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초겨울의 궁 안. 새벽마다 내리는 서리보다 사람들의 눈길이 더 날카롭게 채향의 걸음을 베었다.그녀는 내전 입궁 후 정식 책봉이 선포되었으나,‘왕실 예법을 갖춘 여인’으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세자빈이 아니라 그저, 칭호만 허락된 자였다.“낭자, 예법훈장 윤 상궁께서 오늘도 세 시진 일찍 기다리신다 하옵니다.”“답문학, 품의례, 봉정차 세 가지를 익히셔야 다음 절차로 넘어갈 수 있사옵니다.”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예, 가보겠사옵니다.”그러나 그 말보다 먼저, 그녀의 손은 수라간 뒷방에서 끓고 있는 찹쌀탕 안으로 들어갔다.책봉 후에도, 그녀는 매일 새벽 한 솥의 국을 끓였다.궁중의 격을 갖추려 노력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 삶의 중심은 ‘음식’이었다.“예가 격이라면, 온기는 삶이옵니다.”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어제 다듬어 놓은 밤과 은행을 볶아 작은 탕 안에 띄웠다.그 손끝의 일은 그녀에게 ‘숨’과 같았다.그러나 그런 숨결조차, 궁은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그날 오후, 예훈을 받는 자리.윤 상궁이 채향이 올린 다과를 들여다보더니 매서운 시선으로 물었다.“이것은 어찌 이리 진하냐.”“답문은 정중한 선에서 머물라 하였거늘, 낭자의 한 상은 너무도 사사로워 보이옵니다.”채향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 손등엔, 오늘도 솥에 데인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인이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정채향 낭자께선 궁녀로 지내셔서 그런가 봅니다. 무언가를 만들 땐, 늘 손수 하시려 하시지요.”“하지만 세자빈이 되실 분은 손이 아니라 ‘뜻’을 품는 자리가 아닙니까.”그 말의 주인공은 고운령.고위 외척 가문인 고씨 집안에서 밀어낸 ‘격식의 화신’이라 불리는 여인이었다.그녀는 이미 어릴 적부터 궁의 예법 교육을 받으며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전, 숟가락을 쥘 줄만 아는 여인과 숟가락을 내미는 여인은 다르다고 배웠습니다.”그녀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안엔 분명한 선이 있었다.“채향 낭자께선
새벽의 내전. 책봉 명단이 담긴 목패가 중궁전 앞에 도착했다.금줄이 감싸진 붉은 함, 그 위에 적힌 다섯 명의 이름 중 첫 칸.분명히 그곳에는 ‘정채향’이라는 이름이 올라갈 것이었다.허나, 새벽을 찢는 문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중전마마께, 조용히 전하옵니다. 수라간 정채향 낭자의 과거…그 이름은 진짜가 아니옵니다.”비밀리에 도착한 편지 한 장. 그 안에는 지금까지 채향이 감춰왔던 진실,아니, ‘감추었으나 끝내 묻히지 못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그녀의 진짜 이름은 정채연. 채향은 어릴 적 병으로 죽은 언니의 이름이었다.그들은 어린 채연을 언니의 이름으로 입적시켰다.무명의 어린아이로는 궁녀 시험조차 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녀는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살아남았고, 지금껏 모든 하루를 그 이름 안에서 삼켜왔다.서화령은 그 기록을 들고 중전전의 향로 앞에 앉았다.매화향이 은은히 감도는 방 안에서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이제… 그 아이는 스스로 물러나야겠지.”“죽은 이름으로 살아온 자가 어찌 세자의 배필이 될 수 있겠는가.”같은 시각. 채향은 작은 손으로 떡국을 빚고 있었다.책봉 발표 날 아침, 이현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떡국’을 올리겠다고 다짐한 하루였다.그녀는 설탕도 꿀도 넣지 않았다.말간 국물에 하얀 가래떡을 얹고, 은은한 들기름 향만을 덧붙였다.그 국을 앞에 두고 그녀는 잠시, 죽은 언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채향 언니.”“난 아직도… 그 이름이 나인지, 당신인지 모르겠사옵니다.”“허나 한 가지는 분명하옵니다. 이 마음만큼은, 내 것이었사옵니다.”책봉 발표가 있던 그 시각. 대전엔 모든 대신과 궁료들이 모였고,왕세자는 정좌한 자리에서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오늘부로, 세자빈 간택 후보 5인을 고하노라.”“그 첫째, 정채향 낭자.”웅성거림이 일었다.그때, 서화령이 조용히 왕에게 납서문을 올렸다.“폐하, 이 이름은 실존하지 않는 이름이라 하옵니다.”“낭자는 죽은 자의
수라간 어르신의 방은 늘 정갈하고 말이 없었다.채향을 비롯한 후배 궁녀들이 그 앞을 지날 때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다듬곤 했다.그 방은 궁녀들의 마지막 단 한 치, ‘세상의 바깥이 궁이라면, 그 안의 마지막이기도 한’ 곳이었다.그러나 지금 그 조용했던 공간 앞에서 이궁 소속 수색 인원과 내관들이 벌집처럼 뒤섞이고 있었다.왕의 명으로 내려온 지령이었다.“정채향 낭자의 출신을 증명할 서류가 이 방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하옵니다.”방은 삽시간에 뒤집혔다. 묵은 장롱이 열리고, 쌍자비단을 덮어둔 반짇고리가 들춰지고,마루 아래 숨겨진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발견되었다.그 안에는 익숙한 글씨로 적힌 봉서 하나와 조선호적 원본 문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그 문서에는 분명히 쓰여 있었다.“출신: 전라도 부안군 하서면, 무명. 생모는 이름을 남기지 않음. 조혼 기록 없음.”그 문서가 보여준 이름은 ‘정채향’이 아니었다.그녀의 과거, 그녀의 처음 그리고 그녀가 궁녀가 되기 위해 잊은 이름이었다.같은 시각. 채향은 내전 정원 앞 작은 솥에 황태포를 데치고 있었다.입궁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예비 간택상 차림 준비였다.하나의 음식이 아닌, 한 사람의 진심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오늘 올릴 음식은 단 세 가지 뿐이옵니다.”그녀는 시녀에게 조용히 말했다.“맑은 국, 짠 나물, 그리고 단 쌀떡. 한 상엔 세 가지뿐이지만 제 마음 안에 있던 것 전부이옵니다.”그녀는 몰랐다. 자신의 과거가 지금, 수라간에서 조용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내관은 바로 왕에게 보고를 올렸다.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증거는 없었으나,문서상의 출신은 ‘무명’ 왕실의 혼례를 논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그 말을 들은 왕은 오래 침묵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출신은 이름이 아니고, 이름은 죄가 아니다.”“그대들이 보고 있는 그 아이가 내 눈앞에서 국을 지어 올린 그 손의 주인이다.”“그 손이 진실이라면 나는 그 손을 믿겠다.”그
내전의 문턱은 낮지 않았다.궁녀의 걸음으로 들어왔던 궁이었으나, 이제는 그 안에서도 또 다른 경계를 넘어야 했다.그 경계는 ‘입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고, 채향은 마침내, 사랑이 아니라 의무의 발끝으로 그 문 안을 디뎠다.내전 입궁 첫날. 궁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환영도 없었고, 눈에 띄는 적대도 없었다.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채향 낭자.”중궁의 시녀 중 하나가 나직이 말을 걸었다.“저하께선 오늘 아침, 상단에서 들여온 천을 살피러 가셨사옵니다.잠시 내전에서 홀로 계시게 될 터이니, 궁의 규율은 다시 한번 익혀두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말은 공손했으나, 그 말 아래에는 ‘당신은 이곳이 익숙하지 않지 않느냐’는 뜻이 깔려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소인, 잘 익히고 지키겠사옵니다.”그녀는 오랜만에 다시 그림자처럼 조용한 몸짓으로 걸었다.수라간의 뒷문에서 몰래 고추씨를 볶던 그때처럼,누군가의 발소리를 피해 볶음솥을 닦던 그 손끝처럼.이제는 궁녀가 아닌 위치였으나,그녀는 여전히 ‘낮게 숨쉬는 자의 예법’을 알고 있었다.내전 깊은 곳, 작은 정원 하나가 비어 있었다.그 안엔 반쯤 핀 모란이 한 송이, 흙을 뚫고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그 꽃 앞에서 채향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았다.“…여긴, 처음 보는 공간이옵니다.”그녀는 속삭이듯 중얼이며 손끝으로 조심스레 꽃받침을 어루만졌다.“나는… 여기서 살아남아야 하옵니다.”“저하를 향한 마음을 품은 채,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감싸 안아야 하옵니다.”그러나 그 순간 정원 뒤편, 감춰진 회랑 아래서 은밀히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를 훑고 있었다.“지금 저 눈빛, 자신이 누군지도 잊은 거 아니야?”“정채향… 네가 아무리 단정히 입어도, 수라간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터.”그 속삭임은 간택 예비 후보 중 하나였던 남윤서의 입에서 나왔다.그녀는 서화령의 조카로, 한때 이현의 배필이 될지도 모른다는
대전의 아침은 평소보다 이르게 밝았다.왕은 밤을 새웠다. 숨기지 않았다.잠들지 않은 눈으로 동이 터오는 창을 지켜보았고,자신이 등 돌려 묵인했던 세자의 사랑이 어떤 길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비로소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었다.그가 조용히 일으킨 손끝 아래, 내관이 조심스럽게 밀서를 올렸다.“서화령 마마의 외숙 가문. 남평윤씨의 집안에서 조달한‘봉제 내의’의 끈이 정문에 걸린 겉옷에 사용된 실과 유사하옵니다.”왕은 아무 말 없이 그 밀서를 불에 던졌다.다 타오르지 않은 잿더미가 붉은 숯을 남겼고, 그가 중얼거렸다.“눈을 감았기에 썩은 것이 아니다. 썩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은 것이었다.”같은 시각, 중궁의 연회장이 아닌 후원 깊은 정자에서 서화령은 또 다른 수를 놓고 있었다.고운 분을 바르며, 거울 앞에 선 그녀는 단정했다.예전과 다름없이, 조선 제일의 미모를 지닌 여인답게 우아했고,눈동자엔 미세한 초조조차 묻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는 궁 전체에 또 다른 독이 되어 퍼질 준비를 마쳤다.“정채향이… 태중에 아이를 가졌다고 하더이다.”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 들은 이는 고개를 갸웃했고, 세 번 들은 이는 고개를 끄덕였으며,네 번째부턴 입이 아니라 눈빛이 먼저 수긍을 건넸다.“그래서였군. 그처럼 얼굴이 창백하더니.”“그리 피곤하더니, 입덧이라도 있었던 게지.”“세자저하의 옷을 품에 두었던 그 밤, 무언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니라.”이번엔 향이 아니었다. 소문은 눈보다 빠르게 번졌고,그 소문은 마치 독한 술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었다.채향은 자신에게로 쏠리는 시선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수라간 안팎의 궁녀들마저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릴 때 그 작은 손끝조차 힐끗거렸다.이현은 그날 밤 채향의 침전으로 찾아왔다.문밖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한참을 조용히 서 있다가 마침내 들어섰다.채향은 아무 말 없이 국을 데우고 있었다.맵지 않고, 짜지 않은 단호박과 누룩간장을 이
새벽의 궁은 언제나 고요했지만, 그날은 유난히 서늘했다.차오르는 새벽달조차 연무 속에 묻힌 듯 흐릿했고,밤새 내린 이슬은 회랑 바닥에 얼룩진 발자국을 하나씩 새기고 있었다.그때, 대문 앞에 누군가의 낮은 외침이 들렸다.“이, 이게 뭐더냐!”호위군이 허겁지겁 달려왔고, 경계하던 병사들은 눈을 부릅떴다.그리고 곧, 붉은빛 도는 곤색 겉옷 하나가 정문 현판 아래 정갈하게 접힌 채,세 겹의 끈으로 묶여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누군가 일부러,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겉옷 안쪽에는 이현의 이름을 상징하는 매화 문양이 놓여 있었고,소매 끝에는 분명히 궁녀용 비단 수가 엮인 하얀 실오라기가 박혀 있었다.그것은 단 한 장의 옷이었다.그러나 그 옷이 궁 안에 던진 파문은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날카롭고도 빠르게 번져 나갔다.“세자저하의 옷이… 어찌…”“정채향 낭자라 하더이다, 그 침전 안에서 옷이 사라졌었다지요.”“설마… 잠자리까지…”“천한 궁녀가 세자저하를 유혹해…”궁은 입을 막지 않았다.오히려, 입을 벌리고 즐기고 있었다.향기롭던 이름은 순식간에 궁 안에 가장 불순한 상상으로 뒤덮였고, 진심은 곧 ‘간음’이란 말로 꺾여 버렸다.채향은 아무 말 없이 수라간 뒤편 좁은 담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그녀의 손엔 작은 접시 하나가 들려 있었고,그 안에는 보리밥 한술과, 조선간장 몇 방울이 담긴 질박하고도 서늘한 한 끼가 놓여 있었다.아무도 먹지 않을 밥. 누구도 대령받지 않을 음식.그것은 오늘, 자신이 마지막으로 궁 안에 쏟는 ‘진심의 밥상’이었다.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이것은 내가 지은 죄이옵니다.”“저하를 사랑한 죄. 그 곁을 끝내 떠나지 못한 죄.그러니 이제, 그 죗값은 제가 사라짐으로써 갚겠사옵니다.”그 순간, 별궁의 뒤편 문이 열렸다.그리고 이현이, 거센 숨결을 몰아쉬며 그녀 앞에 서 있었다.그의 눈은 타올랐고, 손엔 그 옷이 들려 있었다.정문에서 회수해 온, 세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