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평소보다 손님이 적은 편이었지만, 자정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새 손님이 들어왔다.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민서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아는 척을 하는 남자는 제법 낯이 익었다. 일행과 뭐라 말을 주고받으며 테이블이 아닌 바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가게도 작고 바텐더도 하나뿐이고…….”
남자의 일행은 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통찮은 표정이었다.
“가게는 작아도 칵테일이 괜찮아. 바텐더 아가씨도 예쁘고 조용하니 좋기만 하구만 괜히 궁시렁거리긴.”
남자는 메뉴판을 받아들며 민서에게 슬쩍 윙크를 날렸다. 마주 웃어주는 민서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일행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메뉴를 뒤적였다.
30대 중반 정도? 흐트러지긴 했지만 둘 다 수트 차림이었고, 전작이 있었던 듯 얼굴이 약간 붉었다.
“난 러스티 네일. 너는?”
“아무거나.”
일행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덮으며 대답하자 남자는 눈을 살짱 찡그렸다.
“아무거나는 무슨. 그런 메뉴는 없거든? 이 친구는 마티니로 주세요.”
“네, 손님.”
웃는 얼굴로 메뉴판을 받아든 민서는 올드 패션드 글라스를 꺼냈다. 얼음 서너 조각을 넣고 스카치 위스키 병을 집어들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지거를 끼고, 간결하고 세련된 움직임으로 용량을 재 얼음 위로 술을 붓는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던 남자의 일행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 쇼는 안 합니까?”
“네?”
“거 있잖아. 막 흔들고 돌리고 던졌다가 받으면서 춤도 추고.”
드란부이를 위스키와 동량으로 넣고 바스푼의 긴 손잡이를 집던 민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요새 많이들 좋아하시더라구요. 화려하죠, 칵테일 쇼. 그런데 그런 쇼를 보여주는 바텐더들을 플레어 바텐더라고 따로 불러요.”
“아가씨는 그런 거 못하나? 하다못해 요래요래 막 흔드는 거라도 해봐요. 그렇게 얌전히 따르지만 말고.”
자꾸만 귀에 들리는 ‘아가씨’ 호칭이 거슬렸지만 민서는 웃었다.
“여기 주문하신 러스티 네일입니다. 주문하신 마티니는 보통 저어서 만드는데, 흔들어서 만들어 드릴까요, 손님? 맛이 좀 달라지긴 하지만……, 손님. 혹시 사과향 같은 과일향 좋아하시나요? 괜찮으시다면 주문하신 마티니와는 좀 다른 칵테일이긴 하지만 애플 마티니로 준비해드릴까요? 그건 흔들어 만들거든요.”
바스푼으로 잘 저어 완성된 러스티 네일을 손님 앞으로 내어놓은 민서는 얼굴 옆에서 두 손을 맞잡고 애교스럽게 흔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남자들은 기분 좋게 웃으며 동의했다.
그녀는 쉐이커에 얼음과 보드카, 애플 리큐르와 라임주스를 계량해 넣으며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지켜보는 두 남자 앞에서 자연스럽게 쉐이커를 결합시키고는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달그락달그락 쉐이커 안에서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어우, 아가씨 팔 힘 좋네.”
일행이 요상한 방향으로 팔을 흔들며 민서를 흉내 내며 웃자, 남자가 팔꿈치로 일행을 툭 쳤다.
“왜, 칭찬이잖아.”
칭찬이긴 하지. 그 묘한 표정과 시선을 뺀다면. 민서는 칠링으로 차가워진 칵테일 글라스에 얼음을 버리고 애플 마티니를 채워 넣었다. 얇게 썬 사과조각을 위에 띄우고는 손님 앞에 내려놓았다.
“애플 마티니 완성되었습니다, 손님.”
바 너머에서 저들끼리 낮은 목소리로 티격대는 걸 일별한 민서는 사용한 기구들을 씻어 정리했다. 오늘은 유난히 보드카 베이스 칵테일이 많이 나갔네. 이것저것 정리하며 바닥을 보이는 보드카 병을 집어드는데 남자의 일행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가씨, 이거 한 잔 더 줘봐. 이 친구 것도 한 잔 더 주고.”
잔에 남은 사과 조각을 손으로 집어먹으며 남자의 일행이 눈을 찡긋거렸다. 눈빛으로 남자의 의사를 확인한 민서는 미소로 대답하고는 러스티 네일과 애플 마티니를 한 잔씩 더 만들었다. 빈 잔과 코스터를 회수하고 새 코스터와 완성된 칵테일을 내주었다.
“아가씨가 여기 사장이야? 직원도 안 두고 혼자 일하는 거야?”
“제가 직원입니다, 손님.”
웃으며 대답하는 민서를 빤히 쳐다보던 일행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아가씨 여기서 한 달에 얼마 벌어?”
“그건 영업비밀인데요, 손님.”
농담으로 대답하는 그녀를 향해 남자의 표정이 은밀해졌다.
“얼마 버는지는 모르겠지만 모자라지 않아? 투잡 뛰어볼 생각 없어?”
민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남자의 시선과 태도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손님 앞에서 기분 나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바텐더는 손님과 갈등을 빚으면 안 된다고 배웠다. 전에 일하던 바에서는 매니저가 있어 추근대거나 시비를 걸어오는 손님을 상대해주었다. 이런 손님을 대할 때면 새삼스럽게 자리를 비운 사장이 원망스러워졌다.
“글쎄요, 손님. 저는 딱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요.”
남자가 일행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야, 너 취했냐? 왜 이래?”
“외로워서 그런다, 외로워서.”
“제수씨 알면 큰일 날 소리!”
“시끄럽고, 생각 있으면 전화해요. 왜, 여자들 그럴 때 있잖아. 갖고 싶은 게 생겼는데 사려니 부담스럽고 그럴 때.”
“야!”
남자가 발끈했지만, 그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민서에게 건넸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명함을 받아 따로 빼어놓은 보드카 병 옆에 내려놓았다.
그 후로도 두 남자는 계속해서 칵테일을 추가해 마셨다. 일행의 은근한 추파도 계속되었다. 젊은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한다. 몇 달 전까지 만나던 스물아홉 아가씨가 있었는데, 지난주에 결혼을 해서 보내줬다. 그래서 지금은 혼자인데, 자기랑 만날 생각은 없는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 쓰는 걸 아끼지 않는 편이다. 유명 탤런트와 닮았다는 소리 자주 듣는데, 진짜 그런가?
다른 손님들은 다 떠나고 그 둘만 남았다. 이제 슬슬 일어나줬으면 좋겠는데……. 민서는 흘깃 시계를 보았다. 2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일행이 시계 쪽을 보고는 씩 웃었다.
“아가씨, 끝날 시간 됐지? 저기 앞에서 술 한 잔 할래? 이 자식 보내고 둘이서.”
민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도저히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남자는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자식 왜 그래? 괜히 데려왔나 보다. 야, 너 일어나. 미안합니다, 바텐더 아가씨. 원래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술버릇이 고약해졌네요.”
남자는 황급히 계산을 마치고, 놓으라고 버럭거리는 친구를 질질 끌고 가게 밖으로 사라졌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민서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보드카 병 옆에 내려놓았던 그 남자의 명함을 집어 들었다. 잠시간 노려보던 민서는 펜을 들어 명함 뒷면에 몇 글자 적었다.
‘개진상.’
흥, 가볍게 콧방귀를 뀐 민서는 바 위에 놓인 빈 잔들과 코스터를 정리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뒷정리 정도는 다음날 조금 일찍 와서 해도 되지만, 그녀는 꼼꼼하게 마감을 했다. 낮에 집 앞에서 보았던 근태의 차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다.
가게 문을 잠그고 나왔을 때가 새벽 3시. 민서는 무거운 걸음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아니야. 그 때가 언젠데. 행정고시를 준비하려면 1분 1초도 아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던 근태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막상 집 앞 골목을 나서려니 발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내밀어 원룸 건물앞 주차장을 훑었다. 없지? 없을 거야. 없어야 맞는 거지. 과연 그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좀 거리가 있는 주차공간까지 둘러본 뒤에야 민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불안해하면서 피해 다녀야 하는 걸까.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로가 배로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렸다. 습관적으로 현관문 앞에 바짝 붙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열었다. 그동안 갇혀있던 안의 공기가 왈칵 밀려왔다. 익숙한 냄새와 분위기가 주는 안도감에 눈이 절로 감겼다.
턱.
갑작스런 마찰음에 번쩍 눈을 뜬 민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그녀는 문 안쪽으로 확 밀려 넘어졌다.
***“하아, 하아, 오빠 조금만 천천히.”숨넘어가는 소리로 애원하는 여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진은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과 살이 맞부딪치며 나는 ‘탁탁’ 소리의 박자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밀어붙이는 남자의 힘에 흔들리는 여자는 애타게 오빠를 부르짖었다.“오, 오빠. 잠깐, 아흑, 오빠. 오빠…….”짧은 숨소리와 함께 성진은 여자의 질 안으로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절정감에 몸을 움찔거리며 더 깊이 여자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사정이 끝나 시들해지는 성기를 여자에게서 빼내고는 몸을 일으켰다.뒤처리를 하려는 그의 손을 여자가 슬며시 잡았다.“빨아줄까?”“됐어.”아쉬운 듯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여자였지만, 그는 티슈를 뽑아 축축하게 젖어있는 그의 물건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오빠, 무슨 일 있어? 요새 이상해.”“뭐가?”“스타일이 변했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들 체위는 바꿔도 스타일은 잘 안 바뀌는데 말이야.”성기를 문지르던 손이 멈칫거렸지만, 그는 구겨진 휴지를 바닥에 던지고 벗어놓은 속옷을 집어 들며 물었다.“그래서, 싫어?”“어유, 왜 그래, 오빠. 난 오빠 밖에 없는 거 알면서. 그러니까 나 얼른 데려가 달라고.”달라붙어오는 여자를 슬쩍 밀어내며 벗어놓은 옷을 집어든 그가 피식 웃었다.“웃지만 말고. 이럴 때마다 스리슬쩍 넘어가려는 거, 모를 줄 알아?”다시 달라붙어 콧소리를 내는 여자를 떼어내고 지갑을 꺼내 수표 몇 장을 꺼내 침대 위에 던졌다. 시무룩해지는 여자의 머리를 쓱쓱 문질러 쓰다듬고는 그 곳을 빠져나왔다.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성진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스타일이 변했다는 여자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변하긴 했지. 예전에는 섹스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영 내키지가 않았다. 습관적으로 여자를 찾고 섹스를 하지만, 그 뒷 느낌이 깔끔하지가 않았다.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아무 것도 없던 집에 이제 여자가 있었다
주차장에서 열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근식이 서 있었다. 가라고 했건만 말도 안 듣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근식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꾸만 몸을 빼려는 여자의 허리를 뒤쪽에서 밀고 있었는데, 그게 보였나 보다.성진은 구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린 채 어버버 말도 못하는 근식을 지나쳐 그의 차에 여자를 태웠다.“집이 어딥니까?”“저기…….”“주소.”딱 떨어진 그의 목소리에 여자가 머뭇거리며 주소를 말했다. 시동을 걸고 불러주는 대로 네비게이션에 입력한 성진이 고개를 들었다. 룸미러로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근식이 보였다. 그 모습이 못마땅해 츱, 혀를 찼더니 여자가 움츠러들었다. 또 못마땅해졌지만 그는 액셀레이터를 밟았다.그녀의 집은 그 칵테일 바에서도, 그의 사무실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차에서 내려서도 머뭇거리는 여자를 재촉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저기…… 이제 정말…….”“들어가는 것까지입니다.”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폼이 꽤나 불안한 모양이었다. 5층을 알리는 소리가 나자 여자는 한숨을 한 번 더 쉬고는 걸어 나갔다. 성진은 조용히 뒤를 따랐다. 두어 개의 문을 지나친 여자가 문 앞에 바짝 붙더니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띠리릭,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나자 이를 확인시키듯 성진을 돌아보았다.“들어가세요.”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더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며 손짓했다.“정말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고개를 숙여 인사한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어가다 말고 멈춰 섰다. 지켜보던 성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뭡니까?”“아, 아니에요.”아니라고 대답해놓고 한 걸음 물러서는 건 또 뭔지. 성진은 성큼성큼 걸어가 여자를 옆으로 슬쩍 밀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오후의 뜨거운 햇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원룸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난장판이었다. 모든 집기류가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고, 옷가지들은 찢어진 채 흩뿌려져 있었다.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스르르 자리에
“츱, 대충들 하지.”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야 덩치 큰 남자가 차장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엇, 형님. 벌써 나오셨습니까?”“그러게 키 주고 가라고 그랬지? 새끼가 말도 안 쳐듣더니.”“제이 그년이 어지간히 앵겨들어야 말이지요, 형님. 그래도 그것이 아니다, 어떻게 형님을 혼자 집에 보내 드리냐, 놓아라, 바짓가랭이 찢어진다 탁 뿌리치고 왔지요. 헤헤.”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운전석으로 향하는 근식의 뒷덜미를 잡은 성진이 손바닥을 내밀었다.“시끄럽고. 차 키 내놓고 넌 다시 들어가.”머뭇거리며 주머니에서 꺼내는 열쇠를 낚아챈 성진은 근식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그래도요, 형님 어떻게…….”“시끄럽다 그랬지? 그만하고 꺼져.”머뭇거리는 근식을 뒤로하고 성진은 운전석에 올랐다.“그럼 들어가십시오, 형님!”90도로 고개를 숙이는 근식을 본 성진이 피식 웃었다. 사내새끼들은 죄다 말끝마다 형님, 형님 거리고, 계집년들은 오빠, 오빠 거리는 게 희극적으로 느껴져서였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새벽의 도로에 차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부지런한 사람들 같으니. 말없이 차를 몰던 그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방금 지나친 사람의 실루엣이 지나치게 눈에 익었다. 후진을 해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도로 한 복판에 서 있는 그를 향해 경적을 울리고 지나가는 다른 차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무슨 상관인가 싶어 그냥 출발하려다 츱, 가볍게 혀를 찬 성진이 차를 갓길에다 주차했다. 차에서 내려서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신호등도 횡단보도도 없는 도로 위로 내려선 여자가 보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돌아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천천히 차도 위로 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팔을 잡아채 뒤로 당겼다. 여자는 너무도 쉽게 뒤로 끌려와 성진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미쳤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씨발!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놀란 마음
부딪친 무릎의 통증을 자각할 틈도 없이 머리채를 잡혔다. 그리고 문 닫히는 소리와 잠금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 깡패새끼랑 여태 같이 있다 온 거야?”근태의 목소리도 떨리는 듯했다. 민서는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근태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이거 놔.”“전화도 안 받고, 집에도 없고, 한 시간이나 늦게 들어와?”“이거 놓으라고!”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써보았지만 그의 손은 너무 단단했다.“어쩐지 그 새끼, 가게 근처에 못 오게 하더니……. 가게서 딩굴었냐? 나 피해서 그 새끼한테 가랑이 벌려줬어?”하,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근태가 말하는 그 새끼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함부로 얘기하지 마!”바로 손바닥이 날아왔다. 신발도 채 벗지 못하고 쓰러진 상태에서 맞은 따귀였다. 맞은 쪽 귀가 먹먹하고 볼 안쪽 살이 터졌는지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뭘 잘했다고 쳐 웃고 지랄이야, 더러운 년이.”그는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올라서더니 민서의 머리채를 잡은 채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온 머리가 다 뽑히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카락에 칭칭 감긴 그의 주먹에 매달려야 했다.“좋디? 좋았어? 나 아닌 다른 새끼랑 떡쳐보니 좋았어, 이 걸레 같은 년아?”그는 그녀를 침대 옆에 내동댕이쳤다. 술에 취한 근태도 무서웠지만, 술냄새를 풍기지 않는 근태는 더 잔인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버둥대던 민서는 무릎으로 기었다. 어서 나가서 경찰에 신고를 해야 했다. 큰 도움은 못될망정, 당장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을 터였다. 공포에 질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뚱이가 너무나 원망스러워 눈물이 났다.“어딜 도망가! 그 새끼한테 대주고 나니까 나는 싫어졌나보지?”다시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린 성태가 손바닥을 날렸다. 차진 마찰음과 함께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진 그녀를 향해 버럭버럭
평소보다 손님이 적은 편이었지만, 자정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새 손님이 들어왔다.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민서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아는 척을 하는 남자는 제법 낯이 익었다. 일행과 뭐라 말을 주고받으며 테이블이 아닌 바에 자리 잡고 앉았다.“가게도 작고 바텐더도 하나뿐이고…….”남자의 일행은 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통찮은 표정이었다.“가게는 작아도 칵테일이 괜찮아. 바텐더 아가씨도 예쁘고 조용하니 좋기만 하구만 괜히 궁시렁거리긴.”남자는 메뉴판을 받아들며 민서에게 슬쩍 윙크를 날렸다. 마주 웃어주는 민서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일행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메뉴를 뒤적였다.30대 중반 정도? 흐트러지긴 했지만 둘 다 수트 차림이었고, 전작이 있었던 듯 얼굴이 약간 붉었다.“난 러스티 네일. 너는?”“아무거나.”일행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덮으며 대답하자 남자는 눈을 살짱 찡그렸다.“아무거나는 무슨. 그런 메뉴는 없거든? 이 친구는 마티니로 주세요.”“네, 손님.”웃는 얼굴로 메뉴판을 받아든 민서는 올드 패션드 글라스를 꺼냈다. 얼음 서너 조각을 넣고 스카치 위스키 병을 집어들었다.검지와 중지 사이에 지거를 끼고, 간결하고 세련된 움직임으로 용량을 재 얼음 위로 술을 붓는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던 남자의 일행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아가씨, 쇼는 안 합니까?”“네?”“거 있잖아. 막 흔들고 돌리고 던졌다가 받으면서 춤도 추고.”드란부이를 위스키와 동량으로 넣고 바스푼의 긴 손잡이를 집던 민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요새 많이들 좋아하시더라구요. 화려하죠, 칵테일 쇼. 그런데 그런 쇼를 보여주는 바텐더들을 플레어 바텐더라고 따로 불러요.”“아가씨는 그런 거 못하나? 하다못해 요래요래 막 흔드는 거라도 해봐요. 그렇게 얌전히 따르지만 말고.”자꾸만 귀에 들리는 ‘아가씨’ 호칭이 거슬렸지만 민서는 웃었다.“여기 주문하신 러스티 네일입니다. 주문하신 마티니는 보통 저어서 만드는데, 흔들어서 만들어 드릴까요, 손
다시 요란하게 몸을 떨어대는 휴대폰을 쳐다보며 민서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정말 받고싶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사과부터 할 테지.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느니, 너 없인 못 산다느니, 앞으로 정말 잘 하겠다느니 온갖 사탕발림을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헤어질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매달릴 것이었다. 알았다고, 용서하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을 사람이었다.어떻게 이런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남자 보는 눈을 기르라던 손님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난 남자 보는 눈이 정말 거지같았던 거야.전화는 잠깐 끊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몸을 떨어댔다. 그녀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끝까지 받지 않았다가는 그가 다시 가게로 찾아올지도 몰랐다.“여……보세요.”-민서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걱정했다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 소름이 돋아 그녀는 팔뚝을 문질렀다.“이제 그만하자 그랬잖아. 나 이제 근태 씨 전화 받을 이유 없어.”-민서야.“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다시 얘기할게. 우린 끝났어. 다시는 전화하지도 찾아오지도 말아줬으면 해.”-사랑해, 민서야.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내가 왜 그랬는지는 너도 잘 알잖아.간절함이 뚝뚝 떨어지는 근태의 목소리에 민서는 헛웃음을 지었다.“안다고? 내가? 아니. 난 그딴 이유 같은 거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어. 이제 전화하지 마. 근태 씨 번호 차단할 거야. 찾아오지도 마. 안 만나줄 거니까.”모질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민서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다.-진짜 너 왜 그래?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내가 이만큼 숙이고 들어갔으면 너도 엥간히 해얄 거 아니야.화난 기색이 묻어나는 근태의 목소리에 민서는 웃었다.“미안하다고 하면 끝난 건가? 욕하고 때린 게 없던 게 되는 거야?”-그건 네가…….“술김이면, 홧김이면 때려도 되는 거야? 약 사다주고 꽃 사다주면 때려도 되는 거야?”민서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