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야, 미안해. 다 내가 무능해서 그래.”유성혁은 휠체어에 앉아 병실을 나왔다.최현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유성혁은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최현아는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왜 나왔어요?”그녀는 다가가 물었다.“네가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길래 걱정돼서 나왔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해서.”유성혁은 그렇게 말하며 최현아의 손을 잡았다.“현아야, 그만하자.”“뭐를요?”그만하자는 말을 다시 듣는 순간, 최현아는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우리 이미 충분히 가졌잖아. 굳이 유남준과 싸울 필요 없어. 게다가 호산 그룹 자체가 원래 유남준이 직접 일궈낸 거잖아. 우리에겐 이미 아버지의 유산이 있어. 그걸로도 이미 충분해.”유씨 가문처럼 대대로 내려오는 재벌가의 재산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유명훈이 남긴 돈과 인맥만 해도 어마어마했다.최현아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다.“당신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아?”“그게 아니야. 난 그냥 이제 편하게 살고 싶어. 계속 싸우고 다투고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제대로 살고 싶어.”유성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처음에는 그 두 꼬마 녀석들에게 당한 게 너무 억울해서 복수할 생각뿐이었다.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만약 진짜로 두 아이를 다치게 했더라면 자신이 과연 무사할 수 있었을까?더군다나 아이들은 아직 너무 어린데 그들의 목숨을 직접 빼앗을 정도로 자신이 악랄하지는 않았다.그는 단순한 바람둥이일 뿐 아이들을 해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은 아니었다.“당신 때문에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어요!”최현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한동안 숨을 가다듬더니 다시 그를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푹 쉬고 있어요.”최현아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며 답답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유성혁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정말 예상도 못 했어요. 지원 씨가 이렇게까지 될 줄은 말이에요”최현아의 목소리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과거에 이지원이 박민정 앞에서 거만하게 구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지원 씨, 예전에 기자들 앞에서, 그리고 박민정이랑 유남준의 친구들 앞에서 한 말 기억해요? 유남준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했었잖아요.”이지원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제,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생각도 안 할 거고 그런 말도 안 할 거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최현아를 바라봤다.“현아 씨, 제발 도와줘요. 이제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최현아는 완벽히 실망한 듯 등을 돌렸다.“현아 씨!”이지원이 다급히 따라가려 하자 최현아가 돌아서서 매섭게 쏘아붙였다.“저 따라오지 마요. 안 그러면 후회하게 될 거예요.”그 말에 이지원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최현아는 거기를 떠났고 기분이 한층 더 언짢아졌다.만약 이지원이 아직도 싸울 의지가 있었다면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원은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과거에는 갖은 악행을 저지르더니 인제 와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니 그런 말이 어떻게 입에서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지원은 다시 저택 안으로 돌아왔다.이제는 수도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상태였다.이 저택도 곧 경매에 넘어갈 예정이었다.사실 박민정이 그녀에게 했던 유일한 일은 모든 사업 관계자들에게 이지원과의 계약을 철회하라고 한 것뿐이었다.그 외의 모든 것들은 박민정이 한 것이 아니었다.이지원 스스로 박민정이 언제든지 자신을 해칠 거라며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고 김인우와 유남준 역시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전전긍긍했다.그녀는 지금의 김인우와 유남준은 그녀가 어떻든, 뭘 하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이지원은 소파에 털썩 쓰러져 넋이 나간 눈으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러다 문득, 자신의
그때 유남준은 단칼에 이지원을 거절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남준 오빠, 저한테는 이거 하나뿐이에요.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유남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네가 나와 연애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널 좋아하지도 않고 넌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 아내가 될 수도 없어.”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이지원이 이 말을 듣고 포기할 거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한 번만 당신과 연애하고 당신의 여자친구가 되어보고 싶어요. 딱 1년만요.”“그러니까 네 말은 그저 연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거야?”유남준이 물었다.이지원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그녀의 태도를 보고 유남준은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유남준의 연인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알린 사람은 박민정이었다.그녀는 박민정이 유남준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정 씨, 그거 알아요? 남준 오빠가 저한테 고백했어요. 이제부터 저는 남준 오빠의 여자친구예요. 너무 기뻐요. 민정 씨도 축하해줄 거죠?”그 순간 박민정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이지원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날, 그녀는 박민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박민정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었다는 우월감이었다.박민정은 도덕성이 강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이지원과 유남준이 사귀게 되자, 그때부터 단 한 번도 유남준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고 유남준을 향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1년은 빠르게 지나갔고 이지원과 유남준은 헤어졌다.그날, 이지원은 오만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남준 오빠도 그냥 평범한 남자더라고요. 별다른 특별함이 없어요. 우리 서로 맞지 않았던 거예요.”그녀는 자신이 아주 교묘하게 승리한 줄 알았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씨 가문에서 박형식을 찾아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김씨 가문.김훈은 박예찬이 박민정의 외할머니댁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다양한 물건들을 준비해 두었다.“예찬아, 너 거기 가서 증조할아버지한테 영상통화 하는 거 잊으면 안 된다. 안 그러면 증조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을 거야.”박예찬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증조할아버지.”김훈은 그를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다음 날, 김훈은 직접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공항에서 정수미와 박민정, 그리고 박윤우까지 모두 도착해 있었다.김훈은 떠나기 전, 정수미와 몇 마디를 나눈 후에야 아쉬운 듯 발걸음을 돌렸다.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정수미는 문득 감탄했다.“김 회장님께서 정말 우리 예찬이를 많이 아끼는구나.”“맞아요.”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훈은 정말 박예찬을 친 증손주처럼 아꼈다. 이미 예찬이는 김씨 가문의 적지 않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회장님께서 이 나이가 되니 진짜 친 증손주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겠지.”정수미가 한마디 덧붙였다.그녀도 예전에는 박민정을 찾기 전, 주변 또래들이 이미 손주, 외손주를 보며 사는 모습을 보며 부러웠다.때때로 꿈에서도 손주들이 옆에서 재잘대는 모습을 보곤 했다.나이가 들고 인생의 끝이 점점 가까워진다고 느낄수록 피붙이라는 것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그때,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이제 비행기에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그래.”박민정은 정수미를 부축하며 비행기에 올랐다.비행기 안에서 두 아이는 신이 나서 이야기꽃을 피웠지만, 박민정은 점점 긴장되기 시작했다.몇십 년 동안 보지 못한 친척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들은 어떤 모습일지도 몰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그녀는 비행 내내 긴장감을 떨치지 못했다.이를 눈치챈 정수미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민정아, 걱정하지 마.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이모들, 다 좋은 분들이야.”박민정은 처음에는 정수미와 같이 있는 것도 어색했지만 이제는 그 손길이 아주 익숙해졌다.그녀는 고
“이 아이들이 예찬이랑 윤우구나?”외할머니는 정교한 이목구비를 가진 똑같이 생긴 두 아이를 바라보며 눈빛이 반짝였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했다.박예찬과 박윤우는 얌전하게 인사했다.“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그래, 그래. 어서 와서 우리 곁으로 오너라. 같이 들어가자.”아이들이 자신을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듣자 외할머니는 더욱 기뻐했다.외할아버지 역시 감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원래 정씨 가문이 대를 이을 후손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안으로 들어가면서 외할아버지는 문득 물었다.“증손주가 더 있다고 했지?”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두 아이가 더 있어요. 그런데 아직 너무 어려서 갑자기 낯선 곳에 오면 적응하기 힘들까 봐 이번에는 데려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데려올게요.”그러자 외할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괜찮아, 우리가 진주로 직접 보러 가면 되지.”“네?”정수미는 순간 당황했다.원래라면 연세도 많으시니, 장거리 이동을 권하지 말아야 했지만, 정보주가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았다. 정보주는 그녀에게 눈짓하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외삼촌과 외숙모께서 정말 기뻐하고 계셔. 괜히 기분 상하게 하지 마.”정수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사실 어르신들이 말만 그렇게 하시는 거지 실제로 움직일 일은 없을 테니 굳이 안 좋은 말을 해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었다.“알겠어.”그렇게 온 가족이 기쁜 마음으로 거실로 향했다.넓은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식탁 위에는 각종 서주의 특별 요리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민정아, 너희 방금 비행기에서 내려서 배고프지? 일단 여기 있는 것 중에서 먹고 싶은 걸 골라봐. 가볍게 먹은 다음에 점심을 따로 차려줄게.”외할머니가 말했다.그녀는 요즘 젊은이들이 식사보다는 간식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어렵게 온 박민정이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맛있게 먹기를 바랐다.“네.”가족들은 함께 간식을 먹
커다란 안방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침대 하나가 있었는데 말이 침대지 크기가 거의 방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옛날 집안의 여자들은 거의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한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쭉 침대에서 생활해야 하는 건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그리고 두 어르신이 자신에게 준비해 둔 침대를 보고 나서야 말로만 들었던 방만한 침대가 있구나 싶었다.또한 화장대며 세면대 등 기본적인 가구들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이런 침대를 만들어내려면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작업에 들어가야 하고 시간은 최소 5년은 넘게 걸린다고 했다.그러기에 당연히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박민정은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봤는데 너무 편안했다.그러다가 문득 그때 자신에게 만약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면, 또 보육원에 보내지지 않았다면 이런 집에서 그들의 온전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러기에는 시간이 이미 너무 많이 흘렀지만 뒤늦게라도 가족을 되찾은 걸 감사하게 여겼다. 박민정은 아직 너무 피곤한 건 아니였기에 조하랑에게 자신도 서주에 도착했다고 알리고자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빠르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아.”“하랑아, 나 오늘 서주에 도착했어. 넌 좀 어때?”박민정의 물음에 조하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괜찮아, 그런데...”조하랑의 우물쭈물한 대답에 박민정이 되물었다.“그런데 뭐?”“잠깐만.”조하랑은 베란다 쪽에 가서 문을 닫았다.“인우 씨랑 같이 왔어.”여기에 온 목적이 김씨 가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글쎄 김인우가 따라왔다고 한다.“인우 씨는 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그러자 조하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나도 몰라. 그래서 지금 어떻게 다시 돌려보낼지 생각 중이야.”조하랑은 말하면서도 시선은 방안으로 향했는데 김인우는 거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혹시나 그가 박민정과의 대화를 엿들을까 봐 조하랑은 대충 지금 상황만 말해준 뒤
“하랑 씨가 여기에 있는데 제가 돌아가서 뭐 해요? 저도 다 생각이 있어요. 하랑 씨가 여기서 1년간 일해야 하는 거면 저도 같이 여기에 있을래요. 그리고 내년에 우리 둘이 같이 돌아가는 거죠.”조하랑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다시 그를 설득했다.“김씨 가문의 사업이 모두 진주에 있는데 인우 씨가 여기에 있으면 어떡해요? 게다가 할아버지는 이제 나이도 많으신데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냥 돌아가요.”계속되는 거절에 김인우는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저는 왜 자꾸만 하랑 씨가 저를 피하는 것만 같죠?”“제가 여기에 있으면 하랑 씨를 돌봐줄 수도 있는데, 그것도 싫어요?”순간 조하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이걸 어떻게 해명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눈앞이 막막하기만 했다.그러다가 결심한 듯 두 주먹을 꼭 쥔 채,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아무튼 저는 이곳에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냥 돌아가요. 같이 있으면 불편해요.”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김인우의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순간 방안이 답답하게 느껴지면서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애써 담담한 척,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혹시 밖에 다른 남자라도 숨겨둔 건 아니겠죠? 그걸 들킬까 봐 지금 저를 급히 보내려고요?”농담처럼 물었지만 혹시나 진짜로 맞다고 할까 봐 살짝 심장이 떨렸다.“아니요.”조하랑은 단번에 부인했다.“전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어쨌든 우리는 지금 부부고 여기서 아무리 1년이 아니라 10년을 혼자 지낸다고 해도 인우 씨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하랑은 자신만의 소양이 있는 사람이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강연우와 헤어지고 나서 곧바로 다른 남자를 찾았을 것이고 절대 솔로로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김인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그러면 더욱 저를 내쫓을 이유가 없겠네요. 만약 저랑 같은 집에 사는 게 불편하면 제가 집 하나 따로 맡을게요. 가끔 만나서 밥이나 먹어도 좋으니까.”“안 돼
조하랑은 사실 자기 건강을 고려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임신 초기라 입덧이 너무 심해 집에서 밥을 거의 못 먹었다시피 했고 억지로 먹어도 다 토해냈었다.불행 중 다행히 이런 음식은 먹을 수 있었고 의사도 지금 상황에서는 우선 산모부터 살고 봐야 하기에 먹고 싶은 음식은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했는데 원래 야식까지 먹으려 했던 조하랑이 갑자기 메스꺼움을 느끼고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오늘 먹었던 음식을 전부 토해내기 시작했다.깜짝 놀란 김인우도 뒤따라와 그녀에게 휴지와 물을 건네주며 걱정스레 물었다.“탈 났어요? 당장 병원부터 가요.”그러나 조하랑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아니요.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에요.”“왜 이렇게 고집이 세요? 어른이면 이런 길거리 음식은 될 수록 먹지 말아야 한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잖아요. 병원에 가자고 하니 또 말도 안 듣고.”김인우는 옆에서 걱정되는 마음에 계속 궁시렁거렸다.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조하랑은 화가 슬슬 치밀어 올라 단번에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으악! 계속 그렇게 잔소리만.... 할, 할 거면 당장... 당장 나가요!”그러나 김인우는 이 와중에도 그녀가 괴로워하는 게 더 신경 쓰였지만 여기서 더 뭐라고 하면 당장에라도 쫓겨날 것 같아 다시 말을 삼켰다.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조하랑도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거실 소파에 털썩하고 쓰러졌다.“이제 좀 괜찮아요?”“많이 나아졌어요.”조하랑은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이때, 김인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 조하랑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했다.“뭐 하려고요?”“하랑 씨 얼굴이 너무 빨개서 혹시나 열이 있나 보려고요.”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는데 조하랑은 이 순간이 너무 어색해서 빠르게 그의 손을 다시 뿌리쳤다.“괜찮다니깐요. 전 이만 씻으러 갈 테니까 인우 씨도 일찍 쉬어요.”말을 마친 뒤 다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그러고는 이제 슬슬 나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