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우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실은 그전까지만 해도 남준 씨가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자기 안전은 뒤로하고 나부터 살리려고 하던 남준 씨를 바라보면서 알게 되었죠. 나한테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처음에는 아이들 때문에 남준 씨랑 다시 만나기로 한 거였어요. 근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느새 내 마음도 기울이고 있더라고요.”유남우는 그 모든 말을 듣고 있으면서 부드러운 눈매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그 말인즉슨,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때 유남우는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괜찮아요? 병원에 갈까요?”박민정이 물었다.그러자 유남우는 손을 흔들면서 기침이 좀 줄어들고 난 뒤 텀블러를 꺼내 들어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마셨다.“괜찮아. 고질병이라서 그래.”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운전기사는 유남준이 있는 장원 안으로 핸들을 꺾었다.아주 외진 곳으로 사방에 경호원이 깔려 있으며 바람이 풀잎에 스치기만 해도 유남우는 모두 알게 되어 있다.“여기야. 그만 내리자.”“네.”박민정과 유남우는 그렇게 차에서 내렸다.장원 안은 엄청나게 밝았고 두 사람이 아직 집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물건을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에 갈래! 집에 갈래! 집... 집에 보내줘...”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민정은 심장이 바짝 조여왔다.이때 유남우가 입을 열었다.“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형 더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의문을 품고 문을 여는 그 순간 박민정은 바로 알 수 있었다.널찍한 거실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고 유남준은 엉클어진 옷차림으로 머리까지 흐트러진 것이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지금 한창 질서 없이 물건을 던지고 있었다.도우미들은 행여나 다치기라도 할까 봐 멀리 떨어져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박민정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꽃병 하나가 박민정을 향
유남준의 현재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리는 박민정이다.박민정의 말에 유남우는 걸음을 멈추었다.“안 돼.”“형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너도 봤잖아. 너랑 아이들 다칠 수도 있어. 그리고 이곳엔 의료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어. 무엇보다도 너희 두 사람 이미 이혼했는데, 형을 너한테로 보낸다고 하면 우리 집안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유남우의 설명을 듣고 나니 박민정은 자기가 조금 전에 뱉었던 말이 이상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유남준에게는 강력한 유씨 가문이 받쳐주고 있으니 이곳에서 치료를 받는 게 자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다시 판단하게 되었다.“네, 그럼, 수고하세요.”“수고라니... 우리 친형인데 동생인 나만큼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유남우는 그럴듯하게 대답했다.이윽고 유남우는 본래 직접 박민정을 집까지 바래다주려고 했으나 회사로 돌아가겠다고 박민정이 거절했다.회사로 가면 운전기사가 데리러 온다고 말이다.유남우는 곳곳마다 자기와 거리를 두려는 박민정의 태도에 달갑지 않았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박민정이 자기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유남우는 다시 유남준이 있는 장원으로 돌아왔다.도착하자마자 도우미 한 명을 밖으로 불러와 물었다“오늘은 어땠어?”“도련님께서 오늘 낮에는 주무시기만 하셨습니다. 오후 3시쯤이 되어서야 깨어나셨고 깨어나자마자 물건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겨우 진정하시고 또다시 주무고 계십니다.”도우미가 공손하게 대답했다.유남우는 그 말을 묵묵히 듣고서 유남준이 있는 방으로 천천히 다가갔다.도우미의 말대로 자는 유남준이 보였다.씻지도 않은 채 온몸이 지저분한 것이 카리스마를 풍기면서 상업계를 주름잡던 그 유남준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내려가 봐.”“네.”도우미는 내려가기 전에 방문을 닫아주었다.방안에 둘만 남게 되자, 유남우는 손을 내밀어 유남준의 팔을 다쳤다.“형.”유남준은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인기척에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유남준이다.“형!”
유명훈이 맨 앞에 앉아있었다. 고영란과 유남우는 나란히 앉아 있었고 늘 강인하기만 하던 그녀도 지금은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실려 오는 서다희의 모습에 고영란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서 비서, 어쩌다 이지경이 된 거야?”들것에 엎드린 서다희가 고개를 들어 고영란 옆의 유남우를 쳐다보았다. 이곳에 부른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었기에 서다희는 먼저 고자질 하지 않았다. “큰사모님, 어르신.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어요?”“남준이가 왜 머리를 열고 수술을 한 건가? 왜 미치광이가 된 거야?”유명훈이 물었다. 서다희가 순간 멍해졌다. “미치광이요?”유남우가 걸어내려 오며 말했다. “이게 바로 서 비서님이 한 짓이에요.”유남우는 휴대폰으로 영상 하나 서다희에게 보여주었다. 영상을 보던 서다희의 눈빛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럴 리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거지?”‘결국, 수술이 실패한 건가?’유남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혹시 우리 형, 이보다 더 한 일도 겪었어야 했나요?”서다희에게 따져 묻는 유남우는 김인우의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워낙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김인우에게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 영상 속 유남준의 모습을 보는 서다희의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저희는 대표님 머리에서 유리 조각 하나를 발견했어요. 그 유리 조각은 대표님의 기억에 가끔씩 이지만 혼란을 가져왔어요. 그 이유로 대표님은 수술을 통해 기억력을 회복하고 싶어 하셨죠. 하지만 그 수술은 후유증을 남길 수 있었어요. 바로 지적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였죠.”서다희는 유남준의 시력 회복을 위해서였다는 얘기는 숨겼다. 유남준이 괜찮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서다희의 대답에 말을 잇지 못했다. 고영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는데 왜
최현아의 말을 들은 유명훈이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남준이가 누굴 마음에 뒀는데?”“그거야 물어볼 필요도 없죠. 당연히 경은 아가씨죠. 할아버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남준 도련님께서 민정 씨와 이혼할 때도 경은 아가씨를 데리고 갔다니까요.”최현아가 말했다. 유명훈은 유남준과 추경은이 눈이 맞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지금의 추씨 가문은 예전과 달리 이미 쇠락하고 있었다. 게다가 추경은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으니 그녀에게는 힘 있는 친정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유남준에게 어울리는 짝은 아니었다. “할아버님께서 경은 아가씨 어렸을 때부터 봐오셨잖아요. 예쁜데다 착하고 효심이 지극하기까지 한 아이예요. 남준 도련님께서 앞을 못 보는 지금이 상황에 경은 아가씨가 보살펴준다면 훨씬 마음이 놓이잖아요.”최현아에게는 그녀만의 계획이 있었다. 추경은은 의지할 곳도, 권력도 없는 아이였고 보기에도 쉽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추경은이 유남준과 결혼한다면 최현아와 유성혁은 더 이상 유남준을 경계할 필요가 없이 그저 유남우 부부만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최현아의 말을 들은 유명훈의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 유남준이 앞을 보지 못하고 지능에도 문제가 생겼으니 그의 곁에는 확실히 그를 보살펴줄 여자가 필요했다. 특히 그를 사랑해 줄 여자 말이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추경은이라면 유남준을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자네 말이 맞아.”유명훈이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그 아이에게 알려주어야 해.”“뭘요?”“우리 남준이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 그 아이가 남준이를 보살피려 하겠지 모르겠네.”“그건 물을 필요도 없어요. 당연히 도련님을 보살펴 주겠다고 할 거예요.”최현아가 확신하며 말했다. 그녀의 대답에 유명훈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좋아. 내일 그 아이에게 오라고 해. 일단 민준이를 한 달간 보살펴 보고 한 달 후에 그 아이와 민준이가 결혼할 수 있도록 말해주지.”“네,
“애초부터 위험한 수술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박민정이 따지듯 물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서다희가 대답했다. “모든 수술엔 위험부담이 있어요. 민정 씨는 이젠 대표님과 이혼하셨으니 두 분 사이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그러니 저도 민정 씨께 너무 많은 걸 알려드릴 순 없어요.”서다희는 유남준과 만약 수술에 실패한다면 박민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수술마저 실패한 마당에 박민정에게 괜한 고민을 안겨 줄 필요는 없었다. 박민정은 몇 가지 더 묻고 싶었지만 서다희가 또 말을 이었다. “수아가 마음이 착해서 남을 돕는 걸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민정 씨도 집주인이라는 명분으로 과분한 부탁을 하시면 안되죠.”“수아를 통해 저에게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부탁드릴게요.”서다희가 뚝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니 박민정도 더 이상 그에게 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다희 역시도 무리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박민정이 툭 손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눈엔 실망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민수아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다희는 무슨 일로 찾은 거야? 너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냐? 내가 대신 물어볼까?”박민정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그래도 돼. 이미 충분히 물어봤어. 괜찮아.”“그럼 다행이네.”민수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박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다희와 유남준은 분명 일부러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박민정은 내일 기회를 봐서 다시 유남준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정말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이든 아니면 다른 문제든 그녀는 꼭 자초지종을 알아내야 했다. ...다음 날. 꽃단장한 추경은이 회사에 나타났다. 그녀는 일부러 회사에서 유씨 가문의 차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박민정도 아침 일찍 출근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일부러 박민정 앞으로 다가온 추경은이 말했다. “새언... 아, 아니. 민정 씨.”박민정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마음이 놓이는구나.”유명훈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이따 남준이를 봐도 놀라지 마렴. 꼭 남준이를 잘 보살펴야 해.”추경은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님.”시동은 건 차량이 저택으로 향했다. 유남우는 일찍부터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행여나 무슨 변수라도 생길까 불안했다. 그는 추경은 그 아이가 지금의 유남준을 보살피겠다고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차량이 도착하자 추경은은 유명훈을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다. “남우야, 경은이를 데려왔으니 남준이 보러 가자꾸나.”“네.”유남우가 앞장서 걸었다. 유남준을 왜 이렇게 외진 곳으로 옮긴걸 까? 추경은은 의아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의 궁금증을 묻지 않은 채 유명훈을 따라 안쪽 방에 도착했다. 이때,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유남준은 안방 침대에 누워있었다.저택 밖에서는 도우미들이 어젯밤 유남준이 깨버린 물건을 처리하며 테이블을 정리했다. “형 깼어요?”유남우가 도우미에게 물었다. 도우미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침에 잠깐 깨셨다가 지금은 다시 잠드셨어요.”유남우가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방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유남준은 이불을 덮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지저분한 사에는 그가 어젯밤 샤워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지금의 유남준은 그저 단순히 미쳤다는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지금의 그는 폭력적인 성향까지 있어 도우미들도 감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유남우의 등 뒤로 추경은이 힐끔 유남준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남준 오빠 혹시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추경은이 물었다. 유남우는 어젯밤 난리를 피우던 유남준의 모습을 떠올렸다. 게다가 수술을 마친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계속 잠을 자는 것도 어쩌면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오빠는 할아버님과 먼저 들어가.
추경은은 결국 유남준에게 쫓겨났다. 밖으로 나온 추경은의 얼굴은 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남준 오빠가 왜 저러는 거예요?”추경은이 큰소리로 물었다. 방금 추경은에게 쫓겨난 도우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추경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그제야 도우미의 몸 이곳저곳에도 멍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전부 지금 그녀보다는 나은 모습이었다. 최소한 피는 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방금 추경은은 하마터면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짜 모습을 드러낼 뻔했다. “말해요. 내가 할어버님께 말씀드려서 당신들 자르나 못 자르나 테스트라도 해보고 싶은 거예요?”도우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추경은이 협박했다. 도우미 한 명이 그제야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아가씨, 작은도련님께서 큰도련님을 모시고 오셨을 때부터 이미 저런 모습이셨어요. 아마 미치신 것 같아요.”‘미쳐?’추경은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줄곧 사랑하던 남자가 미쳐버렸다니.‘어쩐지 할아버님이 내가 차에 타자마자 계속 오빠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시더라니. 게다가 한 달 후엔 오빠와 결혼할 수 있도록 얘기해 주겠다고 하셨잖아.’‘그 모든 게 오빠가 미쳤기 때문이라니. 그래서 할아버님이 날 선택하신 거야.’빨갛게 열이 오른 볼이 따끔거렸다. “분명 얼마 전까진 멀쩡했잖아요. 왜 갑자기 미친 거예요?”“아가씨, 모르시겠지만 큰도련님께서 전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치셨어요. 아마 그 교통사고와 연관 있는 것 같아요.”도우미가 말했다. “그럼 치료될 가능성은 있는 거예요?”추경은이 물었다. 도우미는 마치 멍청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추경은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미쳤어요. 의학적으로 얘기하면 신경이 손상되었다는 얘기죠. 이미 손상된 신경을 어떻게 치료하겠어요. 남은 생은 아마 계속 이렇겠죠.”‘이번 생은 계속 이럴 거라고?’추경은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졌다. ‘그러니까, 난 미친놈이랑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서 유남우는 침묵을 유지했다.간절함이 가득한 두 눈으로 박민정은 계속 애원하면서 부탁했다.“제발 남준 씨 좀 만나게 해줘요.”그러한 모습으로 변한 유남준이 무척이나 걱정되는 박민정이다.만약 유남우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면 박민정은 고영란을 찾아가기로 내심 결정했다.필경 아이들의 할머니이므로 유남준을 만나게 주리라 생각했다.“알았어. 근데 조심해야 할 거야.”유남우는 끝끝내 박민정의 고집에 넘어가고 말았다.“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퇴근하고 같이 가자. 지금 형 상황이 좋지 않아. 감정 기복이 워낙 심해서 저택 쪽에 있는 도우미들 형한테 맞지 않은 사람이 없어.”유남우는 바로 덧붙였다.“알았어요. 그럼, 좀 부탁할게요. 별일 없으면 그만 나가서 일볼 게요.”박민정은 말하고 나서 뒤돌아 떠났다.“그래.”박민정이 사무실에서 나가자 유남우는 바로 저택 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어 유남준의 현재 상황을 체크했다.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라고 도우미가 말했다.걸핏하면 사람을 때리고 우락부락하고 있다면서.추경은 역시 유남준에게 맞았고 더러운 물까지 부었다고 했다.도우미의 말을 듣고서 유남우가 물었다.“의사는요? 가지 않았어요?”“오셨습니다. 큰 도련님께서 이제 막 잠이 드셔서 지금 검사 중이십니다.”“알았어요.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요.”“네.”유남우는 전화를 끊었다.퇴근하자마자 유남우는 박민정을 데리고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유남우는 저택 집사의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고영란이 와 있다고 했다.유남우는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왜 이제서야 알리는 거예요!”“사모님께서 오실 줄 몰랐습니다. 말린다고 하더라도 소용없고 말입니다.”집사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덧붙였다.“큰 도련님께 진정제를 놓아주셔서 아마 한, 두 시간 안으로는 깨어나시지 못할 겁니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남우는 저택 집사에게 미리 말한 바가 있었다.자기 허락 없이 누군가가 유남준을 보러 온다면 거듭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