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주차장에서 열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근식이 서 있었다. 가라고 했건만 말도 안 듣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근식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꾸만 몸을 빼려는 여자의 허리를 뒤쪽에서 밀고 있었는데, 그게 보였나 보다.
성진은 구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린 채 어버버 말도 못하는 근식을 지나쳐 그의 차에 여자를 태웠다.
“집이 어딥니까?”
“저기…….”
“주소.”
딱 떨어진 그의 목소리에 여자가 머뭇거리며 주소를 말했다. 시동을 걸고 불러주는 대로 네비게이션에 입력한 성진이 고개를 들었다. 룸미러로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근식이 보였다. 그 모습이 못마땅해 츱, 혀를 찼더니 여자가 움츠러들었다. 또 못마땅해졌지만 그는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그녀의 집은 그 칵테일 바에서도, 그의 사무실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차에서 내려서도 머뭇거리는 여자를 재촉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저기…… 이제 정말…….”
“들어가는 것까지입니다.”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폼이 꽤나 불안한 모양이었다. 5층을 알리는 소리가 나자 여자는 한숨을 한 번 더 쉬고는 걸어 나갔다. 성진은 조용히 뒤를 따랐다. 두어 개의 문을 지나친 여자가 문 앞에 바짝 붙더니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띠리릭,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나자 이를 확인시키듯 성진을 돌아보았다.
“들어가세요.”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더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며 손짓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고개를 숙여 인사한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어가다 말고 멈춰 섰다. 지켜보던 성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뭡니까?”
“아, 아니에요.”
아니라고 대답해놓고 한 걸음 물러서는 건 또 뭔지. 성진은 성큼성큼 걸어가 여자를 옆으로 슬쩍 밀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오후의 뜨거운 햇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원룸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난장판이었다. 모든 집기류가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고, 옷가지들은 찢어진 채 흩뿌려져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스르르 자리에 주저앉은 여자를 뒤로하고 성진은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릇도 깨진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의자며 테이블이며 멀쩡한 것이 없었다.
지랄발광을 하셨군.
여자의 반응을 봐선 그녀가 집에서 나온 후에 일이 벌어진 듯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여자가 없어서 뒤엎은 모양이었다.
‘벨렐레레.’
경쾌한 벨소리가 울렸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점점이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한 침대 위에 여자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잡으려는데 여자의 작은 손이 먼저 달려들었다. 액정을 보더니 받지 않고 벨소리를 죽여 버리는 걸 보면 그 호로개잡놈인 것 같았다.
“받아보시죠.”
“아니에요. 이제…… 들어온 거 보셨으니 그만…….”
또다시 밀어내는 여자 때문에 성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기 이런 꼴을 보고 이제 그만 가라? 그 호…… 놈이 다시 오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여자를 보며 성진은 으르렁거리듯 낮게 욕을 내뱉었다.
“내가 뭐 정의의 사도 그런 건 아니지만, 아가씨. 이 모양이 된 집구석에 언제 다시 찾아 올 지 모르는 개새끼를 냅두고 그냥 가는 쓰레기는 더더욱 아니란 말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숨 밖에 안 나오는 풍경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지금쯤 근식이 사무실에 도착해 주둥이를 털고 있을 터였다.
츱, 가볍게 혀를 찬 성진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근식이냐? 오늘 일 많아?”
-아닙니다요, 형님. 오늘은 정 이사 하나 있습니다, 형님. 내일은 불금이라 문 의원네 다섯이랑 강 회장네 둘, 한 이사네 둘 요렇게 있는데요, 형님.
“정 이사면…… 이번에도 골프장인가?”
-네, 형님.
성진은 잠시 고민했다.
“오늘은 늬들끼리 갔다 와야겠다.”
-네, 형님.
“보안 신경 쓰고.”
-네, 형님. 걱정하지 마십쇼!
우렁찬 대답소리가 썩 미덥지는 않았지만 수고해라 한 마디 던지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저, 그런데 형님. 아까 그 분…… 형수님 되실 분입니까?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헛웃음이 났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라 인정사정없이 종료버튼을 누르고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멀쩡한 게 없어 보이지만…… 당장 급하게 쓸 만한 것만 챙기십시오.”
“네?”
“내 집으로 다시 갈 겁니다.”
“하지만…….”
“여기 있을 겁니까?”
성진은 보란 듯이 주변을 눈짓했다. 여자의 시선도 그를 따라 주변을 향했다.
“오후에 나와서 아침에 들어갑니다. 안 들어갈 때도 많습니다. 보셨겠지만 넓어서 크게 불편할 일 잘 없을 겁니다.”
성진은 망설이는 여자를 재촉해 짐을 싸게 했다. 깨지거나 부서진 잔해 틈에서 기특하게 살아남은 화장품과 찢어지지 않은 옷가지 몇 개를 챙기는 것까지 지켜보고는 뒤돌아서서 현관문까지 나와 기다렸다. 여자는 그 뒤로도 한참을 꿈지럭거렸다.
“멀었습니까?”
“아니요, 다 됐어요.”
목소리와 함께 쇼핑백 두 개를 든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갑시다.”
여자의 뒤로 현관문을 닫는데, 벨렐렐레 아까의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성진은 여자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들었다. 액정에 뜬 이름은 ‘내 남자’였다.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쳐맞고도 내 남자인가? 말리려 손을 뻗는 여자를 무시하고 전화를 받았다. 연결되자마자 남자의 욕설이 쏟아졌다.
-이 씨발년아! 너 어디야? 어디 갔었어? 여태 누구랑 뭐 했어! 얼마나 더 쳐맞아야 정신 차릴 건데?
“이 개 호로 잡놈의 씨발 새끼야. 병신 같은 새끼가 어디 여자를 패고 이렇게 당당해? 넌 어딘데? 씨발, 뒈지고 싶지 않으면 지금 있는 곳 대.”
성진의 묵직한 욕설을 들은 상대편이 조용해졌다.
“안 들려? 불라고, 이 좆만한 새끼야!”
띠릭, 전화가 끊어졌다. 웃음이 났다. 쫄았네, 병신 새끼. 그는 잔뜩 얼어있는 여자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성큼성큼 걸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3층에 멈춰있던 엘리베이터라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스르르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서 1층 버튼을 눌렀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여자가 보였다.
“안 갑니까?”
“저기…….”
스르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때문에 성진은 열림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러야 했다.
“하, 진짜!”
답답하게 구는 여자에 난데없이 얻어먹은 욕설, 이 모든 상황이 주는 짜증에 성진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여자가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민서는 보조석 바닥에 내려놓은 쇼핑백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휙휙 지나가는 창 밖 풍경을 쳐다보기도 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도 한참 쳐다보았다. 그녀는 불편했다. 남자가 말이 없어 더 불편했다. 차에 타고 난 후로 단 한 마디 없이 운전만 하고 있는 남자를 곁눈으로 힐끔 쳐다보았다.
말이 많지 않은 손님이었다. 이런저런 신변잡기적인 얘기들로 대충이나마 성향을 파악할 수 있던 다른 손님들과는 달리, 칵테일 취향 외의 것은 알 수 없던 손님이었다. 명함도 남기지 않아 이름조차 모르는 손님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차에 타고 있다는 것이 불안했고, 곧 그의 집에 가게 될 거라는 게 더 불안했다.
그 굴욕적이고 비참했던 섹스 뒤에 골아떨어진 근태 옆에서 한참을 울며 떨어야 했다. 이런 취급까지 받아가며 살아야 하나, 죽어버리는 것 외에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내가 죽고 나면 이 남자는 죄책감 같은 걸 느끼기나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죽을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왔었다. 그 곳에서 이 남자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살려준 것이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재워준 것도 고맙지 않았다. 집까지 데려다 준 것도, 난장판이 된 집을 보고 아무 말 하지 않은 것도, 자기 집으로 가자 한 것도 전혀 고맙지 않았다. 다만 근태에게 욕을 해준 것이, 그녀의 편을 들어준 것은 고마웠다. 무서웠지만 고마웠다. 그래서 불편하고 불안하고 무서운 것을 참을 수 있었다.
다시 눈동자를 굴려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30대 중반 쯤 되었을까? 정면을 주시하며 운전만 하는 남자는 커다란 덩치에 비해 곱게 생긴 얼굴이었다. 다만,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오른쪽 눈썹 위에서 눈꼬리쪽으로 이어지는 흉터가 강한 인상을 풍겼다. 눈매도 좀 날카로워 보이나? 민서는 남자를 힐끔거리던 것을 그만두고 무릎 위로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근태에게 주먹을 날리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큰 키와 넓은 어깨가 주는 위압감, 권태로운 듯하면서도 날카롭던 눈빛, 커다란 덩치임에도 놀랄 정도의 민첩한 움직임. 그 때 이 남자가 뭐라고 했더라. ‘남자 보는 눈 좀 길러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하주차장.
남자는 차에서 따라 내리는 민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서는 순간 흠칫거렸다.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뭐지? 악수하자는 건가? 손을 잡으려는 건가? 그럴 만큼 가까운 사이거나 호감을 나누는 사이도 아닌데 왜 갑자기? 그녀는 얼떨결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바짝 긴장해 있는 손을 흘깃 내려다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가져갔다. 아, 두 개니까 하나 들어준다는 거였구나. 괜히 놀랐네. 민서는 앞서 걷는 남자 뒤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따라 걸었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라던가 ‘가방 하나 주세요’라고 한 마디 말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텐데. 어지간히도 말이 없는 남자였다. 입술을 비죽이던 민서가 왼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오른손으로 옮겨 들었다. 그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으악, 왜 하필 저걸 들고 간 거야!
난장판이 된 원룸 안에서 멀쩡한 옷들을 발굴하듯 먼저 챙기고 나서 뒤집어진 속옷 서랍을 챙겼었다. 해서 남자가 들고 있는 종이가방 제일 위쪽엔 검은색 레이스 브래지어가 얌전히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가방 속에는 잡다한 것들 뿐. 손잡이 끈을 묶어서 여며놓긴 했지만, 남자가 들여다보기만 하더라도 그 정체를 알아채는 데 어려움이 없을 터였다. 어으, 내가 진짜 못 살아. 남들한테 보여선 안 되는 모습만 골라서 보이고 있네, 정말.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벌써 저만치 가버린 남자 뒤로 종종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작가입니다. 이제 둘이 같이 삽니다. 흐흐......
“자, 잠깐만요.”민서가 몸을 빼보려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등에 가로막혔다. 손등에 비벼지는 입술 감촉에 어색해하는데, 그가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스스로 틀어막은 입에서 놀란 비명소리가 눌려 나왔다.“보지 마라, 동혁아.”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끔거리던 동혁이 근식의 낮은 경고에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네, 형님.”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몸도 마음도 뜨거운 20대 초반의 남성에게는 다소 무리가 있는 주문이었다. 그가 존경해마지않는 큰형님의 애정행각이었다. 성진의 취한 모습도 처음 보지만 여자와 스킨십하는 것도 처음 보는 동혁이었다. 그는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솔직히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큰형님의 품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의 형수님이었다. 룸미러의 각도로 볼 수 있는 건 성진의 뒤통수와 민서의 머리 위쪽 정도였다. 하지만 거칠어진 성진의 숨소리와 민서가 놀라는 소리, 성진이 작게 속삭이며 민서에게 애원하는 목소리는 너무 자극적이어서 자꾸만 룸미러에 시선이 갔다.“키스하게 해줘.”맞닿은 성진의 몸이 뜨거웠다. 그는 계속해서 민서의 손등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민서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민서야. 제발……”‘그쪽’도 아니고 ‘민서 씨’도 아닌 ‘민서야’였다. 간절하게 애원하는 속삭임에 그녀는 흔들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끌어내렸다.“아프게 하지 않을게. 약속해.”입술을 막고 있던 민서의 손이 치워지고, 성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커피향이 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민서는 눈을 감았다.나는 이 남자와의 키스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아닌 척 했지만 이 남자에게 끌리고 있었나보다. 나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존댓말을 쓰면서 거리를 두며 나를 배려해주는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나보다.눈물이 민서의 볼을 타고 흘렀다.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핥았고,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혀를 내밀어 그의 혀를 살짝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성진은 차 뒷좌석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곧 도착입니다, 형님.”“그래.”근식은 룸미러로 성진의 모습을 확인하고 씩 웃었다.황 회장과의 만남이 길어지면서 조금 예민해진 성진이었다. 워낙 성진을 예뻐하는 황 회장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고객들 중 하나였다면 진즉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고간 이야기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성진도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민서가 일하는 바로 가면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 본 적이 없었다.“황 회장님의 제안은 거절하시면 안 됩니다.”“알아.”“아시면서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형님?”“글쎄다. 영 내키지가 않네. 동혁이한테서 연락은?”“별 일 없다고 합니다. 좀 시끄러운 손님들이 와서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 말고는 괜찮답니다.”성진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손님이 적은 한적한 가게라서 민서가 여유롭게 일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는데,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니 마음에 들지 않은 거였다.곧 차가 멈췄고 성진이 내렸다. 골목에 위치한 바 앞은 한적했다. 그는 거침없이 걸어가 바의 출입문을 열었다.“야, 애 죽겠다, 그만 먹여!”“먹고 죽어, 새끼야!”문이 열리자마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하나에 남자 넷 여자 하나. 바에 동혁과 남자 하나. 그는 빠르게 매장 내부의 인원을 파악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민서가 그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어서오세요. 오늘은 늦으셨네요, 손님.”“일이 있어서.”성진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는 민서 앞에 앉았다. 바에 상체를 기대고 서 있던 남자가 성진을 보았다. 30대 중후반 정도의 늘씬한 남자였다.“민서 씨, 이거 차별 같은데? 이 손님은 왜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거야?”“단골이시거든요.”“나도 자주 오잖아. 나도 단골 해주고 반갑게 말 걸어달라고.”“자주 오시는 건 맞는데 우리 사장님 만나러 오시는 거잖아요. 우리 단골손님이랑 비교가 되나요.”“이거 서운한데?”“음, 저한
***성진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원체 그의 체력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민서가 매일 서투르게나마 상처를 소독해주었고, 단백질 위주의 건강에 좋은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수발은 근식의 몫이었다. 사무실과 병원, 성진의 아파트를 오가며 각종 약들과 보양식을 갖다 바쳤다.“빨리 나으십쇼, 형님. 혼자 하려니 죽겠습니다.”“엄살은. 내가 발 빼고 너 혼자 해도 되겠는데?”“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아시죠? 황 회장이 형님을 얼마나 찾는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양 전무 같은 경우에는 형님 없이는 못 맡기겠다고, 형님 복귀하면 연락 달라고 합디다.”“츱, 까탈스런 영감탱이들.”근식이 입혀주는 수트 재킷 단추를 여미며 성진이 혀를 찼다.“황 회장님이 급하신 모양이더라고요, 형님.”“그 양반이 급하거나 말거나.”시계를 차고 지갑을 챙긴 성진이 방을 나와 현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근식이 소지품을 챙겨와 그 뒤를 따랐다.“그래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형님. 황 회장님이 그래도 제일 큰 고객인데 말입니다, 형님.”“시끄러워.”“그러지 마시고, 형수님한테 가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만 황 회장님 얼굴 보고 갑시다, 네?”계속해서 졸라대는 근식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 태도에 성진은 걸음을 멈추고 근식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뭐냐?”“뭐가요?”“그 영감이 뭐라 그래? 또 지랄맞게 굴어?”근식의 눈동자가 슬며시 옆으로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성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런 거 없었습니다. 워낙 그 양반 성격이 불같아서 그러지요. 일처리 느린 거 못 견뎌하시는 분이잖습니까.”“지금 간다고 연락해.”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마디 뱉은 채 걸음을 옮기는 성진의 뒤에서 근식이 쾌재를 불렀다. 성진이 직접 움직인다고 하니 일이 쉬워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성진은 이상할 정도로 나이 많은 고객들에게 잘 먹혔다. 지금은 저렇게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틱틱거리지만, 막상 고객 앞에서는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할 것이었다. 깍듯
성진이 자세한 설명을 피하는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한 민서는 그가 자신을 보면서 웃자 흠칫 놀랐다.아니, 왜 웃고 그러세요. 그쪽이 깡패라는 것만으로도 불법적인 일 한다는 걸 다 설명하신 거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말 옮기는 일 같은 거 안 하니까 그만 쳐다보세요.어색해진 민서가 바쁜 척 손을 놀렸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나 힐끔힐끔 성진을 확인했다.“큰일이다, 민서 씨. 저 사람, 민서 씨한테 관심있나봐.”카페 사장이 민서 쪽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인 채 속삭였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그냥 깡패 아니라 되게 위험한 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혼자 있을 때 저런 손님 들어오면 무섭잖아.”“위험한 손님 아니에요. 오히려 진상 손님을 두 번이나 쫓아내주셨어요.”민서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카페 사장이 ‘그래?’ 하며 놀라더니 성진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성진은 두 사람을 지켜보다 미간을 좁혔다. 두 여자가 서로 속닥거리다가 자신을 보며 웃는 모양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빨리 마시고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민서에게 또 뭐라 속삭이고는 까르르 웃었다.“그러지 마세요, 손님. 전 당분간 누굴 만나거나 할 생각이 없어요.”“어머, 왜?”“그냥…….”여자가 손을 뻗어 민서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민서의 표정이 난처한 기색으로 바뀌었다.마음에 안 들어.그는 다시 블랙 러시안을 들이켰다. 독한 알콜이 목구멍을 태울 듯 덥히고 넘어갔다.“그럼 나 섹스 온 더 비치 말고 다른 거 추천해줘요.”여자가 빨대로 남은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얼음만 남은 빈 잔을 내밀었다. 민서는 잔과 코스터를 수거하고는 메뉴판을 꺼냈다.“이거랑 이것처럼 이름이 섹스 온 더 비치같이 좀 선정적이다 하는 칵테일이 보통은 달콤해서 마시기 좋아요.”“그러다 훅 가고?”여자가 민서에게 윙크를 날렸고, 민서는 손가락 총을 쏘았다.“그렇죠.”“흐응, 궁금하네.”
구석자리에 숨어서 애정행각을 벌이던 커플이 나가고 민서가 테이블을 치우고 돌아오는데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손님이 없으니 일찍 문 닫고 집에 가자고 하려던 성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만을 표했다.“어서오세요.”여자는 민서의 인사에 환하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한 후 성진의 옆자리에 앉았다.“원래 이 시간에 오면 손님이 없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두 분이나 계시네요?”“다른 손님이 없을 때 주로 오셔서 그래요. 오늘도 같은 걸로 드릴까요?”“네. 섹스 온 더 비치로 주세요.”자주 오는 손님인지, 여자와 민서는 살갑게 안부를 주고받았다.“가게 문 닫고 나서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날이 있어요. 술 한 잔이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 사람도 없고, 사람들 바글바글한데서 혼자 청승 떨기 싫은 그런 날이요. 그런 날엔 여기서 칵테일 한 잔 마시는 게 최고더라고요. 그리고 이왕 마시는 거 맛있는 걸로 마셔야죠.”“원래 혼술하러 오시는 분이 많아요. 조용히 한두 잔씩 드시고 가시고요.”허리케인 글라스에 얼음을 담으며 여자의 넋두리 같은 말에 민서가 웃었다. 쉐이커에도 얼음을 담는 민서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성진 쪽으로 여자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동네에선 못 보던 분이시네요. 안녕하세요,”“아, 네.”“근처에 사시나요? 이렇게 근사하게 생기신 분인데 제 기억엔 없어서요.”“아니요.”“댁이 어디신데요?”“……닥산동입니다.”“어머, 멀리도 오셨네요? 근처에 볼일이라도 있으셨나봐요.”“……직장이 근처라.”“어머어머, 무슨 일 하시는데요?”보드카에 이어 오렌지 주스를 쉐이커에 붓던 민서가 눈을 들어 두 사람을 힐끗 보고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혼자서 칵테일 마시러 오는 손님들 중에 가장 빨리 친해진, 붙임성 좋은 카페 사장이었다. 말 수 적은 성진이 귀찮아하는 것이 민서에게는 너무나 잘 보이는데, 손님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깡패입니다.”카페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민서는 ‘쿡’ 짧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민서가 성진과 심상치 않은 사이임을 넌지시 내비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민서를 포기하지 못한 듯, 시덥잖은 농담을 계속해서 던졌다. 민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걸 본 남자의 일행이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내가 뭐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란 말이지.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 법이거든. 가끔 특식도 먹고 말이야. 맛없는 것도 가끔 먹어 줘야, 아! 원래 먹던 게 맛있는 거구나 하고 깨닫기도 한단 말이지.”“그런가요? 전 맛없는 건 굳이 찾아먹지 않는 편이라서요.”“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먹어봐야 아는 것 아니겠어요?”능글맞게 웃는 남자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어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부글부글 속을 끓이고 있던 성진이 참지 못하고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어린놈이 말이 짧네.”앉아있는 성진을 아래위로 훑은 남자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툭 내뱉은 말에 성진의 뒤에 서 있던 동혁이 발끈했다. 성진이 손을 들어 동혁을 말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파리한 안색으로 앉아있는 성진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성진의 생김새도 남자의 생각에 힘을 보냈다.하지만 정면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성진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오른쪽 눈썹 위에서 눈꼬리까지 이어지는 칼자국이었다. 조금이라도 옆으로 비껴 지났다면 실명했을지도 모를 위험한 흉터였다. 그리고 구부정하게 앉아있을 때는 몰랐던 성진의 넓은 어깨와 큰 키에 위압감을 느꼈다.“그쪽도 예절이 썩 훌륭하지 않더라고.”남자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낭패였다. 작고 여리여리한 민서가 사귀는 남자래야 대단할 게 없다 생각했다. 자신이 민서에게 추근덕거릴 때 옆에서 조용히 지켜만 보기에 배알도 없는 놈인 줄 알았다. 덩치 큰 놈이 형님이라 깍듯하게 칭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옆얼굴이 곱상해 만만한 상대라는 오판을 하고 말았다.“아니…… 그게 아니라…….”성진이 남자에게 한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