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공작의 예언자

저주받은 공작의 예언자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10
Por:  케사르Atualizado 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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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넘기지 못하는 저주를 짊어진 하르젠 공작 준경. 그의 저주를 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예언자 솔이 계약자로 들어온다. 예언의 대가를 나누며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100년 전 하르젠과 라엔의 연결이 강제로 끊겼다는 사실을 추적한다. 명령과 복종으로 시작된 관계는 점차 서로를 향한 자발적인 선택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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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화. 새 예언자

이 저택에서 공작이 서른을 넘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올해 스물넷.

준경 하르젠에게 남은 시간은 여섯 해였다.

그리고 지금.

그 여섯 해를 벌기 위해 그의 앞에 한 명의 예언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

마른 몸을 감싼 검은 옷.

오른쪽 눈 아래에는 신탁청 등록 예언자에게만 나타나는 붉은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준경은 책상에 앉은 채 그녀를 한 번 훑어봤다.

“이름.”

“솔입니다.”

“등급.”

“중급 예언자입니다.”

목소리는 조용했다.

긴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두 손이 몸 앞에서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손끝에 들어간 힘이 조금 강했다.

그래도 시선을 바닥에 처박지는 않았다.

준경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

“가까이 와.”

솔은 움직였다.

왜냐고 묻지 않았다.

책상 앞까지 다가와 멈추자 준경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더.”

솔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이제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였다.

준경의 시선이 오른쪽 눈 아래에 머물렀다.

“고개 들어.”

“예.”

솔이 턱을 조금 들었다.

준경은 손을 뻗었다.

두 손가락이 솔의 턱 아래에 닿았다.

그대로 얼굴을 들어 올리고 조금 옆으로 돌렸다.

솔의 어깨가 순간 굳었다.

그러나 물러나지는 않았다.

준경은 가까이 드러난 문양을 살폈다.

붉은 선 몇 개가 눈 아래에서 가느다랗게 얽혀 있었다.

“예언할 때 변하나.”

“예. 빛이 강해집니다.”

“통증은.”

“있습니다.”

“견딜 만하고?”

“예.”

준경은 대답을 들은 뒤에도 손을 바로 떼지 않았다.

문양을 확인하는 데는 이미 충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있는 예언자.

명령하면 움직이고.

멈추라 하면 멈출 것 같은 여자.

준경은 그 생각에 특별한 의미를 붙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필요해서 불렀다.

그러니 필요한 만큼 확인하면 그뿐이었다.

그가 손을 놓았다.

솔의 얼굴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준경은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

“읽어.”

솔이 두 손으로 계약서를 받았다.

“다 읽으면 서명하고.”

명령은 짧았다.

솔은 아무 말 없이 첫 장을 넘겼다.

준경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여섯 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정말 그것뿐이라면,

이번에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쓸 생각이었다.

예언도.

대가도.

그리고 눈앞의 예언자도.

준경의 손이 떨어진 뒤에도 솔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턱 아래에 닿았던 감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손을 대지는 않았다.

준경이 밀어놓은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앉아.”

“예.”

솔은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첫 장에는 계약 기간과 예언 횟수가 적혀 있었다.

신탁청 등록 예언자 임대 계약서.

낯설지 않았다.

세 번째 가문.

네 번째 계약이었다.

처음 계약했을 때는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지금은 달랐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솔의 손이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준경은 기다렸다.

재촉하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세 번째 장에서 솔의 손이 잠시 멈췄다.

예언에는 대가가 따른다.

피.

기억.

시간.

접촉.

그리고 필요할 경우, 계약자는 그 방식을 직접 정할 수 있었다.

솔은 그 문장을 한 번 더 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준경이 물었다.

“문제 있나.”

“아닙니다.”

“그럼 마저 읽어.”

“예.”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솔이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준경의 시선이 빈칸 하나에 머물렀다.

“보통 뭘 쓰지.”

솔은 질문의 뜻을 알아들었다.

“피를 씁니다.”

준경의 눈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

“왜.”

솔은 잠시 생각했다.

좋아서 고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른 것보다 나았다.

“잃는 게 보이니까요.”

준경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

솔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기억은 사라지고 나면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를 수 있습니다.”

“시간은 나중에야 대가를 알게 되고.”

솔이 잠시 말을 멈췄다.

“접촉은 혼자 치르는 대가가 아닙니다.”

준경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무슨 뜻이지.”

“예언의 반동을 계약자와 나눕니다.”

솔은 익숙한 설명을 이어갔다.

“예언이 깊을수록 통증이나 후유증도 커집니다. 접촉하는 동안 그 일부가 상대에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안 쓰나.”

“대부분의 계약자가 원하지 않습니다.”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예언자의 대가를 굳이 같이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준경은 몇 초 동안 솔을 바라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솔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제가 혼자 감당하면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한 번 내려다봤다.

“적어도 무엇을 잃고 있는지는 보이고요.”

준경의 시선이 그 손목에 잠깐 머물렀다.

“그래.”

그뿐이었다.

위로도 감탄도 없었다.

준경이 깃펜을 집어 솔 쪽으로 돌렸다.

“서명해.”

솔은 펜을 받았다.

빈칸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솔.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준경이 계약서를 가져갔다.

그가 마지막 장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준경 하르젠.

그리고 펜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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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새 예언자
이 저택에서 공작이 서른을 넘긴 적은,단 한 번도 없었다.올해 스물넷.준경 하르젠에게 남은 시간은 여섯 해였다.그리고 지금.그 여섯 해를 벌기 위해 그의 앞에 한 명의 예언자가 서 있었다.검은 머리.마른 몸을 감싼 검은 옷.오른쪽 눈 아래에는 신탁청 등록 예언자에게만 나타나는 붉은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준경은 책상에 앉은 채 그녀를 한 번 훑어봤다.“이름.”“솔입니다.”“등급.”“중급 예언자입니다.”목소리는 조용했다.긴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두 손이 몸 앞에서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손끝에 들어간 힘이 조금 강했다.그래도 시선을 바닥에 처박지는 않았다.준경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가까이 와.”솔은 움직였다.왜냐고 묻지 않았다.책상 앞까지 다가와 멈추자 준경이 그녀를 올려다봤다.“더.”솔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이제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였다.준경의 시선이 오른쪽 눈 아래에 머물렀다.“고개 들어.”“예.”솔이 턱을 조금 들었다.준경은 손을 뻗었다.두 손가락이 솔의 턱 아래에 닿았다.그대로 얼굴을 들어 올리고 조금 옆으로 돌렸다.솔의 어깨가 순간 굳었다.그러나 물러나지는 않았다.준경은 가까이 드러난 문양을 살폈다.붉은 선 몇 개가 눈 아래에서 가느다랗게 얽혀 있었다.“예언할 때 변하나.”“예. 빛이 강해집니다.”“통증은.”“있습니다.”“견딜 만하고?”“예.”준경은 대답을 들은 뒤에도 손을 바로 떼지 않았다.문양을 확인하는 데는 이미 충분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더 보고 싶었다.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있는 예언자.명령하면 움직이고.멈추라 하면 멈출 것 같은 여자.준경은 그 생각에 특별한 의미를 붙이지 않았다.그럴 필요도 없었다.필요해서 불렀다.그러니 필요한 만큼 확인하면 그뿐이었다.그가 손을 놓았다.솔의 얼굴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준경은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읽어.”솔이 두 손으로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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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오늘 시작한다
“오늘 시작한다.”솔의 손끝이 아주 조금 멈췄다.“예언을 말씀이십니까.”“그래.”“오늘 바로요?”준경이 고개를 들었다.솔은 그 시선을 받은 순간 더 묻지 않았다.“……예.”준경은 계약서를 덮었다.“준비해.”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서재를 나섰다.준경이 먼저 걸었다.솔은 두 걸음쯤 뒤에서 그를 따랐다.긴 복도 벽에는 역대 하르젠 공작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솔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이상했다.모두 젊었다.흰머리가 성성한 사람도 없었고, 깊은 주름이 남은 얼굴도 없었다.초상화 아래에는 이름과 사망 당시의 나이가 적혀 있었다.스물아홉.스물여덟.스물아홉.한 사람도 서른을 넘지 못했다.앞서가던 준경이 멈췄다.솔도 즉시 걸음을 멈췄다.“뭘 보고 있지.”“아닙니다.”준경의 시선이 솔이 보고 있던 초상화로 향했다.그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너무 오래 봐서 이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첫 예언을 오늘 해야 할 만큼 급하신 겁니까.”준경이 그녀를 내려다봤다.“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솔은 대답하지 않았다.준경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계약 첫날이라고 죽음이 하루 미뤄지는 건 아니니까.”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솔은 다시 그의 뒤를 따랐다.복도 끝에서 계단이 아래로 이어졌다.한 층.두 층.내려갈수록 창문이 사라지고 공기가 차가워졌다.마지막 철문 앞에서 준경이 멈췄다.손을 대자 잠금장치가 낮은 소리를 내며 풀렸다.문 너머로 푸른 촛불이 켜진 석실이 드러났다.바닥 중앙에는 오래된 원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솔은 그 문양을 보는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중앙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누가 시키지 않아도 익숙한 자리였다.준경은 원 밖에 섰다.“일주일 뒤.”그가 말했다.“동부 협곡에서 전투가 벌어진다.”솔이 고개를 들었다.“우리가 이기는 미래를 봐.”질문은 아니었다.솔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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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대가는 내가 정한다
솔은 고개를 숙였다.“예.”솔은 품 안에서 작은 은빛 칼을 꺼냈다.익숙한 동작이었다.소매를 걷자 희고 마른 팔 위로 오래된 흔적들이 드러났다.얇게 겹친 흉터.아문 것.아직 옅은 붉은빛이 남은 것.준경의 시선이 그곳에 멈췄다.솔은 신경 쓰지 않았다.칼끝을 팔 안쪽에 가져갔다.그 순간.손목이 붙잡혔다.“그만.”솔의 손이 그대로 멎었다.준경은 어느새 원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그의 손가락이 솔의 가느다란 손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공작님.”준경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잡은 손목을 들어 올렸다.소매가 조금 더 밀려 올라갔다. 숨겨져 있던 흉터까지 드러났다.준경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늘 이렇게 했나.”“예.”“전부 예언 대가고.”“예.”솔은 잡힌 손을 빼려 하지 않았다.준경이 놓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그는 한동안 솔의 팔을 내려다봤다.필요할 때마다 베고.아물면 다시 베고.다른 가문에서도 똑같이 반복했을 흔적이었다.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준경은 솔의 손에 들린 칼을 보았다.“내려.”솔의 손가락이 움직였다.칼이 바닥에 놓였다.짤랑.작은 금속음이 석실에 울렸다.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아직 대가가 남아 있습니다.”“알아.”“그럼 피를 내야 합니다.”준경은 그제야 솔의 손목을 놓았다.하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피 말고 다른 것도 있지.”솔이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웠다.아까보다 훨씬.“있습니다.”“뭐가 남았지.”“기억.”솔이 하나씩 말했다.“시간.”짧게 숨을 골랐다.“접촉.”준경의 시선이 솔의 얼굴에 머물렀다.“접촉으로 해.”솔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이번 예언은 가볍지 않았습니다.”“그래서.”“공작님께서도 대가를 치루게 됩니다.““알아.”준경은 계약서를 읽을 때 이미 들었다.솔은 한 순간 그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그럼 손이면 됩니다.”가장 적은 접촉.상환에 필요한 만큼만 나누기 위한 방식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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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두고가
시간이 지나면서 솔을 짓누르던 통증은 빠르게 줄어들었다.대신 준경의 호흡은 처음보다 조금 무거워져 있었다.관자놀이가 욱신거렸고,팔은 안쪽부터 저린 듯 무거웠다.솔은 그것을 느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자신이 편해지는 만큼,이 남자가 그 대가를 받고 있었다.이상한 감각이었다.지금까지의 계약에서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이었다.준경은 솔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숨이 서서히 고르게 변했다.준경의 손가락이 뒷목을 더 세게 눌렀다.솔의 허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문양의 열이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몸 안을 누르던 빚도 거의 사라졌다.입술이 떨어질 듯 말 듯 다시 깊어졌다.준경의 엄지가 솔의 턱선을 따라 움직이며 각도를 바꿨다.솔의 눈이 살짝 감겼다.무릎 위에 펼쳐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얼마 뒤,솔은 알았다.상환은 끝났다.더 이상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없었다.준경에게 넘어가는 반동도 멈췄다.하지만 그가 받은 통증까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준경의 손끝에는 아직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런데 입술도,뒷목을 잡은 손도 떨어지지 않았다.솔은 그 사실을 느꼈다.상환은 끝났는데.준경은 아직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끝났습니다.”입술 사이로 솔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준경의 움직임이 멈췄다.그제야 입술이 떨어졌다.하지만 뒷목을 잡고 있던 손은 바로 풀리지 않았다.한 박자.솔은 가만히 기다렸다.준경의 손가락이 천천히 힘을 늦췄다.그 순간이었다.쿵.솔의 오른쪽 눈 아래에서 강한 박동이 터졌다.“…….”솔이 숨을 삼켰다.상환은 끝났다.몸 안을 누르던 빚도 없었다.그런데 문양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붉은 빛이 피부 아래에서 번졌다.동시에 준경의 표정이 굳었다.그가 오른손을 내려다봤다.소매 아래에서 검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준경은 소매를 걷었다.손등을 뒤덮은 검은 저주 표식이 살아 있는 것처럼 뛰었다.쿵.솔의 문양이 다시 같은 박자로 울렸다.두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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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더 가까이
솔이 새 방으로 안내받은 건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었다. 시녀가 문을 열었다. “이쪽입니다.” 솔은 안으로 들어갔다. 넓었다. 침대 하나와 작은 책상만 있어도 충분했는데, 방 안에는 소파와 벽난로까지 있었다. 창문은 남쪽 정원을 향해 나 있었다. 솔은 방보다 복도를 먼저 돌아봤다. 맞은편에 문 하나가 있었다. “저 방은 누구 방입니까.” 시녀가 잠깐 망설였다. “공작님 침실입니다.” 솔의 시선이 다시 맞은편 문으로 갔다. 그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주표식이 자신과 가까이 있을 때 반응했다. 관찰하려는 거겠지. 그 이상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시녀가 솔의 짐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작은 가방 하나였다. “짐은 이것뿐입니까?” “예.” 시녀가 가방을 한 번 봤다가 솔을 봤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솔은 익숙하게 가방을 열었다. 옷 몇 벌. 빗. 작은 수첩. 그게 전부였다. 계약이 끝나면 다시 떠나야 했다. 많이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솔은 빈 서랍 하나를 열어 옷을 넣었다. 밖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맞은편이었다. 솔의 손이 잠깐 멈췄다. 준경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옷을 정리했다. 관찰하기 좋은 거리. 딱 그 정도였다. 밤이 깊었다. 솔은 낯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좋은 방이었다. 너무 좋은 방이라 오히려 익숙하지 않았다. 이전 계약지에서는 예언자가 머무는 방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 하인 숙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여기는 달랐다. 너무 조용했다. 솔은 눈을 감았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낮은 발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몇 걸음. 잠시 멈춤. 다시 돌아가는 소리. 철컥. 문이 닫혔다. 준경이었다. 솔은 눈을 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작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선명해졌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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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내가 부르면 바로 와
솔이 손을 내밀었다.준경은 손바닥을 받지 않았다.손목을 잡았다.그대로 한 걸음 끌어당겼다.솔의 몸이 가까워졌다.숨이 닿을 만큼은 아니었다.그래도 아까보다 훨씬 가까웠다.준경은 잡은 손목을 들어 자기 오른손 위에 가져갔다.“여기.”솔의 손바닥이 검은 저주 표식 위에 닿았다.순간.솔의 오른쪽 눈 아래가 뜨거워졌다.준경의 손등에서도 검은 선이 빠르게 흐려졌다.거리만 좁혔을 때와는 달랐다.변화는 눈에 띌 만큼 분명했다.“직접 닿는 쪽이 훨씬 빠르군.”“예.”준경은 솔의 손을 그대로 눌러두었다.“그대로.”“예.”붙잡은 힘은 약했다.마음만 먹으면 손을 뺄 수 있었다.그래도 솔은 움직이지 않았다.검은 선은 계속 옅어졌다.잠시 뒤 변화가 멈췄다.이제 더 흐려지지 않았다.준경은 그것을 확인했다.그런데도 손을 놓지 않았다.솔은 잠자코 기다렸다.지속 시간까지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준경의 엄지가 손목 안쪽에 닿아 있었다.맥박이 뛰는 자리였다.그가 낮게 말했다.“가만히.”솔은 고개를 끄덕였다.“예.”준경의 시선이 손등에서 천천히 올라왔다.솔의 얼굴에 멈췄다.검은 선은 이미 변화를 멈췄다.확인할 것은 끝났다.그래도 준경은 한동안 손목을 놓지 않았다.접촉이 길어질수록 검은 선은 조금씩 옅어졌다.그러나 일정한 지점에서 변화가 멈췄다.준경은 그제야 솔의 손을 놓았다.손바닥이 떨어지자 검은 선이 아주 천천히 본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거리보다 접촉.”준경이 말했다.“그리고 오래 닿아 있을수록 효과가 커진다.”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것 같습니다.”준경은 자기 손등을 바라봤다.거리.직접 접촉.지속 시간.조건에 따라 반응의 크기가 달랐다.그렇다면 접촉의 정도도 영향을 줄까.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전날의 감각이 떠올랐다.솔의 턱을 잡았던 손.입술.붙잡고 있던 뒷목.그리고 상환이 끝난 뒤에도 곧바로 놓지 않았던 순간.준경의 시선이 천천히 솔에게 올라갔다.손보다 더 가까운 접촉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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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내 예언자니까
동부 협곡의 지도가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준경 맞은편에는 하르젠가의 군무를 맡은 가신, 에드윈 로셀이 앉아 있었다.“좌측 기병을 먼저 움직이면 된다는 겁니까?”“새벽 안개가 걷히기 전에.”준경이 지도 위 한 지점을 짚었다.“적 주력이 우측으로 쏠린다. 그때 들어가.”에드윈이 잠시 지도를 살폈다.“예언은 확실하고요?”준경이 시선을 들었다.“그래서 불렀어.”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들어와.”솔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오늘도 검은 옷이었다.오른쪽 눈 아래의 붉은 문양은 평소처럼 희미했다.솔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부르셨습니까.”에드윈이 솔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훑어봤다.악의가 있는 시선은 아니었다.전투에 쓰일 말을 살피듯,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는 눈이었다.“이 사람이군요.”준경은 대답하지 않았다.에드윈이 솔에게 손짓했다.“예언자, 이쪽으로 와보게.”솔은 바로 움직였다.한 걸음.두 걸음.그 모습을 보던 준경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에드윈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동부 협곡을 직접 본 건가?”“예.”“적 병력까지?”“전부는 아닙니다. 퇴각 시점과 매복 위치까지 확인했습니다.”“문양은?”솔이 눈을 들었다.“예언 직후에는 반응이 있었습니다.”“지금은 괜찮고?”“예.”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가까이 와봐. 상태도 좀 보지.”솔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갔다.너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준경은 그제야 알았다.자기가 부르면 오는 것과,다른 사람이 부르면 오는 것 사이에솔에게는 아직 아무 차이도 없었다.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솔의 오른쪽 눈 아래를 가까이 보려는 듯 몸을 숙였다.“빛이 남아 있진 않군.”그의 손이 올라왔다.문양 주변을 직접 확인하려는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솔은 피하지 않았다.오히려 익숙하게 턱을 조금 들었다.그 순간.탁.에드윈의 손이 중간에서 멈췄다.준경이 손목을 잡고 있었다.에드윈이 눈썹을 올렸다.“공작?”“손대지 마.”짧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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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내 말만 들어
솔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준경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솔에게는 아니었다. 계약된 적은 여러 번 있었다. 누군가의 예언자였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방금의 내 예언자는 이전과 같은 말로 들리지 않았다. 에드윈이 돌아간 뒤 서재가 조용해졌다. 문이 닫히자 준경이 솔을 봤다. “아까.” 솔이 시선을 들었다. “왜 가만히 있었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에드윈이 너한테 손대려고 했을 때.” 솔은 잠깐 생각했다. 정말 이유를 묻는 것 같았다. “문양을 확인하려고 하셨으니까요.” 준경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럼 만지게 둬?” “필요하면 그렇습니다.”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그랬나.” “예.” 솔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예언 뒤에는 문양을 확인합니다. 상태가 나쁘면 맥박이나 상처도 보고요.” “누가.” “계약자나 담당자가 합니다.” 준경이 잠시 말이 없었다. “아무나?” 솔이 이번에는 조금 망설였다. “필요한 분이요.” 이상한 대답이었다. 필요하면 된다. 그 말대로라면 자신이 처음 솔의 턱을 잡았을 때도, 손목을 돌려 흉터를 봤을 때도, 그녀에게는 특별할 게 없었다. 준경의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솔은 오히려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예언자는 원래 그렇게 관리합니다.” 준경은 낮게 혀를 찼다. 관리. 자기가 쓰던 말이었다. 그런데 남의 입을 통해 들으니 이상하게 거슬렸다. 준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 앞까지 걸어가 멈췄다.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솔의 턱을 잡았다. 솔은 익숙하게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반응이 준경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것도?” 솔이 그의 손 안에서 눈을 깜빡였다. “예?”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있었냐고.” 잠깐의 침묵. 솔은 사실대로 답했다.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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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만지고 싶어서
아침이 밝은 뒤에도 솔은 한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아픈 곳은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계속 신경 쓰였다.손을 가져가려다 멈췄다.어제 준경이 닿았던 자리였다.상환이 아니었다.예언 뒤 상태를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저주를 살피기 위한 실험이라는 말도 없었다.솔은 천장을 바라봤다.지금까지 누군가 자신에게 손을 대는 데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문양을 확인하거나.맥박을 짚거나.상처를 살피거나.대가를 치르거나.그러면 따랐다.그게 예언자의 일이었으니까.어제는 달랐다.준경도 아무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그런데 자신은 피하지 않았다.솔의 눈썹이 아주 조금 모였다.왜?공작이라서?갑작스러워서 몸이 굳은 것뿐인가.아니면 그동안 준경의 손길에 익숙해져서.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솔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답을 찾으려 할수록 더 알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했다.평소와 똑같이 준비를 마쳤다.그때였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솔 님.”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솔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멈췄다.아주 잠깐이었다.부르면 바로 와.준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솔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예. 지금 가겠습니다.”대답은 평소와 같았다.그런데 발을 내딛기까지는,어제보다 한 박자 더 걸렸다.서재 문을 열자 준경은 창가에 서 있었다.책상 위에는 동부 협곡 관련 보고서가 몇 장 펼쳐져 있었다.솔이 들어오자 준경이 고개를 돌렸다.“왔어.”“예.”평소와 같은 대답이었다.솔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멈췄다.준경과 책상 사이에 평소보다 조금 더 거리를 둔 자리였다.준경의 시선이 그 간격을 한 번 훑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제 예언한 매복 위치.”준경이 보고서 한 장을 들어 보였다.“병력이 실제로 확인됐어.”솔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렇습니까.”“네가 본 것과 숫자가 조금 달라.”준경이 보고서를 내밀었다.솔은 다가가 받아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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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오늘 밤 내 방으로 와
솔의 숨이 멎었다.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저주도.예언도.계약도 없었다.그냥 자신에게 손대고 싶었다고 했다.준경은 그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솔은 시선을 내렸다.어제의 감각이 다시 떠올랐다.턱을 잡았던 손.목선을 지나 내려오던 손끝.그리고 이전에는 누구도 업무라는 이름으로 건드리지 않았던 자리.이제는 알았다.그 행동에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이유가 자신이 알고 있던 종류가 아니었을 뿐이었다.그런데도 마음속에 남아 있던 질문 하나는 사라지지 않았다.준경이 물었다.“그런데 너는?”솔이 고개를 들었다.“예?”“왜 안 피했어.”손끝이 다시 굳었다.아침부터 자신에게 묻고 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공작이라서였을까.갑작스러워서 움직이지 못한 걸까.그동안 명령을 따르는 데 익숙했기 때문일까.솔은 어느 쪽도 고르지 못했다.“저는…….”말이 끊겼다.준경은 재촉하지 않았다.솔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습니다.”준경의 눈이 가늘어졌다.솔은 덧붙였다.“왜 그러지 않았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이번에는 변명도 아니었다.정말 몰랐다.준경의 대답을 들었다고 해서 자신의 질문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반대였다.준경은 자신이 왜 손을 뻗었는지 알고 있었다.솔은 자신이 왜 피하지 않았는지 몰랐다.잠깐의 침묵 끝에 준경이 말했다.“그래.”이상할 만큼 담담한 목소리였다.“그럼 아직 모르는 걸로 해.”솔이 그를 바라봤다.준경은 이미 답을 받아낸 사람처럼 더 묻지 않았다.그 태도가 오히려 솔의 마음을 더 어지럽혔다.솔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그때 준경이 오른손을 내려다봤다.검은 저주 표식의 가장자리가 조금 흐려져 있었다.아주 미세한 변화였다.하지만 둘 다 이제는 알아볼 수 있었다.솔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또 반응하고 있습니다.”“그러네.”준경이 소매를 조금 더 걷었다.방금 전까지는 분명 이보다 짙었다.솔이 가까이 서 있는 동안 다시 옅어진 것이다.준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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