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른을 넘기지 못하는 저주를 짊어진 하르젠 공작 준경. 그의 저주를 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예언자 솔이 계약자로 들어온다. 예언의 대가를 나누며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100년 전 하르젠과 라엔의 연결이 강제로 끊겼다는 사실을 추적한다. 명령과 복종으로 시작된 관계는 점차 서로를 향한 자발적인 선택으로 변해간다.
View More다음 날 오전, 신탁청 실무관이 저택에 왔다. 준경은 집무실에서 그를 맞았다. 솔도 옆에 있었다. 실무관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그저께 밤 가져가신 문서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싫은데." 실무관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이런 대답을 예상한 얼굴이었다. "신탁청 기록입니다. 확인하셨다면 반환해 주셔야 합니다." "확인했어. 그래도 싫어." "돌려주지 않으시면 하르젠이 신탁청 기록을 가져간 것으로 처리됩니다." "해." 준경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대신 그 문서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도 같이 적어." 실무관이 말을 멈췄다. "하르젠 공작한테 대가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있다고 알려준 게 신탁청이잖아. 그것까지 다 적어서 올려." 실무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다시 와도 똑같아." 실무관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 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솔이었다. 실무관이 멈췄다. "말씀하십시오." "백 년 전에 하르젠과 라엔의 예언자가 대가를 나누기로 했던 일 말입니다. 그게 나중에 바뀌었지요." "예. 하르젠 쪽 요청으로 바뀌었습니다." 실무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래된 처리 기록을 읊는 것처럼. 솔이 다시 물었다. "라엔의 예언자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까?" "알렸습니다." 솔의 어깨에서 아주 조금 힘이 빠졌다. 실무관이 덧붙였다. "처리가 끝난 뒤에요." 솔이 멈췄다. 준경이 실무관을 봤다. "끝난 뒤?" "예. 바뀐 결과는 처리가 끝나면 양쪽에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실무관은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원래 그렇게 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실무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문이 닫혔다. 솔은 닫힌 문을 한동안 봤다. "몰랐던 겁니다." 준경이 솔을 봤다. "라엔의 예언자는요. 자기가 하르젠의
다음 날 아침.준경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서명할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는 펜을 집었다.엄지와 검지로만 쥐어졌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여전히 굽은 채였다.이름을 쓰기 시작했다.글씨가 비뚤어졌다.준경은 종이를 옆으로 치우고 새 종이에 다시 썼다. 이번에는 펜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다. 잉크가 번졌다.준경이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세 번째 종이를 꺼냈다. 천천히 썼다. 이름은 겨우 알아볼 만했다. 평소 서명과는 전혀 달랐다.그는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셔츠 소매 단추가 풀려 있었다. 아침에 혼자 채우려다 포기한 것이었다.노크 소리가 났다."들어와."솔이었다. 어제 데인 손에는 아직 천이 감겨 있었다.솔은 바닥에 구겨진 종이를 봤다. 그리고 책상 위의 비뚤어진 서명을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대신 준경 옆으로 와서 풀린 소매 단추를 채웠다.준경은 가만히 있었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솔이 단추를 다 채우고 물러났다."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나가야 해.""어디로요.""어제 그 남자. 에드윈이 알아본 게 있어."솔이 잠깐 말이 없었다."에드윈 경이 이리로 와서 보고하면 되지 않습니까.""내가 가는 게 빨라.""오늘은 에드윈 경에게 맡기십시오."준경이 솔을 봤다."왜.""손이 그런데요.""손 하나 때문에 못 갈 일은 아니야."솔은 물러서지 않았다."어제 그 손 때문
말을 꺼낸 건 준경이 아니었다.골목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에드윈과 함께 갔던 기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공작님."준경이 솔에게 잡힌 손목을 뺐다. 천천히. 소매를 끝까지 내렸다."찾았어?""예. 멀지 않습니다. 에드윈 경이 문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들어갔고?""들어갔습니다. 아직 안 나왔습니다."준경이 솔을 봤다.조금 전의 얼굴은 이미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걸을 수 있어?""예.""그럼 가자."기사가 길을 안내했다. 준경이 걸음을 옮겼고 솔이 그 뒤를 따랐다.솔은 걷는 내내 준경의 손을 봤다. 그는 그 손을 옆구리에 붙인 채였다. 걸을 때도 흔들지 않았다.모퉁이를 하나 돌았다.또 하나.솔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알고 있는 길이었다.와본 적 없는 골목이었다. 그런데 벽돌의 색도,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도, 모퉁이에 쌓인 빈 상자도 전부 처음이 아니었다.조금 전 미래 안에서 걸었던 길이었다.그리고 그 끝에 문이 있었다.낡은 나무문. 위에 매달린 등불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미래에서 본 그대로였다.문 맞은편 그림자 속에서 에드윈이 모습을 드러냈다."공작님.""안에 몇 명인지 확인돼?""방금 그 남자와, 원래 안에 있던 사람 하나. 둘입니다.""나간 사람은.""없습니다. 뒷문도 없는 집입니다."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문 앞으로 갔다. 기사들이 양옆에 붙어 섰
이번에는 조용했다.수레 세 대가 차례로 뒷마당을 빠져나갔다. 바퀴가 돌길을 긁는 소리가 멀어졌다.아무도 막지 않았다.마당에는 남자 하나만 남았다.그는 수레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서 있었다. 등을 든 채로.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등을 내려놓았다.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그리고 뒷문으로 나갔다.좁은 골목이었다. 남자는 등도 없이 어둠 속을 걸었다. 익숙한 길인 것 같았다. 모퉁이를 두 번 돌았다.걸음을 멈췄다.품 안에 손을 넣었다.꺼낸 건 작은 꾸러미였다. 끈으로 묶은 얇은 종이 묶음. 손바닥 두 개를 겹친 크기.남자는 그걸 잠깐 내려다봤다.그리고 낡은 문 앞에 섰다. 문 위에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미래가 끊겼다.솔이 눈을 떴다.이번에는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냉기가 손끝에서 거꾸로 올라왔다. 팔꿈치. 어깨. 목. 턱이 저절로 떨렸다. 벽을 짚은 손에 감각이 없었다. 벽이 손바닥 아래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무릎이 꺾였다.준경이 팔을 뻗었다."예언부터……."솔이 겨우 말했다.준경의 손이 솔의 몸에 닿기 직전에서 멈췄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말해."솔은 벽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벽돌보다 자기 몸이 더 차가웠다."상자가 아닙니다."준경이 숨을 죽였다."그 사람입니다. 등 든 사람.""그 사람이 뭐.""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품 안에."솔이 고개를 돌려 준경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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