔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골목이 끝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자꾸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붙잡지 않겠다던 사람은 정말로 나를 붙잡지 않았고, 그래서 더 울고 싶었다.길모퉁이 꽃집에는 분홍 장미가 놓여 있었다. 비가 내리던 날, 그는 내가 꽃을 오래 바라보는 걸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때는 꽃을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혼자 연습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그 약속을 떠올리는 것마저 부끄러웠다.‘사랑은 이미 시작됐다니.’그럼 내 사랑은 어디에 내려놓아야 하는데.집에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침대에 앉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준의 전화를 기다리느라 씻는 시간까지 아까웠다. 거울 앞에 서면 그가 예쁘다고 했던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봤고, 별것 아닌 일에도 ‘오늘은 이 얘기부터 해줘야지’ 하고 웃었다. 그런데 오늘은 휴대전화가 조용했다.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불과 어제만 해도 나는 다음 아침에 보낼 문자를 고르고 있었다. ‘남자친구님, 잘 잤어요?’ 그렇게 보내면 태준이 웃으면서 ‘여자친구님 덕분에요’라고 답할 것 같았다. 실제로 듣지도 못한 대답이 너무 또렷해서, 나는 끝내 베개를 끌어안았다. 가장 아픈 건 아직도 그와 나누지 못한 다정한 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달력을 열었다. 어제 표시한 작은 별 아래에는 ‘1일’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지우려고 손가락을 댔지만 화면만 몇 번 껐다 켰다. 고작 하루짜리 연애였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터졌다. 나는 그와 보낸 날들을 셀 수 있는데, 누군가에겐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진짜 나쁜 사람.”말해 놓고도 그가 걱정됐다. 저녁은 먹었을까. 내가 손잡지 말라고 했을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아직도 그런 걸 궁금해하는 내가 더 싫었다.다음 날 사무실은 평소와 같았다. 수아는 내 자리 위에 수정된 회의 일정을 올려놓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2화. 아내가 있는 남자

    “네.”겨우 한 글자였다. 그런데 그 한 글자에 조금 전까지 남자친구라 부르던 사람이 낯선 남자가 되었다. 나는 태준의 왼손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그의 달력에 막 생긴 하트 하나가 떠올랐다. 하트는 하나만 넣자고 했던 나, 나중에 더 붙이자며 웃던 그 사람. 겨우 몇 분이 지났는데 그때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농담이죠? 오늘부터 1일인데, 첫날부터 이러는 거 너무 심한데요.”“농담 아니에요, 채린 씨.”“그럼 예전에 결혼했다는 거예요? 지금은 끝난 거고요?”그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 짧은 망설임에 대답이 먼저 도착했다. 나는 손끝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짚었다. 그가 내 손을 놓을 때마다 아쉽다고 투정을 부렸던 일이 떠올랐다. 비 오는 골목에서 우산 손잡이를 함께 쥐었고, 맑은 날에도 만나자며 그를 놀렸다. 이제는 뭘 잘못 알고 있었는지조차 차례대로 세어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전 이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내일도 더 좋아하겠다며 웃던 내 손이었다.“제 아내는 백서진이에요. 아직 결혼한 상태예요. 이혼하지 않았고, 따로 살기로 정한 것도 아니에요.”우리가 함께 있던 정원에서는 누군가 찻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문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웃음소리까지 들리는데, 나는 그 모든 것이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아내가 있다는 거네요.”“네.”“그럼 어제도, 오늘도, 내가 남자친구라고 부르는 동안에도요?”“맞아요.”나는 웃었다. 웃어야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호텔에서 처음 만난 밤, 남자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다음 날에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정말로 사랑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 동안 누군가는 그의 아내였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혼자 기뻐했다. 자기 전에 전화로 열 번씩 보고 싶다고 말해 달라던 내가, 오늘은 그가 무슨 말을 더 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나한테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1화. 그의 왼손

    “채린 씨, 제게 꼭 먼저 알려야 할 사실이 하나 있어요.”방금 남자친구가 생긴 여자에게 그런 표정으로 할 말이라니. 나는 그가 숨겨둔 선물이라도 꺼낼 줄 알고 두 손을 모았다. 내 달력에는 오늘이 1일째로 적혀 있었고, 조금 전까지 태준은 그 날짜 옆에 하트를 하나 더 붙이자며 웃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일 아침엔 어떤 문자를 보낼지 고민했다. ‘남자친구님, 잘 잤어요?’라고 쓰면 그가 얼마나 웃을까. 오글거리는 문장을 몇 개나 떠올려 놓고 혼자 신이 났는데, 정작 그는 내일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설마 벌써 100일 기념일 예약했어요?”“채린 씨.”“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딸기 농장을 샀다거나? 그건 조금 부담스러운데.”나 혼자 웃었으나 태준의 입가에는 웃음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을 천천히 놓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손바닥이 허전해졌다. 나는 별일 아닌 듯 그의 소매를 건드렸다.“왜 그래요? 저 또 놀리려고 그러죠?”“저 기다리는 거 잘하는 거 알죠?” 일부러 씩 웃어 보였다. “아까 1일째라고 했으니까, 오늘 안에만 말하면 봐줄게요.” 농담이 통하지 않자 내가 세운 입꼬리도 조금씩 내려갔다.그는 대답 대신 내가 앉았던 의자를 바라봤다. 카페 문 앞까지 나왔던 우리는 다시 정원 쪽 테이블로 돌아갔다. 저녁바람에 작은 꽃잎이 흔들렸고, 태준은 내 의자를 당겨 주었다. 언제나처럼 사려 깊은 손길이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한참을 망설이는 걸까.“우선 앉아서 이야기해요.”“우리 이제 연인이잖아요. 무서운 이야기 할 거면 먼저 안아 주고 해요.”나는 팔을 조금 벌렸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다가왔을 그가 이번에는 제자리에 선 채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가슴에서 작게 무언가가 가라앉았다.“채린 씨가 들으면 많이 속상할 이야기예요.”내가 벌렸던 팔을 내렸다. 그래도 선뜻 겁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그를 남자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그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0화. 연인이라는 이름

    “그런데 태준 씨, 우리 이제 무슨 사이예요?”내가 물어놓고도 놀라서 손을 빼려는데, 태준이 놓치지 않고 손가락을 맞물렸다. 방금까지 키스하던 사람 앞에서 이런 질문 하나가 이렇게 떨릴 일인가.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척 찻잔을 바라봤지만, 실은 그의 입술만 자꾸 눈에 들어왔다.“채린 씨는 어떤 사이였으면 좋겠어요?”“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면 감점이에요.”“큰일 났네요. 오늘은 만점 받고 싶은데.”“그럼 기회 한 번 더 드릴게요. 아주 특별히.”그가 웃다가 내 손등을 엄지로 문질렀다. 그렇게 작은 움직임에도 가슴이 바빠져서, 나는 쓸데없이 테이블 위의 꽃잎을 세었다.“채린 씨가 원한다면, 연인이 되고 싶어요.”연인. 그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굴러다녔다. 호텔에서 처음 만난 날은 내일을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이제는 이 사람이 내게 연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알면서도 이름을 붙이지 못해 망설였던 날들이 그제야 한곳에 모였다. 테이블 맞은편의 남자는 내가 처음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 줄곧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 싫은 건 싫다고 해도 된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 마음을 조금씩 더 내보여도 될 것 같았다. 오늘도 그는 내가 먼저 한 걸음 다가오기를 기다렸다.“제가 싫다고 하면요?”“슬프겠죠. 그래도 채린 씨가 편한 쪽을 택했으면 좋겠어요.”“진짜요? 안 붙잡고?”“붙잡고 싶은 마음은 있겠지만, 대답을 바꾸라고 조르고 싶지는 않아요.”그를 놀려 주려던 말이 혀끝에서 멈췄다. 나는 그가 내 선택을 기다려 주는 순간마다 조금씩 더 좋아졌고, 오늘도 그랬다. 결국 손을 더 꼭 쥐었다. 내가 손가락에 힘을 줄 때마다 그의 웃음이 조금씩 커졌다. 사랑이 시작되는 날의 표정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저런 얼굴일 거라고, 그를 보며 생각했다.“그럼 오늘부터 1일이에요.”“정말요?”“네. 저 지금 태준 씨 여자친구 하겠다고 말한 거예요. 두 번 안 해요.”“한 번만 더 들으면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19화. 허락받은 키스

    ‘열두 번째는 허락받고 싶어요.’문자를 읽는 순간, 이마에 남아 있던 입맞춤이 입술까지 내려온 것만 같았다. 열한 번째는 말없이 내 이마에 닿았는데, 열두 번째는 어디에 하고 싶은 걸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싶어 나는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뭘 허락해 드리면 되는데요?’답장을 보내자 화면에 곧바로 글자가 나타났다.‘직접 만나서 물을래요. 문자로는 채린 씨 얼굴을 못 보니까요.’‘제 얼굴 보면 또 예쁘다고 할 거면서.’‘네. 그건 못 참을 것 같아요.’세상에. 이런 남자를 어떻게 이겨.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뒤척이다가 다시 화면을 켰다. 오늘은 꼭 마지막 문자를 내가 보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태준이 먼저 보내온 잘 자라는 인사를 세 번이나 읽고서야 잠이 들었다. 눈을 감으면 그의 손끝이 이마에 닿던 순간부터 떠올라서, 차라리 얼른 내일이 오길 바라며 이불 속에서 발을 꼼지락거렸다.다음 날 회사에서는 그와 단둘이 마주칠 일이 없었다. 나는 보고서에 집중했고 태준도 예정된 회의를 소화했다. 점심때 수아가 주말 계획을 묻기에 책을 읽을 거라고 답했으나, 책장 사이에 끼워 둔 책갈피보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자꾸 떠올랐다. 업무 메신저에도 사적인 연락은 오가지 않았다. 서로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게 좋아서, 오히려 퇴근 후에 할 말이 쌓여 갔다. 복도에서 그와 마주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딱 한 번쯤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으면 싶었다. 정말 마음이 제멋대로였다.우리가 만난 곳은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정원 카페였다. 담장 안쪽으로 작은 나무들이 이어졌고, 손님이 적은 안뜰 끝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을 만한 테이블이 있었다. 나는 먼저 도착해 따뜻한 차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아직 뭘 허락할지도 모르는데, 입술에 바른 립밤이 신경 쓰여 물컵에 비친 얼굴까지 살폈다.“채린 씨.”고개를 들자 태준이 서 있었다. 웃으며 다가오던 그는 내 앞에 앉기 전에 한 박자 멈췄다.“오늘은 안아도 될까요?”“인사부터 그렇게 하시면 제가 어떻게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18화. 열한 번째 말

    “내일은 열한 번 해줘요.”그 말을 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더 무엇을 바라게 될지 몰랐다. 손을 잡는 일 하나에도 아직 얼굴이 붉어지는 사이였으니, 내일의 열한 번째는 얼마나 오래 마음에 남을까.내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자 태준은 웃으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손을 놓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는데, 조금 전 들었던 열 번째 고백이 자꾸 떠올라 발걸음이 느려졌다.“내일은 어떤 말을 할 건데요?”“벌써 궁금해요?”“열 번이나 듣고도 모자랐으니까요.”“그럼 열한 번째는 조금 다르게 해도 될까요?”나는 일부러 생각하는 척했다. 입술 끝에 맴도는 웃음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반드시 예뻐야 해요.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해달라고 할 거예요.”“그럴 수 있도록 오래 준비할게요.”그는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됐다는 걸 알면서도 내 손을 마지막까지 잡아 주었다. 골목 끝에서 손가락이 떨어졌을 때에는 손바닥을 한 번 더 펼쳐 보였다. 마치 내일도 여기로 돌아오라는 약속 같아서 나는 그 손을 살짝 쳤다.다음 날 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고객경험 개편안의 최종 검토 자료를 확인하고, 수아가 요청한 수정 내역을 정리했다. 태준과는 오전 회의에서 잠깐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어제 내가 그의 품에 기대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서류를 넘기는 모습을 잠깐 보면서, 어젯밤 나를 끌어안던 팔이 생각나 얼른 숫자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담당자에게 필요한 질문을 했고 나는 화면에 표시된 수치를 보며 답했다.그런데 점심 무렵부터는 자꾸 내 이마가 신경 쓰였다. 열한 번째가 다르다니. 설마 꽃을 사 오려나, 아니면 편지를 쓰려나. 아무 근거도 없는 상상을 하다가 수아에게 들켰다.“선임님, 오늘 좋은 일 있으세요?”“왜?”“아까부터 보고서 읽으면서 웃으세요.”나는 재빨리 입술을 다물었다.“수정할 데가 줄어서. 이번 주 안에 끝날 것 같거든.”“그거야말로 좋은 일이네요.”수아가 웃으며 돌아가자 나는 보고서 첫 장을 다시 펼쳤다.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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