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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1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소예지는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를 한 줄씩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임현욱다운 솔직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몇 줄을 바라보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미묘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느 순간에는 서재 안에 또 다른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고이한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소예지가 메시지를 읽는 순간의 표정도, 잠시 후 손가락으로 화면을 빠르게 두드리며 답장을 보내는 모습도 그는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고이한의 턱선은 아주 미묘하게 굳어 갔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서 소예지가 다른 남자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장면을 고스란히 보고 있는 사람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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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84화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하면서도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말에 소예지는 고이한을 흘겨봤다.“누가 당신을 때리고 욕해? 내가 무슨 악처도 아니고.”고이한의 입가에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그럼 평생 당신 옆에서 부려 먹어. 서재 정리도 하고 무거운 짐도 옮기고 젤리 산책도 시키고 하슬이도 데리러 가고. 또...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까.”마지막 말에는 묘하게 다른 뜻까지 담겨 있었다. 성인이라면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의미였다.소예지는 또 한 번 고이한을 노려봤다.“밥이나 먹어.”“알겠어. 밥 먹을게.”고이한은 순순히 젓가락을 들면서도 먼저 소예지에게 반찬을 집어줬다.“밥 먹고 오후에는 새집 가서 같이 정리하자. 오늘 밤은 하슬이 엄마한테 맡기고.”“응.”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점심을 먹은 뒤 소예지는 집으로 돌아가 남은 짐을 정리했다.오후 4시가 되자 김경환과 직원 몇 명이 찾아와 짐을 차에 실어줬고 소예지도 그들과 함께 새집으로 향했다.도착한 뒤에도 김경환 일행은 짐을 옮기며 정리를 도왔다. 소예지도 쉴 새 없이 물건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7시가 되어 있었다.소예지는 직원들에게 먼저 저녁을 먹으러 가라고 한 뒤 혼자 남아 책장을 계속 정리했다. 고이한에게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라고 보냈다.한동안 움직이다 지친 소예지는 소파에 앉아 잠시 쉬었다. 그때 휴대폰에 뉴스 알림 하나가 떴다.무심코 화면을 훑던 소예지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그대로 시선이 멈췄다. 교포 출신의 자산가 진기태가 투자 실패로 파산 위기에 놓였다는 경제계 주요 뉴스였다.소예지는 순간 숨이 막혔다. 진기태는 자신의 연구소에 거액을 투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파산 위기에 놓였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소예지는 곧바로 기사를 눌렀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리더니 고이한이 안으로 들어왔다.소예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진기태 대표님 기사 봤어?”고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봤어.”“정말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83화

    이런 힘쓰는 일은 역시 남자가 한 명 있으면 훨씬 수월했다. 소예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그럼 부탁할게.”고이한의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별것 아닌 한마디였지만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소예지의 모습이 고이한에게는 오히려 선물처럼 느껴졌다.사실 이런 일쯤은 사람을 불러 시켜도 됐다. 하지만 고이한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해주고 싶었다.고이한은 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 올렸다. 탄탄한 팔뚝이 드러나며 단단한 근육이 선명하게 잡혔다.소예지는 옆에 서서 고이한이 본체와 모니터를 각각 완충재로 꼼꼼하게 감싼 뒤 전용 상자에 조심스럽게 넣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소예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생수 한 병을 가져왔다. 다시 올라왔을 때 고이한은 이미 상자 포장까지 끝낸 뒤였다. 소예지가 건네는 물을 본 고이한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받아 들었다.뚜껑을 열고 고개를 젖혀 물을 마시자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위아래로 선명하게 오르내렸다.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 달리 어딘가 거칠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소예지는 슬쩍 시선을 돌리고 자신도 생수병을 열어 물을 마셨다.“고생했어.”“별로.”고이한은 소예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을 위해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게 나한테는 좋은 일이야.”너무도 직설적인 말에 소예지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고이한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곧 화제를 바꿨다.“오후 4시에 김 비서가 사람 보내서 짐 옮겨줄 거야.”“응.”소예지가 문득 물었다.“당신 짐은?”“다 정리해 놨어. 언제든 옮기면 돼. 원래 짐이 별로 없어서.”점심때가 되자 양희순은 오늘 이삿짐을 싸느라 장을 보지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덕분에 고이한에게는 자연스럽게 소예지에게 외식을 제안할 명분이 생겼다.소예지는 양희순에게도 함께 가자고 했지만 양희순은 집에서 간단히 국수나 끓여 먹겠다며 사양했다. 결국 소예지는 고이한과 함께 단지 맞은편에 있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82화

    다음 날 아침, 양희순은 8시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생활용품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소예지가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양희순은 슬쩍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차분한 얼굴이었다. 역시 이런 일은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오늘은 소예지도 양희순과 함께 집에서 이삿짐을 정리하기로 했다. 큰 가구는 따로 챙길 필요가 없었고 평소 쓰던 생활용품만 포장해서 가져가면 됐다.오전 10시쯤, 소예지는 서재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맨 위 칸에 꽂힌 책에는 손이 닿지 않았다. 의자를 가져와 올라가려는데 뒤에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도와줄까?”소예지는 멈칫하며 돌아봤다. 고이한이 문 앞에 서 있었다.“괜찮아.”소예지는 그대로 의자 위에 올라가 맨 위에 꽂힌 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고이한은 곧바로 다가와 옆에 서서 소예지가 내려주는 책을 받아줬다.소예지가 높은 곳에 꽂힌 책을 한 권씩 꺼내 건네면 고이한이 빠짐없이 받아 들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손이 몇 번 자연스럽게 스쳤다.그때 소예지가 두꺼운 양장본 한 권을 꺼내다가 옆에 꽂혀 있던 책까지 건드리고 말았다. 책 한 권이 그대로 소예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당황한 소예지는 손에 들고 있던 무거운 책까지 놓쳤다.“윽!”머리를 세게 맞은 탓에 눈앞이 순간 아찔해졌다. 균형까지 잃은 소예지의 몸이 그대로 비스듬히 아래로 기울었다.고이한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곧바로 팔을 뻗었다. 소예지의 몸을 받아낸 충격에 반걸음 정도 밀려났지만 허리를 감싼 팔에는 오히려 더 힘을 주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혹시라도 부딪힐까 봐 뒤통수까지 받쳐주었다.소예지는 그대로 고이한의 품에 깊숙이 안겼다. 책에 맞은 머리는 욱신거렸고 코끝에는 온통 고이한의 체취가 맴돌았다.“어디 맞았어?”고이한이 다급하게 물으며 소예지의 상태를 살폈다.소예지는 두 발이 바닥에 닿자 맞은 곳을 손으로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괜찮아.”그렇게 말하면서도 왼쪽 이마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미간도 잔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81화

    고이한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예지는 이제 돌아가려나 싶었지만 고이한은 현관이 아니라 소파 뒤로 다가왔다. 소예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커다란 두 손이 어깨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소예지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가 본능적으로 피하려던 찰나 고이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가만있어. 힘 빼.”손에 들어가는 힘은 세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뭉친 어깨를 적당한 힘으로 천천히 풀어주자 소예지도 한결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결국 긴장을 풀고 몸을 맡겼다. 미간은 살짝 찌푸려졌지만 거절하려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때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떨어져 지낸 3년 동안 익숙했던 스킨십마저 어느새 낯설어져 있었다.그래도 모든 오해가 풀린 뒤로 소예지는 더 이상 고이한이 싫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가까이 닿는 것에 다시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소예지는 눈을 감고 고이한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고요한 거실에는 두 사람의 잔잔한 숨소리만 들렸다.소예지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는 걸 느낀 고이한이 계속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일도 중요하지만 몸도 챙겨. 너무 무리하지 말고.”“응.”소예지는 알겠다는 듯 대답하고 눈을 떴다.“됐어. 이제 당신도 내려가서 쉬어.”고이한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을 숙이더니 갑자기 소예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잘 자.”소예지가 놀라 고개를 들자 고이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고이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화를 내든 당장 나가라고 하든 소예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리며 묵묵히 눈을 맞췄다.하지만 소예지는 몇 초 동안 그를 쳐다보다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늦었어.”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받아주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이 늦었다는 말만 건넸을 뿐이다.고이한의 눈에 웃음이 번졌다. 자신이 또 선을 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소예지가 어느 정도 받아준 것 같았다.“잘 자.”고이한이 다시 한번 인사했다. 낮게 가라앉은 목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80화

    고이한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밥 먹고 두 바퀴쯤 돌고 올게.”고이한은 생선구이에서 가장 고소한 부분을 발라 소예지의 그릇에 놓아줬다.소예지는 옆에 놓인 갈비찜을 바라보다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한 점을 집어 들고 고이한에게 말했다.“그릇 줘 봐.”팔을 뻗어도 고이한의 그릇까지 닿기 어려웠다. 고이한은 웃으며 그릇을 가까이 내밀어 소예지가 건네는 갈비찜을 받았다. 그러고는 소예지를 빤히 바라봤다.그 뜨거운 시선을 느끼자 소예지는 괜히 반찬을 집어줬나 싶어 퉁명스럽게 말했다.“밥 먹어. 나 쳐다보지 말고.”고이한은 순순히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소예지가 한마디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말을 듣는 모습이었다.식사를 마친 뒤 소예지가 식탁을 정리하려 하자 고이한도 곧바로 손을 보탰다.“됐어. 당신은 젤리 데리고 나가. 내가 할게.”“같이 해.”고이한은 그대로 남아 정리를 도왔다. 소예지가 남은 음식을 정리하고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는 동안, 고이한은 조리대와 식탁을 닦았다.정리를 모두 마치고 나서야 고이한이 젤리를 불렀다.“젤리야, 가자. 아빠랑 산책하러 가자.”주방에서 나오던 소예지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고이한이 웃음을 참는 소예지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왜? 당신은 젤리 엄마 아니야?”소예지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도 젤리를 자식처럼 아끼기는 했지만 굳이 스스로 엄마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마음대로 해.”소예지는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젤리도 고이한이 좋은지 다가가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고이한은 목줄을 챙겨 젤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단지 안에서 30분 정도 젤리를 산책시킨 뒤 다시 올라왔다.초인종이 울렸을 때 소예지는 마침 거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 젤리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산책을 마쳤으니 고이한은 그대로 돌아가도 됐지만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물 한 잔만 마시고 가도 돼?”소예지가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579화

    돌아오는 길에 고이한은 음악을 틀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소예지도 머릿속으로 업무를 정리하느라 조용했다. 고이한은 그런 소예지를 방해하지 않았다.집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오후 5시쯤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고이한이 소예지에게 물었다.“저녁, 나도 같이 먹어도 돼?”소예지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고이한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뒷걸음질로 빠져나왔다.집에 들어가자 양희순이 먼저 물었다.“사모님, 하슬이도 저녁 먹으러 오나요?”“하슬이는 오늘 본가에서 저녁 먹고 거기서 잘 거예요.”소예지는 대답하고 나서 덧붙였다.“오늘 저녁은 한 사람분 더 준비해 주세요.”양희순의 눈이 금세 반짝였다. 누가 올지 짐작한 듯 웃으며 물었다.“고 선생님도 올라와서 드시는 거예요?”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알겠어요. 바로 준비할게요.”양희순은 신이 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어떤 재료가 있는지 떠올리며 고이한이 좋아하는 음식까지 머릿속으로 하나씩 골랐다.소예지는 위층 서재로 올라갔다.저녁 7시쯤 되자 식사 준비는 거의 끝나 있었다. 찜 요리 하나만 마무리하면 됐다.양희순은 위층으로 올라가 소예지에게 말했다.“저녁 다 됐어요. 고 선생님 올라오시라고 할까요?”소예지는 시간을 확인한 뒤 휴대폰을 꺼내 고이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녁 다 됐어. 올라와.][응.]답장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왔다.그때 양희순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제가 오늘 집에 급히 가봐야 할 일이 있어서요. 식사하고 나면 그릇만 주방에 가져다 놓으세요. 내일 아침에 와서 제가 정리할게요.”소예지는 잠시 멈칫했다.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자신과 고이한이 둘만 있을 수 있도록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려는 것이었다.“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소예지가 곧바로 말하자 속내를 들킨 양희순이 조금 머쓱해했다. 그래도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음식만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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