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츱, 대충들 하지.”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야 덩치 큰 남자가 차장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엇, 형님. 벌써 나오셨습니까?”
“그러게 키 주고 가라고 그랬지? 새끼가 말도 안 쳐듣더니.”
“제이 그년이 어지간히 앵겨들어야 말이지요, 형님. 그래도 그것이 아니다, 어떻게 형님을 혼자 집에 보내 드리냐, 놓아라, 바짓가랭이 찢어진다 탁 뿌리치고 왔지요. 헤헤.”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운전석으로 향하는 근식의 뒷덜미를 잡은 성진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시끄럽고. 차 키 내놓고 넌 다시 들어가.”
머뭇거리며 주머니에서 꺼내는 열쇠를 낚아챈 성진은 근식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그래도요, 형님 어떻게…….”
“시끄럽다 그랬지? 그만하고 꺼져.”
머뭇거리는 근식을 뒤로하고 성진은 운전석에 올랐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형님!”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근식을 본 성진이 피식 웃었다. 사내새끼들은 죄다 말끝마다 형님, 형님 거리고, 계집년들은 오빠, 오빠 거리는 게 희극적으로 느껴져서였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새벽의 도로에 차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부지런한 사람들 같으니. 말없이 차를 몰던 그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방금 지나친 사람의 실루엣이 지나치게 눈에 익었다. 후진을 해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도로 한 복판에 서 있는 그를 향해 경적을 울리고 지나가는 다른 차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상관인가 싶어 그냥 출발하려다 츱, 가볍게 혀를 찬 성진이 차를 갓길에다 주차했다. 차에서 내려서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신호등도 횡단보도도 없는 도로 위로 내려선 여자가 보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돌아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천천히 차도 위로 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팔을 잡아채 뒤로 당겼다. 여자는 너무도 쉽게 뒤로 끌려와 성진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씨발!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놀란 마음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성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빛 속에서 보인 여자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아…….”
성진을 알아본 건지 여자가 작게 소리를 냈다. 역시나 그 바텐더였다. 이것저것 자꾸 말을 걸어오는 다른 곳의 바텐더와는 달리 그를 조용히 내버려둘 줄 아는 바텐더. 그는 여자의 팔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얼굴뿐 아니라 편안한 복장 아래 드러난 피부가 울긋불긋했다.
“뭡니까?”
그의 질문에 여자가 당황한 모습으로 머리를 쓸고 옷매무새를 챙겼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죄송합니다.”
“츱, 뭐가 죄송합니까?”
못마땅한 그의 목소리에 여자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노, 놀라게 해드려…….”
“시끄럽고. ……집이 어딥니까?”
시계를 들여다보며 질문을 던졌지만, 여자는 답이 없었다. 성진은 슬슬 짜증이 나려는 걸 누르며 다시 물었다.
“집이 어디냐고요.”
“……지, 집은 안돼요. 집으로 갈 수 없어요!”
도리질까지 치며 뒤로 물러나는 여자의 팔을 다시 잡았다.
“그냥 가세요. 이제 안 그럴 거예요. 신경 쓰지 마시고…….”
성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몰골을 보니 집에 그 때의 그 호로 잡놈의 새끼가 있는 것 같았다. 여자의 몰골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것도 그 놈이겠지. 가게 주변을 얼씬대지 말랬더니 집으로 찾아간 모양이었다. 세상 그 누구도 그의 탓이라 하지 않을 테지만 그는 죄책감이 들었다.
“달리 갈 데가 있습니까?”
“이, 있어요. 신경 쓰지 마시고…….”
“데려다 드리죠. 거기가 어디입니까?”
여자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성진은 여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갑시다.”
“아니예요. 그냥 가세요. 제가 알아서 갈 수 있어요.”
“갈 데도 없잖습니까! 방금 죽으려 했던 거잖아요! 사람을 바보로 압니까? 시끄러우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갑시다!”
그가 소리 지를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이 잡은 손을 통해 느껴졌다. 다시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말없이 쳐다보고 있자 망설이던 여자가 성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녀를 차 보조석에 태웠다. 가타부타 설명 없이 차를 출발시켰지만 여자는 어떤 항의도 물음도 없이 잠자코 앉아있었다.
여자의 침묵은 성진의 아파트 현관 앞에 이를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물어보지도 않는데 주절주절 떠드는 취미는 없는지라, 성진도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현관문을 열기 전에 설명은 해주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내 집이고, 아무도 없습니다. 당장 갈 데 없어보여서 데려온 거지 딴 생각하고 데려온 거 아니니까 겁먹지 맙시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를 보며 성진은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말았다.
일찍 찾아온 아침에 밖은 제법 밝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아파트 안은 어두컴컴했다. 현관에 멀뚱히 선 여자를 뒤로하고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선 성진이 커튼을 젖히자 집 내부가 조금 밝아졌다. 제법 넓은 거실에 소파 하나 덜렁 놓인 퀭한 공간이었다.
겁먹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성진의 모습이 보였다. 괜히 움츠러드는데, 여자를 지나쳐 주방으로 간 그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꺼내 그녀에게 휙 던졌다. 반사적으로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물병은 현관 바닥을 딩굴었다.
츱, 짧게 혀를 찬 성진은 다른 병을 꺼내 마셨다. 반쯤 남은 물을 다시 냉장고에 넣고 문을 닫으려는데, 생수병과 맥주캔으로만 속을 채운 냉장고 안이 눈에 들어왔다.
츱, 신경 쓰이네. 뭐, 알아서 하겠지.
성진은 아직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쭈뼛거리고 서 있는 여자에게 못마땅한 척 한 마디 던졌다.
“신발, 벗겨드려야 합니까?”
“아니에요. 드, 들어갈게요.”
여자는 후다닥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 기니까 거기서 자요. 이불 필요합니까?”
“아니요.”
찢기고 부어오른 여자의 얼굴이 그를 향했다. 저대로 두기엔 뭔가 찝찝한데. 집에 약이나 반창고 같은 것들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봤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다치고 찢어지는 경우는 많았지만, 웬만한 것들은 그냥 내버려뒀고,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단골 병원으로 가서 처치했기에, 집에서 뭔가 했던 기억이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방에서 티셔츠와 반바지, 필요 없다던 이불까지 들고 와 소파 위에 툭 던졌다.
“화장실은 저 쪽.”
그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 성진은 ‘그럼 쉬시길.’ 짧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대충 씻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방 밖에서 조심조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한 짓을 한 것 같았다. 언제부터 자기가 남의 사정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맞고 사는 여자들은 많았다. 굳이 과거의 기억을 들추지 않더라도 말이다. 관리하는 계집년들 중에서도 손님한테 맞고 징징거리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던가. 물론 그런 손님은 따로 리스트를 만들어 받지 않고 있지만.
죽겠다 악쓰는 사람들도 많았다. 빌려간 돈을 못 갚겠다며 차라리 죽이라고 대갈통을 들이밀던 놈들이 얼마던가. 목 메고 죽은 놈들도 여럿이고, 한강으로 뛰어든 놈도 몇 있었다. 일이 터질 때는 직접 죽기 직전까지 사람을 두드려 패기도 했다.
그런 주제에 안면 좀 있다고 죽으려는 사람을 주워서 집까지 데려오다니. 이 무슨 안 어울리는 짓이람.
일상의 피로감과 정사 후의 노곤함, 오랜만에 직접 운전한 데에서 오는 피로 덕분에 생각이 많았지만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2시가 되자 핸드폰 알람이 울었다. 손으로 몇 번 더듬어 핸드폰을 뒤집어 알람을 끈 성진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을 두어 번 내쉬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기운을 떨칠 틈도 없이 문을 열고 화장실로 향하려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생각 없이 나왔다가 평소와 달리 환한 거실이 눈부셔서 당황한 것이다. 늘 쳐놓았던 암막커튼이 왜…….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린 채 커튼을 치러 움직이다 다시 멈췄다. 소파 위에 얇은 이불을 덮고 웅크려 누운 여자가 보였다. 아, 짧게 소리를 낸 그가 조용히 뒤돌아 방으로 돌아갔다.
“츱, 성가시네.”
혼자 사는 집에서 속옷 따위를 챙겨 입는 습관 같은 걸 들인 적이 없는 그였다. 때문에 잠들기 전 씻고 벗은 채로 잠들었기에, 현재 그는 알몸이었다. 여자가 깨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랄까? 여자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 싫다던 그녀를 강제로 데려온 게 그였지 않나. 옷장을 뒤적여 속옷과 셔츠를 꺼내 입고 바지도 입었다.
다시 나간 거실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엉망이던 얼굴에서 그나마 핏자국이 없었다. 붓기도 제법 가라앉은 듯했다. 그가 갈아입으라고 건넸던 옷은 그대로 소파 귀퉁이에 얌전히 개어져 있었다.
혹시라도 깨울까 싶어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서둘러 수신거절을 누르고 살피는데, 천천히 눈을 뜨는 여자가 보였다. 흐릿한 눈빛이었지만 몇 번 깜빡이더니 또렷해졌다. 시선이 마주쳤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성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왜?”
-언제 나오십니까요, 형님? 집 앞입니다.
여자가 눈을 몇 번 더 깜빡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고 옷차림을 확인하고 머리를 매만지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알아서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어제 가실 때도 혼자 운전해 가셨지 말입니다요, 형님. 어떻게 제가 또 형님께 운전하시라고 그러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내려오십쇼, 형님.
“츱, 가라고.”
짧게 혀 차는 소리에 전화기 너머 근식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앞의 여자가 움찔거리더니 덮고 있던 이불을 주섬주섬 개는 모습도 보였다. 일타이피. 피식 웃음이 났다.
-예, 형님. 이따 뵙겠습니다.
대꾸 없이 핸드폰을 내렸더니 여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제…… 아니 오늘 감사했습니다. 신세는 조만간 갚을 게요. 그럼…….”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는 모습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강아지 같았다.
“어떻게 가려고?”
“네?”
“여기 닥산동입니다. 어제 거기까지 걸어가긴 무리일 텐데요.”
“아…….”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여자를 지나쳐 화장실로 향하며 성진은 아까부터 하려던 말을 꺼냈다.
“기다려요.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씻고 나왔더니 여자는 기를 쓰고 성진을 말리려 들었다. 차비만 빌려주면 나중에 갚겠다며 여기서 더 신세를 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차 키를 들고 신발을 신었다.
“뭐합니까?”
성진의 재촉에 여자는 마지못한 듯 그를 따라 나왔다.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성진은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참이었다. 뭐하러 오지랖을 부려서 이런 귀찮음을 자초했는지! 그렇다고 여자 말대로 그냥 보냈다가는 뒤가 찜찜해서 내내 신경이 쓰일 터였다. 적어도 그 빌어 쳐먹을 호로잡놈의 새끼가 집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들여보내야 할 게 아닌가.
“그 새끼한테도 그렇게 똑 부러지게 거절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비난하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여자는 움찔하더니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제 좀 조용히 가겠군. 그의 입가에 미미하게 웃음이 서렸다.
작가입니다. 남주야. 쫌!
현식은 굳은 표정으로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앞에 엉망이 된 얼굴을 당당하게 들고 앉아있는 젊은 여자가 몹시 껄끄러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그 조폭 같지 않게 생겨먹었던 조폭이 ‘내 여자’라 했었다. 겉으로 봐서는 제 아들인 근태가 그리 집착할만한 점도, 성진이 애지중지할만한 매력도 없어보였다. 그렇다는 건, 저 속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만만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근태의 일을 매번 봐주던 경찰 간부가 성진의 구속 소식을 알려준 후, 그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불안함에 잠도 설쳤었다. 매번 성진의 곁에서 무게를 잡던 덩치 큰 험악한 놈이 당장이라도 들이닥쳐서 그를 협박할 것 같기도 했고, 뉴스에 이런 것이 떴다면서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근태의 폭력사건 기사를 내밀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좋은 제안을 했던 당대표의 번호가 핸드폰에 뜨면 몸이 굳어서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이렇게 불안함에 떨 바에는 차라리 성진을 찾아가서 협상을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민서가 찾아와 준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해보게.”민서는 속으로 천천히 다섯을 세었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말들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입을 열었다.“먼저 사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현식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네깟 게 뭔데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냐고, 내 아들과의 일은 그녀석과 해결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근태와의 일은 유감이네. 변호사를 통해 들었겠지만 충분하게 보상하지.”“유감…….”민서의 표정을 보니, 그의 사과가 마음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식은 내키지 않았지만 말을 더했다.“어쨌거나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가씨 상태를 보니 우리 근태가 좀 심했어.”진심이 담겼다고 느껴지는 사과는 아니었지만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잘못을 인
***민서는 택시에서 내려 커다란 대문 앞에 섰다. 등 뒤에서 택시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그 택시를 멈춰 세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공연히 벌집을 들쑤시는 꼴이 되지 않을까하는 불안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할 수 있다, 한민서. 내가 해야 해.”스스로를 다독인 그녀가 손을 내밀어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 응답이 없어 한 번 더 눌렀다.-누구세요?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인터폰에 얼굴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갔다.“김근태 씨 댁인가요?”-그런데 누구세요?“김근태 씨에 대해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요.”인터폰 너머에서 잠시 부산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사님, 얼른 문 열어줘요. 우리 근태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하지만 사모님.-근태 소식 안다잖아요!전자음이 들리며 대문이 열렸다.-어서 들어와요.“감사합니다.”민서는 들어가 대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안에 넓은 정원을 잠시 둘러보았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잘 관리되고 있는 예쁜 정원이었다. 근태가 부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부자동네로 유명한 곳에 이 정도 규모의 저택에서 살 정도라는 건 몰랐었다. 주눅이 들면서 다시 후회라는 감정이 솔솔 피어올라왔다.저 멀리서 현관문이 열리고 중년 여자가 그녀를 마중 나왔다. 효숙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정원의 반도 가로지르지 못한 민서를 보고 안달을 냈다. 기다리지 못하고 민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민서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표정이 굳어졌다. 젊은 여자애 얼굴이 얼룩덜룩 엉망이었다. 그녀의 아들이 무슨 일로 유치장에 수감되었었는지 너무도 잘 아는 효숙이었기에 민서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근태의 행방을 알 수도 있는 사람이 찾아왔다는 반가움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불편함과 껄끄러움이 생겨났다.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민서는 효숙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먼저 근태가 행방불명이라는 소식부터 전했다. 성진이 근태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생략했다. 폭행사건의 피해자인 민서에게 성진의 폭력적인 면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상처가 다 낫지 않은 그녀였다. 공연히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근식은 그저 근태를 찾는 그의 모친이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고, 민서와 경찰조사를 받을 때 함께 있었던 성진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잡혔다고만 했다. 곽 경사를 향한 점잖은 욕설이 다소 섞인 설명이었다.민서는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구속이라니. 그토록 구속되기를 바라마지 않던 근태는 한 번도 구속된 적이 없었는데, 성진이 구속되었다고 하니, 편파적인 공권력에 화가 났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성진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그…… 김근태는 괜찮은 걸까요?”의외의 질문에 근식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 형님이 경찰에 잡혀갔는데 김근태를 걱정하는 건가? 그 개차반 씨발놈을? 하지만 이어지는 민서의 중얼거림에 그의 표정이 편안해졌다.“안 괜찮았으면 좋겠네요. 죽어버린 거였으면 좋겠어. 성진 씨가 감옥에 있는데…… 그 개새끼가 편안하게 있는 건 말이 안 돼.”걱정하지 말라고, 그 개새끼는 우리 형님이 아주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 없앴다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근식 씨. 제가…… 뭘 해야 할까요?”“네?”“제가 어떻게 해야 성진 씨를 도울 수 있을까요?”민서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근식은 웃었다.“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면회도 몇 번 가 주시면 좋고요.”“그런 거 말고요.”“실력 좋은 변호사님이 형님 사건 맡아주실 겁니다. 그 개새끼가 재판 받는 게 무서워 도망간 걸 가지고 그 개좆만도 못한 경찰 새끼가 건수 잡았다 싶어 엮은 겁니다. 증거도 없으니 곧 풀려나실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하지만…… 처음이라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근식은 웃었다.“변호사님한테 얘기 해 놓겠습니다. 변호사 접견은 수시로 가
***“야, 한영호.”성진과 통화를 마친 근식이 심각한 표정으로 영호를 불렀다. 소파에 드러누워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용호가 고개만 돌려 근식을 쳐다보았다.“왜?”“형님이 김현식 국장이랑 통화할 때 누구 전화로 했냐?”“내꺼.”“강원도 갈 때 네 차도 끌고 갔었나?”“형님 차에 얹혀 가느라 안 가져갔었지.”막힘없는 용호의 대답에 근식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머릿속이 정리가 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형님 구속되셨다. 압수수색 나온다고 하니까 너는 당분간 시온으로 출퇴근하는 걸로 하자. 핸드폰은 바꿔야 할 것 같다. 압수 목록에 네 이름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일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거니까. 너는 그 날 형님이랑 애들 데리고 밤낚시 간 거다.”심드렁한 표정으로 누워있던 용호가 근식의 말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씨발 것들. 핸드폰 바꾼 지 얼마 안됐는데.”“증거 될만한 건 없지?”“우리 물고기님들께서 부지런히 그 새끼 뜯어먹어주셨다면 없지. 그 새끼 달아오던 때도 흔적 안 남기려고 별 지랄을 다 떨었는데 증거가 있겠냐?”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긴 용호가 사무실 출입문을 열다 말고 근식을 돌아보았다. 그는 빨리 안 가고 뭐하냐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는 근식을 향해 손가락 키스를 날렸다.“고생해, 자기.”“씨발 새끼가, 저 병 또 도졌네.”질색하는 근식을 향해 신나게 웃어준 용호가 갔다. 근식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몸서리를 쳤다. 가장 큰 건더기를 처리했으니 잔잔바리들을 처리할 차례였다. 그는 강릉까지 근태를 실어간 동생들을 불러 잡도리했다. 그들은 성진이 근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직접 눈으로 지켜봤던지라 기강이 바짝 서 있는 상태였다. CCTV를 잘 피한 건 물론이고 서울을 벗어나는 과정도 여러 단계를 거쳐 조심해 꼬리가 잡힐 일이 없다고 장담했다. 혹시라도 흔적이 남아 걸리게 되더라도 조직에 피해가 가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근식은 다 같이 술이나 한 잔씩 하라며 지갑에서 오만원권 너댓 장을 꺼
현식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효숙이 마중을 나왔다. 며칠 동안 시커멓게 죽은 낯빛으로 사람이 들어오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이 이렇게 태도가 바뀐 것이었다. 역시 그 깡패새끼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는 가방을 받아드는 효숙을 노려보았다.“왜요.”가방을 받아주었음에도 꼼짝 않고 서 있는 남편을 향해 효숙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경찰 쪽에 힘을 써 줄 사람이 남편 밖에 없었기에 그의 비위를 맞춰주러 나온 마중이었다. 절대로 남편을 향한 원망이 누그러진 게 아니었기에 목소리가 곱게 나오지 않았다.“당신, 경찰서에 갔었어?”“어떻게 알았어요?”“경찰서에…….”현식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누르느라 잠깐 말을 멈췄다.“근태 실종 신고 했어?”“네. 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요.”“도대체 누구 허락을 받고? 왜 쓸 데 없는 짓을 해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느냐고!”일을 벌려놓고 당당한 효숙의 태도에 근식은 폭발했다. 손가락질을 하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효숙이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뒤이어 그녀에게도 분노가 들끓었다.“쓸 데 없는 짓? 쓸 데 없는 지잇? 지금 우리 근태 실종신고 한 게 쓸 데 없는 짓이라고 한 거예요, 당신?”“쓸 데 없는 짓이지, 그럼? 왜 물어보지도 않고 일을 만드냐고!”효숙이 현식의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우리 아들이 사라졌어요! 연락도 안 돼서 불안해하는 나한테 당신, 뭐라 그랬어요? 조용히 반성하면서 공부나 하라고 대전 사찰에 보냈다면서요? 없대요! 대전 그 어느 사찰에도 우리 근태가 없었대요! 그래서 했어요, 실종 신고. 애 아빠라는 사람이 안 찾아주니까 경찰한테 찾아달라고 하려고요!”“내가 보냈댔잖아! 좀 잠잠해지면 어련히 알아서 잘 데리고 올까! 여편네가 겁도 없이 어딜 나서?”“그러게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던가! 당신이 먼저 날 불안하게 만들었잖아요! 나라고 뭐, 좋아서 경찰한테까지 찾아간 줄 알아요?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잘못을 빌기는커녕 되레 따지기 시작하는 효숙의
근식은 아직 성진에게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형수님. 우리 지영이가 칵테일을 한 번도 못 마셔봐서 그런데요. 예전에 그 커피 맛 나는 칵테일 한 번 만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근식이 던졌고.“어머! 커피 맛 나는 칵테일이요? 그런 게 있어요? 궁금해요, 언니! 아니, 힘드신데 무리하지 마세요.”“아니에요, 지영 씨. 힘들지 않고 어렵지도 않아요. 재료만 있으면…… 여기 주류 코너가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있어요, 주류 코너! 제가 알아요!”지영이 덥석 물었다. 그녀는 다시 민서의 팔짱을 끼고 조잘조잘 떠들면서 걸어갔다.“제가 또 한 커피 하거든요. 언니도 전에 제 커피 맛있다고 하셨죠? 그게 또 기술이 있어야 하거든요.”멀어지는 지영의 목소리를 배경삼아 근식이 말을 꺼냈다.“신경 쓰이는 점이 있습니다, 형님. 그 여자가 시온에 명함을 들고 찾아왔다고 하더라고요.”“명함? 늬들 명함 함부로 뿌리고 다녀?”“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애초에 가지고 다니는 애들도 없고요. 얍실이 말로는 그 여자가 아들 방에서 찾았다고 했답니다.”“귀찮게 됐네. 실종신고 한 경찰서가 어디래?”“그것까지는 안 물어봤지만, 뻔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개주둥이 곽 경사가 냄새 맡고 덤벼들지 않겠습니까?”근식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성진이 피식 웃었다.“건수 잡았다고 신나있겠군.”“직접적인 증거 같은 건 못 찾을 겁니다. 경찰서 앞에서 달아 올 때도 신경 많이 썼고요, 작업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그 새끼가 언제는 증거 가지고 덤비든? 지 꼴리는 대로 잡아들여 족치는 종자인데.”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성진은 느긋한 표정이었다.“따로 생각해 두신 게 있습니까? 별로 걱정 안 되시는 거 같은데요.”“글쎄. 힘 써 줄 사람이 있을 듯도 해서.”성진이 말한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는 사이에 주류 코너에 도착해버렸다. 근식은 생각을 멈췄다. 지영이 여러 병의 술을 들고 오는 게 보였기 때문에 머리가 아파졌기 때문이었다.“형수님. 생각해보니까
***“하아, 하아, 오빠 조금만 천천히.”숨넘어가는 소리로 애원하는 여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진은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과 살이 맞부딪치며 나는 ‘탁탁’ 소리의 박자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밀어붙이는 남자의 힘에 흔들리는 여자는 애타게 오빠를 부르짖었다.“오, 오빠. 잠깐, 아흑, 오빠. 오빠…….”짧은 숨소리와 함께 성진은 여자의 질 안으로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절정감에 몸을 움찔거리며 더 깊이 여자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사정이 끝나 시들해지는 성
주차장에서 열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근식이 서 있었다. 가라고 했건만 말도 안 듣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근식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꾸만 몸을 빼려는 여자의 허리를 뒤쪽에서 밀고 있었는데, 그게 보였나 보다.성진은 구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린 채 어버버 말도 못하는 근식을 지나쳐 그의 차에 여자를 태웠다.“집이 어딥니까?”“저기…….”“주소.”딱 떨어진 그의 목소리에 여자가 머뭇거리며 주소를 말했다. 시동을 걸고 불러주는 대로 네비게이션에 입력한 성진이 고개를 들었다. 룸미러로 여전히
부딪친 무릎의 통증을 자각할 틈도 없이 머리채를 잡혔다. 그리고 문 닫히는 소리와 잠금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 깡패새끼랑 여태 같이 있다 온 거야?”근태의 목소리도 떨리는 듯했다. 민서는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근태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이거 놔.”“전화도 안 받고, 집에도 없고, 한 시간이나 늦게 들어와?”“이거 놓으라고!”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써보았지만 그의 손은 너무 단단했다.“어쩐지 그 새끼, 가게 근처에 못 오게 하더니……. 가게서 딩굴었냐?
평소보다 손님이 적은 편이었지만, 자정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새 손님이 들어왔다.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민서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아는 척을 하는 남자는 제법 낯이 익었다. 일행과 뭐라 말을 주고받으며 테이블이 아닌 바에 자리 잡고 앉았다.“가게도 작고 바텐더도 하나뿐이고…….”남자의 일행은 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통찮은 표정이었다.“가게는 작아도 칵테일이 괜찮아. 바텐더 아가씨도 예쁘고 조용하니 좋기만 하구만 괜히 궁시렁거리긴.”남자는 메뉴판을 받아들며 민서에게 슬쩍 윙크를 날렸다. 마주 웃어주는 민서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