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영은 마치 충격받은 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딸... 어쩜 그렇게 엄마를 모함할 수가 있니?”
도아영의 상처받은 눈빛을 본 강현재는 딸이 허인하를 감싸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친엄마가 자식을 해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현재는 딸을 타일렀다.
“이연아,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면 안 돼. 그리고 이분은 낯선 여자가 아니라 너와 이준의 친엄마잖아. 이분이 없었다면 너희도 세상에 없었어.”
“거짓말 아니에요!”
도아영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강현재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현재야. 아이들은 거짓말할 줄 몰라.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지. 정말 괜찮아. 아이들이 사모님을 좋아하는 걸 보니 사모님이 아이들에게 정말 잘해줬다는 얘기잖아. 난 그걸로 충분해.”
‘그래,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허인하가 일부러 딸에게 그렇게 말하도록 시켰을 것이다.’
도아영의 눈에 가득한 안타까움과 억울함을 본 강현재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주머니는 어디 있어?”
보모가 황급히 들어왔다.
강현재는 허인하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세요.”
이는 아이들을 허인하에게서 떼어놓겠다는 의미였다.
보모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자 강현재는 분노에 찬 얼굴로 허인하만 홀로 그 자리에 남겨놓은 채 도아영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하나는 친아빠이고 하나는 친엄마인데 그녀가 무슨 권리로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옆에 놓인 핏자국이 묻은 솜을 바라보며 허인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슬픔보다 더 컸던 감정은 바로 절망적인 실망감이었다.
결혼 6년 동안 그녀는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키우며 그가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강현재는 바람을 피우지 않았고 그녀에게도 자상했으며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도아영이 나타나기 전까지였다.
오늘 밤 단 하루 동안 강현재가 도아영을 감싸는 모습은 지난 6년 동안 그녀를 감싸던 모습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해줬던 작은 호의들이 너무나 보잘것없게 느껴지게 했다.
...
밤이 깊었다.
허인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고 곧이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재 또한 샤워를 마치고 침대 반대편에 누웠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린 채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 후, 강현재가 말했다.
“아영이는 그냥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온 것이니 당신이 그렇게까지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도 없고 아이들을 부추겨 거짓말을 시킬 필요도 없어. 오늘 일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내.”
‘이번 한 번으로 끝내라고?’
허인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가 6년 동안 키웠어. 갓난아기 때부터 내 손으로 키웠고 그 누구보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길 바랐어. 그런데 당신은 무슨 근거로 내가 아이들을 꼬드겼다고 단정 짓는 거지?”
“당신이 아니라면 아영이가 그랬겠어?”
강현재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굳이 내가 일깨워줘야겠어? 아영이야말로 그 아이들의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그의 싸늘한 말에 허인하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6년간의 헌신이 도아영의 눈물 어린 하소연보다 못하다니. 그럼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뭐였을까?’
...
그날 밤,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허인하가 눈을 떴을 때, 강현재는 이미 곁에 없었다.
오늘은 주말, 가족과 함께 보내는 날이라 강현재는 회사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허인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모님, 아침 식사... 준비되어 있습니다.”
집사 임훈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인하는 식당으로 향하다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도아영이 정성스럽게 아침 식사를 차려놓은 것이었다.
“사모님, 일어나셨어요? 어서 오셔서 아침 식사하세요.”
도아영의 미소는 더없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강현재는 그 모습이 허인하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여기는 네 아이들의 집이니까 편안하게 지내면 돼.”
허인하는 발걸음을 멈췄다. 뺨이 화끈거리는 것이 마치 뺨을 맞은 것만 같았다.
도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허인하가 자리에 앉자 도아영이 말했다.
“이거 드셔 보세요. 이 만두는 예전에 제가 제일 잘 만들었던 건데 현재도 좋아했어요. 그래서 사모님과 아이들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어서 한 번 만들어 봤어요.”
강현재는 정말 만두를 좋아했다.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
“솜씨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네. 수고했어. 앞으로는 직접 만들 필요 없어. 인하도 할 줄 아니까.”
‘수고했어... 인하도 할 줄 아니까... 그러니까 도아영은 만들 필요 없고 나더러 만들라는 뜻인가?’
허인하는 묵묵히 죽 그릇만 바라봤다. 그녀는 아픈 강이준을 2박 3일 동안 밤샘 간호하며 눈이 충혈될 정도로 애썼지만 그때 강현재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허인하는 강현재가 도아영을 귀한 손님으로 대하느라 예의를 차리는 것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맞아요, 저도 할 줄 알아요. 게다가 이연이는 게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을 수가 없어요.”
도아영이 놀란 듯 말했다.
“알레르기라고요? 현재야, 아이들이 알레르기 체질인 건 어릴 때 제대로 관리를 안 해줘서 그래. 아이들을 너무 과잉보호하면 안 돼. 다양한 균에 노출시켜서 면역력을 키워줘야지.”
강현재는 잠시 머뭇거리다 허인하를 쳐다봤다.
사실 허인하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잘못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아영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도아영도 강현재의 침묵을 눈치채고 화제를 돌렸다.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가고 싶은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돼?”
그러고는 허인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모님도 저희와 함께 가시겠어요?”
그때 강현재가 갑자기 말했다.
“그냥 허인하라고 불러.”
도아영은 순순히 고쳐 불렀다.
“알았어. 허인하 씨.”
두 사람은 허인하의 의향은 전혀 묻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았다.
허인하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말했다.
“두 분만 다녀오세요. 저는 오늘 선약이 있어서요.”
강현재는 무심결에 되물었다.
“당신이 무슨 친구가 있다고?”
허인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제아시로 이사 와서 만나기로 했어.”
결혼 전에는 친구가 많았지만 강현재와 결혼해 제아시로 이사 온 후에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친구들은 대부분 수도인 정경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현재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짧게 당부했다.
“일찍 돌아오고 조심해.”
허인하는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강현재는 도아영에게 직접 반찬을 놔주며 물었다.
“병은 이제 완전히 나은 거야?”
도아영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나았어. 걱정 마.”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지?”
도아영은 시선을 내리깔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지금이라도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된 거지 뭐.”
사실 그녀는 고생과는 거리가 먼 윤택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자 허인하는 외출 준비를 도왔다.
물통, 물티슈, 어린이 카메라, 갈아입을 옷 등을 꼼꼼히 챙겼다.
“엄마가 오늘은 같이 못 나가. 아빠 말씀 잘 듣고 함부로 뛰어다니면 안 돼.”
허인하는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강이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그럼 누가 우리랑 같이 놀아줘요?”
“아빠, 그리고...”
허인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너희들의 친엄마.”
“싫어요!”
강이연은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우리 친엄마가 아닐 리 없잖아요. 그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아줌마 얼굴도 본 적 없는데.”
허인하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이연아, 도아영 씨는 너희 친엄마가 맞아. 너희가 그분을 싫어하면 아빠가 슬퍼하실 거야.”
아이들은 여전히 탐탁지 않아 했지만 허인하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허인하가 자신들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도아영에 대한 반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허인하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식탁 위에 메모 한 장을 올려놓았다.
“아이들의 식습관이랑 알레르기 있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들을 꼼꼼히 적어놨어.”
말을 마친 허인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저녁이 될 때까지 허인하는 친구 조여린이 운영하는 라운지 바에서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 가족끼리 보내는 날에 이렇게 오랫동안 내 가게에 있는 건 처음이네.”
조여린이 과일 접시를 내밀었다.
허인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조적인 말투로 말했다.
“네 식구가 오붓하게 놀러 가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너도 네 일을 하면 되잖아.”
허인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전공을 살릴 만한 일자리가 제아시에는 없어.”
그녀는 벤처 투자 전문가였지만 제아시의 중소 제조업체들은 수천억대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유치하고 융합할 단계는 아니었다.
가장 확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강현재의 회사뿐이었다.
강산 그룹은 이미 인근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이었으니까.
하지만 허인하는 그의 사업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너는 타고난 재능을 너무 썩히고 있어.”
조여린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인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오빠를 통해 투자를 접했고 17세부터 아버지와 함께 투자에 참여하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통찰력으로 허씨 가문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명문가 출신으로 부족할 것 없이 자란 허인하가 미혼인 데다 어린 자녀까지 있는 강현재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했을 때, 허씨 가문은 극렬히 반대하며 절연까지 불사했다.
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온 남자가 이제 남편이 되었으니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조여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현재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허인하가 평범한 가정 출신이고 고향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녀의 부모님이 지금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허인하는 약간 현기증이 났다.
“이제 그만 마셔야겠다. 돌아가야...”
웅...웅...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강현재에게서 온 전화였다.
허인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강현재는 거의 전화를 걸지 않고 카톡으로 소통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현재의 말투는 차갑고 냉정했다.
“당장 아동 병원으로 와.”
허인하는 조여린에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