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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Author: 경옥
계연수는 황제가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살짝 조여들었다.

황후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폐하께서 네 그림을 보신 모양이다. 이만 가 보거라.”

계연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폐하는 본궁과 완전히 다르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친 규범들, 모두 기억하고 있느냐?”

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황후 마마. 모두 익혔습니다.”

황후는 본래도 계연수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방금의 말도 그저 한 번 더 주의를 주려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서둘러 다녀오라 이르렀다.

전갈을 전하러 온 두 명의 궁녀를 따라나서는 동안, 계연수의 마음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이번이 황제를 처음으로 뵙는 자리였다.

더구나, 예전 계부 역시 황제의 한 마디 판결로 무너졌던 기억이 있었다.

그 감정은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감옥에서 아버지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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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877화

    마음속에서 타들어 가는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다. 곁에는 의지할 혈육조차 없었으니, 그 모든 괴로움을 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손보경 역시 이 팽팽한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그녀는 손안에 힘을 주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평온하게 대답했다.“태후마마께서는 그저 집안의 소소한 일들을 물으셨을 뿐입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심한율의 눈 깊은 곳에 희미한 실망이 스쳤다. 워낙 짧은 순간이라 손보경은 알아차리지 못했다.심한율은 한때 손보경에게 마음이 움직인 적이 있었다. 만약 그녀가 태후의 속셈을 솔직히 털어놓았다면, 자신도 마음을 열고 이 여인을 받아들이려 노력했을 것이다.어찌 되었든 손보경은 이미 그의 부인이었다. 부부간의 정리로 보나 도리로 보나, 어려서부터 익혀 온 가르침으로 보나 심한율은 그녀를 박대할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손보경은 여전히 태후의 사람이었다.어쩌면 지금도 태후와 함께 심씨 가문을 해칠 계책을 꾸미고 있을지 몰랐다. 그런데도 손보경은 끝내 단 한마디의 진실조차 털어놓지 않았다.심한율은 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곁을 스쳐 지나가자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바람을 일으켰다. 몇 걸음 옮기던 그는 잠시 멈춰 선 채 손보경에게 말했다.“일찍 쉬거라. 내일 아침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절에 가서 요양하도록 하고.”손보경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부군께서는 오늘 밤 머물지 않으십니까?”심한율은 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아무런 대답도 없이 처소를 나섰다.차가운 밤바람이 옷자락을 파고들었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문득 발길을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등불이 켜진 처소는 고요했고, 희미한 불빛만이 닫힌 창호 너머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그때 어둠 속에서 호위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심한율이 목소리를 낮추어 명했다.“내일부터 사람을 붙여 한시도 눈을 떼지 말거라. 그녀가 절 밖으

  • 주문춘귀   제876화

    심서준의 목소리는 느릿하고 차분했다. 나직하게 이어지는 말에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 특유의 침착함이 배어 있었다. 계연수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못내 뒤숭숭했지만, 이제는 그의 품에 몸을 맡긴 채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심서준은 계연수를 품속으로 한층 깊이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서늘했던 마음까지 천천히 녹여 주었다. 그는 그녀의 미간에 입을 맞춘 뒤, 눈가와 뺨을 따라 부드럽게 내려가더니 마침내 붉은 입술을 가만히 머금었다.그 다정한 입맞춤에는 말로 다 전하지 못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자신이 언제나 그녀의 앞을 지키고 있을 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한편, 부저로 돌아온 손보경은 처소에 발을 들이자마자 시어머니인 만씨의 부름을 받았다.이미 밤이 깊어 바깥은 적막에 잠겨 있었지만, 만씨는 아직 의관도 풀지 않은 채 방 안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 촛불이 간간이 흔들릴 때마다 굳게 다문 입매와 어두운 낯빛 위로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손보경을 기다리는 동안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은 듯,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손보경은 만씨 앞으로 다가가 눈을 내리깔고 공손히 문안을 올렸다.만씨는 그런 며느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고개를 숙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오늘 손보경이 궁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날카로운 가시 하나가 박힌 듯 줄곧 마음을 찔렀다. 태후를 만나 심씨 가문에 관해 무슨 말이라도 꺼냈을까 염려스러웠다.손보경이 입궁한 뒤, 만씨는 이미 집안의 어른들과 이 일을 의논해 두었다. 대감의 뜻도 분명했다. 지금은 영청 후작부의 사건이 매듭지어지는 중요한 시기였다. 만에 하나라도 뜻밖의 변고가 생기는 일을 막으려면 당분간 손보경을 부저 안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만씨는 한동안 손보경을 바라보다

  • 주문춘귀   제875화

    황후는 계연수와 심서준이 돌아갈 채비를 하자 태자에게 두 사람을 배웅하라 이르고, 궁인들에게는 등롱을 밝혀 앞길을 비추게 했다.두 사람이 떠난 뒤, 황후는 황제에게서 풍기는 짙은 술 냄새를 맡고 걱정스레 물었다.“폐하, 오늘도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그러고는 곁에 있던 상궁에게 해장탕을 가져오라 일렀다. 황제는 눈앞의 황후와 그녀가 내민 그릇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없이 받아 들었다.“짐은 오늘 밤 이곳에서 묵겠다.”뜻밖의 말에 황후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젊은 시절, 두 사람의 금실은 더없이 깊었다. 그때 황제의 곁에는 오직 황후 한 사람뿐이었다.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황제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황후가 연이어 두 황자를 낳아 지위가 굳건해진 뒤에야 비로소 후궁을 들이는 일을 고려했을 정도였다.그러나 아무리 깊었던 정이라 해도 세월이 흐르면 빛이 바래기 마련이었다. 황제의 후궁은 여전히 몇 되지 않았지만, 황제가 황후의 처소를 찾지 않은 지도 이미 오래였다.그러니 황후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궁인들을 불러 황제가 머물 채비를 갖추게 했다.*한편 계연수는 심서준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각 안이 덥게 느껴졌건만, 찬 밤공기를 맞으며 한동안 걸은 탓인지 이제는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손에 쥔 화로도 일찌감치 온기를 잃어 손가락 끝까지 차갑게 식어 있었다.심서준은 계연수의 손을 잡았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두 손을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계연수에게서는 은은한 매화 향과 달큼한 과실주의 향기가 한데 어우러져 풍겼다.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얼굴과 부드럽게 풀린 눈매가 더없이 곱고 사랑스러웠다. 심서준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만히 맞댄 채, 애틋함이 밴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부저로 돌아온 두 사람은 목욕으로 차가워진 몸을 녹였다. 이윽고 침상에 나란히 누운 뒤, 계연수는 오늘 밤 황후에게 들은 이야기를 심서준에게 모두

  • 주문춘귀   제874화

    황후는 태자와 계연수가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띠며 물었다.“앞전의 일은 모두 끝났느냐?”강현은 황후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추며 답했다.“네, 끝났습니다. 부황께서는 외숙부와 함께 어서재에서 의논하실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쪽에도 함께 오시겠다고 하셔서, 제가 먼저 와 모후께 말씀드리고 차와 다과를 준비해 두려 했습니다.”황후는 곁에 있던 여관에게 눈짓해 준비를 시킨 뒤, 다시 강현을 바라보았다.“너는 어서재에 함께 있지 않았느냐?”강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외숙부께서 말씀하시길, 개춘 후 영청 후작부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일이니 먼저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하셨지요.”황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외숙부의 말이 옳다. 너는 이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더라도 옳은 선택이 되기 어려울 터이니, 차라리 모른 척하고 묻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다.”그러고는 계연수에게 시선을 돌렸다.“몸은 좀 괜찮아졌느냐?”계연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조금 나아졌습니다.”황후는 다시 사람을 시켜 청현환 몇 알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작은 상자에 담긴 약을 계연수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겨울에는 날씨가 차서 따뜻한 방 안에 오래 머물면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쉽단다. 나도 젊었을 때는 이런 증상이 있었지. 지금은 내가 추위에 익숙해져서, 하루 종일 있어도 답답하지 않단다.”계연수는 손에 놓인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황후가 자신에게 점점 더 깊은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심서준의 아내이기에 베푸는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황후는 자신을 남이 아닌 가족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 따뜻한 변화는 계연수의 마음에도 조용히 와닿았다.그러나 그 평온한 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밖에서 궁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폐하께서 드십니다.”계연수는 순간 정신을

  • 주문춘귀   제873화

    계연수의 말은 진심이었다. 꾸밈을 벗은 손보경이 어떤 사람인지는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터였다.손보경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속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곤녕궁에 이르자 태후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태후는 안으로 들어서는 계연수와 손보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얼굴에 웃음을 띠고 손보경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손보경이 곁으로 다가가자 태후는 그녀를 앉혀 두고 심씨 가문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이것저것 물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후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나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감정을 감춘 채 손보경을 조용히 살폈다.다행히 손보경은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태후의 곁으로 다가갔을 뿐, 겉으로는 심씨 가문에서 힘들게 지낸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태후는 손보경의 손을 잡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심씨 가문에서 너를 박대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돌아와 말하거라. 내가 너를 위해 바로잡아 줄 테니.”손보경은 태후가 일부러 황후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임을 알았다.듣기로는 봄이 시작되면 영청 후작부의 사건도 완전히 매듭지어질 예정이었다. 지금 태후는 황후를 위협하고 있었다. 영청 후작부를 건드린다면 태후 역시 심씨 가문을 옭아맬 명분을 찾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불씨로 이용될 사람이 바로 손보경 자신이었다.그제야 손보경은 심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뼈저리게 깨달았다.지난 몇 달 동안 태후는 끊임없이 서신을 보내 심씨 가문을 탄핵할 구실을 마련하라고 재촉했다. 심지어 모반을 꾀한 것처럼 꾸민 서신까지 만들어 심한율의 서재에 몰래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그러나 심한율은 손보경을 경계하여 서재에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다. 설령 기회가 있었다 해도 손보경 자신이 두려워 차마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일이 뜻대로 성사된다면 심씨 가문에는 모반이라는 대죄가 씌워진다. 그렇게 되면 자신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태후는 몇 번이고 반드시 무사하게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정말 목

  • 주문춘귀   제872화

    계연수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탄다는 사실은 심서준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가 추위를 조금이라도 느낄까 염려해, 온각의 구들불이 한시도 꺼지지 않도록 늘 따뜻하게 데워 두었다.대문 앞에는 손보경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둑한 겨울 저녁, 마차 곁에 홀로 선 모습이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 그녀는 심서준의 품에 폭 감싸인 채 걸어 나오는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순간 넋을 잃었다.자신은 평생토록 계연수처럼 마음 편하고 다정한 나날을 누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짤막한 인사가 오간 뒤, 손보경은 심서준에게 공손히 오숙부라 불렀다. 그러나 심서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계연수의 팔을 받쳐 조심스레 마차에 태웠다. 손보경의 낯빛이 옅게 질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다문 채 뒤편의 마차에 올랐다.입궁한 뒤에는 심서준과 계연수가 서로 갈라져야만 했다. 심서준은 외전으로 향하고, 계연수는 곤녕궁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밤이 내려앉은 궁궐에는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길게 뻗은 궁도를 타고 불어온 찬 바람이 계연수의 망토 자락을 세차게 흔들었다. 두툼한 옷감이 바람에 펄럭이며 연신 파르락거리는 소리를 냈다.심서준은 그런 계연수에게 몸을 조금 기울이고 나직이 당부했다.“이따가 내가 찾아가겠다. 함께 돌아갈 테니 황후마마 곁에서도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집에 있을 때처럼 편히 있으면 된다.”계연수는 망토 자락을 여미며 작게 대답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심서준이 떠난 뒤, 계연수는 손보경과 함께 곤녕궁으로 향했다. 손보경은 이미 후궁의 길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궁인이 앞장서지 않아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두 사람의 발소리가 고요한 궁도 위로 나란히 이어졌다. 양옆에서는 시종들이 말없이 등롱을 들고 따랐고, 바람에 흔들리는 불빛이 길 위에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걷는 내내 손보경은 자꾸만 곁에 있는 계연수의 옆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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