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시 요란하게 몸을 떨어대는 휴대폰을 쳐다보며 민서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정말 받고싶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사과부터 할 테지.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느니, 너 없인 못 산다느니, 앞으로 정말 잘 하겠다느니 온갖 사탕발림을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헤어질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매달릴 것이었다. 알았다고, 용서하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을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런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남자 보는 눈을 기르라던 손님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난 남자 보는 눈이 정말 거지같았던 거야.
전화는 잠깐 끊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몸을 떨어댔다. 그녀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끝까지 받지 않았다가는 그가 다시 가게로 찾아올지도 몰랐다.
“여……보세요.”
-민서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걱정했다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 소름이 돋아 그녀는 팔뚝을 문질렀다.
“이제 그만하자 그랬잖아. 나 이제 근태 씨 전화 받을 이유 없어.”
-민서야.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다시 얘기할게. 우린 끝났어. 다시는 전화하지도 찾아오지도 말아줬으면 해.”
-사랑해, 민서야.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내가 왜 그랬는지는 너도 잘 알잖아.
간절함이 뚝뚝 떨어지는 근태의 목소리에 민서는 헛웃음을 지었다.
“안다고? 내가? 아니. 난 그딴 이유 같은 거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어. 이제 전화하지 마. 근태 씨 번호 차단할 거야. 찾아오지도 마. 안 만나줄 거니까.”
모질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민서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다.
-진짜 너 왜 그래?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내가 이만큼 숙이고 들어갔으면 너도 엥간히 해얄 거 아니야.
화난 기색이 묻어나는 근태의 목소리에 민서는 웃었다.
“미안하다고 하면 끝난 건가? 욕하고 때린 게 없던 게 되는 거야?”
-그건 네가…….
“술김이면, 홧김이면 때려도 되는 거야? 약 사다주고 꽃 사다주면 때려도 되는 거야?”
민서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민서야. 그러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너 지금 어제 일 때문에 많이 화나서 마음에 없는 말 하는 것 같은데…….
“어제 일? 기억나기는 하니?”
-민서야.
“지겨워, 정말.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몇 번을 더 말해야 하는 거야?”
-내가 지금 갈게. 만나서 얘기하자.
민서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떻게 해도 근태는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벽에다 대고 말하는 기분이 이럴까.
"오지 마. 경찰에 신고할 거야."
신고할 거라는 말에 근태가 피식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우습겠지. 신고 할 때마다 연인끼리 가볍게 다툰 것이라는 그의 말을 더 믿어주는 경찰들이었기에.
"마지막 경고야. 앞으로 다시는 전화하지도, 찾아오지도 마. 더 할 말 없으니까 끊어."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든 말든 민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아, 한숨을 깊이 내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지 말랬다고 안 올 근태가 아니란 것을 알기에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마땅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가서 시간을 죽일 방법은 많았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피해 다녀야 할까 싶어 답답한 심정이었지만, 질질 끌려 다니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외출을 준비하는 그녀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평소 잘 다니지 않던 곳으로 가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더니 가게로 출근할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더운 날씨에 좀 걸었더니 땀이 흘러 출근 전에 가볍게 씻을 생각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룸 건물 앞에 주차되어있는 그의 차가 보였던 것이다.
민서는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으니 집 안에서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건물 안? 차 안? 짙은 색으로 선팅된 차 유리 때문에 근태가 차에 타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가 차를 멀리에 주차해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꼼짝없이 그에게 잡혔을 거다. 식은땀이 났다.
몇 달 전 그에게 처음으로 헤어지자 했을 때, 가장 심하게 맞았었다. 그의 주먹에 맞고 날아가 손바닥이 찢어지고, 그의 발길에 갈비뼈가 부러졌었다. 그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계단에서 굴렀느니, 잘 돌볼 테니 입원까지는 필요없다느니, 경찰 앞에서 잘도 떠들어댔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극진하게 민서를 간호했다. 그러게 왜 그런 말을 해서 나를 화나게 만드느냐, 때린 건 미안하지만 그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느냐, 네가 잘 처신하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것이라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녀를 탐하며 사랑한다 속삭였다.
그 때 끝냈어야하는데.
민서는 천천히 뒷걸음질로 그 곳을 벗어났다.
“민서 씨, 어디 아파? 얼굴이 영 아닌데?”
사장 정호가 민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표정을 굳혔다. 오픈 준비에 여기저기 둘러보던 민서는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프긴요. 멀쩡해요, 걱정마세요.”
“안 아픈 사람 얼굴이 아닌데?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아픈 사람 부려먹는 악덕 사장 만들지 마. 가게 문 며칠 닫는다고 안 죽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고.”
진지한 표정의 사장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건물주 아들의 여유랄까? 그는 매우 관대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얼굴에 상처나 멍이 눈에 띌 정도면 그 얼굴로 무슨 장사냐며 가게 문을 닫고 그녀를 병원으로 보냈다. 그 일로 그녀에게 어떤 불이익이 가는 일도 없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자꾸 이런 식이면 같이 일 못하죠’라는 얘기가 몇 번은 나올만한데도 그는 씩 웃으며 ‘그 핑계로 가게 문 닫고 노는 거지 뭐’라며 넘어가곤 했다.
남자 복은 없지만 사장 복은 있나보다. 그래서 민서는 더 열심히 일했다. 근태에게 맞을 때도 되도록 얼굴이나 드러나는 부분은 피하려고 애썼다. 죽을 것같이 아픈 게 아니라면 이를 악물고 웃으며 일했다. 얼굴만 비치다시피 하고 가게를 비우는, 절실하지 않은 사장이 그녀에겐 너무나 절실했다.
“정말 아픈 데 없어요. 그냥………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랬나 봐요.”
사장은 영 못 미더운 얼굴이었지만 수긍했다.
“아쉽네. 오늘도 문 닫고 노는가 싶었는데.”
“그렇게 자꾸 문 닫을 궁리만 하시다가 가게 망하면 어떻게 해요. 여기 망하면 제 일자리는 사장님이 책임지고 찾아주셔야 돼요.”
농담처럼 툭 던진 말에 사장은 걱정 말라는 듯 검지를 들어 흔들었다.
“망해도 가게 문은 안 닫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오픈 준비를 하는 동안 설렁설렁 가게 안을 돌아다니던 사장은 한참 핸드폰으로 수다를 떨더니 손님이 몇 명 들어온 걸 보고는 나가버렸다. 나가기 전에 ‘오늘도 수고해’라든지, ‘말썽 부리는 사람 있으면 지체하지 말고 경찰 불러. 지난번처럼 혼자 끙끙대지 말고’라든지 ‘홍 여사 전화 오면 알지?’ 같은 말들을 쏟아내고서.
작가입니다. 저 사장도 제가 좀 애낍니다. 완죤 부럽다는..... 나도 저렇게 살고싶다......
“자, 잠깐만요.”민서가 몸을 빼보려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등에 가로막혔다. 손등에 비벼지는 입술 감촉에 어색해하는데, 그가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스스로 틀어막은 입에서 놀란 비명소리가 눌려 나왔다.“보지 마라, 동혁아.”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끔거리던 동혁이 근식의 낮은 경고에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네, 형님.”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몸도 마음도 뜨거운 20대 초반의 남성에게는 다소 무리가 있는 주문이었다. 그가 존경해마지않는 큰형님의 애정행각이었다. 성진의 취한 모습도 처음 보지만 여자와 스킨십하는 것도 처음 보는 동혁이었다. 그는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솔직히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큰형님의 품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의 형수님이었다. 룸미러의 각도로 볼 수 있는 건 성진의 뒤통수와 민서의 머리 위쪽 정도였다. 하지만 거칠어진 성진의 숨소리와 민서가 놀라는 소리, 성진이 작게 속삭이며 민서에게 애원하는 목소리는 너무 자극적이어서 자꾸만 룸미러에 시선이 갔다.“키스하게 해줘.”맞닿은 성진의 몸이 뜨거웠다. 그는 계속해서 민서의 손등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민서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민서야. 제발……”‘그쪽’도 아니고 ‘민서 씨’도 아닌 ‘민서야’였다. 간절하게 애원하는 속삭임에 그녀는 흔들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끌어내렸다.“아프게 하지 않을게. 약속해.”입술을 막고 있던 민서의 손이 치워지고, 성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커피향이 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민서는 눈을 감았다.나는 이 남자와의 키스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아닌 척 했지만 이 남자에게 끌리고 있었나보다. 나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존댓말을 쓰면서 거리를 두며 나를 배려해주는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나보다.눈물이 민서의 볼을 타고 흘렀다.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핥았고,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혀를 내밀어 그의 혀를 살짝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성진은 차 뒷좌석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곧 도착입니다, 형님.”“그래.”근식은 룸미러로 성진의 모습을 확인하고 씩 웃었다.황 회장과의 만남이 길어지면서 조금 예민해진 성진이었다. 워낙 성진을 예뻐하는 황 회장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고객들 중 하나였다면 진즉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고간 이야기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성진도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민서가 일하는 바로 가면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 본 적이 없었다.“황 회장님의 제안은 거절하시면 안 됩니다.”“알아.”“아시면서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형님?”“글쎄다. 영 내키지가 않네. 동혁이한테서 연락은?”“별 일 없다고 합니다. 좀 시끄러운 손님들이 와서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 말고는 괜찮답니다.”성진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손님이 적은 한적한 가게라서 민서가 여유롭게 일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는데,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니 마음에 들지 않은 거였다.곧 차가 멈췄고 성진이 내렸다. 골목에 위치한 바 앞은 한적했다. 그는 거침없이 걸어가 바의 출입문을 열었다.“야, 애 죽겠다, 그만 먹여!”“먹고 죽어, 새끼야!”문이 열리자마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하나에 남자 넷 여자 하나. 바에 동혁과 남자 하나. 그는 빠르게 매장 내부의 인원을 파악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민서가 그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어서오세요. 오늘은 늦으셨네요, 손님.”“일이 있어서.”성진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는 민서 앞에 앉았다. 바에 상체를 기대고 서 있던 남자가 성진을 보았다. 30대 중후반 정도의 늘씬한 남자였다.“민서 씨, 이거 차별 같은데? 이 손님은 왜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거야?”“단골이시거든요.”“나도 자주 오잖아. 나도 단골 해주고 반갑게 말 걸어달라고.”“자주 오시는 건 맞는데 우리 사장님 만나러 오시는 거잖아요. 우리 단골손님이랑 비교가 되나요.”“이거 서운한데?”“음, 저한
***성진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원체 그의 체력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민서가 매일 서투르게나마 상처를 소독해주었고, 단백질 위주의 건강에 좋은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수발은 근식의 몫이었다. 사무실과 병원, 성진의 아파트를 오가며 각종 약들과 보양식을 갖다 바쳤다.“빨리 나으십쇼, 형님. 혼자 하려니 죽겠습니다.”“엄살은. 내가 발 빼고 너 혼자 해도 되겠는데?”“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아시죠? 황 회장이 형님을 얼마나 찾는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양 전무 같은 경우에는 형님 없이는 못 맡기겠다고, 형님 복귀하면 연락 달라고 합디다.”“츱, 까탈스런 영감탱이들.”근식이 입혀주는 수트 재킷 단추를 여미며 성진이 혀를 찼다.“황 회장님이 급하신 모양이더라고요, 형님.”“그 양반이 급하거나 말거나.”시계를 차고 지갑을 챙긴 성진이 방을 나와 현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근식이 소지품을 챙겨와 그 뒤를 따랐다.“그래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형님. 황 회장님이 그래도 제일 큰 고객인데 말입니다, 형님.”“시끄러워.”“그러지 마시고, 형수님한테 가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만 황 회장님 얼굴 보고 갑시다, 네?”계속해서 졸라대는 근식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 태도에 성진은 걸음을 멈추고 근식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뭐냐?”“뭐가요?”“그 영감이 뭐라 그래? 또 지랄맞게 굴어?”근식의 눈동자가 슬며시 옆으로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성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런 거 없었습니다. 워낙 그 양반 성격이 불같아서 그러지요. 일처리 느린 거 못 견뎌하시는 분이잖습니까.”“지금 간다고 연락해.”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마디 뱉은 채 걸음을 옮기는 성진의 뒤에서 근식이 쾌재를 불렀다. 성진이 직접 움직인다고 하니 일이 쉬워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성진은 이상할 정도로 나이 많은 고객들에게 잘 먹혔다. 지금은 저렇게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틱틱거리지만, 막상 고객 앞에서는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할 것이었다. 깍듯
성진이 자세한 설명을 피하는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한 민서는 그가 자신을 보면서 웃자 흠칫 놀랐다.아니, 왜 웃고 그러세요. 그쪽이 깡패라는 것만으로도 불법적인 일 한다는 걸 다 설명하신 거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말 옮기는 일 같은 거 안 하니까 그만 쳐다보세요.어색해진 민서가 바쁜 척 손을 놀렸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나 힐끔힐끔 성진을 확인했다.“큰일이다, 민서 씨. 저 사람, 민서 씨한테 관심있나봐.”카페 사장이 민서 쪽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인 채 속삭였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그냥 깡패 아니라 되게 위험한 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혼자 있을 때 저런 손님 들어오면 무섭잖아.”“위험한 손님 아니에요. 오히려 진상 손님을 두 번이나 쫓아내주셨어요.”민서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카페 사장이 ‘그래?’ 하며 놀라더니 성진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성진은 두 사람을 지켜보다 미간을 좁혔다. 두 여자가 서로 속닥거리다가 자신을 보며 웃는 모양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빨리 마시고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민서에게 또 뭐라 속삭이고는 까르르 웃었다.“그러지 마세요, 손님. 전 당분간 누굴 만나거나 할 생각이 없어요.”“어머, 왜?”“그냥…….”여자가 손을 뻗어 민서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민서의 표정이 난처한 기색으로 바뀌었다.마음에 안 들어.그는 다시 블랙 러시안을 들이켰다. 독한 알콜이 목구멍을 태울 듯 덥히고 넘어갔다.“그럼 나 섹스 온 더 비치 말고 다른 거 추천해줘요.”여자가 빨대로 남은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얼음만 남은 빈 잔을 내밀었다. 민서는 잔과 코스터를 수거하고는 메뉴판을 꺼냈다.“이거랑 이것처럼 이름이 섹스 온 더 비치같이 좀 선정적이다 하는 칵테일이 보통은 달콤해서 마시기 좋아요.”“그러다 훅 가고?”여자가 민서에게 윙크를 날렸고, 민서는 손가락 총을 쏘았다.“그렇죠.”“흐응, 궁금하네.”
구석자리에 숨어서 애정행각을 벌이던 커플이 나가고 민서가 테이블을 치우고 돌아오는데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손님이 없으니 일찍 문 닫고 집에 가자고 하려던 성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만을 표했다.“어서오세요.”여자는 민서의 인사에 환하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한 후 성진의 옆자리에 앉았다.“원래 이 시간에 오면 손님이 없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두 분이나 계시네요?”“다른 손님이 없을 때 주로 오셔서 그래요. 오늘도 같은 걸로 드릴까요?”“네. 섹스 온 더 비치로 주세요.”자주 오는 손님인지, 여자와 민서는 살갑게 안부를 주고받았다.“가게 문 닫고 나서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날이 있어요. 술 한 잔이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 사람도 없고, 사람들 바글바글한데서 혼자 청승 떨기 싫은 그런 날이요. 그런 날엔 여기서 칵테일 한 잔 마시는 게 최고더라고요. 그리고 이왕 마시는 거 맛있는 걸로 마셔야죠.”“원래 혼술하러 오시는 분이 많아요. 조용히 한두 잔씩 드시고 가시고요.”허리케인 글라스에 얼음을 담으며 여자의 넋두리 같은 말에 민서가 웃었다. 쉐이커에도 얼음을 담는 민서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성진 쪽으로 여자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동네에선 못 보던 분이시네요. 안녕하세요,”“아, 네.”“근처에 사시나요? 이렇게 근사하게 생기신 분인데 제 기억엔 없어서요.”“아니요.”“댁이 어디신데요?”“……닥산동입니다.”“어머, 멀리도 오셨네요? 근처에 볼일이라도 있으셨나봐요.”“……직장이 근처라.”“어머어머, 무슨 일 하시는데요?”보드카에 이어 오렌지 주스를 쉐이커에 붓던 민서가 눈을 들어 두 사람을 힐끗 보고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혼자서 칵테일 마시러 오는 손님들 중에 가장 빨리 친해진, 붙임성 좋은 카페 사장이었다. 말 수 적은 성진이 귀찮아하는 것이 민서에게는 너무나 잘 보이는데, 손님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깡패입니다.”카페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민서는 ‘쿡’ 짧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민서가 성진과 심상치 않은 사이임을 넌지시 내비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민서를 포기하지 못한 듯, 시덥잖은 농담을 계속해서 던졌다. 민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걸 본 남자의 일행이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내가 뭐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란 말이지.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 법이거든. 가끔 특식도 먹고 말이야. 맛없는 것도 가끔 먹어 줘야, 아! 원래 먹던 게 맛있는 거구나 하고 깨닫기도 한단 말이지.”“그런가요? 전 맛없는 건 굳이 찾아먹지 않는 편이라서요.”“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먹어봐야 아는 것 아니겠어요?”능글맞게 웃는 남자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어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부글부글 속을 끓이고 있던 성진이 참지 못하고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어린놈이 말이 짧네.”앉아있는 성진을 아래위로 훑은 남자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툭 내뱉은 말에 성진의 뒤에 서 있던 동혁이 발끈했다. 성진이 손을 들어 동혁을 말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파리한 안색으로 앉아있는 성진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성진의 생김새도 남자의 생각에 힘을 보냈다.하지만 정면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성진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오른쪽 눈썹 위에서 눈꼬리까지 이어지는 칼자국이었다. 조금이라도 옆으로 비껴 지났다면 실명했을지도 모를 위험한 흉터였다. 그리고 구부정하게 앉아있을 때는 몰랐던 성진의 넓은 어깨와 큰 키에 위압감을 느꼈다.“그쪽도 예절이 썩 훌륭하지 않더라고.”남자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낭패였다. 작고 여리여리한 민서가 사귀는 남자래야 대단할 게 없다 생각했다. 자신이 민서에게 추근덕거릴 때 옆에서 조용히 지켜만 보기에 배알도 없는 놈인 줄 알았다. 덩치 큰 놈이 형님이라 깍듯하게 칭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옆얼굴이 곱상해 만만한 상대라는 오판을 하고 말았다.“아니…… 그게 아니라…….”성진이 남자에게 한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