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예전의 그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생각했다. 계연수는 마땅히 자신을 사모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자신뿐이어야 한다고.설령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보다 더 나은 사내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하지만 훗날에야 그는 깨달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내가 있었고, 계연수에게는 자신 말고 다른 이를 선택할 권리도 있었다.그는 우습게도 그녀 앞에서 냉담한 척했고, 무심한 척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때의 그는 그녀를 원망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면서 왜 자꾸만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걸까? 그렇게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왜 자꾸 가까이하려는 걸까?계연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열등감마저 품게 만들었다.그녀가 물에 빠진 뒤로 그는 수도 없이 그런 감정에 빠져들었다. 마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사람처럼.그리고 누구보다 선명하게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이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늘 계연수 앞에서만큼은 자존심을 놓지 않던 자신도, 언젠가는 더 이상 오만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어쩌면 그날이 오면 계연수의 눈에도 자신은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 될지 몰랐다.그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내이자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한때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사람 역시 이미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으니까.심서준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여 계연수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가장 다정한 힘으로 그녀를 품 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자신의 뜨거운 체온으로 그녀를 녹여 내기라도 하려는 듯.계연수 역시 그런 심서준의 다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에게서 이런 부드러움을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를 받아들였다.이토록 부드럽고 다정한 온기는 사실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지금껏 누군가에게 애틋하게 보듬어지
심서준이 그런 태도를 보이자 계연수 역시 한결 마음이 누그러졌다.그녀는 살며시 심서준의 어깨에 기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다음에 또 저한테 무섭게 구시면 어떻게 할 겁니까?”심서준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되물었다.“네가 말해 보거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하지만 계연수는 막상 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그녀가 심서준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심가는 그의 것이었고,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 역시 그의 것이었다.게다가 심서준의 마음은 늘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던가.무엇이 그를 고개 숙이게 만들 수 있겠는가.그래서 그녀는 늘 이렇게 한발 물러서고 부드럽게 달래는 방법으로 그의 태도를 누그러뜨릴 뿐이었다.애초에 심서준에게 무언가를 해 보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그녀는 그저 심서준과 잘 지내며 평생을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계연수는 조용히 말했다.“생각해 보고 나중에 말씀드릴게요.”심서준은 눈을 내리깔았다.그는 계연수가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심서준은 그녀를 어깨에서 떼어 내어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어스름한 마차 안에서 심서준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아름다운 얼굴이었다.혼인한 뒤로 계연수는 언제나 무심한 듯 담담했다. 늘 평온했고, 세상사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그 얼굴 위에 아주 옅은 근심이 내려앉아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소리 없이 내리는 비 같았다. 빗줄기는 너무 가늘어 몸을 적시지 못하지만 분명 비는 내리고 있었다. 아련하고 흐릿한 산안개가 사람을 감싸듯, 희미한 슬픔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심서준은 계연수가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가느다란 눈썹 아래 드리운 슬픔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아래로 향한 눈길을 바라보았다.짙고 검은 눈동자와 살짝 올라간 눈꼬리. 눈 아래로 부서진 빛이 어른거렸고
그 생각이 스친 순간, 심서준은 문득 고개를 숙여 계연수를 바라보았다.길고 곧은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시선은 곧장 눈앞의 고운 얼굴에 머물렀다.작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희고 깨끗한 뺨에 또렷한 눈썹과 눈매.그를 바라보는 살구빛 눈동자에는 마차 안의 희미한 불빛이 잔잔하게 비치고 있었다.예전처럼 눈길을 피하거나 주눅 든 기색은 없었다.오히려 당당했다.게다가 눈빛에는 약간의 분함과 못마땅함까지 담겨 있었다.심서준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보면 볼수록 지금 이 순간의 계연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그리고 자신이 오래도록 바라 왔던 것이, 마침내 손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음을 느꼈다.하지만 계연수가 다른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본 일은 아직 넘어가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당당하게 말대꾸하는 것도 굳이 따지지 않은 채 물었다.“먼저 말해 보거라. 다른 사내를 그렇게 보는 게 옳은 일이냐?”계연수는 심서준의 험상궂은 표정을 바라보았다.이 사람은 원래 늘 이런 식이었다.좋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언제나 저런 무뚝뚝하고 서늘한 얼굴로 사람을 압박하곤 했다.계연수는 이제 심서준의 성격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문득 그녀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렸다.그녀는 억울한 듯 눈을 들어 올리고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좋게 말하면 될 일을 왜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세요?”심서준은 순간 멈칫했다. 다시 바라본 계연수의 얼굴은 어느새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마치 정말로 그에게 겁을 먹은 사람 같았다.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자신은 전혀 무섭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원래부터 이런 표정이었는데, 계연수는 그걸 무섭다고 했다.게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내리고 몸까지 뒤로 물리고 있었다.심서준은 잠시 굳어 있다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한층 누그러뜨렸다.“널 겁주려던 게 아니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그는 낮게 덧붙
계연수는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져 슬쩍 고개를 들어 심서준의 옆모습을 살폈다.그러나 심서준의 얼굴은 늘 그렇듯 담담하고 서늘하기만 해서,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곰곰이 생각해 봐도 최씨와 함께 극장에 나와 연극을 본 것이 그리 잘못된 일 같지는 않았다.심서준에게 이끌려 마차에 오르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심서준은 곁에 앉은 채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원래도 체격이 큰 사람이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는데, 말까지 없으니 더욱 숨 막히게 느껴졌다.결국 계연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극장에 가는 걸 원치 않으셨나요?”계연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정말 싫었다면 처음부터 말해 주면 될 일이었다. 그랬다면 이번만큼은 굳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녀는 연극 감상에 큰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을 뿐이었다.심서준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한번 바라보더니, 문득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화첩을 가져가 버렸다.계연수는 순간 멍해졌다.아직 한 장도 펼쳐 보지 못했는데...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심서준을 바라보았다.“부군께서도 보고 싶으신가요?”심서준의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그는 화첩을 펼치고는 몇 장을 대충 넘겨보았다.계연수가 옆으로 바짝 다가와 들여다보려 하자, 심서준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계연수를 바라보았다.“그 장군이 그렇게 좋으냐?”계연수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장군이 좋다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부군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심서준은 그녀를 깊이 바라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화첩을 그대로 마차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차 안은 그리 밝지 않았다.게다가 심서준이 너무 빨리 덮어 버린 탓에 계연수는 가까이 들여다봤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그런데 이제는 화첩마저 내던져 버리자 그녀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또 왜 던지시는 거예요?”심서준이 그녀를 바
그때 최씨가 또 비밀이라도 나누듯 작은 책자 하나를 계연수의 손에 슬며시 쥐여 주었다.“이건 밖에서 그린 초상화예요. 제가 보기엔 네다섯 할은 닮았더라고요. 숙모님도 한번 보세요.”계연수는 화첩을 쥔 채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아니나 다를까. 심서준이 두 손을 뒤로 한 채 바로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얼음장처럼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내려다보는 눈빛에, 가늘고 긴 봉황 같은 눈매가 살짝 좁혀져 있었다.그 사이에도 최씨는 여전히 상생이 얼마나 늠름한 분장을 하는지, 무대 밖에서는 또 얼마나 준수한 사람인지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계연수는 급히 최씨의 손을 꼭 쥐었다.최씨도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 계연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놀라 소리를 질렀다.그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다.정말로 깜짝 놀란 것이 분명했다.심소연과 넷째 아가씨도 한창 공연에 빠져 있다가 최씨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고, 곧바로 화들짝 놀랐다.평소에도 그들은 심서준을 가까이하지 못했다.한 지붕 아래 살고는 있었지만 일 년 내내 나누는 말이 몇 마디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항렬도 높았기에 그들에게 사실상 집안 어른과 다를 바 없었다.계연수는 또래라 편하게 말을 섞을 수 있었지만, 심서준은 달랐다. 높은 권세를 지닌 데다 늘 말수가 적었고, 좀처럼 웃는 법도 없었으니 말이다.항상 차갑고 거리감 있는 모습이었기에 최씨 역시 그를 마주할 때면 괜히 긴장부터 됐다.최씨는 급히 몸을 일으켜 예를 올렸다.심서준은 최씨를 한번 바라본 뒤 다시 계연수에게 시선을 돌렸다.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원래도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는데, 말없이 서 있기만 한 지금은 더욱 엄숙하게 느껴졌다.계연수 역시 심서준이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저런 표정까지 짓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방금 자신과 최씨가 나눈 이야기를 들었을까?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들었다고 해도 특별히 문제 될 말은 하지 않았다.계연수는 긴장으로
오늘 공연의 압권은 바로 이 충신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극이었다.무대 아래는 무척이나 떠들썩했다.점소이들은 찻쟁반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능숙하게 오갔고, 객석에서는 떠드는 소리와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계연수가 앉은 관람석은 이층에 마련된 귀빈석이었다.원래 그녀는 연극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하지만 오늘은 최씨가 직접 함께 가자고 권했고, 마침 당분간 심서준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데다 바람도 쐴 겸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따라나선 것이었다.반면, 심소연과 최씨는 유난히 공연을 좋아하는 듯했다.두 사람 모두 무대에 푹 빠져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최씨는 아래를 바라보며 계연수에게 작게 속삭였다.“저 사람은 화춘반의 무생 상생이에요. 화춘반에서도 가장 이름난 간판배우랍니다.”계연수는 고개를 내려 무대를 바라보았다.마침 상생이 몸을 날려 화려하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등 뒤의 깃발이 바람을 가르며 휘날렸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무장 차림 역시 늠름하고 기백이 넘쳐 절로 시선을 끌었다.과연 간판배우라 불릴 만했다.계연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최씨에게 답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최씨는 여전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넋을 잃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계연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물었다.“연극을 자주 보러 오는 모양이네?”최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저랑 셋째 아가씨는 원래 자주 와요. 오늘 공연은 대미를 장식하는 무대라 가장 볼거리가 많거든요. 그래서 숙모님께서도 좋아하실까 싶어 일부러 모시고 왔어요.”그러더니 목소리를 한층 더 낮췄다.“저 상생이라는 배우를 반년 전에 성 서쪽 수륙법회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공연 분장을 하지 않았거든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천도를 위해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는데, 무대 위 모습과는 달리 학자 같은 분위기가 있었어요. 숙모님께서도 보셨다면 분명 좋아하셨을 거예요.”그때 아래에서 다시 한번 우레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상생이 창을 휘두르며 무예 동작을 선보이고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