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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오빠 조금만 천천히.”
숨넘어가는 소리로 애원하는 여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진은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과 살이 맞부딪치며 나는 ‘탁탁’ 소리의 박자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밀어붙이는 남자의 힘에 흔들리는 여자는 애타게 오빠를 부르짖었다.
“오, 오빠. 잠깐, 아흑, 오빠. 오빠…….”
짧은 숨소리와 함께 성진은 여자의 질 안으로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절정감에 몸을 움찔거리며 더 깊이 여자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사정이 끝나 시들해지는 성기를 여자에게서 빼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뒤처리를 하려는 그의 손을 여자가 슬며시 잡았다.
“빨아줄까?”
“됐어.”
아쉬운 듯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여자였지만, 그는 티슈를 뽑아 축축하게 젖어있는 그의 물건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요새 이상해.”
“뭐가?”
“스타일이 변했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들 체위는 바꿔도 스타일은 잘 안 바뀌는데 말이야.”
성기를 문지르던 손이 멈칫거렸지만, 그는 구겨진 휴지를 바닥에 던지고 벗어놓은 속옷을 집어 들며 물었다.
“그래서, 싫어?”
“어유, 왜 그래, 오빠. 난 오빠 밖에 없는 거 알면서. 그러니까 나 얼른 데려가 달라고.”
달라붙어오는 여자를 슬쩍 밀어내며 벗어놓은 옷을 집어든 그가 피식 웃었다.
“웃지만 말고. 이럴 때마다 스리슬쩍 넘어가려는 거, 모를 줄 알아?”
다시 달라붙어 콧소리를 내는 여자를 떼어내고 지갑을 꺼내 수표 몇 장을 꺼내 침대 위에 던졌다. 시무룩해지는 여자의 머리를 쓱쓱 문질러 쓰다듬고는 그 곳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성진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스타일이 변했다는 여자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변하긴 했지. 예전에는 섹스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영 내키지가 않았다. 습관적으로 여자를 찾고 섹스를 하지만, 그 뒷 느낌이 깔끔하지가 않았다.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아무 것도 없던 집에 이제 여자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가는 것과 문을 열었을 때 아는 척해오는 사람이 있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별다른 감정이 없던 여자였는데, 갈수록 그의 기분이 묘해졌다. 푸르딩딩 부어있던 얼굴이 점차 가라앉으면서 멍 색깔이 점점 시커멓게 변하는 꼴이 눈에 들어올 때면 울컥울컥 화가 치솟았다.
-엄마는 괜찮아. 네가 있어서 엄마는…….
터진 입술 위에 새롭게 생긴 상처를 하고서도 성진을 안고 하염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여인의 모습이 그 위에 겹쳐보여서 그랬으리라.
언젠가 여자에게 했던 충고 ‘남자 보는 눈 좀 길러요’가 생각났다. 피식. 룸미러로 자기 얼굴을 힐끔 쳐다본 형진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여자 패는 개호로잡놈의 새끼에서 벗어나 겨우 자리잡은 곳이 조폭 나부랭이 집이라니, 그 여자도 남자 운은 지지리도 없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냥 조폭 나부랭이도 아니고, 시퍼런 멍과 부은 얼굴, 터진 입술에도 발정하는 변태 조폭 나부랭이 말이다.
민서는 식탁 의자 위에 다리를 끌어안고 앉아서 식탁 위에 놓인 카드키와 신용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사요. 말했듯이 난 집에서 뭘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내 방만 건들지 않으면, 어디를 어떻게 바꾸든 상관없어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언제 돌아오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주방은 사용 흔적이 없었고, 찬장이나 서랍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냉장고는 생수와 맥주가 전부였고, 흔해빠진 라면도 하나 없었다. 아니, 그릇은커녕 수저도 없으니, 정말 들어와서 잠만 자고 나가는 곳이라는 게 실감이 되었달까.
그 사람은 나의 뭘 믿고 이런 걸 떡하니 맡기고 간 걸까. 민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나가서 뭘 사먹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에 끌어안고 있던 다리를 내리고 일어서려는데 현관에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민서는 흠칫 놀라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해야하지? 나가서 맞이해야 하나? 손님 주제에 그래도 되나?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제자리에서 왔다갔다하던 민서가 눈을 들었다. 검은 수트 차림의 성진이 들어오다 말고 멈춰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어서오세요.”
어색하게 인사말을 건넨 민서는 입술을 물었다. 가게에서 손님에게 건네던 인사가 자동으로 나와 버렸다. 할 말이 이것뿐이란 말인가, 속으로 자책하면서.
“나가죠.”
“네?”
나가자고? 어딜? 왜? 남자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멍하게 있던 민서는 자신이 외출 준비를 하고 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깨닫고 부리나케 그가 지정해준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방구석에 둔 가방을 뒤적거려 입고 나갈만한 옷을 꺼냈다. 근태가 찢어놓은 옷들이 주로 외출복이어서, 수트를 입고 있는 남자와 어울릴만한 옷이 없었다. 그저 후줄근해 보이지 않은 것으로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민서를 확인한 남자가 돌아서서 걸었다. 민서는 어색하게 서 있다가 그가 돌아보자 흠칫 놀랐다.
“안 갑니까?”
“아, 네. 가요.”
말없이 가기에, 제 차림이 마음에 안 들어 두고 가려는가 싶었던 민서는 어색하게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말이 없는 사람인 건 알겠지만, 필요한 말은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여긴 왜 온 걸까? 민서는 묻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것 같지 않아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성진이 멈춰선 곳은 여성복 코너였다.
“저는 이런 것…….”
“다 찢어졌잖아요. 입을 만한 걸로 몇 개 골라요.”
“하지만…….”
거부는 거부한다는 오러를 풍기면서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본 민서는 입을 다물었다. 새삼스럽게 수트 차림의 남자 옆에 선 제 모습이 매장 안의 거울에 비쳤다. 청바지에 후드티셔츠. 지독하게 안 어울렸다.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민서의 얼룩덜룩한 얼굴을 보며 잠시 흠칫하며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긴 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금세 되살리며 찾는 물건이 있는지 물어왔다. 남자는 간단히 말했고, 직원은 신나게 여러 벌의 옷을 들고 와서 민서에게 권했다. 망설이는 민서를 본 그는 모두 달라고 했고, 그녀는 기겁을 했다. 민서는 부담감을 끌어안은 채로 괜찮아 보이는 몇 벌을 골랐고, 그 중 하나를 입어봤으며, 그 사이즈에 맞는 것이 여러 벌 담긴 쇼핑백을 손에 들어야 했다.
남자는 또 걸었다. 민서는 뒤를 따라갔다.
멈춰선 곳은 가구 매장이었다. 눈이 동그래진 민서를 보며 남자가 픽 웃었다.
“하루 이틀은 소파에서 자도, 계속 거기서 자는 건 무리입니다. 거기 있으면 나도 불편하고.”
그렇게 침대와 옷장, 서랍장을 샀다. 또 필요한 게 있냐는 물음에 민서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부담감이 목을 졸라오는데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원룸에 모두 있었다. 그가 조금 덜 무서워지면 기회를 봐서 같이 가달라고 부탁해보자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갈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백화점을 나와서 그는 또 별다른 말없이 걸었다. 차가 지하 주차장에 있는데, 그는 도로를 건넜다. 민서는 어디 가냐고 묻지도 못하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도착한 곳은 콩나물국밥집이었다. 민서는 반가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를 따라 들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계속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난 걸 들은 모양이었다.
국밥집에서도 민서의 얼굴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하지만 태연하게 행동하는 민서와, 점잖고 정중하게 대하는 성진의 태도에 모른 척 해주는 분위기였다. 음식은 금방 나왔고, 두 사람은 대화 없이 밥을 먹었다.
“그 새……, 그 자식 아니, 그 사람 다시 연락 온 적 있습니까?”
뜨거운 국밥을 열심히 불어가며 먹던 민서가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걸 잘 먹는가보다. 뚝배기가 거의 비어 있었다. 절반 이상 남은 제 것을 숟가락으로 뒤적이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때 전화를 대신 받아주신 후로는 없어요. 제 원룸이나 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어쩌면 포기했을 지도 모르고요.”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좀 우습지만, 경찰은 왜 안 불렀습니까?”
국밥을 뒤적이던 손이 잠깐 멈췄다.
“불렀죠. 여러 번 불렀어요. 애인 사이에 가벼운 다툼이었다, 넘어져서 다친 거다, 계단에서 굴렀다 거짓말을 잘도 늘어놨어요. 그 사람 집안이 좀 좋은가보더라고요. 조회해보더니 경찰들이 조심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대부분 주의를 주고 끝냈어요. 제 상처가 좀 심했을 때는 하룻밤 가둬놓긴 했는데…… 다음 날 찾아와서 더……. 암튼, 그랬어요. 경찰은 소용이 없어요.”
담담히 늘어놓는 민서의 말에 성진은 험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짭새가 어떠니 하는 걸 보면 경찰을 향한 욕설인가 보았다. 민서는 웃었다.
“말씀하신 대로 남자 보는 눈이 없었네요, 제가.”
성진은 민서를 한참 쳐다보았다. 어색해진 민서가 하하 하고 웃고는 남은 국밥을 먹었다.
“천천히 먹어요. 밖에서 담배 하나 피고 오겠습니다.”
일어서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민서는 숟가락을 놓았다.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과분한 도움을 받아도 되나 불안했다. 근태를 피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것만으로도 생명의 구함을 받은 것 같았는데, 이런 거금까지 쓰게 만들다니. 물론 그가 자발적으로 쓴 돈이긴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으면 쓰지 않았을 돈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까 생각하니 막막했다.
민서는 근태를 만나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그 때 그녀는 행복했다. 이렇게 과분한 남자가 자기를 사랑해준다는 것에 자신감도 가졌었다. 그가 베풀어주는 것들에 감사하면서도, 사랑하는 사이인데 이 정도는 받아도 되는 거라며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그가 그녀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떠올려본 민서는 몸서리를 쳤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헤어지자고 하는 거야?’라고 당당히 따지던 근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 남자는 나에게 뭘 바라는 걸까.
성진은 가로수 옆에서 담배 연기를 뿜었다. 뿜으면서 자신이 한 말을 곱씹었다. 경찰을 왜 안 불렀냐. 그 때도 그랬었다. 경찰을 부르자고, 아빠가 엄마를 죽기 직전까지 때린다고, 경찰 아저씨가 아빠를 잡아갔으면 좋겠다고 울면서 소리 질렀었다. 그 때 그의 엄마는 성진을 똑바로 앉혀놓고 단단히 일렀었다. 엄마는 괜찮다고, 금방 나을 거라고. 아빠가 감옥 가면 돈은 누가 벌어 오냐고, 성진이가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은 전부 아빠 덕분이라며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었다.
입맛이 씁쓸해져 성진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구둣발로 짓밟았다. 다 바보 같았다. 저 여자도, 그의 엄마도, 경찰들도.
식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다 먹은 건지 여자가 일어서고 있었다. 뱃속에서 요란하게 꼬르륵소리가 울리기에 많이 먹을 것 같더니, 뚝배기에 밥이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다 먹은 겁니까?”
“네.”
“그럼 가죠.”
그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민서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으로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는 성진의 얼굴을 내내 힐끔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
“자꾸 쳐다보니까.”
“아…….”
운전하느라 모르는 줄 알았는데 보였나보다. 민서는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제 손가락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까요, 전 손님 이름도 모르더라고요. 얼굴만 알지, 이름도 뭣도 아무것도 모르는 분께 이렇게 폐를 끼쳐서 어떻게 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강성진입니다. 깡패고요. 서른넷이고 가족은 없습니다.”
민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성진을 보았다.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로 말한 것 치고는 조금 놀라웠달까.
“아……, 네.”
“깡패라고 해서 그쪽을 어떻게 할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겁내지는 마시고.”
“그,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많으시구나 해서요. 아, 전 한민서예요. 스물여덟이고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는 소리에 재미있다는 듯 성진의 입술이 늘어졌다.
“몇 살인 줄 알았는데?”
“아, 저보다 한두 살 정도 많겠구나 생각했어요.”
“칭찬으로 듣죠.”
침묵이 불편했던 민서가 생긋 웃었다. 이렇게라도 대화가 이어지니 마음이 편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한테는 은인이시고, 나이도 그렇고…….”
성진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입가에 웃음도 스몄다. 지금까지 무수히 들어왔던 형님 소리나 오빠 소리가 질린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여자가 나이를 운운하니 묘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빠라고 부르시면 편히 하죠.”
작가입니다. "강성진입니다. 깡팹니다." 그렇다고요.....
“자, 잠깐만요.”민서가 몸을 빼보려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등에 가로막혔다. 손등에 비벼지는 입술 감촉에 어색해하는데, 그가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스스로 틀어막은 입에서 놀란 비명소리가 눌려 나왔다.“보지 마라, 동혁아.”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끔거리던 동혁이 근식의 낮은 경고에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네, 형님.”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몸도 마음도 뜨거운 20대 초반의 남성에게는 다소 무리가 있는 주문이었다. 그가 존경해마지않는 큰형님의 애정행각이었다. 성진의 취한 모습도 처음 보지만 여자와 스킨십하는 것도 처음 보는 동혁이었다. 그는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솔직히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큰형님의 품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의 형수님이었다. 룸미러의 각도로 볼 수 있는 건 성진의 뒤통수와 민서의 머리 위쪽 정도였다. 하지만 거칠어진 성진의 숨소리와 민서가 놀라는 소리, 성진이 작게 속삭이며 민서에게 애원하는 목소리는 너무 자극적이어서 자꾸만 룸미러에 시선이 갔다.“키스하게 해줘.”맞닿은 성진의 몸이 뜨거웠다. 그는 계속해서 민서의 손등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민서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민서야. 제발……”‘그쪽’도 아니고 ‘민서 씨’도 아닌 ‘민서야’였다. 간절하게 애원하는 속삭임에 그녀는 흔들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끌어내렸다.“아프게 하지 않을게. 약속해.”입술을 막고 있던 민서의 손이 치워지고, 성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커피향이 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민서는 눈을 감았다.나는 이 남자와의 키스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아닌 척 했지만 이 남자에게 끌리고 있었나보다. 나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존댓말을 쓰면서 거리를 두며 나를 배려해주는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나보다.눈물이 민서의 볼을 타고 흘렀다.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핥았고,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혀를 내밀어 그의 혀를 살짝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성진은 차 뒷좌석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곧 도착입니다, 형님.”“그래.”근식은 룸미러로 성진의 모습을 확인하고 씩 웃었다.황 회장과의 만남이 길어지면서 조금 예민해진 성진이었다. 워낙 성진을 예뻐하는 황 회장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고객들 중 하나였다면 진즉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고간 이야기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성진도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민서가 일하는 바로 가면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 본 적이 없었다.“황 회장님의 제안은 거절하시면 안 됩니다.”“알아.”“아시면서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형님?”“글쎄다. 영 내키지가 않네. 동혁이한테서 연락은?”“별 일 없다고 합니다. 좀 시끄러운 손님들이 와서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 말고는 괜찮답니다.”성진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손님이 적은 한적한 가게라서 민서가 여유롭게 일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는데,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니 마음에 들지 않은 거였다.곧 차가 멈췄고 성진이 내렸다. 골목에 위치한 바 앞은 한적했다. 그는 거침없이 걸어가 바의 출입문을 열었다.“야, 애 죽겠다, 그만 먹여!”“먹고 죽어, 새끼야!”문이 열리자마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하나에 남자 넷 여자 하나. 바에 동혁과 남자 하나. 그는 빠르게 매장 내부의 인원을 파악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민서가 그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어서오세요. 오늘은 늦으셨네요, 손님.”“일이 있어서.”성진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는 민서 앞에 앉았다. 바에 상체를 기대고 서 있던 남자가 성진을 보았다. 30대 중후반 정도의 늘씬한 남자였다.“민서 씨, 이거 차별 같은데? 이 손님은 왜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거야?”“단골이시거든요.”“나도 자주 오잖아. 나도 단골 해주고 반갑게 말 걸어달라고.”“자주 오시는 건 맞는데 우리 사장님 만나러 오시는 거잖아요. 우리 단골손님이랑 비교가 되나요.”“이거 서운한데?”“음, 저한
***성진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원체 그의 체력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민서가 매일 서투르게나마 상처를 소독해주었고, 단백질 위주의 건강에 좋은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수발은 근식의 몫이었다. 사무실과 병원, 성진의 아파트를 오가며 각종 약들과 보양식을 갖다 바쳤다.“빨리 나으십쇼, 형님. 혼자 하려니 죽겠습니다.”“엄살은. 내가 발 빼고 너 혼자 해도 되겠는데?”“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아시죠? 황 회장이 형님을 얼마나 찾는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양 전무 같은 경우에는 형님 없이는 못 맡기겠다고, 형님 복귀하면 연락 달라고 합디다.”“츱, 까탈스런 영감탱이들.”근식이 입혀주는 수트 재킷 단추를 여미며 성진이 혀를 찼다.“황 회장님이 급하신 모양이더라고요, 형님.”“그 양반이 급하거나 말거나.”시계를 차고 지갑을 챙긴 성진이 방을 나와 현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근식이 소지품을 챙겨와 그 뒤를 따랐다.“그래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형님. 황 회장님이 그래도 제일 큰 고객인데 말입니다, 형님.”“시끄러워.”“그러지 마시고, 형수님한테 가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만 황 회장님 얼굴 보고 갑시다, 네?”계속해서 졸라대는 근식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 태도에 성진은 걸음을 멈추고 근식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뭐냐?”“뭐가요?”“그 영감이 뭐라 그래? 또 지랄맞게 굴어?”근식의 눈동자가 슬며시 옆으로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성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런 거 없었습니다. 워낙 그 양반 성격이 불같아서 그러지요. 일처리 느린 거 못 견뎌하시는 분이잖습니까.”“지금 간다고 연락해.”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마디 뱉은 채 걸음을 옮기는 성진의 뒤에서 근식이 쾌재를 불렀다. 성진이 직접 움직인다고 하니 일이 쉬워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성진은 이상할 정도로 나이 많은 고객들에게 잘 먹혔다. 지금은 저렇게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틱틱거리지만, 막상 고객 앞에서는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할 것이었다. 깍듯
성진이 자세한 설명을 피하는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한 민서는 그가 자신을 보면서 웃자 흠칫 놀랐다.아니, 왜 웃고 그러세요. 그쪽이 깡패라는 것만으로도 불법적인 일 한다는 걸 다 설명하신 거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말 옮기는 일 같은 거 안 하니까 그만 쳐다보세요.어색해진 민서가 바쁜 척 손을 놀렸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나 힐끔힐끔 성진을 확인했다.“큰일이다, 민서 씨. 저 사람, 민서 씨한테 관심있나봐.”카페 사장이 민서 쪽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인 채 속삭였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그냥 깡패 아니라 되게 위험한 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혼자 있을 때 저런 손님 들어오면 무섭잖아.”“위험한 손님 아니에요. 오히려 진상 손님을 두 번이나 쫓아내주셨어요.”민서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카페 사장이 ‘그래?’ 하며 놀라더니 성진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성진은 두 사람을 지켜보다 미간을 좁혔다. 두 여자가 서로 속닥거리다가 자신을 보며 웃는 모양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빨리 마시고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민서에게 또 뭐라 속삭이고는 까르르 웃었다.“그러지 마세요, 손님. 전 당분간 누굴 만나거나 할 생각이 없어요.”“어머, 왜?”“그냥…….”여자가 손을 뻗어 민서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민서의 표정이 난처한 기색으로 바뀌었다.마음에 안 들어.그는 다시 블랙 러시안을 들이켰다. 독한 알콜이 목구멍을 태울 듯 덥히고 넘어갔다.“그럼 나 섹스 온 더 비치 말고 다른 거 추천해줘요.”여자가 빨대로 남은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얼음만 남은 빈 잔을 내밀었다. 민서는 잔과 코스터를 수거하고는 메뉴판을 꺼냈다.“이거랑 이것처럼 이름이 섹스 온 더 비치같이 좀 선정적이다 하는 칵테일이 보통은 달콤해서 마시기 좋아요.”“그러다 훅 가고?”여자가 민서에게 윙크를 날렸고, 민서는 손가락 총을 쏘았다.“그렇죠.”“흐응, 궁금하네.”
구석자리에 숨어서 애정행각을 벌이던 커플이 나가고 민서가 테이블을 치우고 돌아오는데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손님이 없으니 일찍 문 닫고 집에 가자고 하려던 성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만을 표했다.“어서오세요.”여자는 민서의 인사에 환하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한 후 성진의 옆자리에 앉았다.“원래 이 시간에 오면 손님이 없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두 분이나 계시네요?”“다른 손님이 없을 때 주로 오셔서 그래요. 오늘도 같은 걸로 드릴까요?”“네. 섹스 온 더 비치로 주세요.”자주 오는 손님인지, 여자와 민서는 살갑게 안부를 주고받았다.“가게 문 닫고 나서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날이 있어요. 술 한 잔이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 사람도 없고, 사람들 바글바글한데서 혼자 청승 떨기 싫은 그런 날이요. 그런 날엔 여기서 칵테일 한 잔 마시는 게 최고더라고요. 그리고 이왕 마시는 거 맛있는 걸로 마셔야죠.”“원래 혼술하러 오시는 분이 많아요. 조용히 한두 잔씩 드시고 가시고요.”허리케인 글라스에 얼음을 담으며 여자의 넋두리 같은 말에 민서가 웃었다. 쉐이커에도 얼음을 담는 민서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성진 쪽으로 여자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동네에선 못 보던 분이시네요. 안녕하세요,”“아, 네.”“근처에 사시나요? 이렇게 근사하게 생기신 분인데 제 기억엔 없어서요.”“아니요.”“댁이 어디신데요?”“……닥산동입니다.”“어머, 멀리도 오셨네요? 근처에 볼일이라도 있으셨나봐요.”“……직장이 근처라.”“어머어머, 무슨 일 하시는데요?”보드카에 이어 오렌지 주스를 쉐이커에 붓던 민서가 눈을 들어 두 사람을 힐끗 보고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혼자서 칵테일 마시러 오는 손님들 중에 가장 빨리 친해진, 붙임성 좋은 카페 사장이었다. 말 수 적은 성진이 귀찮아하는 것이 민서에게는 너무나 잘 보이는데, 손님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깡패입니다.”카페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민서는 ‘쿡’ 짧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민서가 성진과 심상치 않은 사이임을 넌지시 내비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민서를 포기하지 못한 듯, 시덥잖은 농담을 계속해서 던졌다. 민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걸 본 남자의 일행이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내가 뭐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란 말이지.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 법이거든. 가끔 특식도 먹고 말이야. 맛없는 것도 가끔 먹어 줘야, 아! 원래 먹던 게 맛있는 거구나 하고 깨닫기도 한단 말이지.”“그런가요? 전 맛없는 건 굳이 찾아먹지 않는 편이라서요.”“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먹어봐야 아는 것 아니겠어요?”능글맞게 웃는 남자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어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부글부글 속을 끓이고 있던 성진이 참지 못하고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어린놈이 말이 짧네.”앉아있는 성진을 아래위로 훑은 남자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툭 내뱉은 말에 성진의 뒤에 서 있던 동혁이 발끈했다. 성진이 손을 들어 동혁을 말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파리한 안색으로 앉아있는 성진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성진의 생김새도 남자의 생각에 힘을 보냈다.하지만 정면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성진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오른쪽 눈썹 위에서 눈꼬리까지 이어지는 칼자국이었다. 조금이라도 옆으로 비껴 지났다면 실명했을지도 모를 위험한 흉터였다. 그리고 구부정하게 앉아있을 때는 몰랐던 성진의 넓은 어깨와 큰 키에 위압감을 느꼈다.“그쪽도 예절이 썩 훌륭하지 않더라고.”남자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낭패였다. 작고 여리여리한 민서가 사귀는 남자래야 대단할 게 없다 생각했다. 자신이 민서에게 추근덕거릴 때 옆에서 조용히 지켜만 보기에 배알도 없는 놈인 줄 알았다. 덩치 큰 놈이 형님이라 깍듯하게 칭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옆얼굴이 곱상해 만만한 상대라는 오판을 하고 말았다.“아니…… 그게 아니라…….”성진이 남자에게 한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