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들이 한사코 물고 늘어지자 보다 못한 정수미도 앞으로 나서게 되었다.“주주 여러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씨 가문이 주주로 들어온 이상 절대 여러분을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요.”유석진은 말뿐이지만, 정수미는 정말로 호산 그룹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서울에서 악랄하고 독하기도 명성이 자자한 정수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따라서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고 있던 주주들은 동시에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고영란은 상황이 어느 정도 완화되자 결혼식을 계속 진행했다.오늘과 같은 광경은 인생에서 처음이라 함미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동하는 박예찬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갔다.“동하야.”뒤늦게 정신을 차리게 된 함미현은 동하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아이를 찾아 나섰다.한편, 동하는 박예찬을 박윤우로 착각하고 쪼르르 달려와 말을 걸었다.“윤우 형, 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박예찬은 덤덤한 모습으로 동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난 윤우가 아니라 윤우의 쌍둥이 형인 박예찬이라고 해.”순간 동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박윤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나 박윤우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으니 말이다.어린아이에게는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동하를 찾아 나선 함미현은 곧바로 두 아이를 보게 되었다.함미현 역시 박예찬을 보자마자 박윤우인 줄 알았다.‘아닌데... 윤우는 오늘 화동으로 서고 있잖아...’그렇게 모자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박민정과 조하랑이 다가왔다.“동하야, 동하가 잘못 본 거야. 얘는 윤우가 아니라 예찬이 형이야.”“예찬이는 윤우랑 쌍둥이라 똑같이 생긴 거야.”그 말을 듣고서 동하는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몰랐는지 어슴푸레한 두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함미현은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두 아이 모두 멋지고 귀엽고 영특하니 말이다.박민정은 박예찬에게 잠깐 동하랑 같이 놀아주라고 했다.이윽고 함미현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미
간신히 주주들을 달래 놓자마자 빅뉴스가 터지고 말았다.기사 헤드 라인에는 유남우가 권씨 가문 두 형제와 연합하여 호산 그룹의 많은 재산을 옮긴 것으로 적혀 있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만약 저 기사가 사실이라면... 유 대표, 이건 범죄야!”“정말로 우리 돈을 몰래 옮긴 거야?”“...”주주들은 마침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평범하게 흘러갈 줄 알았던 결혼식에서 이렇게 많은 일이 터질 것으로 생각지도 못한 고영란이다.주주들은 유남우에게 해답을 요구하고 있었다.누군가가 일부러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유남우는 알고 있었다.다만 요즘 경계하지 않았을 뿐이고 상대가 누군지도 전혀 모른다.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크게 번지자 윤소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남우 씨, 이게 다 사실이에요?”유남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주주를 포함한 하객들에게 말했다.“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모든 걸 지켜본 박민정 역시 덩달아 조급해졌다.‘누굴까? 왜 남우 씨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걸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걸까?’하지만 주주들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다.“유 대표, 지금 당장 설명하도록 해! 아니면 결혼이고 뭐고 나 그런 거 몰라.”“맞아!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 다른 대표 앉힐 거야!”“...”고영란과 유씨 가문의 친척들만 제외하고 모두 좋은 구경이라도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고영란도 어찌 할 수 없었다.설령 고씨 가문을 입 밖으로 낸다고 하더라도 그 어떠한 역할도 일으키지 못할 것 같았다.정수미 역시 나서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재산을 몰래 옮겼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게 된다면, 그건 바로 감옥행이나 다름없는 일이다.유남우를 사지로 몰고 있던 그 찰나, 홀 대문이 열리면서 경호원 복장을 한 사람들 사이로 유남준이 걸어 나왔다.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유남준에게 쏠리게 되었다.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채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결혼식장에 나타난 유남준.유남준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오랜 시간 호산 그룹에서 일해 온 주주가 유남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유 대표님, 괜찮으셔서 참 다행입니다. 이제 그만 돌아오시기 바랍니다.”“그래요. 대표님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단 말이에요.”“유 대표님, 사실이 그러합니다. 호산 그룹은 대표님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듭니다.”“...”주주들의 말을 듣게 된 유석진은 얼굴이 점점 험상궂어졌다.‘미친 거 아니야? 유남준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내가 이렇게 버젓이 서 있는데도?’유남준의 윗사람으로서 유석진은 그런 말들이 거북하기만 했다.지금 가장 황당하고 다급한 사람은 윤소현일 것이다.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으로서 결혼식이 망친 건 고사하고 자기 남편의 자리를 대체하려고 하는 사람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다들 똑바로 알고 계세요! 남우 씨가 아니면 우리 엄마는 절대 호산 그룹에 그 어떠한 지지도 하지 않을 거예요!”윤소현은 발끈하며 말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그 말을 듣게 된 정수미는 윤소현이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껏 펼쳐진 모든 상황으로 보아 유남우에게 불리한 국면인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만약 이러한 시국에서 협박하는 말까지 서슴지 않게 한다면 유남우에게 화만 안겨줄 것이다.“윤소현 씨, 그 말은 지엔 그룹의 지지가 없다면 우리 호산 그룹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까?”“우리 호산 그룹, 지엔 그룹보다 못난 게 없어요. 지엔 그룹의 투자금을 받게 된다면 호산 그룹에 있어서는 금상첨화일 뿐이에요. 그 말인즉슨, 지엔 그룹의 투자금이 호산 그룹의 생사를 좌우지할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에요.”“호산 그룹의 생사는 결정할 수 없지만, 윤소현 씨 남편이 앞으로 호산 그룹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지는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네요.”주주들은 윤소현의 말을 듣고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더 이상 윤소현의 체면을 돌보지도 않고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오랜 시간 동안 상인으로 일해 온 주주들이
“그리고 유남준 시력은 대체 언제 회복한 거야?”궁금증이 폭발한 조하랑이다.박민정은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대충 둘러댔다.“말하자면 길어. 궁금하면 인우 씨한테 물어봐봐.”“인우 씨도 아는 일이야?”조하랑은 더더욱 어리둥절해졌다.“대충 알 거야.”박민정은 지금 머릿속이 제법 복잡하다.‘남준 씨 대체 왜 저러는 걸까?’동생이 망쳐놓은 걸 수습하고 있는 형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동생을 미친 듯이 깎아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윤소현은 어느새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시집오자마자 이런 치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말이다.‘젠장!’만약 정수미가 계속 눈짓을 보내고 참으라고 한 게 아니었다면 윤소현은 이미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하지만 유남우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서류를 건네받으면서 인사까지 했다.“형, 고마워.”평온한 모습으로 뱉은 말이었지만, 살기가 가득한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그렇다, 유남우는 아주 철저하게 지고 말았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유남준은 유남우에게 길이길이 남을 교훈을 남겨 주었다.서다희는 유남우에게 서류를 건네주고 나서 나지막한 소리로 유남우의 귓가에 속삭였다.“남우 도련님, 저희 대표님께서 이미 봐주신 겁니다. 도련님께서 대표님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던 건 이로써 끝마치겠으나 앞으로 부디 잠자코 지내시길 바랍니다.”필경 유남우는 유남준을 완전히 헤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유남준은 자기 동생을 직접 죽일 수도 없었다.하지만 이번 교훈은 직접 죽이는 것보다 유남우에게 더욱 치명적일 것이라는 점을 유남준은 믿고 있었다.유남우의 쌍둥이 형으로서 유남준은 동생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아 하고 덤덤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지만, 그 누구도 보다도 존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남우라는 것을.모든 걸 마치고 서다희는 다시 유남준의 곁으로 돌아왔다.결혼식은 계속 진행되었지만,
유남우는 윤소현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일어나. 그만 가자.”윤소현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네...”고영란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유남우를 따라서 떠났다.윤소현 때문에 번번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를 때마다 고영란은 맏며느리인 박민정이 예쁘기만 했다.두 사람이 가고 난 뒤 고영란은 바로 유남준에게 물었다.“남준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제 엄마 보이는 거야? 그 수술은 또 뭐고.”수술하고 나서 유남우가 자기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다는 것을 고영란에게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을 유남준은 알고 있었다.두 아들 모두 고영란에게 아픈 손가락이니 말이다.따라서 유남준은 수술 후유증이라고 둘러대면서 이제 다 낳았다고 했다.“그런 거였어? 그럼, 됐어.”“이제 건강에도 이상이 없으니 민정이랑 다시 회복해. 하루라도 빨리.”고영란이 말했다.그녀는 박민정이 자기를 구해준 뒤로 박민정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하지만 고영란이 말하지 않아도 유남준은 가장 먼저 박민정과 재혼을 하려고 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어느새 밤이 드리워졌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데리고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길에, 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그녀가 피해버렸다.“저 아직 재혼한다고 허락하지 않았어요.”이혼하자고 한 사람도 유남준이고 재혼하자고 한 사람도 유남준이다.세상이 그를 중심에 두고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순순히 모든 걸 유남준의 뜻에 따라 하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의 말에 유남준은 순간 걸음까지 멈추며 어리둥절해했다.“왜? 화났어?”유남준은 오늘 자기가 유남우의 결혼식을 깽판 친 것 때문에 박민정이 화난 줄로 착각하고 있다.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박민정이다.“네! 화가 나지 않겠어요?”‘내가 무슨 상품도 아니고... 좋으면 사고 싫으면 반품하는 거야?’박민정은 걸음을 재촉하며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이 남자가 긴 다리를 내디디며 곧바로 쫓아왔다.“남우 일은 남우
유남준은 그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흘겨보기만 하고서 또다시 잔을 기울였다.한걸음에 달려온 방성원이 다가와 말렸다.“남준아, 너 회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적당히 마셔.”김인우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뒤늦게 말리기 시작했다.“그래. 일단은 몸부터 챙기고 봐야지. 그만 마셔.”자기 몸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유남준이다.하지만 조금 전 박민정이 했던 말만 떠올리면 가슴 한쪽 곁이 아프고 답답하여 술로 마비시켜야 할 것만 같았다.이윽고 유남준은 다시 잔을 들어 한꺼번에 마셨다.“이 정도는 괜찮아.”그 정도로 마셨다가 없던 병도 생길 기세였다.그러나 두 사람은 유남준을 말릴 수가 없었다.김인우는 의사로서 알코올이 지금 유남준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알고 있다.따라서 김인우는 기회를 틈타 룸에서 나와 잠시 망설이다가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늦은 밤, 박민정은 이제 막 잠에 들었는데 벨 소리에 깨어나고 말았다.“여보세요.”“형수, 나야.”김인우는 바로 설명하기 시작했다.“지금 시간 돼? 혹시 제호로 좀 올 수 있어? 남준이가 계속 술을 마셔서 그래.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고 술만 마시고 있어.”박민정은 아직 비몽사몽인 상황이다.유남준이 왜 술을 마시고 있는지 그 이유를 김인우는 모를 리가 없다.유남준은 의미 없는 술을 마시지 않고 절제되지 않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이렇게 술을 퍼붓고 있는 이유가 모두 박민정 때문이라는 것을 실은 잘 알고 있다.“형수, 나랑 성원이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래. 형수가 와서 좀 말리면 안 돼? 지금 남준이 몸 상황이 어떤지 형수도 잘 알잖아.”주저리주저리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김인우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이 시간에 술을 마시고 있다고요? 구사일생한 사람이 그래도 되는 거예요?”박민정은 졸려서 누우면 당장 기절할 것만 같았다.“인우 씨, 저 안 가요. 임신한 몸이라 움직이기 불편해요.”유남준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마다했던 그 박민정이 아니다.지
유남준은 바로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김인우와 방성원은 모든 걸 꿰뚫어 보고서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남자도 사랑에 빠지니 나쁜 건 아니네. 몸도 알아서 챙기고 말이야.”김인우가 웃으면서 말했다.실은 방성원 역시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남준이도 갔으니 나도 슬슬 일어날게.”“뭐? 우리 둘이 마셔도 되잖아.”말하면서 김인우는 술잔을 기울였다.그러자 방성원은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나 술 끊은 지 꽤 됐어.”그 한마디에 김인우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언제?”“은정이 태어난 뒤로.”방성원은 멈칫거리다가 덧붙였다.“술 마시고 내가 은정이를 안으면 자꾸 울고 그랬거든.”말을 마치고 방성원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본의 아니게 홀로 룸 안에 남겨진 김인우는 착잡하기 그지없었다.‘한 놈은 아내 바라기가 되고 한 놈은 딸바보가 되고... 나 원 참...’‘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거야?’김인우는 혼자 술 마시기에 너무 심심하여 매니저한테 사람들을 좀 데리고 오라고 했다.그러자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오게 되었다.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이지원이 버젓이 살아서 나타난 것이었다.심지어 제호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었다.김인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지원 앞으로 다가갔다.이지원은 그제야 ‘손님’이 김인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순간 동공이 움츠러들면서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김인우는 한 걸음 더 다가와 있었다.“와... 너 정말 끈질기다? 아직도 살아 있는 거야?”김인우는 혀를 내두르면서 말했다.그 한마디에 이지원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인우 오빠, 저...”“닥쳐! 그렇게 부르지 마!”자기한테 ‘인우 오빠’라고 하고 있는 이지원의 모습이 너무 역겨웠다.심심할 틈에 이지원을 만나게 되어 순간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김인우는 다른 여자들을 내보내고 이지원만 룸에 남게 하였다.다리에 힘이 쫙 풀린 이지원은 바로 김인우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인우 오빠... 아니, 인우
“그래? 그럼, 너 박민정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김인우의 물음에 이지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네, 민정이한테 꼭 사과할게요.”“잘 생각하고 사과하는 게 좋을 거야. 사과는 말로만 해서 되는 거 아니야. 어떻게 하면 성의 있게 사과할 수 있을까 거듭 생각하고 나서 행동으로 옮기도록 해.”김인우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말했다.그 말을 듣고서도 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네, 그렇게 할게요.”김인우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충고’를 건넸다.“딱 3일만 준다! 그 어떠한 수작도 부리지 마!”“도망을 가도 내가 반드시 잡을 것이고 죽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살려내서 네가 사과하고 난 뒤에 다시 죽일 거야!”김인우는 이지원에게 사람까지 붙였다.절대 진주시에서 나갈 수 없게끔, 절대 자기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말이다.김인우가 룸에서 나가고 난 뒤, 이지원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요즘 처참하기 그지없게 살고 있는 건 사실이다.하지만 이지원은 단 한 번도 생각을 멈춘 적이 없다.어떻게 하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박민정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갈 수 있는지...이지원 역시 기사로 윤소현과 유남우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었다.물론 한수민이 죽은 것까지 알게 되었다.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지원과는 모두 무관한 일들이었다.하지만 이지원의 시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정수미이다.지엔 그룹의 여자 대표로서 유씨 가문의 어르신까지 정수미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딸을 찾는다고 신문에 기사를 올린 것도 본 적이 있다.기사 내용은 둘째치고 이지원은 그 기사에 적힌 주소가 자기가 지냈던 그 보육원이라는 점을 캐치하게 되었다.이지원은 혹시나 하는 마음을 안고 시도해 보려고 했었다.어쩌면 자기가 정수미의 딸일지도 모른다면서.얼굴이 예쁘니 부모님 역시 만만치 않은 분들이라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