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
“하아, 하아, 오빠 조금만 천천히.”
숨넘어가는 소리로 애원하는 여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진은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과 살이 맞부딪치며 나는 ‘탁탁’ 소리의 박자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밀어붙이는 남자의 힘에 흔들리는 여자는 애타게 오빠를 부르짖었다.
“오, 오빠. 잠깐, 아흑, 오빠. 오빠…….”
짧은 숨소리와 함께 성진은 여자의 질 안으로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절정감에 몸을 움찔거리며 더 깊이 여자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사정이 끝나 시들해지는 성기를 여자에게서 빼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뒤처리를 하려는 그의 손을 여자가 슬며시 잡았다.
“빨아줄까?”
“됐어.”
아쉬운 듯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여자였지만, 그는 티슈를 뽑아 축축하게 젖어있는 그의 물건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요새 이상해.”
“뭐가?”
“스타일이 변했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들 체위는 바꿔도 스타일은 잘 안 바뀌는데 말이야.”
성기를 문지르던 손이 멈칫거렸지만, 그는 구겨진 휴지를 바닥에 던지고 벗어놓은 속옷을 집어 들며 물었다.
“그래서, 싫어?”
“어유, 왜 그래, 오빠. 난 오빠 밖에 없는 거 알면서. 그러니까 나 얼른 데려가 달라고.”
달라붙어오는 여자를 슬쩍 밀어내며 벗어놓은 옷을 집어든 그가 피식 웃었다.
“웃지만 말고. 이럴 때마다 스리슬쩍 넘어가려는 거, 모를 줄 알아?”
다시 달라붙어 콧소리를 내는 여자를 떼어내고 지갑을 꺼내 수표 몇 장을 꺼내 침대 위에 던졌다. 시무룩해지는 여자의 머리를 쓱쓱 문질러 쓰다듬고는 그 곳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성진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스타일이 변했다는 여자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변하긴 했지. 예전에는 섹스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영 내키지가 않았다. 습관적으로 여자를 찾고 섹스를 하지만, 그 뒷 느낌이 깔끔하지가 않았다.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아무 것도 없던 집에 이제 여자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가는 것과 문을 열었을 때 아는 척해오는 사람이 있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별다른 감정이 없던 여자였는데, 갈수록 그의 기분이 묘해졌다. 푸르딩딩 부어있던 얼굴이 점차 가라앉으면서 멍 색깔이 점점 시커멓게 변하는 꼴이 눈에 들어올 때면 울컥울컥 화가 치솟았다.
-엄마는 괜찮아. 네가 있어서 엄마는…….
터진 입술 위에 새롭게 생긴 상처를 하고서도 성진을 안고 하염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여인의 모습이 그 위에 겹쳐보여서 그랬으리라.
언젠가 여자에게 했던 충고 ‘남자 보는 눈 좀 길러요’가 생각났다. 피식. 룸미러로 자기 얼굴을 힐끔 쳐다본 형진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여자 패는 개호로잡놈의 새끼에서 벗어나 겨우 자리잡은 곳이 조폭 나부랭이 집이라니, 그 여자도 남자 운은 지지리도 없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냥 조폭 나부랭이도 아니고, 시퍼런 멍과 부은 얼굴, 터진 입술에도 발정하는 변태 조폭 나부랭이 말이다.
민서는 식탁 의자 위에 다리를 끌어안고 앉아서 식탁 위에 놓인 카드키와 신용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사요. 말했듯이 난 집에서 뭘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내 방만 건들지 않으면, 어디를 어떻게 바꾸든 상관없어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언제 돌아오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주방은 사용 흔적이 없었고, 찬장이나 서랍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냉장고는 생수와 맥주가 전부였고, 흔해빠진 라면도 하나 없었다. 아니, 그릇은커녕 수저도 없으니, 정말 들어와서 잠만 자고 나가는 곳이라는 게 실감이 되었달까.
그 사람은 나의 뭘 믿고 이런 걸 떡하니 맡기고 간 걸까. 민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나가서 뭘 사먹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에 끌어안고 있던 다리를 내리고 일어서려는데 현관에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민서는 흠칫 놀라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해야하지? 나가서 맞이해야 하나? 손님 주제에 그래도 되나?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제자리에서 왔다갔다하던 민서가 눈을 들었다. 검은 수트 차림의 성진이 들어오다 말고 멈춰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어서오세요.”
어색하게 인사말을 건넨 민서는 입술을 물었다. 가게에서 손님에게 건네던 인사가 자동으로 나와 버렸다. 할 말이 이것뿐이란 말인가, 속으로 자책하면서.
“나가죠.”
“네?”
나가자고? 어딜? 왜? 남자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멍하게 있던 민서는 자신이 외출 준비를 하고 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깨닫고 부리나케 그가 지정해준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방구석에 둔 가방을 뒤적거려 입고 나갈만한 옷을 꺼냈다. 근태가 찢어놓은 옷들이 주로 외출복이어서, 수트를 입고 있는 남자와 어울릴만한 옷이 없었다. 그저 후줄근해 보이지 않은 것으로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민서를 확인한 남자가 돌아서서 걸었다. 민서는 어색하게 서 있다가 그가 돌아보자 흠칫 놀랐다.
“안 갑니까?”
“아, 네. 가요.”
말없이 가기에, 제 차림이 마음에 안 들어 두고 가려는가 싶었던 민서는 어색하게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말이 없는 사람인 건 알겠지만, 필요한 말은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여긴 왜 온 걸까? 민서는 묻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것 같지 않아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성진이 멈춰선 곳은 여성복 코너였다.
“저는 이런 것…….”
“다 찢어졌잖아요. 입을 만한 걸로 몇 개 골라요.”
“하지만…….”
거부는 거부한다는 오러를 풍기면서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본 민서는 입을 다물었다. 새삼스럽게 수트 차림의 남자 옆에 선 제 모습이 매장 안의 거울에 비쳤다. 청바지에 후드티셔츠. 지독하게 안 어울렸다.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민서의 얼룩덜룩한 얼굴을 보며 잠시 흠칫하며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긴 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금세 되살리며 찾는 물건이 있는지 물어왔다. 남자는 간단히 말했고, 직원은 신나게 여러 벌의 옷을 들고 와서 민서에게 권했다. 망설이는 민서를 본 그는 모두 달라고 했고, 그녀는 기겁을 했다. 민서는 부담감을 끌어안은 채로 괜찮아 보이는 몇 벌을 골랐고, 그 중 하나를 입어봤으며, 그 사이즈에 맞는 것이 여러 벌 담긴 쇼핑백을 손에 들어야 했다.
남자는 또 걸었다. 민서는 뒤를 따라갔다.
멈춰선 곳은 가구 매장이었다. 눈이 동그래진 민서를 보며 남자가 픽 웃었다.
“하루 이틀은 소파에서 자도, 계속 거기서 자는 건 무리입니다. 거기 있으면 나도 불편하고.”
그렇게 침대와 옷장, 서랍장을 샀다. 또 필요한 게 있냐는 물음에 민서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부담감이 목을 졸라오는데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원룸에 모두 있었다. 그가 조금 덜 무서워지면 기회를 봐서 같이 가달라고 부탁해보자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갈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백화점을 나와서 그는 또 별다른 말없이 걸었다. 차가 지하 주차장에 있는데, 그는 도로를 건넜다. 민서는 어디 가냐고 묻지도 못하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도착한 곳은 콩나물국밥집이었다. 민서는 반가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를 따라 들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계속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난 걸 들은 모양이었다.
국밥집에서도 민서의 얼굴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하지만 태연하게 행동하는 민서와, 점잖고 정중하게 대하는 성진의 태도에 모른 척 해주는 분위기였다. 음식은 금방 나왔고, 두 사람은 대화 없이 밥을 먹었다.
“그 새……, 그 자식 아니, 그 사람 다시 연락 온 적 있습니까?”
뜨거운 국밥을 열심히 불어가며 먹던 민서가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걸 잘 먹는가보다. 뚝배기가 거의 비어 있었다. 절반 이상 남은 제 것을 숟가락으로 뒤적이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때 전화를 대신 받아주신 후로는 없어요. 제 원룸이나 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어쩌면 포기했을 지도 모르고요.”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좀 우습지만, 경찰은 왜 안 불렀습니까?”
국밥을 뒤적이던 손이 잠깐 멈췄다.
“불렀죠. 여러 번 불렀어요. 애인 사이에 가벼운 다툼이었다, 넘어져서 다친 거다, 계단에서 굴렀다 거짓말을 잘도 늘어놨어요. 그 사람 집안이 좀 좋은가보더라고요. 조회해보더니 경찰들이 조심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대부분 주의를 주고 끝냈어요. 제 상처가 좀 심했을 때는 하룻밤 가둬놓긴 했는데…… 다음 날 찾아와서 더……. 암튼, 그랬어요. 경찰은 소용이 없어요.”
담담히 늘어놓는 민서의 말에 성진은 험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짭새가 어떠니 하는 걸 보면 경찰을 향한 욕설인가 보았다. 민서는 웃었다.
“말씀하신 대로 남자 보는 눈이 없었네요, 제가.”
성진은 민서를 한참 쳐다보았다. 어색해진 민서가 하하 하고 웃고는 남은 국밥을 먹었다.
“천천히 먹어요. 밖에서 담배 하나 피고 오겠습니다.”
일어서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민서는 숟가락을 놓았다.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과분한 도움을 받아도 되나 불안했다. 근태를 피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것만으로도 생명의 구함을 받은 것 같았는데, 이런 거금까지 쓰게 만들다니. 물론 그가 자발적으로 쓴 돈이긴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으면 쓰지 않았을 돈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까 생각하니 막막했다.
민서는 근태를 만나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그 때 그녀는 행복했다. 이렇게 과분한 남자가 자기를 사랑해준다는 것에 자신감도 가졌었다. 그가 베풀어주는 것들에 감사하면서도, 사랑하는 사이인데 이 정도는 받아도 되는 거라며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그가 그녀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떠올려본 민서는 몸서리를 쳤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헤어지자고 하는 거야?’라고 당당히 따지던 근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 남자는 나에게 뭘 바라는 걸까.
성진은 가로수 옆에서 담배 연기를 뿜었다. 뿜으면서 자신이 한 말을 곱씹었다. 경찰을 왜 안 불렀냐. 그 때도 그랬었다. 경찰을 부르자고, 아빠가 엄마를 죽기 직전까지 때린다고, 경찰 아저씨가 아빠를 잡아갔으면 좋겠다고 울면서 소리 질렀었다. 그 때 그의 엄마는 성진을 똑바로 앉혀놓고 단단히 일렀었다. 엄마는 괜찮다고, 금방 나을 거라고. 아빠가 감옥 가면 돈은 누가 벌어 오냐고, 성진이가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은 전부 아빠 덕분이라며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었다.
입맛이 씁쓸해져 성진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구둣발로 짓밟았다. 다 바보 같았다. 저 여자도, 그의 엄마도, 경찰들도.
식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다 먹은 건지 여자가 일어서고 있었다. 뱃속에서 요란하게 꼬르륵소리가 울리기에 많이 먹을 것 같더니, 뚝배기에 밥이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다 먹은 겁니까?”
“네.”
“그럼 가죠.”
그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민서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으로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는 성진의 얼굴을 내내 힐끔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
“자꾸 쳐다보니까.”
“아…….”
운전하느라 모르는 줄 알았는데 보였나보다. 민서는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제 손가락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까요, 전 손님 이름도 모르더라고요. 얼굴만 알지, 이름도 뭣도 아무것도 모르는 분께 이렇게 폐를 끼쳐서 어떻게 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강성진입니다. 깡패고요. 서른넷이고 가족은 없습니다.”
민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성진을 보았다.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로 말한 것 치고는 조금 놀라웠달까.
“아……, 네.”
“깡패라고 해서 그쪽을 어떻게 할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겁내지는 마시고.”
“그,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많으시구나 해서요. 아, 전 한민서예요. 스물여덟이고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는 소리에 재미있다는 듯 성진의 입술이 늘어졌다.
“몇 살인 줄 알았는데?”
“아, 저보다 한두 살 정도 많겠구나 생각했어요.”
“칭찬으로 듣죠.”
침묵이 불편했던 민서가 생긋 웃었다. 이렇게라도 대화가 이어지니 마음이 편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한테는 은인이시고, 나이도 그렇고…….”
성진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입가에 웃음도 스몄다. 지금까지 무수히 들어왔던 형님 소리나 오빠 소리가 질린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여자가 나이를 운운하니 묘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빠라고 부르시면 편히 하죠.”
작가입니다. "강성진입니다. 깡팹니다." 그렇다고요.....
현식은 굳은 표정으로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앞에 엉망이 된 얼굴을 당당하게 들고 앉아있는 젊은 여자가 몹시 껄끄러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그 조폭 같지 않게 생겨먹었던 조폭이 ‘내 여자’라 했었다. 겉으로 봐서는 제 아들인 근태가 그리 집착할만한 점도, 성진이 애지중지할만한 매력도 없어보였다. 그렇다는 건, 저 속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만만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근태의 일을 매번 봐주던 경찰 간부가 성진의 구속 소식을 알려준 후, 그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불안함에 잠도 설쳤었다. 매번 성진의 곁에서 무게를 잡던 덩치 큰 험악한 놈이 당장이라도 들이닥쳐서 그를 협박할 것 같기도 했고, 뉴스에 이런 것이 떴다면서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근태의 폭력사건 기사를 내밀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좋은 제안을 했던 당대표의 번호가 핸드폰에 뜨면 몸이 굳어서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이렇게 불안함에 떨 바에는 차라리 성진을 찾아가서 협상을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민서가 찾아와 준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해보게.”민서는 속으로 천천히 다섯을 세었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말들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입을 열었다.“먼저 사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현식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네깟 게 뭔데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냐고, 내 아들과의 일은 그녀석과 해결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근태와의 일은 유감이네. 변호사를 통해 들었겠지만 충분하게 보상하지.”“유감…….”민서의 표정을 보니, 그의 사과가 마음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식은 내키지 않았지만 말을 더했다.“어쨌거나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가씨 상태를 보니 우리 근태가 좀 심했어.”진심이 담겼다고 느껴지는 사과는 아니었지만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잘못을 인
***민서는 택시에서 내려 커다란 대문 앞에 섰다. 등 뒤에서 택시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그 택시를 멈춰 세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공연히 벌집을 들쑤시는 꼴이 되지 않을까하는 불안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할 수 있다, 한민서. 내가 해야 해.”스스로를 다독인 그녀가 손을 내밀어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 응답이 없어 한 번 더 눌렀다.-누구세요?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인터폰에 얼굴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갔다.“김근태 씨 댁인가요?”-그런데 누구세요?“김근태 씨에 대해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요.”인터폰 너머에서 잠시 부산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사님, 얼른 문 열어줘요. 우리 근태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하지만 사모님.-근태 소식 안다잖아요!전자음이 들리며 대문이 열렸다.-어서 들어와요.“감사합니다.”민서는 들어가 대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안에 넓은 정원을 잠시 둘러보았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잘 관리되고 있는 예쁜 정원이었다. 근태가 부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부자동네로 유명한 곳에 이 정도 규모의 저택에서 살 정도라는 건 몰랐었다. 주눅이 들면서 다시 후회라는 감정이 솔솔 피어올라왔다.저 멀리서 현관문이 열리고 중년 여자가 그녀를 마중 나왔다. 효숙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정원의 반도 가로지르지 못한 민서를 보고 안달을 냈다. 기다리지 못하고 민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민서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표정이 굳어졌다. 젊은 여자애 얼굴이 얼룩덜룩 엉망이었다. 그녀의 아들이 무슨 일로 유치장에 수감되었었는지 너무도 잘 아는 효숙이었기에 민서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근태의 행방을 알 수도 있는 사람이 찾아왔다는 반가움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불편함과 껄끄러움이 생겨났다.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민서는 효숙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먼저 근태가 행방불명이라는 소식부터 전했다. 성진이 근태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생략했다. 폭행사건의 피해자인 민서에게 성진의 폭력적인 면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상처가 다 낫지 않은 그녀였다. 공연히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근식은 그저 근태를 찾는 그의 모친이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고, 민서와 경찰조사를 받을 때 함께 있었던 성진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잡혔다고만 했다. 곽 경사를 향한 점잖은 욕설이 다소 섞인 설명이었다.민서는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구속이라니. 그토록 구속되기를 바라마지 않던 근태는 한 번도 구속된 적이 없었는데, 성진이 구속되었다고 하니, 편파적인 공권력에 화가 났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성진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그…… 김근태는 괜찮은 걸까요?”의외의 질문에 근식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 형님이 경찰에 잡혀갔는데 김근태를 걱정하는 건가? 그 개차반 씨발놈을? 하지만 이어지는 민서의 중얼거림에 그의 표정이 편안해졌다.“안 괜찮았으면 좋겠네요. 죽어버린 거였으면 좋겠어. 성진 씨가 감옥에 있는데…… 그 개새끼가 편안하게 있는 건 말이 안 돼.”걱정하지 말라고, 그 개새끼는 우리 형님이 아주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 없앴다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근식 씨. 제가…… 뭘 해야 할까요?”“네?”“제가 어떻게 해야 성진 씨를 도울 수 있을까요?”민서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근식은 웃었다.“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면회도 몇 번 가 주시면 좋고요.”“그런 거 말고요.”“실력 좋은 변호사님이 형님 사건 맡아주실 겁니다. 그 개새끼가 재판 받는 게 무서워 도망간 걸 가지고 그 개좆만도 못한 경찰 새끼가 건수 잡았다 싶어 엮은 겁니다. 증거도 없으니 곧 풀려나실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하지만…… 처음이라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근식은 웃었다.“변호사님한테 얘기 해 놓겠습니다. 변호사 접견은 수시로 가
***“야, 한영호.”성진과 통화를 마친 근식이 심각한 표정으로 영호를 불렀다. 소파에 드러누워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용호가 고개만 돌려 근식을 쳐다보았다.“왜?”“형님이 김현식 국장이랑 통화할 때 누구 전화로 했냐?”“내꺼.”“강원도 갈 때 네 차도 끌고 갔었나?”“형님 차에 얹혀 가느라 안 가져갔었지.”막힘없는 용호의 대답에 근식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머릿속이 정리가 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형님 구속되셨다. 압수수색 나온다고 하니까 너는 당분간 시온으로 출퇴근하는 걸로 하자. 핸드폰은 바꿔야 할 것 같다. 압수 목록에 네 이름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일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거니까. 너는 그 날 형님이랑 애들 데리고 밤낚시 간 거다.”심드렁한 표정으로 누워있던 용호가 근식의 말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씨발 것들. 핸드폰 바꾼 지 얼마 안됐는데.”“증거 될만한 건 없지?”“우리 물고기님들께서 부지런히 그 새끼 뜯어먹어주셨다면 없지. 그 새끼 달아오던 때도 흔적 안 남기려고 별 지랄을 다 떨었는데 증거가 있겠냐?”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긴 용호가 사무실 출입문을 열다 말고 근식을 돌아보았다. 그는 빨리 안 가고 뭐하냐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는 근식을 향해 손가락 키스를 날렸다.“고생해, 자기.”“씨발 새끼가, 저 병 또 도졌네.”질색하는 근식을 향해 신나게 웃어준 용호가 갔다. 근식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몸서리를 쳤다. 가장 큰 건더기를 처리했으니 잔잔바리들을 처리할 차례였다. 그는 강릉까지 근태를 실어간 동생들을 불러 잡도리했다. 그들은 성진이 근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직접 눈으로 지켜봤던지라 기강이 바짝 서 있는 상태였다. CCTV를 잘 피한 건 물론이고 서울을 벗어나는 과정도 여러 단계를 거쳐 조심해 꼬리가 잡힐 일이 없다고 장담했다. 혹시라도 흔적이 남아 걸리게 되더라도 조직에 피해가 가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근식은 다 같이 술이나 한 잔씩 하라며 지갑에서 오만원권 너댓 장을 꺼
현식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효숙이 마중을 나왔다. 며칠 동안 시커멓게 죽은 낯빛으로 사람이 들어오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이 이렇게 태도가 바뀐 것이었다. 역시 그 깡패새끼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는 가방을 받아드는 효숙을 노려보았다.“왜요.”가방을 받아주었음에도 꼼짝 않고 서 있는 남편을 향해 효숙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경찰 쪽에 힘을 써 줄 사람이 남편 밖에 없었기에 그의 비위를 맞춰주러 나온 마중이었다. 절대로 남편을 향한 원망이 누그러진 게 아니었기에 목소리가 곱게 나오지 않았다.“당신, 경찰서에 갔었어?”“어떻게 알았어요?”“경찰서에…….”현식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누르느라 잠깐 말을 멈췄다.“근태 실종 신고 했어?”“네. 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요.”“도대체 누구 허락을 받고? 왜 쓸 데 없는 짓을 해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느냐고!”일을 벌려놓고 당당한 효숙의 태도에 근식은 폭발했다. 손가락질을 하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효숙이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뒤이어 그녀에게도 분노가 들끓었다.“쓸 데 없는 짓? 쓸 데 없는 지잇? 지금 우리 근태 실종신고 한 게 쓸 데 없는 짓이라고 한 거예요, 당신?”“쓸 데 없는 짓이지, 그럼? 왜 물어보지도 않고 일을 만드냐고!”효숙이 현식의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우리 아들이 사라졌어요! 연락도 안 돼서 불안해하는 나한테 당신, 뭐라 그랬어요? 조용히 반성하면서 공부나 하라고 대전 사찰에 보냈다면서요? 없대요! 대전 그 어느 사찰에도 우리 근태가 없었대요! 그래서 했어요, 실종 신고. 애 아빠라는 사람이 안 찾아주니까 경찰한테 찾아달라고 하려고요!”“내가 보냈댔잖아! 좀 잠잠해지면 어련히 알아서 잘 데리고 올까! 여편네가 겁도 없이 어딜 나서?”“그러게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던가! 당신이 먼저 날 불안하게 만들었잖아요! 나라고 뭐, 좋아서 경찰한테까지 찾아간 줄 알아요?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잘못을 빌기는커녕 되레 따지기 시작하는 효숙의
근식은 아직 성진에게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형수님. 우리 지영이가 칵테일을 한 번도 못 마셔봐서 그런데요. 예전에 그 커피 맛 나는 칵테일 한 번 만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근식이 던졌고.“어머! 커피 맛 나는 칵테일이요? 그런 게 있어요? 궁금해요, 언니! 아니, 힘드신데 무리하지 마세요.”“아니에요, 지영 씨. 힘들지 않고 어렵지도 않아요. 재료만 있으면…… 여기 주류 코너가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있어요, 주류 코너! 제가 알아요!”지영이 덥석 물었다. 그녀는 다시 민서의 팔짱을 끼고 조잘조잘 떠들면서 걸어갔다.“제가 또 한 커피 하거든요. 언니도 전에 제 커피 맛있다고 하셨죠? 그게 또 기술이 있어야 하거든요.”멀어지는 지영의 목소리를 배경삼아 근식이 말을 꺼냈다.“신경 쓰이는 점이 있습니다, 형님. 그 여자가 시온에 명함을 들고 찾아왔다고 하더라고요.”“명함? 늬들 명함 함부로 뿌리고 다녀?”“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애초에 가지고 다니는 애들도 없고요. 얍실이 말로는 그 여자가 아들 방에서 찾았다고 했답니다.”“귀찮게 됐네. 실종신고 한 경찰서가 어디래?”“그것까지는 안 물어봤지만, 뻔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개주둥이 곽 경사가 냄새 맡고 덤벼들지 않겠습니까?”근식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성진이 피식 웃었다.“건수 잡았다고 신나있겠군.”“직접적인 증거 같은 건 못 찾을 겁니다. 경찰서 앞에서 달아 올 때도 신경 많이 썼고요, 작업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그 새끼가 언제는 증거 가지고 덤비든? 지 꼴리는 대로 잡아들여 족치는 종자인데.”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성진은 느긋한 표정이었다.“따로 생각해 두신 게 있습니까? 별로 걱정 안 되시는 거 같은데요.”“글쎄. 힘 써 줄 사람이 있을 듯도 해서.”성진이 말한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는 사이에 주류 코너에 도착해버렸다. 근식은 생각을 멈췄다. 지영이 여러 병의 술을 들고 오는 게 보였기 때문에 머리가 아파졌기 때문이었다.“형수님. 생각해보니까
“츱, 대충들 하지.”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야 덩치 큰 남자가 차장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엇, 형님. 벌써 나오셨습니까?”“그러게 키 주고 가라고 그랬지? 새끼가 말도 안 쳐듣더니.”“제이 그년이 어지간히 앵겨들어야 말이지요, 형님. 그래도 그것이 아니다, 어떻게 형님을 혼자 집에 보내 드리냐, 놓아라, 바짓가랭이 찢어진다 탁 뿌리치고 왔지요. 헤헤.”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운전석으로 향하는 근식의 뒷덜미를 잡은 성진이 손바닥을 내밀었다.“시끄럽고. 차 키 내놓고 넌 다시 들어가.”머뭇거리며 주머니
부딪친 무릎의 통증을 자각할 틈도 없이 머리채를 잡혔다. 그리고 문 닫히는 소리와 잠금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 깡패새끼랑 여태 같이 있다 온 거야?”근태의 목소리도 떨리는 듯했다. 민서는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근태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이거 놔.”“전화도 안 받고, 집에도 없고, 한 시간이나 늦게 들어와?”“이거 놓으라고!”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써보았지만 그의 손은 너무 단단했다.“어쩐지 그 새끼, 가게 근처에 못 오게 하더니……. 가게서 딩굴었냐?
다시 요란하게 몸을 떨어대는 휴대폰을 쳐다보며 민서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정말 받고싶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사과부터 할 테지.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느니, 너 없인 못 산다느니, 앞으로 정말 잘 하겠다느니 온갖 사탕발림을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헤어질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매달릴 것이었다. 알았다고, 용서하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을 사람이었다.어떻게 이런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남자 보는 눈을 기르라던 손님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난 남자 보는 눈이 정말 거지같았던 거야.전화는 잠깐 끊어지는
평소보다 손님이 적은 편이었지만, 자정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새 손님이 들어왔다.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민서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아는 척을 하는 남자는 제법 낯이 익었다. 일행과 뭐라 말을 주고받으며 테이블이 아닌 바에 자리 잡고 앉았다.“가게도 작고 바텐더도 하나뿐이고…….”남자의 일행은 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통찮은 표정이었다.“가게는 작아도 칵테일이 괜찮아. 바텐더 아가씨도 예쁘고 조용하니 좋기만 하구만 괜히 궁시렁거리긴.”남자는 메뉴판을 받아들며 민서에게 슬쩍 윙크를 날렸다. 마주 웃어주는 민서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