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준경의 손이 멈췄다.솔은 덧붙이지 않았다.에드윈도 잠시 말이 없었다.준경이 계약서를 한번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백 년 전에도 하르젠이 예언자 대가에 끼어 있었고.”폐성 기록을 봤다.“지금도 내가 끼어 있고.”“예.”준경은 웃지 않았다.“재밌네.”에드윈이 말했다.“현재 계약 양식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솔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접촉 상환도요.”“예?”“그 방식 자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봐야 합니다.”솔은 폐성 기록을 손끝으로 눌렀다.“이쪽에서 먼저 시작된 건지, 원래 있던 방식을 여기에 쓴 건지 모르니까요.”준경이 물었다.“기록 남아 있을까.”“있으면 좋겠습니다.”“없으면?”솔은 잠깐 말이 없었다.준경이 먼저 알아챘다.“예언으로 볼 생각이야?”“가능은 할 것 같습니다.”에드윈의 시선도 솔에게 갔다.잠시 조용해졌다.준경은 폐성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솔도 마찬가지였다.계약서 위에 올려둔 손끝이 움직이지 않았다.“하지만.”솔이 말했다.“지금은 안 보겠습니다.”준경이 솔을 봤다.“왜.”솔은 두 기록 사이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폐성에서 본 것도 아직 제대로 모르겠습니다.”“뭐가.”“어느 게 먼저였는지요.”쓰러진 준경.열린 문.검게 번진 저주.뒤섞여 들어오던 장면들이 떠올랐다.“다시 보면 또 그렇게 될 수도 있고?”“모르겠습니다.”솔은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래서 기록부터 보고 싶습니다.”준경은 잠깐 말이 없었다.“그걸로 안 나오면?”“그때 다시 생각하겠습니다.”“그래.”대답은 금방 나왔다.솔이 준경을 봤다.“기록 먼저 봐.”“예.”에드윈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가 말했다.“그럼 오래된 계약 기록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접촉 상환도.”솔이 덧붙였다.“예. 그것도 같이요.”에드윈이 문서를 모으기 시작했다.솔이 계약서 한쪽을 잡았다.“잠깐만요.”“예?”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첫 장.다음 장.접촉 상환
다음 날 아침.솔은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걸었다.준경은 서류를 넘기다가 그 모습을 봤다.“아파?”솔이 멈췄다.“……조금은요.”“많이?”“그 정도는 아닙니다.”맞은편 의자에 앉았다.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엉덩이가 의자에 닿는 순간 표정이 잠깐 굳었다.준경이 그걸 봤다.“아프네.”“조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그게 아픈 거잖아.”솔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준경이 잠깐 보다가 물었다.“후회해?”“아닙니다.”이번에는 바로 나왔다.준경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전혀?”“예.”눈도 피하지 않았다.준경은 잠시 솔을 바라보다 다시 서류를 들었다.“그럼 됐어.”사각.종이가 넘어갔다.솔은 맞은편에서 그걸 보고 있었다.입술을 열었다 닫았다.한번.또 한번.“공작님.”“왜.”준경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어제…….”그제야 눈이 올라왔다.“어제 뭐.”말이 막혔다.솔은 무릎 위의 손을 괜히 한번 고쳐 잡았다.“좋으셨습니까.”준경의 시선이 멈췄다.“뭐가.”솔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준경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또 그러십니까?”“뭘.”“아시면서.”“내가 어제 한 게 좀 많아서.”솔은 입을 다물었다.“됐습니다. 안 묻겠습니다.”“왜.”“또 놀리시잖습니까.”“이제 안 놀릴게.”“이미 하셨습니다.”준경이 결국 서류를 내려놨다.“그래서 뭘 알고 싶은데.”이미 물어놓고 다시 꺼내려니 더 어려웠다.솔은 잠깐 아래를 봤다.“제가…….”준경은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다.“잘했습니까.”웃음기가 사라졌다.솔은 그 얼굴을 보고 기다렸다.“응.”짧은 대답.솔의 눈이 조금 느슨해졌다.준경이 덧붙였다.“좋았어.”무릎 위에서 맞물려 있던 손가락이 풀렸다.솔은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준경이 물었다.“그게 궁금했어?”잠시 뒤 고개가 끄덕여졌다.“예.”“왜?”솔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어제 들었던 질문이 떠올랐다.내가 원하는지가 중요해?그때는 답하지 못했다.지금도 딱
서랍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짧은 가죽끈이 달린 승마용 채찍.솔의 시선이 거기에 멈췄다.준경이 돌아왔다.“왜.”“그걸 쓰실겁니까?““응.”솔은 채찍을 보고 다시 준경을 봤다.“무서워?”“조금은요.”“싫으면 말해.”솔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채찍 끝을 한번 더 봤다.“……해보고 싶습니다.”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치마 올려.”솔의 손이 치맛자락으로 갔다.천을 천천히 허리 위까지 걷어 올렸다.허벅지가 드러났다.준경의 시선이 아래로 한번 내려갔다.“탁자 잡고 엎드려.”솔이 탁자 앞으로 갔다.양손으로 가장자리를 잡고 몸을 숙였다.치마는 허리에 걸린 채였다.엉덩이가 훤히 드러난 자세.솔은 괜히 탁자만 봤다.뒤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준경은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솔의 손가락이 가장자리를 조금 세게 쥐었다.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앞 봐.”“예.”솔이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허리 조금 더 내려.”따랐다.“그래.”잠깐의 정적.언제 올지는 몰랐다.짝—몸이 크게 움찔했다.“읏……!”숨이 막혔다.맞은 자리가 뜨겁게 올라왔다.준경은 바로 두 번째를 치지 않았다.솔의 거친 숨만 방 안에 남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폐성에서 가져온 기록은 에드윈에게 넘겼고, 먼저 복귀한 기사들의 보고까지 받고 나서야 문이 닫혔다.방이 조용해졌다.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도 돌아가겠습니다.”준경은 대답하지 않았다.잔을 들었다가 입도 대지 않고 다시 내려놨다.“솔.”문으로 가던 걸음이 멈췄다.“예.”“어딜 가.”솔이 돌아봤다.준경이 손가락으로 불렀다.“이리 와.”앞까지 가자 다시 말했다.“더.”한 걸음.준경은 의자에 앉은 채 솔을 올려다봤다.“폐성에서 왜 나 안 놨어.”솔의 눈이 조금 커졌다.“예?”“예언 끝나고. 계속 잡고 있었잖아.”그제야 알아들었다.솔의 시선이 아래로 갔다.“걱정돼서 그랬습니다.”“내가?”“예.”“뭐가 걱정됐는데.”솔이 다시 그를 봤다.“다치실까 봐요.”“내가 다치는 게 싫어?”질문이 묘하게 한 칸 더 들어왔다.솔은 금방 답하지 않았다.“……좋아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에드윈 다쳐도 걱정하잖아.”“그렇습니다.”“똑같아?”입이 다물렸다.준경은 기다렸다.솔의 손가락이 옷자락 끝을 눌렀다.“……아닙니다.”“뭐가 다른데.”이번에는 솔이 바로 그를 봤다.“공
솔은 금속판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하르젠.그 옆에는 라엔의 예언자.두 사람의 이름 사이에서 시작된 선이 아래로 내려가다 갈라져 있었다.한쪽은 하르젠에게.다른 한쪽은 예언자에게.솔이 손끝으로 선을 따라갔다.“이 예언의 대가.”준경이 옆으로 다가왔다.“둘이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지금 우리처럼?”솔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금속판을 다시 한번 살폈다.“비슷합니다.”“같은 건 아니고?”“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준경은 더 묻지 않았다.솔이 금속판 아래쪽을 살피다가 손을 멈췄다.끝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였다.그런데 돌판과 금속판 사이에 가느다란 틈이 있었다.손끝을 넣어 당겼다.얇은 판 하나가 앞으로 밀려 나왔다.“공작님.”준경이 몸을 숙였다.처음 것보다 훨씬 작았다.표면도 많이 닳아 있었다.솔은 남은 글자부터 찾았다.날짜.조금 전 기록과 같았다.그 아래에도 두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하르젠.라엔의 예언자.그리고 그 밑.희미하게 남은 글자.처리 결과.솔의 손이 멈췄다.준경이 물었다.“왜.”솔은 대답하지 않고 처음 금속판을 옆에 가져왔다.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첫 기록.두 갈래.두 번째 기록.하나.
솔의 입술이 굳었다.“지금요?”“응.”“제가 반대해도요?”“응.”대답이 너무 쉽게 나왔다.솔의 눈썹이 조금 모였다.준경이 그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화났어?”“아닙니다.”너무 빨랐다.준경의 입가가 움직였다.“그럼 그 얼굴은 뭔데.”솔은 잠시 버텼다.“……조금은 화난 것 같습니다.”준경이 웃었다.솔은 더 굳었다.“웃으실 일 아닙니다.”“알아.”“안 그러신 것 같습니다.”그 말에는 준경도 입을 다물었다.잠깐 뒤 손이 올라와 솔의 뺨을 한번 쓸었다.“여기 있어.”솔이 바로 물었다.“공작님은요?”“내가 열어볼게.”“싫습니다.”준경의 손이 멈췄다.솔 자신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그래도 말을 고치지는 않았다.“같이 가겠습니다.”“위험하다며.”“그러니까요.”준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무슨 말이야.”“저도 모릅니다.”솔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그래도 공작님 혼자 들어가는 건 싫습니다.”이번에는 준경이 웃지 않았다.둘이 잠시 마주 봤다.“알았어.”그가 먼저 문 쪽으로 돌아섰다.솔도 따라갔다.한 걸음 뒤가 아니라 바로 옆에 섰다.문에 가까워지자 준경의 저주가 다시 짙어졌다.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