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집에 도착한 지 한참 됐다는 사실도 잊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안부 한마디로 사람을 사랑에 빠지기 직전까지 데려가는 걸까. 그가 내 이름을 부르기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고, 통화 너머에서 작게 웃는 기척이 들리자 괜히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대표님이세요?”
“네. 명함 뒷면의 번호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지금 전화해도 괜찮은지도요.”
“이미 하셨으면서 그런 걸 물어봐요?”
“안 괜찮다고 하시면 바로 끊으려고요.”
나는 방금 벗은 구두를 가지런히 놓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의 손에 명함을 쥐여 준 건 나였으면서, 정작 전화를 받으니 열일곱 살처럼 마음이 부산했다.
“괜찮아요. 아주 조금은요.”
“조금이라도 허락받았으니까 기쁘네요.”
“대표님은 그렇게 말하면 여자들이 다 넘어올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채린 씨가 웃으면 좋겠어요.”
나는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내 이름 뒤에 꼬박꼬박 ‘선임님’을 붙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 하나를 사이에 둔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집에서 통화하고 있을 뿐인데, 그가 ‘채린 씨’라고 부르면 어젯밤 호텔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는 그러지 마세요. 오늘 회의 때 얼마나 떨었는지 알아요?”
“알아요. 그래도 발표 잘했어요.”
“그건 제가 원래 잘하는 일이거든요.”
“네. 그래서 더 멋있었어요.”
그가 웃으며 한마디를 보태자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아무것도 꺼내지 못했다. 칭찬 하나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진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우리 약속해요. 회사에서는 대표님이랑 직원이에요. 업무 메신저로 사적인 얘기도 하지 말고, 다른 사람 있을 때 특별하게 굴지도 말기.”
“약속할게요. 채린 씨 일에 제가 방해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그리고 아침에 제가 사과한 거, 아직 안 받아 주셨죠?”
“받았어요. 제가 아픈 것보다 채린 씨가 놀란 게 더 마음 쓰였거든요.”
가슴 한편이 몽글몽글해졌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맨발을 흔들었다.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매번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골라서 할까. 그러면서도 어제의 손길을 떠올리게 만드는 목소리라니, 정말이지 반칙이었다. 나는 그가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빈 식탁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면 그는 내 접시에서 딸기를 골라 주었을까. 생각만 했는데도 웃음이 나서, 혼자 있는 집이 전혀 조용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저, 이제 번호 지울 거예요.”
“왜요?”
“자꾸 전화하고 싶어질까 봐요. 그러면 큰일이잖아요.”
잠깐 말이 없었다. 너무 솔직했나 싶어 괜히 물컵을 집어 들었는데, 그가 천천히 물었다.
“큰일 나면 안 되나요?”
“우린 같은 회사 다니잖아요.”
“알아요. 그래서 회사에서는 약속 지킬 거예요. 다만 퇴근한 채린 씨가 제 전화를 반가워한다면, 그건 오래 기억하고 싶네요.”
내가 조용해지자 그가 다시 물었다.
“정말 지울 거예요?”
“……아직은요.”
“다행이네요. 저는 저장해도 될까요?”
“뭐라고요?”
“제가 웃게 되는 사람, 어때요?”
“너무 길어요. 그냥 이채린으로 저장해요.”
“그러면 이름을 볼 때마다 오늘처럼 웃어도 됩니까?”
나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식탁에 이마를 대고 말았다. 들키지 않는 사랑은커녕, 아직 좋아한다는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는데 벌써 온몸이 들떠 있었다.
“대표님, 저 내일 출근해야 해요.”
“네. 저도요.”
“그럼 끊어요.”
“먼저 끊으세요.”
“그건 싫어요.”
“저도요.”
시계를 보니 통화가 벌써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씻고 누웠을 시간인데, 오늘은 잠을 조금 덜 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딱 5분만 더요.”
“5분만요?”
“싫으면 말고요.”
“아니요. 5분 더 좋아할 수 있어서요.”
심장이 또 얄밉게 뛰었다. 나는 그와 오늘 먹지 못한 저녁 메뉴를 이야기하고, 그가 좋아하는 과일을 물었다. 딸기라고 하면 놀릴 생각이었는데 그는 내가 고른 건 뭐든 맛있게 먹을 것 같다며 웃었다.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가 한참 이어진 뒤에야 우리는 내일도 각자 자기 일을 잘해 보자고 인사를 나눴다. 통화가 끝날 무렵 그는 내게 말했다.
“오늘 하루 중 제일 좋았던 순간이 언제인지 알아요?”
나는 일부러 모른다고 했고,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이요. 채린 씨가 아직 끊지 않았잖아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결국 그가 들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
전화를 끊고도 그의 번호를 저장하지 못했다. 이름을 입력하려다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나는 결국 연락처에 ‘강태준’이라고 적었다. 화면이 꺼지자 곧바로 다시 켰다. 그 이름이 거기 있는 걸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다음 날 회사에서는 약속대로였다. 우리는 직원들이 지나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평범하게 고개만 숙였고, 그는 회의 중 내 자료에 빠진 항목을 다른 팀원에게 하듯 확인했다. 나는 그 질문에 답하면서도 어제 통화에서 들었던 웃음을 혼자 떠올렸다.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길에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제 그가 먼저 연락했으니 오늘은 내 차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정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화면을 켰다는 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
6분이 흘렀다. 나는 결국 먼저 문자를 보냈다.
‘대표님, 저 지금 6분째 기다려요.’
“선임님, 방금 웃으셨어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수아의 질문에 나는 책갈피를 황급히 책장 사이로 밀어 넣었다. 웃고 있었다는 걸 들킨 순간에도 입가에는 태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손글씨 여덟 글자만으로 이렇게 기뻐하다니.“책이 재미있어서. 어제 읽다가 웃긴 부분이 있었거든.”“무슨 책인데요? 저도 읽어 볼래요.”“다 읽으면 빌려줄게. 결말은 아직 나도 몰라.”수아는 금세 관심을 돌려 오후 회의 자료를 물었다. 나는 파일을 열어 필요한 표를 찾아줬고, 그녀가 자리로 돌아간 뒤에야 가방 지퍼를 닫았다. 책갈피는 버리지 못했고, 내 웃음은 아무 일도 없던 표정 뒤에 감춰졌다.점심시간, 수아가 사내 카페에서 딸기 음료를 주문했다. 그 이름을 듣자 태준이 떠올랐다. 시럽은 반만 넣고 얼음도 조금. 내가 말한 걸 한 번에 외운 사람. 혹시라도 내 얼굴에 생각이 드러날까 봐 메뉴판을 오래 내려다보다 따뜻한 차를 골랐다.“선임님은 딸기 안 좋아하세요?”“좋아하지. 오늘은 따뜻한 게 당겨서.”그렇게 말한 뒤 컵을 받았는데, 손바닥이 따뜻해질수록 이상하게 허전했다. 태준과 함께였다면 내 잔을 기웃거리며 ‘한 입만 마셔도 될까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까부터 자기 잔은 왜 안 마시느냐고 타박하면서도 기어코 컵을 건네줬겠지.오후에는 TF 실무 자료를 정리했다. 수아가 빠뜨린 첨부 파일을 찾아줬고, 팀장의 요청에 맞춰 표의 순서를 바꿨다. 누가 나를 특별히 쳐다보지도 않았고, 태준이 지나가는 복도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회의 일정과 수정 지시가 오가는 동안 사무실은 늘 그렇듯 분주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늦은 오후 회의실에서 출력물을 정리하다 태준의 서명이 있는 검토표를 발견했다. 몇 줄의 수정 의견이 적혀 있었고, 내가 처음 제안한 방식대로 진행하라는 표시도 있었다. 업무에 필요한 표시일 뿐이었다. 나는 서류를 정해진 순서대로 묶으면서도, 그의 필체를
'그건 약속 못 지키겠습니다.’나를 생각하지 말라는 부탁 앞에서만, 태준은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나는 그 문장을 밤새 열어 보았다. 읽을 때마다 속이 아렸고, 아파하면서도 그가 나를 아직 생각한다는 사실이 좋아졌다. 휴대전화 화면에 손가락을 올린 채 한참 망설였으나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어떻게 내게 가장 아픈 비밀을 숨겼을까. 미워하다가도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너무 우스웠다.‘그럼 실컷 생각해요.’입력창에 적었다가 지웠다.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기나 해요?’이것도 지웠다. 이미 알고 있을 사람이었다. 손을 잡을 때마다 웃음부터 터지던 나를, 전화를 끊기 싫어 5분만 더 달라던 나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면서 왜 그렇게 늦게 말했을까.다음 날 아침, 나는 달력부터 열었다. 토요일 칸에는 ‘같이 책 읽고 맛있는 거 먹기 ♡’라고 적혀 있었다. 카페에서 그와 정한 약속이었다. 하트를 하나 더 그려 넣을까 고민하던 날에는 토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그 날짜를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나는 일정을 눌러 삭제했다. 확인 창이 나타나자 잠깐 멈췄다가 다시 눌렀다. 약속 하나가 사라진 빈칸을 보며 이렇게까지 쉽게 지울 수 있는 거였냐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투덜거렸다.가방에서는 호텔 라운지 영수증이 나왔다. 첫날 혼자 마셨던 음료값이 적힌 종이였다. 버릴 생각으로 펼쳤는데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나는 낯선 남자에게 재미없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는 나를 웃기기 위해 애쓰겠다고 했다. 딸기 디저트를 내 앞으로 밀어 주면서도 뭘 강요하지 않았던 손, 내 손바닥 위에 먼저 펼쳐졌던 그의 손.“그날로 돌아가면, 나 안 앉혔을까.”혼잣말을 하고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 다가왔을 때 거절했을까. 어쩌면 똑같이 웃고 똑같이 반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 밤의 나는 무척 행복했으니까.사진첩도 열었다. 함께 찍은 얼굴은 없었다. 대신
‘전송 완료.’하필 그 사람에게 보내지 않기로 한 말을, 손가락 하나가 먼저 건네 버렸다.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밥 먹었어요?’ 겨우 다섯 글자와 물음표 하나. 지우기 버튼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상대에게 도착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회사 보고서를 세 번씩 검토하는 내가 왜 하필 이런 순간에는 손끝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할까.‘잘못 보냈어요.’그 말을 쓰고도 보내지 못했다. 태준이 정말 밥을 먹었는지 궁금했으니까.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 나였고,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보지 않은 것도 나였다. 그런데 그의 저녁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끝내 집으로 데려와 버렸다.화면이 밝아졌다.‘네, 먹었습니다.’짧은 답장이었다. 좋아하는 메뉴도, 늦게까지 일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고작 한 줄이었는데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 베개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아도 글자가 눈앞에 남았다. 예전 같으면 그 뒤에 꼭 한마디가 더 왔을 것이다. ‘오늘 제일 맛있었던 건 뭐예요?’ 하고 물은 다음, 내가 달콤한 음식을 골랐다고 하면 ‘그럼 저는 채린 씨가 웃는 얼굴이 제일 맛있었어요’ 같은 말로 나를 놀렸겠지. 그 유치한 농담에 또 넘어가면서도 모르는 척 웃었을 텐데, 오늘은 더 이어질 말이 없었다.잘 먹었구나. 아프지 않고, 굶지도 않았구나.안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어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결혼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나는 그가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렇게 기뻐했다. 그가 내 앞에서 딸기 라테를 한 모금 마시고 '채린 씨가 마시는 게 더 맛있어 보여요'라던 날까지 떠올랐다.그날 나는 일부러 빨대를 내 쪽으로 돌려 놓았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었고, 한 번 더 만나기 위해 메뉴 맞히기 내기에서 일부러 졌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비밀을 가진 여자처럼 굴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의 나는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늘 내가 예쁘게 웃으면 내일 그가 또 만나자고 해 줄까,
“기다리란 말도 못 하겠어요. 그래도 사랑은 이미 시작됐습니다.”카페 문을 닫고 나온 뒤에도 그 말이 따라왔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골목이 끝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자꾸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붙잡지 않겠다던 사람은 정말로 나를 붙잡지 않았고, 그래서 더 울고 싶었다.길모퉁이 꽃집에는 분홍 장미가 놓여 있었다. 비가 내리던 날, 그는 내가 꽃을 오래 바라보는 걸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때는 꽃을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혼자 연습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그 약속을 떠올리는 것마저 부끄러웠다.‘사랑은 이미 시작됐다니.’그럼 내 사랑은 어디에 내려놓아야 하는데.집에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침대에 앉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준의 전화를 기다리느라 씻는 시간까지 아까웠다. 거울 앞에 서면 그가 예쁘다고 했던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봤고, 별것 아닌 일에도 ‘오늘은 이 얘기부터 해줘야지’ 하고 웃었다. 그런데 오늘은 휴대전화가 조용했다.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불과 어제만 해도 나는 다음 아침에 보낼 문자를 고르고 있었다. ‘남자친구님, 잘 잤어요?’ 그렇게 보내면 태준이 웃으면서 ‘여자친구님 덕분에요’라고 답할 것 같았다. 실제로 듣지도 못한 대답이 너무 또렷해서, 나는 끝내 베개를 끌어안았다. 가장 아픈 건 아직도 그와 나누지 못한 다정한 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달력을 열었다. 어제 표시한 작은 별 아래에는 ‘1일’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지우려고 손가락을 댔지만 화면만 몇 번 껐다 켰다. 고작 하루짜리 연애였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터졌다. 나는 그와 보낸 날들을 셀 수 있는데, 누군가에겐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진짜 나쁜 사람.”말해 놓고도 그가 걱정됐다. 저녁은 먹었을까. 내가 손잡지 말라고 했을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아직도 그런 걸 궁금해하는 내가 더 싫었다.다음 날 사무실은 평소와 같았다. 수아는 내 자리 위에 수정된 회의 일정을 올려놓
“네.”겨우 한 글자였다. 그런데 그 한 글자에 조금 전까지 남자친구라 부르던 사람이 낯선 남자가 되었다. 나는 태준의 왼손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그의 달력에 막 생긴 하트 하나가 떠올랐다. 하트는 하나만 넣자고 했던 나, 나중에 더 붙이자며 웃던 그 사람. 겨우 몇 분이 지났는데 그때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농담이죠? 오늘부터 1일인데, 첫날부터 이러는 거 너무 심한데요.”“농담 아니에요, 채린 씨.”“그럼 예전에 결혼했다는 거예요? 지금은 끝난 거고요?”그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 짧은 망설임에 대답이 먼저 도착했다. 나는 손끝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짚었다. 그가 내 손을 놓을 때마다 아쉽다고 투정을 부렸던 일이 떠올랐다. 비 오는 골목에서 우산 손잡이를 함께 쥐었고, 맑은 날에도 만나자며 그를 놀렸다. 이제는 뭘 잘못 알고 있었는지조차 차례대로 세어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전 이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내일도 더 좋아하겠다며 웃던 내 손이었다.“제 아내는 백서진이에요. 아직 결혼한 상태예요. 이혼하지 않았고, 따로 살기로 정한 것도 아니에요.”우리가 함께 있던 정원에서는 누군가 찻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문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웃음소리까지 들리는데, 나는 그 모든 것이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아내가 있다는 거네요.”“네.”“그럼 어제도, 오늘도, 내가 남자친구라고 부르는 동안에도요?”“맞아요.”나는 웃었다. 웃어야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호텔에서 처음 만난 밤, 남자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다음 날에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정말로 사랑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 동안 누군가는 그의 아내였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혼자 기뻐했다. 자기 전에 전화로 열 번씩 보고 싶다고 말해 달라던 내가, 오늘은 그가 무슨 말을 더 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나한테
“채린 씨, 제게 꼭 먼저 알려야 할 사실이 하나 있어요.”방금 남자친구가 생긴 여자에게 그런 표정으로 할 말이라니. 나는 그가 숨겨둔 선물이라도 꺼낼 줄 알고 두 손을 모았다. 내 달력에는 오늘이 1일째로 적혀 있었고, 조금 전까지 태준은 그 날짜 옆에 하트를 하나 더 붙이자며 웃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일 아침엔 어떤 문자를 보낼지 고민했다. ‘남자친구님, 잘 잤어요?’라고 쓰면 그가 얼마나 웃을까. 오글거리는 문장을 몇 개나 떠올려 놓고 혼자 신이 났는데, 정작 그는 내일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설마 벌써 100일 기념일 예약했어요?”“채린 씨.”“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딸기 농장을 샀다거나? 그건 조금 부담스러운데.”나 혼자 웃었으나 태준의 입가에는 웃음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을 천천히 놓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손바닥이 허전해졌다. 나는 별일 아닌 듯 그의 소매를 건드렸다.“왜 그래요? 저 또 놀리려고 그러죠?”“저 기다리는 거 잘하는 거 알죠?” 일부러 씩 웃어 보였다. “아까 1일째라고 했으니까, 오늘 안에만 말하면 봐줄게요.” 농담이 통하지 않자 내가 세운 입꼬리도 조금씩 내려갔다.그는 대답 대신 내가 앉았던 의자를 바라봤다. 카페 문 앞까지 나왔던 우리는 다시 정원 쪽 테이블로 돌아갔다. 저녁바람에 작은 꽃잎이 흔들렸고, 태준은 내 의자를 당겨 주었다. 언제나처럼 사려 깊은 손길이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한참을 망설이는 걸까.“우선 앉아서 이야기해요.”“우리 이제 연인이잖아요. 무서운 이야기 할 거면 먼저 안아 주고 해요.”나는 팔을 조금 벌렸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다가왔을 그가 이번에는 제자리에 선 채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가슴에서 작게 무언가가 가라앉았다.“채린 씨가 들으면 많이 속상할 이야기예요.”내가 벌렸던 팔을 내렸다. 그래도 선뜻 겁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그를 남자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