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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같은 엘리베이터

작가: 루니
last update 게시일: 2026-10-10 07:37:15

‘그리고 이제야 이름을 알았네요. 채린 씨.’

나는 사내 메신저의 마지막 줄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름 세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귀 끝까지 뜨거워졌고, 손가락은 답장 칸 위에서 자꾸 망설였다. 호텔에서는 끝내 알려 주지 않았던 이름. 그 사람이 지금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업무용 메신저인데요, 대표님.’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후회했다. 너무 퉁명스러웠나 싶어 다시 입력창을 열었을 때, 답장이 먼저 도착했다.

‘맞습니다. 이 선임님께는 업무 관련해서만 연락드리겠습니다.’

마땅히 안심해야 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니 서운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먼저 선을 그었으면서도, 그가 너무 얌전히 물러나는 건 아쉬웠다.

‘아, 그건 아니고요.’

급하게 쓰고 지웠다. 결국 메신저 창을 닫고 모니터 앞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젯밤엔 그렇게 용감했으면서, 오늘은 문자 한 줄에도 쩔쩔매다니.

“선임님, 퇴근 안 하세요?”

수아가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창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고, 책상 위엔 오전 회의에서 수정하기로 한 자료가 남아 있었다.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요.”

수아를 보내고 파일을 정리했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집중했으나, 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의 손이 떠올랐다. 어젯밤 손등에 입 맞추던 사람의 손이 오늘은 회의 자료 위에서 숫자를 짚었다. 내 인생에 그토록 다른 두 모습이 한 사람에게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밤 9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수정본을 저장하고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니 곧 문이 열렸고,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머리칼을 정리하는데 닫히던 문이 다시 벌어졌다.

“타도 될까요?”

그가 서 있었다.

“대, 대표님.”

“아까보다 더 놀라시네요.”

“어디서 자꾸 나타나세요?”

“회사인데요. 제가 여기서 일하거든요.”

너무 당연한 대답이어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가 들어오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우리는 거울 속에서 시선을 마주쳤다가 동시에 앞을 봤다.

“발표, 정말 좋았어요.”

“메신저로도 칭찬하셨잖아요.”

“글로만 하면 못 믿으실까 봐요.”

“믿어요. 그 말은 믿어요.”

그가 미소 지었다. 가까운 곳에서 웃는 모습을 보자, 어제 내 손등에 닿았던 입술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어제 아침엔 미안했어요.”

말을 꺼내자마자 눈을 들 수 없었다. 그가 봉투를 열어 보여 주던 순간부터 줄곧 사과하고 싶었는데, 정작 얼굴을 보니 그날의 입맞춤까지 함께 생각났다.

“많이 아팠죠?”

“그보다 채린 씨가 우는 줄 알았어요.”

“안 울었거든요.”

“알아요. 그런데 제가 안아 주면 더 화내실까 봐.”

그가 웃자 나는 그때 안아 줬다면 정말 울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속으로만 간직한 말을 끝내 꺼내지 못한 채,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일은 끝난 걸로 해요.”

말해 놓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날이라고 부른 순간에도 호텔의 침대와 그가 덮어 주던 이불이 선명했다. 태준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회사에서 불편한 일 없도록 할게요.”

“그렇게 쉽게요?”

“채린 씨가 원하는 걸 존중해야죠.”

“그럼 제가 회사에서 실수하면요?”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이야기할 거예요. 잘하시면 똑같이 칭찬할 거고요.”

“어젯밤에 그렇게 잘해 주고도요?”

“채린 씨가 애써 준비한 일이잖아요. 제 마음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바랐던 답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엉뚱하게도 조금씩 저렸다.

“나쁜 사람.”

“네?”

“아니에요.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태준이 내 손에 들린 서류철을 보더니 물었다.

“오늘도 늦게까지 일했네요. 저녁은 먹었어요?”

“아뇨. 퇴근하면 먹으려고요.”

“그럼 집에 가는 길에 꼭 챙겨 드세요. 배고프면 잠도 설쳐요.”

“대표님은요?”

“저도 아직이요.”

“그럼 대표님도 꼭 드세요.”

“이렇게 서로 걱정만 하다가 저녁을 놓치겠네요.”

나도 모르게 웃자 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고, 문이 열리자 태준은 먼저 나가지 않고 손으로 길을 내주었다.

“먼저 가세요, 이 선임님.”

이렇게 헤어지면 정말로 끝날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들자 가방에서 명함 지갑을 꺼냈다. 입사 첫날 받은 명함 한 장을 뽑아 뒷면에 휴대전화 번호를 적었다. 펜이 조금 떨려 마지막 숫자가 비뚤어졌다.

“회사 메신저로는 업무 얘기만 하세요.”

그가 내밀어진 명함을 내려다봤다.

“그럼 이 번호로는요?”

“일 얘기 빼고요.”

“이를테면?”

“오늘 저녁 먹었냐고 묻는 거요. 그런 건 괜찮아요.”

그가 명함을 받아 손안에 넣었다. 꼭 귀한 걸 받은 사람처럼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니 내 심장도 덩달아 바빠졌다.

“그럼 제가 아주 자주 궁금할 것 같은데요.”

“너무 자주는 곤란해요.”

“하루에 몇 번까지 괜찮습니까?”

“그런 건 알아서 하세요.”

태준이 웃었다. 나는 더는 얼굴을 보여 줄 자신이 없어 서둘러 회전문을 빠져나왔다. 가을밤 공기가 뺨을 스쳤고, 이번에는 웃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외투를 벗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허기가 느껴졌지만 휴대전화부터 확인했다. 잠깐 후, 모르는 번호가 화면에 떴다.

나는 한 번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잘 들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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