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우는 정신을 차리고, 마음의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앞으로는 윤소현이 감히 더는 짜증을 부리지 못하게 만들 거야.”유남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홍주영은 유남우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전에 해외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만 해도 유남우는 언제나 다정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던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무겁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홍주영은 유남우가 절대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도련님. 윤소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솔직하게 말씀하시고 파혼하는 게 낫지 않나요? 굳이 자신을 이렇게 괴롭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홍주영은 진심으로 말했다. 유남우는 괴롭다는 말에 곁눈으로 홍주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호산그룹의 대표이자 유씨 가문의 운명을 쥔 사람이야. 걸을 수도 있고, 움직일 수도 있어. 뭐가 괴롭다는 거지?" 홍주영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주영은 유남우가 평생 안고 있던 상처가 그의 병약한 몸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네." ...회사에서 박민정은 곧바로 윤소현과 계속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의 통보를 받았다. 더군다나 이제 윤소현은 태아의 건강을 위해서, 박민정이 병원으로 가서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 박민정은 이게 분명 자신을 괴롭히려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할 수 없었다. 마케팅 5팀의 직원들도 이 소식을 듣고 걱정스러워했다. "팀장님, 팀장님도 임신 중이신데, 이렇게 여기저기 뛰어다니시는 건 너무 무리 아닙니까?" "괜찮아, 너희는 너희 일에만 집중해." 박민정은 현재 자신이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박민정은 부하 직원들의 업무를 배정해 주고 곧바로 윤소현과 협의하기 위해서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윤소현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정수미가 앉아 있었다. 정수미는 딸이 병원에 입원
정수미가 떠나고 병실에는 박민정과 윤소현 둘만 남았다.박민정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 서류를 윤소현 앞에 내밀었다.“윤 대표님, 이것은 두 회사의 협력 보고서입니다.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주세요.”그러나 윤소현은 서류를 받지 않고 말했다.“목이 말라. 물 한 잔 가져다줄 수 있어?”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윤소현에게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윤소현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온수로 다시 가져다줘.”윤소현은 일부러 트집을 잡았다.“동생, 이렇게 물도 제대로 못 따르는 사람이 호산 마케팅 부서에서 팀장으로 일한다는 게 말이 돼?”“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다른 사람을 찾으셔도 됩니다.”박민정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윤소현은 입가에 조소를 띠며 말했다.“나는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않을 거야. 네가 어떻게 할 건데?”“지금 당장 다시 온수로 가져와!”윤소현은 컵을 다시 박민정에게 내밀었다.박민정은 컵을 받으려 손을 뻗었다.그러나 윤소현은 손을 들어 물을 박민정에게 거칠게 쏟아부었다.박민정은 피할 틈도 없이 온몸이 물에 젖었다. 천천히 주먹을 쥐며 감정을 억눌렀다.“기분 안 좋아?”윤소현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네가 원망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야. 배경이 없으니 내가 이렇게 괴롭힐 수 있는 거야. 맞지?”윤소현이 말한 것이 사실이었다.만약 박민정에게도 정수미 같은 어머니가 있었다면, 아무도 박민정을 괴롭힐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고영란도 박민정을 두려워했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박민정은 자기 친어머니가 누구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박민정은 윤소현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고개를 들어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정수미 씨가 윤소현 씨를 평생 지켜줄 수 있기를 기도하세요.”윤소현은 박민정의 말을 듣고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지만, 여전히 지고 싶지 않았다.“우리 엄마가 늙어 돌아가실 수도 있지만, 나는 엄마의 유일한 딸이야. 엄마가 돌아가시면 모든 재산은 내 것이
이 순간. 진주시의 한 보육원에서.원장실 안에서 정수미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원장님, 제 친딸이 지금 어디에 있나요?”원장은 정수미를 먼저 앉히고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했다.정수미는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정수미는 항상 친딸을 찾고 싶어 했고 이제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드디어 작은 실마리를 찾은 것이었다.“며칠 전 보육원의 선생님께서 누군가가 28년 전에 이곳에서 한 여자아이를 입양해 갔다며 그 아이의 친부모가 누구인지 물어봤다고 하더군요.”원장은 그 당시 입양 기록을 꺼내 들었다.기록부 이미 누렇게 변색하여 많은 부분이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 겨울에 입양된 여자아이는 단 두 명뿐이었다.그중 하나가 정수미의 딸이었다.“그 아이가 이제 자라서 친부모를 찾으러 온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기록이 많이 없어졌지만, 그 아이가 정수민 씨의 딸일 확률은 반반이죠.”정수미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정수미는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원장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그분이 혹시라도 정체가 드러날까, 걱정했는지 이름이나 거주지를 남기지 않았어요.”정수미의 마음은 계속해서 조마조마했다.“그러면 제가 어떻게 그분을 찾을 수 있죠?”“그 아이가 오늘 오후에 다시 와서 등록하고 친자 확인을 위해 혈연 정보를 남기겠다고 약속했어요.”정수미는 가슴속에 얹혀 있던 돌이 조금이나마 내려가는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좋아요. 제가 여기서 그분을 기다리겠어요.”정수미는 친딸을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 딸이 어떻게 생겼을지, 지금 잘 지내고 있을지 몹시 궁금해졌다.정수미는 딸이 좋은 가정에 입양되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정수미는 이미 결심했다. 아이를 찾기만 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최상의 삶을 제공하고 결코 아이에게 다시는 어떤 고통이나 억울함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윤소현은 더 묻고 싶었지만, 정수미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다.윤소현의 마음속 불안이 점점 커져만 갔다. ‘보육원? 엄마가 보육원에? 일하러 간다더니, 무슨 일이지?’윤소현은 입양된 딸로서 늘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까 두려웠다. 정수미와는 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정수미가 자신을 버릴 가능성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윤소현은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저의 엄마가 요즘 뭘 하고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한수민 씨 말씀인가요? 아니면 정 대표님?”윤소현은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당연히 정수미 씨죠. 한수민 씨는 엄마 자격도 없으니까,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네, 네. 알겠습니다.”비서는 전화를 끊고 속으로 윤소현을 은근히 경멸했다.친어머니조차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정말 배은망덕하다고 여겼다.그러나 비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정수미라면, 원하기만 하면 자녀조차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비서는 정수미의 일정을 살피기 시작했고 윤소현은 혹시라도 정수미가 보육원에서 새로운 동생을 데려올까 불안했다....박씨 가문 옛 저택.박민정은 집에 돌아와 소파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오늘 하루는 지치고 고단했다.박윤우는 엄마 옆에서 조용히 서서 아무 말 없이 박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민수아는 그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왜 유남준이 박민정과 이혼했는지 심지어 아이까지 돌보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민수아는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런 상황에서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게 흔한 이유라는 걸 깨달았다.“민정아, 피곤하면 침대에서 자는 게 어때?”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안 피곤해.”민수아는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알겠어.”그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박민정은 일어나며 생각했다.‘이상하네. 이 시간에 누구지?’민수아가 나서며 말했다.“내가 나가볼게.”“고마워.”민수아가 문을 열고 나가
박민정의 말에도 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았고 달빛 아래 유남준의 모습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어떻게 해야 네가 진주시를 떠나겠어? 1800억이면 충분하지 않아?”유남준은 곧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많은 고민 끝에 박민정과 아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가 또다시 돈을 언급하자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날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죠? 난 떠나지 않을 거고 진주시에 남아서 호산에도 계속 다닐 거예요.”박민정은 유남준이 무슨 계획을 꾸미는지 지켜보려 했다. 만약 유남준에게 정말 다른 여자가 생겼다면, 절대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박민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유남준은 그녀의 고집을 알기에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서다희가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어떻게 됐나요?”“동의하지 않았어.”유남준은 짧게 대답했다.서다희는 예상했던 대로 박민정이 거절할 거로 생각했다.“그럼 어떻게 할까요? 강제로 데리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서다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차에 올라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만두자.”박민정의 성격상 강제로 데리고 가면 오히려 의심만 커지고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게다가 박민정과 박윤우는 쉽게 데려갈 수 있지만, 정민기와 박예찬까지 데리고 가는 건 복잡한 일이었다.서다희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조용히 있었다.“이제 돌아갈까요?”“넌 돌아가. 난 여기 좀 더 있을게.”유남준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서다희는 그가 박민정을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한편, 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에게 민수아와 박윤우가 다가와 물었다.“유남준이 왜 왔어?”“별일 아니야.”박민정은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은 더 묻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밤이 되자 박민정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열었다. 카톡에 냉지석으로부터 메
“만약 실패해도 괜찮아. 자책하지 마. 넌 그저 최선을 다하면 돼.”유남준의 얼굴은 담담했고 그는 곧 닥쳐올 일에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듯 보였다.김인우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반드시 최선을 다할게.”...다른 병원에서 윤소현은 밤새워 기다렸지만, 다음 날에도 정수미는 오지 않았다.대신 정수미의 비서가 찾아왔다.“윤소현 씨.”“어떻게 됐어요? 알아낸 게 있나요?”윤소현은 다급하게 물었다.비서는 침착하게 대답했다.“정 대표님께서 보육원에서 친딸을 찾고 계신다는 소식입니다.”윤소현의 심장이 순간 내려앉았다.정수미가 친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정수미는 윤소현이 철이 들기 시작한 때부터 줄곧 딸을 찾아왔다. 그렇게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친딸을 찾고 있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친딸을 찾고 있다니. 나를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가?'윤소현은 손을 꽉 쥐며 분노에 휩싸였다.‘나는 엄마를 위해 친엄마와의 관계도 끊었는데, 왜 엄마는 나를 위해 친딸 찾는 걸 포기할 수 없는 거지?'비서는 윤소현의 얼굴에서 무서운 감정이 엿보였지만, 말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맞장구쳤다.“20년 넘게 못 찾았다면 이제는 더 이상 찾기 어려울 것 같아요.”윤소현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어제 정수미가 너무 격앙된 모습을 보면서 뭔가 단서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믿을 만한 사람들을 보내서 엄마를 주시하게 해요. 절대 들키지 말고 엄마가 친딸에 대해 무슨 단서를 쥐고 있는지 확인해요.”“알겠습니다.”비서는 즉시 대답했다.비서가 떠난 후에도 윤소현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원래는 정수미가 다른 아이를 입양할까 봐 걱정했지만, 이제는 정수미가 친딸을 찾을까 봐 더욱 불안했다.정수미 같은 사람이라면 친딸에게는 절대 소홀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정씨 가문의 재산은 더 이상 윤소현에게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윤소현은 더는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윤소현은 곧바로 정수미에게
윤소현은 즉시 침대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더 초췌하고 불쌍해 보이도록 만들었다.“소현아, 괜찮니?”정수미는 급하게 방으로 들어오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소현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많이 나아졌어요. 이제 좀 덜 아파요. 아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윤소현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만약 죽으면 엄마는 혼자 남아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윤소현은 정수미를 끌어안았다.정수미는 윤소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소중한 딸이 어떻게 죽겠니?”윤소현은 훌쩍이며 말했다.“엄마, 방금 생각해 봤는데요. 동생이 엄마 곁에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제가 죽더라도 동생이 있으니까요.”정수미는 윤소현이 자신이 친딸을 찾는 것을 반대할까 봐 걱정했는데 윤소현이 직접 언급하니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소현아, 엄마는 네 동생을 찾는 걸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어. 하늘이 도와주는 건지, 이제 곧 네 동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윤소현의 마음이 싸늘해졌다.정수미가 친딸을 찾으면 윤소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하지만 겉으로는 너그러운 척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정말이에요?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정수미는 약간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아직 찾지는 못했어. 단지 실마리가 생긴 것뿐이야.”“그렇군요. 엄마, 꼭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윤소현은 정수미를 위로했다.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바란다.”윤소현은 어떻게 단서를 찾았는지 다시 물었다.정수미는 사업에서는 날카롭고 능숙했지만, 윤소현 앞에서는 그렇게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다.어제 원장이 한 말을 다시 한번 윤소현에게 이야기해 주었다.“그렇군요. 그러면 가능성은 반반인 거네요. 그 사람이 엄마의 딸이 아닐 가능성도 있는 거죠?”윤소현이 물었다.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도 그 반의 가능성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윤소현은 겉으로는 더 묻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
악몽에서 깨어난 한수민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꿈에 그녀는 끝까지 박형식의 용서를 받지 못했으며 곁에 있던 사람들도 그녀 곁을 깡그리 떠나버렸다.정신이 흐리터분한 한수민은 두 팔로 자기의 앙상한 몸을 감싸안고 한쪽 구석에 옹송그려 앉아있었다.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지금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꽈르릉!’창문을 진동하는 천둥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린 한수민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리고 채 못 뜬 목도리를 마저 마무리 짓고, 정리해 두었던 모든 물건은 수납함에 넣어두었다.계속해서 그녀는 편지를 썼다.이 모든 것을 마친 뒤, 비로소 한시름 놓인 듯 침대에 올라가서 누웠다.심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뱃속은 수많은 칼로 휘젓는 듯 아팠다. 의사를 부르려 했지만, 부를 힘도 없거니와 와주는 의사조차도 없었다.그녀는 스스로 오늘 저녁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느껴졌다.몸을 뒤척일 힘마저 잃은 한수민은 쏟아지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이렇게 혼자서 외롭게 죽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제발 누군가 다가와서 곁을 지켜주길 갈망했다.“아파…”안간힘을 다 써서 외쳤지만, 어렴풋한 이 한마디밖에 뱉지 못했다.간병인은 이미 깊숙이 잠들었는지라 깨워지질 않았다.기진맥진한 한수민은 곁에 있는 초인종마저 누를 힘이 없었다.‘이게 바로 천벌인가 봐!’그녀는 한없이 후회했다. 한데 인제 와서 땅을 친 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헉…’동틀 무렵, 한수민은 드디어 가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주검은 지금의 한수민으로 말하면 일종의 해탈이라 할 수 있다.간병인이 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두 시간 지난 뒤였다. 시체는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부인님…”간병인은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내가 깊게 잠들지만 않았어도…’간병인은 크게 후회했다. 한수민을 간호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의 변화를 차츰차츰 보아온지라 슬퍼서 눈물을 몇 방울 떨군 후 박민정한테 전화했다.박씨 가문 옛 저택오늘도 평범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