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계연수는 심서준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머리맡의 베개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렀다.하지만 그런 행동은 자신의 성정과도 맞지 않았고, 하인들 입에 오르내릴 말이 생길까 걱정되어 억지로 화를 삼킨 채 몸을 일으켰다.그러다 문득 생각했다.심서준이 보지 말라고 한다고 정말 안 볼 이유가 있나.애초에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막아선 건 그였다. 그러니 계연수는 오히려 끝을 보고 말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계연수는 용춘을 불러 들였다.“이따가 가서 그 책 좀 사 오거라.”사실 용춘 역시 과부가 마지막에 누구를 선택하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결말을 모른 채로는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계연수의 속도 조금은 풀렸다.심서준이 이미 시어머니께 문안을 드리지 못한다고 전해 두었다고 하니, 계연수도 거리낄 것 없이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사실 잠들기 전에도 그녀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심서준에게 괜히 심술이 나서 한밤중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지만, 정작 심서준은 깊이 잠든 탓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까지 푹 잠들었고, 계연수만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분명 심서준을 골탕 먹이려던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고, 괜히 자신만 고생한 셈이었다.생각해 보니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어느새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용춘이 돌아와 침상 곁에 서 있었다.“못 샀습니다.”계연수는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요즘 제일 잘 팔린다는 서책이 아니었느냐 헌데 왜 못 산 것이냐?”용춘이 대답했다.“들리는 말로는 윗선에서 더는 판매하지 못하게 했답니다. 서점마다 전부 자취를 감췄다고 해요.”그러더니 허리를 숙여 계연수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그 책이 너무 많은 남자들과 얽히고설켜 풍기를 해친다고 해서 금서가 됐다네요.”예전 괴담이나 귀신 이야기를 다룬 책들 가운데는 그것보다 훨씬 노골
계연수는 촉촉이 젖은 눈으로 심서준을 올려다보았다.“고작 화본 하나라면서요. 헌데 왜 못 보게 하시는 건데요?”심서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연수야. 네가 꼭 이유를 원한다면, 나는 네가 그런 화본을 읽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계연수는 멍하니 심서준을 바라보았다.그의 눈빛도, 태도도 늘 그랬다.어렴풋이 기억 속 어린 시절의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굳이 이유를 설명하는 것조차 탐탁지 않아 했다.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여겼고 모든 일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야 했다.심서준은 모든 것을 통제했고,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계연수는 자신이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서러웠다.심서준은 계연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를 바라보았다.감았던 눈 사이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려 귀밑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적셨다.희고 고운 뺨도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준 뒤 몸을 돌려 계연수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가슴 한가운데가 꽉 조여 오는 듯했다. 그 자신이 더 괴로울 정도였다.심서준은 그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모레쯤 시간이 날 것 같구나. 그때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마.”계연수는 눈물을 모조리 심서준의 옷깃에 문질러 버렸다. 평소 그가 얼마나 깔끔한 성격인지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더 그랬다. 몇 번 문질러도 성이 차지 않자 아예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목덜미에까지 눈물을 닦아 냈다.눈물은 짭짤하고 축축했다.한번 서러움이 터지자 마치 둑이 무너지듯 멈추지 않았다.심서준의 옷깃은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는 그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꼭 안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계속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면서, 그녀가 제 몸에 마구 기대고 문지르도록 내버려 두었다.아이처럼 구는 계연수의 모습에 심서준의 마음도 조금씩 무너졌다.향기롭고 부드러운 몸이 품 안에서 이리
계연수는 심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에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여기며 그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심서준이 말했다.“그 책은 더 이상 보지 말거라.”계연수는 순간 멈칫했다.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어째서 자신만 읽어선 안 된다는 걸까.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려 했다.화본을 읽는다고 해서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심심풀이로 보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아직 결말도 남아 있었고, 용춘과 은자 열 냥을 걸고 내기까지 한 상태였다. 한창 궁금증이 절정에 달한 지금 읽지 못하게 되는 건, 다른 어느 때보다 괴로운 일이었다.심서준은 이미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는 곁으로 다가온 계연수를 느긋하게 올려다보았다. 따라 들어오면서부터 잔뜩 불만이 쌓인 듯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왠지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굳이 그녀와 이 문제로 이치를 따질 생각은 없었다.“내 누각에 책이 그렇게 많은데, 그걸로는 부족하더냐?”계연수는 눈을 크게 떴다.그제야 오늘 심서준이 자신을 누각에 데려간 이유를 깨달았다.앞으로는 그곳에 있는 책만 읽으라는 뜻이었다.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녀는 곧바로 항의했다.“전 싫어요.”심서준은 침상 위로 올라앉은 채, 여전히 침상 곁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에는 차갑고도 나른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싫어도 상관없다. 천천히 찾아보면 되지. 언젠가는 네 마음에 드는 책도 있을 테니.”그는 다시 계연수를 한번 바라보며 말했다.“이리 와서 누워라.”계연수는 이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막무가내일 수 있나 싶었다.그녀는 홱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심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돌이켜 생각해 보니 계연수에게도 이렇게 큰 성미가 있다는 건 미처 몰랐다.예전에는 자신만 보면 늘 조심스럽고 눈치를 살피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제 앞
계연수는 아직도 조금 믿기지 않았다.싫어하지 않았다면서, 예전에는 만날 때마다 어딘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지 않았던가.그때 심서준이 말했다.“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꽤 좋다. 네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 앞으로는 종종 올라와 보아도 된다.”계연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제가 와도 되는 건가요?”그녀의 기억 속 이곳은 심서준만의 영역과도 같은 장소였다.듣기로는 심씨 노부인조차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고, 입구에는 늘 사람이 지키고 있다고 했다.예전부터 심서준의 서재에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지만, 이곳만큼은 단 한번도 와 본 적이 없었다.심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올 수 있다. 넌 이미 내 부인이지 않느냐.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너도 갈 수 있다.”그러고는 계연수를 깊이 바라보며 덧붙였다.“다만 이곳 책들은 네가 읽는 이야기책들보다 훨씬 읽을 가치가 있겠지.”계연수는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결국 이야기책 읽는 버릇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말이었다.그녀는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심서준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사람이 한평생 사는 이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아닌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보는 것이고, 설령 그것이 시정잡배들이 즐겨 읽는 이야기책이라 해도 자신을 즐겁게 해 준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심서준처럼 엄숙한 사람은 뜻을 조정에 두고 있으니, 그의 즐거움과 자신의 즐거움은 애초에 같을 수 없었다.심서준은 다시 계연수의 손을 잡고 바깥 회랑으로 나갔다.그곳에 서자 시야가 한층 더 탁 트였다.계연수는 난간을 짚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다가 문득 몇 개의 공명등을 발견했다.그녀는 급히 심서준의 소매를 붙잡았다.“부군, 저것 좀 보세요.”심서준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계연수가 저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애초에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으니, 좋아해 주기만 하면 충분했다.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처
계연수에게 물에 빠졌던 그날의 일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그녀는 가끔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심서준이었는데도, 어쩐지 모든 기억이 흐릿했다.그날의 심서준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 지나치게 희미했다. 마치 애초에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계연수는 뒤돌아 심서준을 바라보았다.심서준은 한 걸음 뒤에 서서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기억나느냐?”계연수는 고개를 저었다.“물에 빠진 뒤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오래전부터 품어 왔던 의문을 꺼냈다.“그 일 이후로는 부군께서 저를 만나려 하지 않으셨잖아요.”심서준은 계연수를 한번 바라보았다.“보고 싶지 않았으니까.”그 무렵의 그는 이미 마음을 접은 뒤였으니, 굳이 그녀를 만날 이유도 없었다.그러자 계연수는 다시 물었다.“왜 보고 싶지 않으셨는데요?”심서준은 몸을 돌려 누각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귀찮았으니까.”계연수는 잠시 멍하니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심서준은 예전부터 늘 자신을 귀찮아했다.계연수도 그의 곁으로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제야 이곳의 시야가 얼마나 탁 트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뒷마당은 물론 이곳으로 이어지는 길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길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문득 옛일이 떠올랐다.예전에 이곳으로 오던 길에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오거나, 몰래 작은 돌멩이를 연못에 던져 물고기를 놀리곤 했었다.설마 그 모습도 전부 심서준이 보고 있었던 걸까?그래서였을까.언제나 만년설처럼 차갑기만 하던 심서준이 어느 날 갑자기 먼저 말을 걸어 왔다.연못 속 물고기들이 싫으냐고.계연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도대체 자신은 심서준의 눈에 어떤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가장 초라하고 민망한 모습까지 모두 보여 준 마당에, 이제 와서 어떻게 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순간 계연수는 문득 아득한 기
심서준은 고개를 숙였다.“그 일의 자세한 경위는 정종현이 이미 모두 진술했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저는 돌아가지 않는 편이 낫겠네요.”심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도 가서 한번 보고 싶다면 상관없다.”계연수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고준안 오라버니도 보고 싶지 않고요.”그녀는 정말 고준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렵게 그날 밤의 악몽을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만약 고준안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일 뻔했던 기억도 함께 되살아날 터였다.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불안해졌다.다행히 고준안은 무사했고, 그녀 또한 그 일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심서준은 나직이 응한 뒤 말했다.“나중에 시간이 나면 내가 함께 데리고 가 보마.”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 그에게 입혀주었다.심서준은 순순히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 문득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끝났느냐?”계연수는 잠시 멈칫했다.“뭐가요?”심서준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월경 말이다.”계연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아직 안 끝났어요.”심서준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계연수의 손을 잡고 함께 정원을 거닐러 나갔다.심서준은 원래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풍류를 즐기거나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지금 이 순간 계연수와 함께 정원을 걷고 있으면서도 책상 위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그는 이미 모든 일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확인해야 안심이 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밤늦게 정원을 거니는 일은 계연수의 성미와도 그리 맞지 않았다.원래부터 게으른 편이라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심서준이 드물게 흥을 낸 만큼 그녀도 조용히 곁을 지켰다.오늘 밤은 달빛이 유난히 좋았다.심서준은 계연수를 데리고 한 누각으로 올라갔다.그 누각은 심서준의 서재가 있는 뜰 옆에 자리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