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아침 일찍 일어난 박윤우는 따끈한 온수 팩을 안고 이불속에 드러누웠다.박민정이 박윤우를 깨워 주려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걸 발견했다.“윤우야…”박민정이 부드럽게 불렀다.박윤우가 살며시 눈을 뜨더니 허약하게 말했다.“엄마…”“아들, 어데 아파?”박민정이 걱정되어 물었다.“엄마, 나 어지러워요…”“얼른 일어나, 엄마가 옷 입혀줄게, 병원에 가자.”애가 어지럽다고 하자, 놀란 박민정은 다급히 서두르기 시작했다.박윤우는 어릴 때부터 백혈병으로 앓고 있었기에 설사 작은 병이더라도 끌면 안 되기 때문이다.“엄마, 나 병원에 가기 싫어요. 그냥 집에서 누워 쉬면 안 돼요?”“안되지, 윤우의 이마에 장국 끓일 수 있겠네…”“나 어제 비 맞아서 그래요. 좀 누워 있으면 금방 나을 것 같아요.”박윤우가 변명했다.유남준이 말소리에 깨어나 방에서 나오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지금은 아들이 일 순위이다. 박민정은 어제저녁의 불쾌한 일로 유남준을 무시하지 않았다.“윤우 지금 열이 많이 나고 있어요. ““엄마 출근 안 해요? 아빠랑 병원 가게 해줘요.”박윤우가 유남준을 훔쳐보면서 말했다.“윤우가 아픈데 엄마가 어떻게 출근해? 오늘 휴가 내면 되지.”“근데 엄마 어제도 휴가 냈잖아요. 어차피 아빠는 한가하신데…”그러는 박윤우는 문 입구 편에 서 있는 유남준을 올려보면서 말을 이었다.“아빠가 윤우를 병원에 데리고 가줄 수 있지요? 네? ”유남준은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그래, 민정 씨는 출근해, 윤우는 내가 병원에 데려가면 되지.”유남준이 병원에 데려다주는 것을 원하는 박윤우를 보고 박민정은 묵묵히 옷을 입혀 유남준에게 안겨 주었다.두 사람이 차에 오르기까지 배웅했다.차에 앉은 유남준은 또 박민정을 보면서 신신당부했다.“어제저녁에 한 얘기, 서둘러 결정해.”박윤우만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당장 유준우를 한 대 갈기고 싶은 심정이다.“어제 무슨 일 인데요?”박윤우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주치의가 박윤우의 전면 검진 보고서를 보니 백혈병 외 감기로 인한 발열 증상은 없었다.“수치가 정상입니다.”‘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박윤우가 다급히 변명했다.“의사 선생님, 혹시 제가 병원에 오니 병균이 자동으로 죽은 건 아닐까요?”이에 주치의는 껄껄 웃었다. 따라서 얼마간 짐작이 갔다.병실 밖을 나온 주치의는 유남준에게 말했다.“대표님,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도련님이 유치원에 가기 싫어서 꾀병하는 것이고, 둘째는 아침에 급히 깨어나면 어지럼증을 나타나는 애들도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면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유남준은 당연히 두 번째로 추측했다.“괜찮다니 다행입니다.”병실로 돌아온 유남준은 박윤우를 안고 집으로 향했다.“아빠, 윤우는 유치원도 가기 싫고, 집에도 가기 싫어요. 아빠가 일하는 곳에 가고 싶어요.”박윤우는 오늘 유남준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면서 숨겨진 여자가 누군가 꼭 밝혀낼 타산으로 여태껏 연기 했는데 이대로 순순히 돌아갈 리 없었다.“안 돼! 유치원 가든지, 집으로 가든지 둘 중 하나 선택해!”유남준은 오늘 애를 데리고 놀 여유가 없다.“싫어, 아빠~ 윤우 버리지 말고 데리고 가줘요. 난 아빠 따라서 갈래요. 아빠 윤우 말고 딴 아기 생겼나요?”박윤우가 유남준의 넓적다리를 껴안고 눌러앉아서 응석 부렸다.오가는 사람들이 호기심에 찬 시선을 던져왔다.이에 박윤우는 더 신나서 외쳐댔다.“윤우를 싫어하면서 왜 낳았어요?”“지금 저를 버리려고요? 형이랑, 저는 진짜 불쌍한 애들이에요…”박윤우가 눈물 콧물 쥐어짜서 유남준의 바지에 뿌려 놓았다.‘아빠, 진짜 나빠. 우리를 버리려고 하다니.’유남준은 이런 응석둥이 박윤우를 대치하기 제일 힘들어한다. 애가 또 아프지, 손찌검도 할 수 없고.“알았어, 알았어. 그럼 아빠 따라 회사 가되, 절대 까불면 않되. 조용하게 앉아 있어야 해, 알았지?”“네!”박윤우는 언제 울었냐 싶은 듯 뚝 하고 그쳤다.유
“대표님이 분부하신 이혼 협의서입니다.”강연우가 이혼 협의 서류를 유남준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유남준은 강연우에게 협의 내용을 읽어 달라고 했다.강연우가 협의서 내용을 또박또박 읽어 주었다.“벌써 이혼 서류까지 다 작성했어! 흥!”박윤우가 노기등등하여 ‘탕!’문을 박차고 들어갔다.문소리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누구야?”유남준이 양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박윤우를 보는 순간 강연우가 거침없이 대답했다.“작은 도련님입니다.”왜냐하면 박윤우가 작은 치수의 유남준 마냥 똑 닮았으니 말이다.“아빠! 진짜로 엄마랑 이혼 하려고요?”박윤우는 두 볼이 볼록해서 화를 냈다.유남준은 강연우에게 먼저 나가보라고 손 저었다.“어린이가 어른들의 일에 참견하고 그러면 못써.”강연우가 나간 뒤, 유준우는 화가 나서 팔짝 뛰는 인형 같은 애를 보면서 말했다.”박윤우는 지금 화가 나서 어쩔 바를 몰라 하면서 생각했다.‘형 말이 맞아, 아빠는 바람둥이야!’“윤우는 아빠를 여태껏 믿었는데, 어떻게 우리 엄마를 배신할 수가 있어요! 내가 크면 꼭 복수할 거야!”박윤우의 자그마한 몸은 분노에 못 이겨 바르르 떨고 있었다.이에 유남준은 화를 낼 대신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진짜지? 그럼 얼른 커서 아빠한테 복수해야 해?”유남준은 자기가 그때까지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태연자약하게 대답하는 유남준을 본 박윤우는 화가 상투 밑까지 치밀어 오르는 참,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짜고짜 컵을 들어 유남준을 향해 힘껏 던졌다.‘잘그랑!’컵이 유남준의 어깨를 명중하고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다.컵 부서지는 소리에 서다희가 뛰어 들어왔다. 박윤우가 또다시 ‘흉기’를 찾으려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렸다.“도련님! 그만해요!”“도련님이라 부르지 말아요! 난 당신들의 도련님이 아니에요! 난 박 씨지 유 씨가 아니에요!”박윤우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화가 동했다.자신이 그토록 믿어오던 유남준이 엄마를 배신
서다희의 차에 실려 별장에 도착한 박윤우는 박예찬한테 전화를 걸어 고자질했다.“형, 바람둥이 아빠 있잖아, 엄마랑 이혼 하려 해.“뭐라고?”동생의 말을 들은 박예찬은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박윤우는 훌쩍거리면서 말했다.“어제저녁에 엄마랑 다투는 소리를 들은 듯했는데 안 믿었어. 근데 오늘 회사에서 이혼 협의서까지 작성했어.”유치원에 있는 박예찬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람이 없는 구석을 찾아서 말했다.“대체 무슨 일인지 똑똑히 말해봐.”박윤우는 요즘 발생한 일들을 자초지종 얘기해 주었다.“형, 나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어. 형 말을 들었을 건데.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그래 내가 뭐랬어? 누구도 믿지 말고 형만 믿고 따라와!”박예찬도 화가 부쩍 동해서 말했다.“알았어, 형.”박윤우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형, 아빠는 지금 앞을 못 보는 봉사야. 우리 복수 안 할래? 아빠 돈 깡그리 빼앗을까?”“않되.”박예찬이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왜?”박예찬은 자기가 유남준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말했다.“만일 아빠가 돈 없는 빈털터리라도 되면 또 우리 엄마한테 빌붙을 꺼야. 그니깐 이혼 후 다시 봐.”박윤우가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알았어, 이혼 후에 다시 보지 뭐.”박윤우가 손으로 턱을 고이고 또 말했다.“형, 나 인터넷에 올려서 아빠의 죄행을 다 까밝힐까 봐.“안 돼! 절대 안 돼!”박예찬이 명령하는 어투로 외쳤다.“왜? 왜 안 되는 건데?”박윤우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럼, 바람둥이 아빠를 그대로 둬?“인터넷에 올리면 엄마까지 당할 수 있으니깐 절대 않되. 알았지?”박예찬이 차근차근 타일렀다.“알았어, 형.”형의 말에 일리는 있지만 그대로 참고만 있으려니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였다.무슨 수를 쓰더라도 유남준을 괴롭힐 예정이다.통화를 마친 뒤 박예찬은 은근히 박민정이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다.호산 그룹.박민정은 일에 몰두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유남준과 이
두원 별장박민정이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기 바쁘게 별장 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윤우 도련님, 이건 던지면 안 돼요. 이건 사장님이 제일 좋아하는 골동품인데…”‘쟁그랑!’또 하나의 비싼 도자기가 박살 났다. 조각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이를 본 박민정이 쏜살같이 달려갔다.박민정이 돌아온 걸 본 가정부들은 구세주를 본 것처럼 기뻐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윤우 도련님이 한창 화를 내고 있어요. 아무리 말려도 안 돼요.”‘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무슨 일이지?’박민정은 다급히 안쪽으로 들어갔다.박민정의 뒤를 이어 추경은이 따라 들어왔다.경비원한테 박민정과 함께 온 거라고 뻥 치면서 들어왔다.지금 거실은 물론, 주방, 서재까지 온통 수라장이 되었다.“도련님, 노트북은 물로 씻으면 안 돼요!”가정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박민정이 소리에 따라 뛰어갔을 무렵 노트북이 이미 세면대 물속에 빠져있었다.“박윤우!”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신나게 집안 물건들을 작살내고 있던 박윤우는 박민정의 고함에 깜짝 놀라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박민정을 올려다보았다.“엄마, 왔어요?”박윤우는 엉거주춤하면서 자그마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박민정의 두 눈은 노여움으로 이글거렸다.박윤우는 태어나서부터 몸이 늘 안 좋아 박민정이 애지중지 길러왔다.“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박민정이 돌아오면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저지른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부쩍 당황했다.거짓말하고 싶었지만, 박민정의 두 눈과 마주치는 순간 김빠진 공처럼 풀이 죽어 서 있었다.박민정은 스스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가가서 물었다.“왜 행패 부려?”박윤우는 머리를 떨구고 아무런 변명도 안 했다.이런 박윤우를 지켜보는 박민정은 가슴이 짜릿하게 아팠다.하지만 행패 부리는 애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얘기해 봐. 대체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그제야 박윤우는 말문을 열었다.“엄마, 윤우는 알고 있어요, 저 사람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알콩달콩하더니 벌써 이혼하다니?’추경은은 유남준이 박민정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니 언젠가는 이혼으로 끝날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웃음이 흘렀다.윤우의 손목을 잡고 서재에서 뛰쳐나오던 박민정은 추경은과 마주쳤다.그녀는 너랑 할 말이 없다는 듯 윤우의 손을 잡고 두원 별장을 떠나려 했다.“어머, 새언니. 이렇게 늦은 밤에 어딜 가려고요?”추경은이 가식을 떨었다.“저리 비켜!”박민정이 쌀쌀하게 쏘아붙였다.“부부싸움에 툭 하면 가출하는 건 애한테 안 좋아요.”추경은의 심보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박민정은 상대도 하기 싫어서 외면했다.박민정은 정민기에게 바로 전화해서 박씨 가문 옛 저택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박민정이 떠난 후 추경은의 입꼬리는 잔뜩 올라갔다.추경은은 컵을 가져와 더운물을 받았다.이를 본 가정부가 말했다.“제가 사장님한테 가져다드릴게요.”가정부는 추경은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종래로 가사 도우미를 사람으로 취급한 적이 없었다.사모님과 윤우 도련님이 집을 비웠으니 대신 특별히 이 여자를 방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추경은은 두 눈을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넌 뭐야? 꺼져! 이 집에 여주인이 바뀐 거 안 보이냐?”가정부는 어이가 없는 듯 말했다.“얼굴이 두꺼워도 분수가 있어야지요. 사모님과 사장님은 아직 이혼 안 했어요. 그들 사이엔 애들도 있고요.”이에 추경은은 픽 웃었다.“방금 못 들었어? 둘이 내일 당장 이혼 한다고 말했잖아! 어디서 오지랖은! 내가 이 집 여주인이 되면 너부터 해고 할 거야.”말이 끝나기 바쁘게 막아선 가정부를 확 밀쳐내고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그러고는 서재의 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누구야?”“오빠, 저예요”그녀는 목청을 가다듬어 말했다.“오빠, 물 좀 마셔요.”지난번의 일을 겪고 난 유남준은 추경은이 준 물을 마실 리가 없었다.“저리 비켜!”말하면서 추경은의 손을 화다닥 밀쳐냈다.더운물이
박윤우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응, 알고 있어.”모든 걸 떠나서 자기 엄마만큼은 그 어떠한 상처도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그런 아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박민정은 이마에 뽀뽀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했다.“윤우야, 미안해. 아까 두원 별장에서 엄마가 이유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너한테 소리 질러서 미안해. 엄마가 진심으로 사과할게.”그러자 박윤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엄마, 사과할 필요 없어. 지금까지 엄마한테 화 난 적도 없었고 앞으로 화가 날 일도 절대 없을 거야.”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포근한 봄바람이 스쳐 가듯이 마음은 이내 따뜻하고 흐뭇하기만 했다.두 아들을 낳은 것이야말로 이번 생에서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았다.두 아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버텼고 더 열심히 살아가게 할 동력이기도 하니 말이다.때로는 든든한 아들로 때로는 다정한 ‘딸’로 곁을 지켜주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침실로 박윤우를 보내고 나서 박민정 역시 자기 침실로 돌아왔다.어찌 됐든 안정적인 숙면을 유지해야 하는 시기이니 말이다.임신한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파동이 너무 심해도 안 된다.유남준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미친 소리를 하더라도 절대 똑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한편, 방안에서.민수아는 그만 참지 못하고 약혼자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정이랑 너희 대표님 혹시 싸웠어?”다짜고짜 들려오는 질문에 서다희는 의아하기만 했다.“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오늘 윤우까지 데리고 박씨 가문 본가로 왔거든. 보통 여자가 애를 데리고 친정으로 오는 건 백이면 백 남편이랑 싸워서 오는 거야.”민수아는 결코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박민정에게 다른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계속 캐묻기에는 실례인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었다.서다희는 민수아의 말을 듣고서 답을 하기보다는 당부부터 했다.“임신한 상황에 윤우까지 챙기랴 사모님께서 매우 힘드실 거야. 그러니 수아 네가 시간 되면 옆에서 좀 잘 챙겨드려. 절대 그
“남준 오빠, 우리 언제 출발해?”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추경은이 옆에서 물었다.“9시 후에.”박민정에게 알린 시간은 9시 30분이었다.확실한 답을 듣고 난 추경은은 마침내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속으로는 기뻐해 마지 못하고 있으나 겉으로는 위하는 척하면서 물었다.“근데 이혼이 무슨 소꿉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영란 이모한테 알려야 하는 거 아니야?”“이혼하고 나서.”유남준은 당연히 유씨 가문 모든 사람에게 알리려는 생각이었다.아니면 그 누구도 모르게 되니 말이다.더욱더 확실한 답을 얻게 되자, 추경은은 두 사람의 ‘인연’이 정말로 끝을 맺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긴, 오빠가 이혼하든 결혼을 하든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등을 의자에 기대고 앉은 유남준은 추경은이 계속 옆에서 중얼거리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입 아프지 않아?”그 말에 추경은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뻘쭘하기 그지없었다.한쪽에 있던 가정부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하여 바로 손으로 입을 막았다.그 누가 보더라도 추경은에 대한 유남준의 마음은 뻔했다.엄청나게 싫어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하지만 알면서도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뻔뻔한 것인지 추경은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남자보다는 여자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추구할 때 더 쉽다면서.언젠가는 넘어오게 되어 있다면서.마침내 9시가 되었고 추경은 바로 유남준 따라서 차에 올랐다.부 좌석에 앉아 있던 서다희는 차에 오른 추경은을 보고서 마냥 이상하기만 했다.“추경은 씨는...”하지만 서다희가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말을 끊어버렸다.“내가 같이 가자고 했어.”서다희는 그 말을 듣고서 더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시는지...’9시 20여 분쯤, 차는 가정 법원 앞에 이르렀다.이미 가정 법원에서 유남준을 기다리고 있었던 박민정이 보였다.서다희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보고서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이미 도착하셨습니다.”“응.”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