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Author: 주광

제1화

Author: 주광
이혼을 결심한 그날, 고예진은 유치원 화재 현장에서 죽을 뻔한 일을 겪었다.

아들 부이안을 구하기 위해, 예진은 마지막 힘까지 끌어모아 이안을 바깥쪽으로 밀쳐냈고, 자신은 무너진 책장 밑에 깔려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에 짓눌렸다.

그리고 그런 예진이 목숨 걸고 구해낸 친아들 이안은 그녀의 안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친아들은 불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다른 여자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고모, 괜찮아? 이안이 놀랐어... 너무 무서워...”

류아린은 팔에 경미한 화상을 입었을 뿐이지만, 마치 생명이 위독한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있었다.

“고모 괜찮으니까, 이안이 무서워하지 마.”

예진의 기억 속 이안은 아버지 부윤제를 꼭 빼닮았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조용하고 차분한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안은 아린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있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왜... 왜 하필 저 여자야... 내 아들이...’

예진의 가슴 깊은 곳이 날카로운 비수가 꽂힌 듯 아팠다.

바로 그 순간, 예진의 남편 부윤제가 불길 속을 뚫고 들어왔다.

윤제의 시선은 쓸진 책장 밑에 있던 예진을 그냥 지나쳐서 곧장 아린을 향했다.

그는 곧장 아린에게 달려가 이안을 안아 들었다.

“이안아! 아린아!”

“아빠, 고모 먼저 도와줘! 고모가 나 구하려다 다친 거야!”

윤제는 아린과 이안의 상처를 다급하게 살폈다.

예진은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봤다.

셋이 서로를 감싸 안은 모습은... 누가 봐도 완벽한 가족이었다.

그 가운데 있던 자신은, 마치 불청객처럼 어울리지 않는 그림자일 뿐이었다.

‘아파. 숨이 막혀. 그래도... 살고 싶어.’

예진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가 겨우 목소리를 내게 했다.

“살려줘요... 제발 살려줘요.”

그제야 세 사람의 시선이 예진에게 향했다.

예진은 분명히 봤다. 아들과 남편의 걱정 어린 얼굴은, 자신을 보는 순간 싸늘하게 변했다.

“엄마... 고모 몸이 약하니까 먼저 도와줘야 해. 엄마는 조금만 참아, 곧 소방관 아저씨들이 올 거야.”

“아린이가 이안이를 구했어.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순 없어. 아린아, 우리 먼저 가자.”

그렇게 말한 윤제는 아린을 조심스럽게 안고, 이안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셋은 그대로 등을 돌려, 예진을 남겨두고 떠나려 했다.

“이러지 마. 너무 위험해. 예진 씨를... 제발 좀 도와줘...”

아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윤제와 이안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저 사람, 괜찮을 거야.”

“맞아, 엄마는 맨날 아픈 척하잖아. 이번에도 뻔해. 소방관 아저씨들이 금방 올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제는 아린과 이안을 데리고 유치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불길은 점점 거세졌고, 곧 온 유치원을 집어삼켰다.

예진은 멍한 눈으로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내가 열 달 동안 품었다가 낳은, 목숨 걸고 구한 아들이 맞나?’

‘내가 8년을 사랑한, 하루도 잊지 못했던 남편 맞냐고?’

세상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편과 아들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을 버려둔 채 다른 여자를 구하고 떠나버렸다.

예진은 불 속에 홀로 남겨졌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뜨거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미 절망감이 바닥을 쳐서일까...’

그 순간, 예진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참 우스웠다.

‘정말, 우습지도 않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조소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다시 눈앞이 흐릿해졌다.

짙은 연기가 폐를 파고들며 숨을 멎게 했다.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가는 찰나, 예진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남았다.

‘만약...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다시는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내버려두지 않겠어.’

얼마나 잤는지도 모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예진은 아주 기나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예진은 마치 낯선 관객처럼 한발짝 떨어져서 자신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았다.

처음엔 설렘이었고, 그다음은 기다림이었고, 결국엔... 무너진 기대였다.

‘내가 왜 저렇게 바보처럼... 저 사람들만 바라보고 살았을까?’

...

열여덟 살, 고씨 가문과 부씨 가문은 사업적 이해관계를 이유로 혼약을 맺었다.

고예진의 성년식 날, 그녀는 처음으로 부윤제를 만났다.

그때 윤제는 스물두 살, 대학을 갓 졸업하고 부씨 가문의 가업을 물려받기 시작한 시기였다.

패기와 자신감으로 빛나던 남자.

예진은 윤제를 처음 본 순간 알았다.

‘이 사람이... 내 남편이 될 사람이구나.’

그날 이후, 소녀의 순도 100퍼센트 첫사랑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로지 윤제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윤제의 마음속엔 언제나 ‘자신의 첫사랑’이 있었다.

바로 부씨 가문이 입양한 양녀, 류아린.

아린의 어머니와 윤제의 어머니 도순희는 어릴 적부터 의자매라 불릴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몇 해 전, 아린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아린은 부씨 가문으로 들어와 윤제와 함께 자랐다.

‘그렇게 오랫동안 곁에 있었으면... 당연히 오누이처럼 각별한 관계겠지.’

예진은 늘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윤제의 나이는 스물여섯.

의사는 현장 점검 중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친 윤제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 아린은 조용히 짐을 싸서, 유학을 떠났다.

윤제의 옆을 지킨 사람은 예진뿐이었다.

윤제가 절망에 빠져있던 순간, 예진은 끝없이 윤제에게 말을 걸고, 그의 운동을 도우며 재활 치료 과정에서 같이 울고 웃으며 지옥 같은 나날을 버텨냈다.

그리고 결국, 윤제는 다시 일어섰다.

그 후, 윤제는 예진에게 프러포즈했다.

예진은 자신이 꿈꾸던 사랑의 결말을 믿었다.

‘이제 윤제 씨는 진짜 나만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렇게 예진은 스물두 살에 윤제의 아내가 되었고, 같은 해에 아들 이안을 낳았다.

그때의 예진은 자연분만을 위한 진통 끝에 결국 제왕절개로 아들을 출산했다.

그야말로 난산이었다.

그렇게 힘겨운 출산 과정에서도 그녀는 밤낮없이 곁을 지키던 윤제의 모습에, 모든 고통이 보상받은 듯 느껴졌다.

‘우리... 앞으로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세 식구가 늘 함께.’

하지만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안이 백일을 맞던 날, 아린이 귀국했다.

그리고 윤제에게 진짜 사랑은 결국 예진이 아닌, 그의 첫사랑이었다.

윤제가 아린을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진을 대하는 윤제의 온도는 서서히 차가워졌고, 퇴근 시간이 지나서도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기 일쑤였다.

이와 동시에 고씨 가문의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 년 사이에 거의 모든 계열사가 무너져 내렸다.

그 와중에 윤제의 아버지마저 병세가 악화하여 세상을 떠났다.

이제 집에는 윤제의 어머니, 도순희만 남았다.

고씨 가문이 더 이상 도움도, 가치도 없어진 시점에서 도순희는 이안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새아가, 네가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 해서 몸이 약해진 것 같구나. 아이는 내가 데려다 잘 키워주마.”

처음엔 그런 말로 시작됐지만, 곧 아린과 도순희가 함께 이안을 키우기 시작했다.

예진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류아린은 이미 과거야. 어머님은 이안이 할머니잖아.’

‘설마...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진 않으시겠지?’

하지만, 그때의 예진은 너무 순진했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오늘, 예진은 정말 오랜만에 어렵게 기회를 얻어 유치원으로 이안을 데리러 갔다.

하지만 유치원에 불이 났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이안과 윤제가 아린을 데리고 뛰쳐나가는 장면을 본 순간, 예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착각을 하고 살았던 거지?’

결국 거센 불길은 결국 예진을 집어삼켰고, 그 속에서 예진은 절규했다.

“살려줘... 제발...”

“...”

예진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펼쳐진 건 시뻘건 불길이 아닌, 하얀 병실의 천장이었다.

한참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현실을 인지했다.

‘아...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

병실엔 아무도 없었다.

예진의 온몸은 붕대로 감겨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상태였다.

방금 꾼 꿈 때문인지, 환자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따갑게 타들어 갔다.

예진은 누군가를 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연기 때문에 성대를 다쳤나 봐...’

그녀는 힘겹게 침대 옆의 목발을 짚고 일어나 탁자 위의 물을 겨우 한 모금 삼켰다.

그제야 타는 듯한 목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아들 이안을 떠올랐다.

예진은 목발을 짚으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아이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병실을 막 벗어난 순간, 옆 병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발이 멈췄다.

웃음소리는 따뜻하고, 평화롭고, 무엇보다... 익숙했다.

예진은 천천히 다가갔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안이 훤히 보였다.

아린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도순희는 그 병상 옆에서 사과를 깎고 있었다.

이안은 아린의 이불 위에 몸을 기대고, 아린을 꼭 껴안고 있었다.

“고모... 아직 아파요?”

이안의 목소리는 작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속엔 따뜻한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30화

    아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안은 더 크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아린은 소파에 앉아 이안을 안고 다독였다.“이안아, 울지 마. 괜찮아. 다 고모가 잘못했어.”“고모, 나 이제 엄마 안 볼 거야. 엄마는 나쁜 사람이야!”‘어떻게 내 아들이, 내 아들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지...’윤제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굳어졌다.그런 윤제를 힐끗 바라본 아린은 살짝 난처한 얼굴을 지었다.“오늘 이안이가 나한테 먼저 전화했어. 부모 참여 행사가 있다고... 예진 씨가 오기로 했다면서... 근데... 내가 혹시라도 가면 예진 씨가 또 뭐라고 할까 봐 망설였어.”“요즘 오빠랑 예진 씨 사이도 좀... 민감한 시기잖아. 그래서 내가 괜히 이안이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 같아서...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아린의 조심스러운 말투와 자책하는 표정에, 윤제는 더더욱 예진에 대한 불만이 치밀어 올랐다.“이게 어떻게 네 잘못이냐? 전부 고예진 잘못이지. 고예진은 정말 미쳤어. 나한텐 아무리 소리 지르고 화내도 상관없지만, 어떻게 애한텐... 아직 어린애라고!”아린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 이번엔 예진 씨가 정말 너무했어.”이안은 여전히 흐느끼며 몸을 떨었지만, 아린이 계속 안아주고 달래자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하지만 아침도 먹지 못한 이안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자, 이안이 아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고모... 나 케이크 먹고 싶어.”아린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우리 착한 이안이. 고모가 지금 당장 만들어줄게.”아린은 재킷을 벗고 부엌으로 향했고, 이안은 윤제의 다리를 꼭 안았다.“아빠... 엄마랑 진짜 이혼할 거야?”윤제는 잠시 굳어버렸다.‘이혼? 그 사람이 진짜 그럴 거라곤 생각도 안 했는데... 늘 말뿐이라고 생각했어.’“그건 어른들 일이고, 넌 신경 쓰지 마. 다시는 혼자 밖에 나가는 일 없어야 해. 알았지? 다음엔 정말 혼나.”이안은 윤제의 대답에 실망한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얼마 뒤, 아린이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29화

    “도대체 왜 맘대로 뛰쳐나간 거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예진의 목소리는 이성을 잃은 듯 떨렸다.이안은 예진에게 맞은 엉덩이를 감싸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엄마가... 진짜로 나를 때렸어?’그때, 영호가 서둘러 차에서 내려와 예진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진정하세요. 아직 어린아이잖아요.”예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애써 진정을 시도했다.“내가 너한테 몇 번 말했니? 밖에서 파는 케이크나 디저트 같은 건 절대 먹지 말라고 했잖아!”이안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이를 악물고 버럭 소리쳤다.“먹을 거야! 왜 나만 못 먹어! 왜 맨날 엄마가 만든 것만 먹어야 해!”“왜냐면 넌 우유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내가 만든 건 모두 네가 못 먹는 재료 빼고 만든 거야!”예진의 말에 이안은 순간 움찔하더니 고개를 홱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이제 내 엄마도 아니잖아! 상관하지 마!!”그 말에 예진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래... 결국 이 아이도 날 버리는구나.’사실 예진은 원래 요리, 특히 제과 같은 방면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하지만 이안이 단 음식을 좋아하고 또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는 밤낮으로 배우고 연습해서 만들어냈던 게 바로 그 ‘우유 없는 케이크’였다.영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말렸다.“애들은요,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아무 말이나 해요. 너무 마음에 담지 마세요.”그러면서 예진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렸다.‘괜찮아... 익숙해지면 되잖아. 기대할 것도 없고, 상처받을 것도 없어.’예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부이안, 이게 마지막이야. 이젠 네가 뭘 하든, 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아.”그 순간, 저 멀리에서 윤제가 급히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부이안!”이안은 윤제를 보는 순간 울음이 폭발했다.“아빠! 나 엄마 싫어... 엄마는 나쁜 사람이야...”윤제는 이안을 꼭 끌어안고 눈살을 찌푸리며 예진과 영호를 번갈아 바라봤다.예진은 윤제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28화

    마음속 억울함이 올라오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이안은 눈앞에 보이는 과일을 세게 밀쳐내고 벌떡 일어나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선생님이 당황해 곧바로 따라나섰지만, 그때는 이미 이안의 모습이 유치원 정문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예진은 선생님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이안 어머님, 큰일 났어요. 이안이가 방금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지금 유치원 여기저기 다 찾아봤는데 아이가 보이질 않아요.]비록 마음속으로는 ‘난 더 이상 엄마가 아니야’라며 선을 그으려 했지만, 막상 아들이 사라졌다는 말에 예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선생님, 유치원 쪽에서도 계속 찾아주시고요. 저도 아이 아빠에게 연락하고 바로 가겠습니다.”전화를 끊자마자, 예진은 결국 또다시 윤제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사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윤제는 핸드폰 화면에 ‘예진’이라는 이름이 뜨자 입꼬리를 스치듯 올렸다.‘역시 고성그룹부터 압박하니까 꼬리 내리는군.’‘결국 먼저 연락 하는 건 늘 이 여자야.’전화를 받은 찰나, 예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이안이가 유치원에서 도망쳤대요. 지금 없어졌어요.]윤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쾅!그는 벌떡 일어나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뭐라고 했어, 지금?!”30분 후, 예진과 윤제가 유치원 앞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들은 이미 유치원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이는 없었다.결국 CCTV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이안은 경비원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 몰래 대문 밖으로 빠져나갔던 것이었다.‘실종 신고는 시간이 좀 지나야 받아준다는 말도 있던데...’예진은 본능적으로 경찰에 신고하려다, 괜히 헛수고만 하게 될까 봐 망설이며 이를 악물고 포기했다.유치원 앞을 벗어나자 윤제는 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사람들을 총동원시켜 아이를 찾으라 지시했다.전화를 끊고 나자마자 예진을 쏘아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이안이에게 아무 일 없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이랑 난 끝이야.”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27화

    [여보세요? 이안아?]“고모, 오늘 유치원에서 부모 참여 수업 있는데, 고모가 대신 와줄 수 있어?”아린은 손목시계를 흘깃 봤다.[이안아, 엄마는?]“엄마가 또 삐졌어. 안 오겠대. 완전 유치해. 나도 이제 그런 엄마 필요 없어.”아린은 순간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고예진... 이번엔 진짜 단단히 각 잡고 싸우는 거네?’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잘됐네. 이 기회에 이안이가 고예진을 미워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내가 들어갈 틈이 생기지.’그렇게 생각한 아린은 일부러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이안아, 고모도 오늘 회사에서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지금은 나가기 어려울 것 같아. 그리고 엄마가 약속했다면 꼭 올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그 말을 끝으로, 아린은 전화를 끊었다.이안은 뭔가 더 말하려다 전화를 뺏긴 듯한 기분에 말문이 막혔다.‘다 엄마 때문이야! 약속도 못 지키고!’속상함에 이안은 다시 아빠 윤제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윤제는 회의 중이었고,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이번엔 할머니 도순희에게 전화했다.[우리 착한 손주! 지금 할머니는 고스톱하는 중이라 바빠. 엄마한테 부탁해. 엄마는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하나둘 전화를 돌렸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이안은 교실 앞 계단에 주저앉아 눈시울을 붉혔다.‘엄마도, 아빠도, 고모도, 할머니도... 아무도 안 와...’그때 선생님이 이안을 발견하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이안아, 혹시 집에서 어른들이 다 바쁘신가 보네? 그래서 못 오시는 거야?”이안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예진이 직접 만든 디저트로 친구들에게 칭찬받을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모든 계획이 무산됐다.선생님은 이안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괜찮아. 그럼 오늘은 선생님이랑 짝꿍 해서 게임을 하면 어때?”“네...”이안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선생님 손을 잡고 교실로 들어갔다.그 순간, 아까 그 무리의 친구들이 또 몰려왔다.“이안, 너희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26화

    유치원 행사장.작은 소파에 이안만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잔뜩 찌푸린 얼굴로, 예진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엄마는 한 번도 늦은 적 없었는데... 오늘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이미 부모 참여 수업 시작 직전, 아이들과 부모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행사장을 누비고 있었다.그때, 몇몇 아이들이 이안 쪽으로 다가와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이안아, 너희 엄마 왜 아직도 안 왔어? 혹시 안 오는 거 아냐?”“지난번에 너 다쳤을 때도 안 왔다며? 너희 엄마... 너 싫어서 안 온 거 아냐?”“...”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어른이었으면 상처가 될 말들이, 아이들 입에서는 쉽게 튀어나왔다.이안은 더 깊이 찌푸린 얼굴로, 단단히 말문을 열었다.“그럴 리 없어! 우리 엄마 분명 올 거야. 내가 말했잖아. 오늘 엄마가 직접 만든 디저트 가져올 거라고.”그 말을 듣고, 아이들 눈이 반짝였다.“진짜? 너희 엄마 디저트 진짜 맛있잖아! 오늘 또 먹을 수 있어?”이안은 목을 꼿꼿이 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당연하지.”“와! 이안이는 좋겠다. 맨날 그렇게 맛있는 거 먹을 수 있어서 부럽다.”그제야 이안의 얼굴에도 조금 웃음이 돌았다. 역시 친구들의 칭찬은 아이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고, 행사장은 어느새 완벽하게 세팅을 마쳤고, 아이들과 엄마들은 지정된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런데 예진만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선생님은 이안을 바라보다 조용히 다가와 무릎을 굽혀 말했다.“이안아, 엄마는 어디 계셔?”그 순간, 이안은 표정 하나 없이 고개를 들었다.그 얼굴은 마치... 윤제를 빼닮았다.“엄마가 잊어버렸나 봐요. 선생님, 전화해 볼게요.”이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출입문 옆에 있던 작은 의자에 가서 스마트워치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예진은 고씨 본가에서 막 나오던 길이었다.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인도를 빠르게 걷던 그녀는 핸드폰 진동에 멈춰 제자리에 서서 전화를 받았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25화

    “이미 다 생각해 봤어요. 이안이는 부윤제가 키우게 두고, 나는 그 사람 재산 반만 받으려고 해요.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예진의 말에 고환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만해! 너희 부부싸움이 지금 어디까지 가는 건데! 이혼은 절대 안 돼. 난 동의 못 해!”“아빠!”“이혼할 생각이라면, 다시는 날 아빠라고 부르지 마라!”고환일은 격분한 듯 가슴팍을 손으로 눌렀고, 송승예는 깜짝 놀라 급히 그를 부축했다.예진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알고 있어... 지금 고성그룹은 위기야.’‘부윤그룹이 손을 뗀다면, 수백 명 직원들의 생계까지 흔들릴 수 있어.’‘하지만... 나는... 더이상 이 집안의 방패막이로 살고 싶지 않아.’그렇게 생각한 순간, 예진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죄송해요.”갑작스러운 행동에 고환일과 송승예 모두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아빠, 엄마. 제가 이기적인 거 알아요. 하지만... 그동안 제가 어떤 수모를 견뎌왔는지 말한 적 없죠?”“항상 좋은 이야기만 전했잖아요. 근데... 며칠 전에 있었던... 그 일은 생각만 해도 아직도...”그날, 그 연기 속, 숨이 막히던 순간이 떠올라 예진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그날...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하지만 걱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다들 ‘왜 연락 안 됐냐고’만 따졌을 뿐.’부모 앞에서는 늘 강한 척하던 예진이 이 순간만큼은 더없이 여려졌다.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그 모습을 본 송승예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며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예진아, 너희 부부는 겉으로 보기엔 잘 지냈잖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동안?”예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그동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말하자면 끝이 없었다.‘실망은 단 한 번에 오는 게 아냐.’‘작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순간 폭발하는 거야.’“이제 와서 다 말하는 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하지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