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미는 동하의 당뇨병이 유전이라는 말에 깊은 혼란에 빠졌다.‘동하가 미현이에게서 유전된 거라면 미현이 역시 윗세대에서 유전된 거 아닌가? 하지만 나랑 그 사람 가족 중 당뇨병은 없는데...’표정이 굳어진 정수미는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겉으로나마 함미현을 위로했다.“미현아, 너무 자책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어떤 엄마든 자기 자식이 건강하기를 바라지 그렇지 않은 엄마는 없단다.”함미현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삼켰다.“네.”정수미는 함미현의 슬픈 눈빛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느꼈다.‘내가 어떻게 우리 딸을 의심할 수 있지? 미현이는 분명 내 딸이야.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나 겨우 찾은 딸인데 다시 잃을 순 없어.’“선생님. 돈은 얼마가 들든 상관없습니다. 제 손자의 건강만 찾아주신다면 선생님과 이 병원이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톡톡히 보상해 드리겠습니다.”“걱정하지 마세요. 정 대표님. 저희는 최선을 다해 도련님의 건강을 찾아드릴 것입니다.”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윤서현은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그녀는 이곳에 있는 게 지겨웠다.‘내가 왜 남의 아이를 위해 여기 있어야 하지? 남우 씨 혼자 회사에서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박민정이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남우 씨에게 접근하지는 않겠지?’“엄마, 미현이도 많이 지쳤을 테니 얼른 가서 쉬세요. 의사도 동하 꼭 낳게 해주겠다고 했잖아요.”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함미현을 걱정했다.“가자, 미현아. 동하는 병원에 맡기고 우리도 밥 먹으면서 조금 쉬자.”“네.”두 사람은 나란히 병원을 나섰다.윤소현은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모녀 같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저도 모르게 질투심이 솟은 그녀는 함미현을 바로 폭로해 버리고 싶었다.만약 함미현의 정체를 폭로한다면 정수미는 끝없이 친딸을 찾으려 할 것이다.‘안돼. 이제 와서 폭로할 수는 없어. 계속 친딸을 찾다가 정말 박민정까지 조사하면 어떻게 해?’지금 정수미가 함미현에게 보이는 태도로 보았을 때, 박민정이
정수미가 상처받을까 걱정된 비서가 급히 덧붙였다.“하지만 그것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일이죠. 아가씨께서 어릴 때부터 대표님 곁에서 자라신 게 아니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정수미도 그녀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다른 질문을 건넸다.“그럼 소현이는 날 닮았어?”길연서는 말문이 막혔다.두 사람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윤소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실력도 없으면서 매번 실수해 놓고 성질은 있는 대로 부린다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결함이었다.윤소현이 매번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정수미가 나서서 뒷수습을 해줘야 했다.정수미와 윤소현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길연서가 정수미를 따르기 전, 정수미는 지금처럼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당시 정수미는 조용하고 끈기 있게 참아내며 혼자 모든 것을 이겨냈다.지금의 위치까지 온 것은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소현 아가씨는 참 예쁘세요. 대표님 젊었을 때처럼 당당하고 도도한 매력이 있으시죠.”길연서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 정도로밖에 답할 수 없었다.똑똑한 정수미는 길연서의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결국 두 딸 모두 나를 닮지 않았다는 말이네. 하지만 뭐 어때? 모든 자식이 엄마를 닮을 수는 없는 일이잖니.”그녀가 자신을 위로했다.비서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친자 확인 검사를 진행해 볼까요?”“그건 절대 안 돼.”정수미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미현이는 내 딸이야. 내가 친자 검사를 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상처받겠니?”정수미의 말에 길연서도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정수미가 위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방 안에서 함미현은 음식을 먹으며 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아 그녀는 초조해 보였다.“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함미현은 정수미가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혼잣말을 했다.“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박민정이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유남우는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왔어?”그는 박민정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박민정은 그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물었다. “유 대표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저기와 선을 긋는 듯한 그녀의 말에 유남우는 가슴이 아팠다.그는 아무렇지 않을 척 말했다. “괜찮아. 며칠 전에 비를 맞았더니 감기 기운이 있나 봐.”말을 마친 그는 박민정을 향해 손짓했다.“이리 와서 앉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아.”박민정이 유남우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말씀하세요.”“일단 나를 좀 편하게 대해주면 안 될까?”유남우가 물었다.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유남우는 그녀를 난감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됐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 “내 속마음을 좀 털어놓고 싶어서 너를 불렀어.”박민정은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유남우가 말했다. “난 더는 호산 그룹을 맡고 싶지 않아.”“왜요?”박민정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난 처음부터 형의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었어. 내가 대표의 자리에 앉은 건 형이 기억을 잃고 눈이 안 보여서였어. 어머니는 힘들게 키운 그룹을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 봐 두려워서 나를 그 자리에 앉혔지. 이제 형의 몸이 좋아졌으니 내가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아.”박민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어 유남우가 말했다. “될 수록이면은 내 말을 형에게 전해줘. 나는 예전처럼 자유로운 게 좋다고 말이야.”“이런 얘기는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박민정이 말했다.그녀도 유남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유남우의 결혼식에서도 그는 호산 그룹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빈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유남우는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은 바로 가서 따뜻한
유남우는 더는 고집 부리지 않고 차에 타서 병원으로 갔다.그가 응급실로 실려 가는 것을 보고 홍주영은 밖에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민정 역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걱정하는 표정이었다.그녀는 고영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홍주영이 막았다.“절대 연락하지 마세요.”“왜요?”박민정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방금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뒷문으로 나왔어요. 사모님께 말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련님의 몸이 안 좋은 것이 소문날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들은 다시 이사회를 해서 도련님을 해임하려 할 것입니다.”홍주영은 계속 말했다. “도련님은 생각이 많으신 분이라 해임된다면 병세가 더욱 심해질 것이에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괜찮겠죠?”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홍주영한테 물었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전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제때 병원에 왔으니 괜찮아요.”이 말을 듣고 박민정은 비로소 마음이 놓여서 고영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병원 복도 밖에서 유남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홍주영은 임신 중인 박민정을 걸상에 앉혔다.“좀 쉬세요.”“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홍주영은 박민정의 고운 얼굴을 보고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오른쪽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데도 박민정의 카리스마를 가릴 수 없었다.홍주영은 유남우가 왜 박민정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같은 여자인 그녀가 봐도 참 예뻤다. “왜요?”박민정은 줄곧 자신을 보고 있는 홍주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자 홍주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너무 이쁘셔서요.”박민정은 바로 대답했다. “비서님도 예뻐요.”홍주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홍주영은 박민정과 윤소현처럼 그 정도로 이쁘지 않다. 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의아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얼굴이 이쁘면 어떤 일들은 쉽게 풀려나가요. 이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예
홍주영은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뭔가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도련님께서 치료하려고 해외로 가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사귀었겠네요.”박민정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세상은 원래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녀는 운명을 믿게 되었다.많은 것들은 진작에 정해져 있는 거로 생각했다.홍주영은 박민정이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아직 유남우한테 감정이 있는 줄 알았다.홍주영이 말했다. “민정 씨, 도련님한테 마음이 있다면 고백하세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도련님의 마음속에는 항상 민정 씨가 있어요. 오직 민정 씨밖에 모르시는 분이에요.”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표정이 굳어졌다.“주영 씨. 대표님과 저는 그냥 어렸을 때 인연이 있을 뿐, 사귄 적도 없어요. 지금 저는 이미 결혼하고 이혼까지 했어요. 남우 씨도 결혼했고요. 우리는 각자 자식도 있어요.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전 남우 씨와 사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확실한 건 전 지금 남우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박민정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녀는 홍주영이 오해할까 봐 이어 말했다.“대표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전에도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래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박민정의 말을 듣고 홍주영은 그제야 자기가 오해한 것을 알았다.“미안해요. 제가 오해했네요.”“괜찮아요.”박민정은 말을 다 하고 시간을 보았는데 벌써 오후 6시가 다 되어갔다.마침내 의사가 응급실에서 걸어 나왔다. 유남우의 상태가 이미 안정되었다고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유남우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홍주영한테 말했다. “주영 씨, 전 오늘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남우 씨 좀 부탁해요.”유남우가 무사하니 박민정은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홍주영이 또 오해할 거로 생각했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네.”박민정은 이제야 떠났다.그녀가 병원을 나간
병원으로 달려간 윤소현은 유남우의 곁을 지키는 홍주영을 보고 말했다. “왜 남우 씨가 병원에 입원해요? 어떻게 돌봤길래 이렇게 되냐고요?”금방 의식이 돌아온 유남우는 비난하는 목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홍주영한테 말했다. “먼저 들어가 봐.”“알겠어요.”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실을 나갔다.유남우가 자기 비서를 감싸는 걸 보고 기분이 언짢아진 윤소현이 말했다. “남우 씨, 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난 그냥 남우 씨가 너무 걱정돼서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임신 중이라 호르몬으로 인해 감정 변화가 많다고.”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여동생이랑 조카 데리고 검진받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거의 다 했어요. 엄마가 가라고 하셨어요. 금방 결혼했으니 같이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요.”윤소현은 말하면서 유남우에게 기댔다.그녀가 갑자기 자기한테 기대자 유남우는 너무 불편해서 표정마저 굳어졌다. 그는 손을 들어 윤소현을 밀어냈다.윤소현도 사람이고 여자다. 유남우가 자신을 향한 애정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우 씨, 우리는 이미 결혼했어요.”유남우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 들어.”윤소현은 순간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심지어 유남우가 신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와 자기 배 속의 아이를 받아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의 뿌리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점점 깊어져 갔다. “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윤소현은 나갔다.그녀는 지금 자신의 남은 인생이 망한 건 아닌가 생각하며 걱정했다.윤소현은 병원 안의 공원에 가서 산책하려 했는데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308호실 환자 가족분입니까?”“맞는데요. 무슨 일이죠?”윤소현은 의아해서 물었다.“다른 게 아니라 방금 환자 가족 두 분이 병원비를 많이 내서요. 근데 우리 쪽에서는 연락이 안 되네요
윤소현은 박민정이 한 일을 까발리기 위해 병원 내부 CCTV와 병원 외부 CCTV를 확보해 서울에 있는 이모에게 보냈다.정수미의 동생 또한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명성을 더럽히기로 마음먹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윤소현은 자기 생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박민정이 파렴치한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너무 피곤해서 집으로 갔는데 집에 있는 세 여자가 엄청나게 신나 했다.“민정아, 고마워. 내가 이 목걸이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어?”민수아가 말했다.“보스, 정말 고마워요. 제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러 갈 수 있게 되다니.”진서연도 설렘이 가득한 얼굴이었다.“민정 씨, 우리 은정이를 위해서 전문 보육사를 찾아줘서 정말 고마워요.”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녀는 이것들을 준비한 적이 없다.그녀는 솔직한 성격이라서 바로 말했다.“내가 준 게 아니야.”다들 의아했다.“네가 보낸 게 아니라고? 네 이름으로 돼 있던데?”민수아는 핸드폰 진동이 울려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다희 보낸 메시지였는데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그녀는 뭔가를 알아차렸다.“민정아, 남준 씨가 보낸 것 같아.”서다희는 그녀들한테 유남준이 주는 거라고 말하면 받지 않을 것 같아서 박민정이 보낸 거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순순히 받아들였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서연은 눈을 껌뻑거리며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보스랑 화해하고 싶어서 우리한테 잘 보이려는 게 아닐까요?”민수아와 설인하도 같은 생각이었다.“됐어요. 이 선물 필요 없어요. 다시 돌려주자고요.”설인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그녀는 박민정이 다시 결혼의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혼자 자유롭게 사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진서연은 좀 아쉬워했지만 말했다.“보스, 화해하고 싶지 않다면 선물을 다시 돌려줘도 괜찮아요.”그러자 민수아도 말했다.“맞아, 목걸이는 나중에 내가 돈이 생기면
박민정은 사랑의 존재는 믿었지만 그 사랑이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특히 오늘 유남준이 연지석, 유남우, 그리고 에리 세 남자를 언급하고 나서 그녀는 더욱 불안해졌다.그녀는 유남준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은 믿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단지 좋아함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를 믿은 적이 없었다.그녀는 유남준이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리라는 믿음이 없었다. 마치 유남준이 그녀를 의심하며, 자신이 연지석 같은 다른 사람을 선택할까 봐 불안해하는 것처럼 말이다.“민정 씨가 어디가 모자라서 자신감을 잃은 거예요? 제가 봤을 때 민정 씨는 이미 아주 훌륭해요.”박민정을 바라보는 설인하의 눈빛은 반짝거렸다.박민정은 혼자서 아들 둘을 키우면서 노래를 만들고 회사를 차렸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사랑에 관한 데서 자신이 없는 거죠.”박민정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연애도 해보지 못하고 결혼했다.심지어 결혼 상대도 잘못 만나서 결혼하고 나서도 신혼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연애의 설렌 느낌은 더더욱 경험해보지 못했다.그래서 이제는 두려웠다.설인하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녀를 응원했다.“어찌 됐든, 민정 씨는 자기를 믿으세요. 전 전에부터 계속 민정 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민정 씨처럼 혼자 힘으로 살아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그녀는 예전처럼 도망가도 방성원에게 빌붙어 살 수밖에 없는 삶이 싫었다.“그거 알아요? 저 사실 재작년에도 집에서 도망친 적이 있어요. 나는 내가 방성원을 떠나고 잘 지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하마터면 사기꾼한테 잡혀갈 뻔했어요. 그때 생각을 하면 아직도 진저리가 나요. 그리고 결국에는 방성원이 와서 나를 구해주더라고요.”박민정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그리고 설인하는 쓴웃음을 하며 말했다.“소름 끼치는 것이 있는데 뭔지 알아요?”“뭔데요?”“그날 나를 납치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방성원이 보낸 것이었어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고 싶었대요.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