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XS 그룹의 모든 업무는 중단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협력사들이 계속해서 박민정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 일주일 내로 문제를 해결하기만 한다면 계속해서 거래를 이어나가겠다고 한 모양입니다.”정수미가 태연하게 물었다.“일주일 안에?”뒤이어 그녀가 서늘한 냉소를 흘렸다.“만약 정말 일주일 내로 해결한다면, 내가 직접 박민정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정수미가 휴식을 취하려던 그때, 그녀의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 보니 박민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가 감히 자신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수신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은 정수미가 물었다.“민정이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다니, 무슨 일이지?”뒤이어 수화기 너머에서는 박민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 대표님, 사업 경쟁을 하고 싶으면 정당한 수단으로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제 기밀문서를 빼돌리시고, 제 회사 건물까지 침입하신 건 선을 넘은 것 같습니다만.”박민정은 이미 회사 직원에게서 모든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정수미 역시 박민정이 이렇게나 빨리 배후를 알아차릴 줄 몰랐지만 굳이 놀란 티를 내지는 않았다.“그 선이 도대체 뭘까? 민정이 네가 함미현, 염혜란이랑 짜고 날 속일 때는 그 선이라는 걸 생각해봤니?”“아, 그 일 말씀이신가요?”박민정은 그제야 정수미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았다는 듯 말했다.“확실하게 말해드릴 수 있는 건, 저는 단 한 번도 정 대표님을 속인 적 없다는 겁니다. 정 대표님께서 사람을 똑바로 못 알아보신 건, 대표님 탓 아닌가요?”한편, 옆에서 모든 대화를 다 듣고 있던 비서의 손에는 벌써 식은땀이 흥건했다.정수미가 정씨 가문을 이끌어가기 시작한 후로 그 아무도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한 적이 없었다.박민정은 정말 다른 의미로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었다.정수미의 차분하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굳이 네가 인정하길 바라진 않아. 그래봤자 너는 네
연지석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이사회가 모든 경영권을 저에게 넘겼으면,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네가 해외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널 모를 줄 알아? 너 지금 그 유부녀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이사회도 이미 만장일치로 결정했어. 네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의 자금 지원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 여자는 네가 먼저 안 끊어낸다면 우리가 대신 처리해줄 수밖에 없어!”말을 마친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연지석은 있는 힘껏 손안의 휴대폰을 꽉 쥐었다.그는 적어도 자신이 해외에 있는 동안 만큼은 이 고집불통 꼰대들이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연지석은 곧장 하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늙은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도 알고 있었어?”그 말에 하민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처음부터 내가 얘기했잖아. 그 사람들이 형이랑 박민정이 무슨 사이인지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네가 일러바친 거야?”연지석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그 목소리에 불안감을 느낀 하민재가 다급하게 해명했다.“당연히 아니지. 내가 어떻게 형을 배신할 수 있겠어? 벌써 잊은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유남준이 보낸 사람한테 그렇게 처맞았는데.”연지석 역시 하민재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그럼 연우석이겠네.”연우석이라면 연지석의 형이자 명목상 연씨 가문의 후계자였다.하지만 그런 연우석의 위치는 최근 들어 연지석 때문에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그 형 원래 이런 짓 많이 하잖아. 조심해.”하민재가 당부했다.“응, 나도 알고 있어.”전화를 끊은 연지석은 답답한 마음에 책상을 초조하게 두드렸다....정씨 가문에서 XS 그룹을 고립시켰다는 소식은 빠르게 회사 전체에 퍼졌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겠다던 회사들도 모두 다급하게 XS 그룹과 계약을 해지했다.결국, 남은 것은 손연서와
그 말에 오준수는 잠시 망설였다.그 모습에 이지원이 다시 한번 오준수를 부추기기 시작했다.“오 대표님, 설마 손연서가 두려우신 건가요? 여자가 너무 강해지면 안 돼요. 오 대표님께서 이혼하게 되신 이유는 다 손연서 씨 힘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에요.”오준수는 결혼 생활 내내 자신에게만 의지하던 손연서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의 결심을 굳혔다.“알겠습니다. 꼭 저를 떠난 걸 후회하게 해주죠.”사실 그에게는 아직 손연서와 재결합 하려는 마음도 남아 있었다. 이혼 후 그녀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만 느껴졌다.게다가 그의 아들인 성훈도 가끔씩 손연서의 이름을 언급하고 되뇌기까지 했으니 말이다....XS 그룹박민정은 모든 협력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한순간에 초창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설인하를 포함한 직원들은 모두 풀이 죽어 있었다.결국, 참지 못한 진서연이 제안했다.“보스, 예전처럼 작곡만 하는 건 어때요? 그런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 수입은 생길 겁니다.”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제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작곡만 한다는 건 먼 미래를 내다본 계획이 아니야.”게다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박민정은 영원히 복수할 수 없게 된다.오늘의 이 굴욕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되풀이될 것이다.“그럼 부사장님한테 도와달라고 해보는 건 어때요?”설인하가 입을 열었다.연씨 가문에서 연지석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던 박민정은 그런 설인하의 제안도 거절했다.“우리는 우리 스스로 힘을 키워가야 해요.”“오늘부터, 우리는 새로운 투자자를 찾을 겁니다.”그 순간, 밖에 있던 에리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박민정이 대답했다.안으로 들어선 에리가 말을 꺼냈다.“예전의 그 광고들은 다시 촬영 들어갔고, 야근이라도 해서 최대한 제때 끝낼 거야.”“고마워, 그럼 부탁할게.”박민정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다른 연예인이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테지만 이미 누군가가 망쳐놓은 광고를 에리는 별다른 불만 없이 묵묵히 다시 찍고 있었다.“별거
곧이어 두 사람이 탄 차는 IM 그룹 본사 정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박민정은 눈앞의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남준 씨가 말한 회사가, IM 그룹이었어요?”유남준은 그런 박민정의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또 아까처럼 너 안고 내려서 보여줄까?”“아뇨, 됐어요. 저 혼자 내릴게요.”이때, 문 앞의 경호원이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었고 박민정은 배를 감싼 채 조심스레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려 거대하게 우뚝 서 있는 IM 그룹을 보는 그녀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유남준은 그런 박민정을 데리고 IM 그룹의 맨 위층에 있는 대표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여기까지 올 동안 박민정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했다.그때, 서다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대표님...”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다희는 박민정을 발견하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그는 유남준이 일부러 박민정을 데리고 회사로 왔다는 것도 모른 채 애써 모르는 척을 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 애썼다.“대표님, 오늘은 IM 그룹 대표님께서 자리를 비우셨는데, 다음에 다시 오시는 게 어떠실지?”그 말에 박민정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만약 유남준이 정말 IM 그룹의 대표였다면 이때까지 숨길 리가 있을까? 역시 오늘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순히 협상을 위해서였을 것이다.유남준은 그런 서다희를 흘겨보다가 입을 열었다.“더 숨길 필요 없어. 내가 일부러 와이프를 회사까지 데리고 온 거니까. 그리고 민정이는 이 회사의 안주인으로서 당연히 회사 운영 상황에 대해 알 권리가 있는 사람이야.”그 말에 박민정은 또 한 번 멍해졌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어쩌면 임신 때문에 지능까지 낮아진 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자신이 위급한 상황에 기지를 발휘했다고 생각했던 서다희가 황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방금은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박민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여기가 정말 유 대표님의 회사란 말이에요?”“
드디어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유남준의 마음이 비로소 홀가분해졌다.“좋아, 방금 한 말 꼭 지켜야 해.”박민정이 되물었다.“내가 언제 남준 씨 속인 적 있어요?”그녀는 지금 유남준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유남준은 그런 박민정을 더욱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알지, 알지. 너보다 약속 더 잘 지키는 사람은 없지.”박민정은 애써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너무 답답하고 더우니까 그만 해요.”유남준은 그렇게 텅 비어버린 자신의 손과 품을 느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드디어 박민정의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오늘은 김인우와 박예찬, 그리고 조하랑까지 와 있었다. 박예찬와 박윤우는 따로 방 안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정수미 그 망할 마귀할멈이 또 우리 엄마 괴롭혔어.”박윤우가 잔뜩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박예찬의 표정도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예전에 자신 역시 그 마귀할멈의 손에 명을 달리할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형, 우리한테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박예찬은 그저 주먹만 꽉 쥔 채 대답했다.“아쉽게도 우리가 아직 너무 어려.”“에휴...”박윤우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도 어느 정도는 되갚아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미 그 마귀할멈 집 주소도 알아냈고, 어떻게 들어가는지도 알거든.”박예찬이 말했다.“정말? 잘됐다. 그럼 우리 얼른 가자!”당장이라고 정수미에게 벌을 주고 싶어 안달 났던 박윤우가 말했다.하지만 박예찬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넌 아직도 몸이 안 좋잖아. 거긴 나 혼자 가도 돼.”“싫어, 나도 갈래!”박윤우가 고집을 부렸다.“형,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형이 먼저 나서잖아. 나도 곧 수술받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이번엔 나도 엄마 지켜주고 싶어.”박윤우는 아무 도움 안 되는 쓰레기가 되기 싫었다.박예찬 역시 박윤우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며 더는 말려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럼 우리 나중에 적당한 때를
정씨 가문 본가.정수미는 새로운 친자 확인 결과지를 받아들었다.그녀의 눈빛에는 냉기만 감돌았다.그리고 옆에 있던 비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이지원 정말 겁도 없네요, 감히 이런 친자 확인 공문서까지 위조할 생각을 하다니.”정수미는 모녀 관계가 아니라는 친자 확인 감정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함미현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받지 않은 듯 평온해 보였다.“난 항상 최 선생을 믿어왔는데, 왜 그 사람이 이지원을 도와주는 거지?”최 선생이라면 정수미의 개인 주치의로서 그의 여러 유전자 감정을 도왔던 인물이다.며칠 전, 그는 아주 자신 있는 표정으로 감정서를 들고 정수미를 찾아와 그녀와 이지원은 모녀가 맞다는 말을 해주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항상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정수미는 최 선생이 이지원에게 매수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당장 전화해서 최 선생 부르겠습니다.”비서가 입을 열었다.“그래, 우선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지 마. 그냥 내 몸이 좀 안 좋다고만 전해.”정수미는 자신의 계획이 들킬 것을 염려해 비서에게 재차 당부했다.“알겠습니다.”비서는 곧장 최민환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를 떴다.그 탓에 저택 안으로 몰래 숨어드는 두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여기야?”박윤우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주위를 살폈다.“응, 조심해.”이미 이곳의 시스템을 완전히 파악한 박예찬은 일시적으로 모든 보안 시스템을 종료시켰다.빠르게 정수미가 지내는 곳을 발견한 두 아이는 멀리서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엄마가 어디가 그렇게 미워서 날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 거야?”정수미는 자신의 딸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박윤우는 그런 정수미의 모습을 관찰하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뭐라고 저렇게 중얼거
다른 병원들에서 온 감정서들을 바라보던 최민환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그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다.“정 대표님, 이건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겁니다.”최민환이 서둘러 말했다.그와 오랜 세월 동안 접촉해왔던 정수미는 어느 정도 최민환을 신뢰하고 있었다.“그럼 그 오해가 뭔지 얘기해보세요. 왜 이지원은 내 친딸이 아닌데도, 친자 감정서에는 친자라고 나와 있었는지.”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최민환은 뭔가 떠오른 듯 그날 친자 감정서를 진행했던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그날 친자 감정을 진행할 때, 큰 아가씨께서 갑자기 샘플을 잘못 챙겼다며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새로 가져오신 그 샘플로 교체해서 진행했죠. 그리고 남은 절차는 다 제 직원들에게 맡겼습니다. 맹세컨데 제 직원들이 그런 날조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그 답변에 더 멍해진 쪽은 정수미였다.샘플을 교체했다니?“확실해요?”“확실합니다!”잠시 망설이던 최민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큰 아가씨께서 저에게 몰래 찾아와 만약 감정서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 결과를 수정해 달라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그 말을 하는 최민환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저는 절대 정 대표님께서 제게 주셨던 기회와,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믿음을 저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대표님을 왜 배신하겠습니까?”그 말에 정수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럼 최 선생 말은, 소현이가 최 선생에게 감정 결과를 혈연관계가 아닌 거로 바꿔 달라고 했다는 건가요?”최민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그냥 결과를 바꾸라는 말만 했습니다. 제가 거절했더니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더는 아무 얘기 하지 않더군요. 저도 이때까지 대표님과 아가씨 사이에 불화가 생길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겁니다.”그 말에 정수미는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윤소현의 성격대로라면 자신이 친딸을 찾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하지만 샘플은 왜 바꿔치기했던 걸까
박윤우가 막 도망치려던 순간, 정수미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한 가정부가 아이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너는 누구니? 여기서 뭐 하는 거야?”가정부가 물었다.그 목소리에 정수미와 비서가 동시에 그쪽을 쳐다보았다. 박윤우가 가정부에게 가로막힌 채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 아이, 어디서 많이 본 아이인데?”정수미가 말했다.박윤우는 억지로라도 도망쳐보려 했지만 그의 작은 체구로 도망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결국, 아이는 가정부에게 붙잡혀 정수미의 앞으로 가게 되었다.“놔줘, 이 나쁜 사람들. 마귀할멈!”박윤우가 작은 몸을 힘껏 몸부림치며 외쳤다.하지만 아이의 몸부림과 외침이 하인과 정수미에게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정수미는 이내 박윤우를 알아보았다.“너, 박윤우 아니니?”정수미는 박윤우와 박예찬을 기억하고 있었다.박윤우는 서늘한 눈빛으로 정수미를 바라보며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그래, 나야. 얼른 날 놔 주는 게 좋을걸. 안 그러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가만두지 않는다고?정수미의 답답했던 가슴이 사르르 녹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너 같은 꼬마가 날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그 질문에 박윤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지금 날 놔주면 내가 18년 뒤에 찾아와서 복수할 거야!”“그렇다면, 더더욱 널 놔줄 이유가 없는데?”그 말에 정수미는 일부러 아이를 더 놀리기 시작했다.그런 말을 하는 박윤우의 마음도 편치만은 못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이런 곳에 갇히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엄마에게는 형이 있었고, 아직 태어나지 못한 동생이 있었던 덕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말해 봐, 우리 집엔 왜 온 거야?“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이렇게 어린아이가 자신의 집에 잠입했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박윤우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연히 실수로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야. 여기가 아줌마 집일 줄은 몰랐어.”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정씨 가문처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