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만약 어느 날 네 마음이 변했더라도 민정이한테 상처 주지 말고 그냥 우리 정씨 가문으로 보내줘.”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미 수많은 일을 겪어온 정수미는 약속이란 게 참 지켜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유남준도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자기 말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게 없었다.하여 허리를 숙이고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비록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말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아는데요. 꼭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전 이미 IM 그룹의 모든 지분을 민정이 명의로 변경했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저희 둘이 헤어지면 민정이가 평생 먹고 남을 돈은 있는 거잖아요.”사실 박민정은 이미 지엔 그룹을 소유하고 있기에 금전적인 면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지만 그래도 유남준이 저렇게 말하니 마음이 든든했고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하여 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나도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게.”“네.”유남준의 입꼬리는 어느새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민정이 수술이 끝났는지 이만 가볼까요?”“그래.”그렇게 유남준은 정수미의 휠체어를 밀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사실 방금 정수미가 당부했던 말은 서주에 있을 때 정근우도 똑같이 말했었다.“만약 우리 민정이를 괴롭히는 날에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때나 지금이나 유남준은 그들의 말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박민정을 지켜주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마음이 따뜻했다.박민정의 수술은 점심이 되어서야 끝났고 김인우가 수술실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유남준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어떻게 됐어?”김인우는 마스크를 벗으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아마 큰 문제는 없을 텐데 회복되는 걸 지켜봐야 할 것 같아.”유남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고 정수미와 다른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들 배고프시죠? 얼른 가서 밥부터 먹고 옵시다.”김인우도 웃으며 답했다.“그래요. 밥부터 먹어요.”박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혹시나 정수미와 박민정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아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갈 때도 모두 짝을 지어 돌아갔는데 그중 정민기와 진서연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서다희와 민수아도 팔짱을 끼고 가다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하더니 그녀도 임신했다고 알렸다.세 커플 중 오직 방성원과 설인하 두 사람만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서로 떨어져서 걸었다.그리고 이런 상황을 진작에 눈치챈 방성원은 아까부터 마음이 불편했지만 사람이 많아서 애써 참고 있었다.하여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김인우가 그의 팔을 잡았다.“성원아, 나도 곧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아.” 그러자 방성원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우리 은정이는 이제 곧 두 살이야.”“어쩌라고? 우리 딸이 아마 네 딸보다 더 귀여울걸?”그의 말에 방성원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면서.”순간 김인우는 할 말을 잃었다.그의 말대로 아무리 자기가 딸은 원한다고 무조건 딸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그러고 보니 유남준도 딸을 간절히 원했지만 태어난 네 명의 아이는 모두 남자였다. 역시나 딸 복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그러다가 방성원은 문득 설인하와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걸 발견하고 재빨리 김인우에게 말했다.“그만하자.”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설인하를 쫓아갔다.“뭘 이리도 빨리 가?”설인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기다리란 소리도 없었잖아.”방성원은 그녀의 대답에 어이없다가 문득 앞에서 하하호호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두 커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자신과 설인하는 비록 지금 이혼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냉랭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방성원은 지난번 설인하와 연지석 사이를 오해한 게 미안한 것도 있어서 차에 올라탈 때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남자의 돌발행동에 설인하는 온몸이 굳어진 채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 물었다.“뭐 하는 거야?”“손잡고 싶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약혼했고 설인하는 학교에 다닌 것 외에는 주로 방성원 만나러 성진그룹에 갔다. 그때의 방성원은 설인하에게 한없이 차갑고 무뚝뚝해서 남들의 눈에는 여자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졸업하고 난 뒤 양가 부모님의 허락하에 두 사람은 혼인을 맺었고 모든 게 탄탄대로 흘러갈 줄 알았다.그러나 결혼하기 얼마 전에 설씨 가문이 부도났고 동시에 설인하의 부모님도 돌아가게 되었다.그때 설인하는 큰 타격을 받고 한동안 말조차 하지 못했다.게다가 방성원은 설인하와의 결혼 첫날 밤에 그녀에게 상처 주는 말까지 해버렸다.그 이후로부터 설인하는 방성원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고 분명 두 사람은 부부였지만 어딘가 서먹서먹하고 어색했다.설인하는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빠르게 자기 손을 뺐다.그러자 방성원은 한껏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왜 그래?”설인하는 주먹을 꽉 쥐고 답했다.“아니야.”그리고 지금의 방성원을 더 이상 보기 싫어 아예 등지고 앉았다. 혹시나 혼자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 방성원이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왠지 모르게 익숙지 않았고 오히려 불편했다.방성원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던 이때, 설인하가 다시 답했다.“천천히 하자, 천천히.”그제야 방성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겠어.”설인하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많이 배려한 셈이다.집에 돌아와 보니 방성원의 부모님이 이미 와있었고 한창 방은정과 놀아주고 있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같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물었다.“왜 이렇게 늦게 와?”“퇴근하고 병원에 친구 보러 갔었어요.”“그래.”안현자는 방은정을 안고 설인아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녀에게 말했다.“인하야,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좀 나와 봐.”말을 마친 뒤 아이를 도우미에게 넘겨줬다.그러나 방성원은 본능적으로 자기 어머니가 설인하에게 못된 말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엄마, 그냥 여기서 얘기해요.”안현자는 자기 아들의 예민한 반응
설인하는 안현자의 말을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여태껏 방성원은 자신을 너무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그저 미적지근한 태도로 대했다.특히 연애 초반에도 방성원은 달콤한 말 한마디나 그 어떤 사랑 고백, 하물며 그 흔한 선물조차 준 적이 없었다.‘그런데 꼭 나랑 결혼해야 한다고 매달렸다고?’안현자는 한눈에 봐도 눈앞의 설인하가 지금 자기 말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인하야, 이런 걸로 내가 너를 속이겠니? 너도 잘 생각해 봐. 너희 집이 그때 파산하고 네 부모님까지 돌아가셨으면 우리 방씨 가문에서는 충분히 그 결혼을 무를 수 있었어.”여기까지 들은 설인하는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진짜 그대로 파혼을 밀고 나갔다면 좀 창피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 선택이 우리 방씨 가문에는 더 유리했을 거야. 그런데 우리 성원이가 무조건 너랑 결혼하겠다고 억지 부리는 바람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허락했어.”“그때 성원이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또 너를 위해 우리 앞에서 무릎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그 무뚝뚝한 방성원이 자신을 위해 무릎까지 꿇었다는 소리에 설인하는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었다.“저는...”이때 안현자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솔직히 난 아직도 네가 내 며느리인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우리 아들이 죽고 못 산다고 하니 엄마로서 다른 방법이 없잖니.”안현자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설인하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방금 했던 말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그런데 왜 여태껏 이런 말을 저한테 해주지 않으셨어요?”“난 네가 진심으로 우리 아들을 사랑하는 줄 알았으니까!”안현자가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넌 그저 겉으로만 우리 성원이를 사랑한다고 했고 우리 아들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그만큼 표현하지 않았던 거야.”“그 애는 자기 아빠를 닮아서 어릴 때부터 말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걸 잘 못 했어. 그렇다고 이게 너한테 상처받을 이유는 못 되잖아?”안현자는 어떻게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방성원은 방문호와 한창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혹시나 자기 아내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방성원의 모습에 안현자는 혀를 끌끌 차며 방문호에게 말했다.“여보, 애들도 쉬어야 하는데 우리도 그만 돌아갑시다.”그러자 방문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그리고 돌아가기 전 그는 방성원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마치 어린아이에게 당부하듯 말했다.“인하랑 싸우지 말고 잘 지내.”두 사람이 가자마자 방성원은 빠르게 설인하한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엄마가 심한 말은 안 하셨어?”순간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걸 느낀 설인하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그저 시시콜콜한 얘기만 나눴어.”말을 마치자마자 설인하가 갑자기 방성원을 향해 양팔을 뻗으며 물었다.“나 좀 안아줄 수 있어?”사실 두 사람은 약혼 날 이후로 포옹해 본 적이 없었다.방성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그녀를 품에 안았고 설인하는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성원 씨...” 오늘따라 유난히 다정하게 들리는 그녀의 부름에 방성원이 대답했다.“응.”“앞으로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서로 숨기는 일 없이 솔직하게 말하기.”방성원은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했다.“그래.”방성원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설인하는 눈을 꼭 감은 채 그의 온기를 느끼려 했지만 방성원은 자기 감정을 억제하느라 꽉 안아주지도 못했다.그렇게 두 사람이 애틋하게 안고 있을 무렵, 갑자기 도우미가 방은정을 데리고 들어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져버리고 말았다.“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나갈게요.”그러자 설인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아니에요. 괜찮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도우미에게 다가가더니 방은정을 자기 품에 안고 그녀의 귀여운 볼에 입을 맞췄다.
윤소현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아봤다.그녀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던 사촌 동생한테 뺨을 맞으니 그 충격은 거의 배로 느껴졌다.“정윤아, 너 어디 두고 봐!”그러자 정윤아는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언제까지 두고 보시려고요? 몇십 년 뒤 백발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까요?”그녀의 말 한마디에 윤소현은 또다시 발악했다.“난 절대 감옥에 가지 않을 거야! 누군가가 꼭 데리러 올 거거든.”“아,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구인데요?”그러나 윤소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윤소현한테는 정윤아가 마지막 동아줄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졌기 때문이다.정윤아는 대답 못 하는 그녀에게 계속 일침을 날렸다.“그거 알아요? 제가 너무 심심해서 유남우 씨는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거든요?”유남우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윤소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뭐 하고 있는데?”“여기저기 선을 보러 다니느라 아주 정신이 없더라고요. 거의 괜찮은 집 여자들은 다 한 번씩 만나본 것 같던데 왜 이렇게 결혼을 서두르는지 모르겠어요. 설마 언니의 그늘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윤소현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런 남자랑 결혼하는 것 자체가 불행이야.”윤소현의 순결도 유남우 때문에 더럽혀졌다. 이때 정윤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유남우 씨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어요?”순간 윤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그 누구한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왜요?”정윤아는 순간 그녀의 말에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그러나 윤소현은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면서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말을 꺼리는 모습에 정윤아는 더욱 호기심이 차올랐다.“혹시 유남우 씨가 언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요?”“네가 알아서 뭐 하게?”끝까지 대답하지 않으려는 모습에 정윤아도 어쩔 수 없이 그만 물어야 했다.“알겠어요. 그런데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아직 끝난 것 같
유남우는 박민정이 최근에 수술해서 지금 정수미와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차창을 내려 담담한 얼굴로 한참 동안 병원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러다가 핸드폰을 꺼내 박민정의 번호를 눌렀지만 통화버튼까지 누를 용기는 없었다.유남우가 차를 몰고 다시 돌아가려던 이때, 박민정과 유남준이 한껏 다정한 모습으로 병원에서 나오는 걸 발견했다.순간 유남우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더니 미친 사람처럼 안광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그러나 이쪽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두 사람은 먹을거리 사러 나왔다가 갑자기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다행히 유남준이 눈치가 빨라 박민정을 단번에 자기 쪽으로 잡아당겨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박민정도 깜짝 놀랐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차는 어느새 두 사람과 겨우 1센티미터만 사이에 두고 세워져 있었다.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심장이 떨려 한껏 창백한 얼굴로 유남준을 바라보자 그는 다정하게 박민정부터 안심시켰다.“괜찮아, 너무 무서워하지 마.”귀가 먹먹해서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느낌상 자신을 안심시키고 있는 듯싶었다.“네네.”유남준은 다시 살기 돋친 얼굴로 그 차를 향해 쏘아보았고 유남우는 그대로 핸들을 돌려 자리를 떴다.유남준은 비록 운전석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차 번호를 기억한 뒤 재빨리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차 번호 하나 조회해 봐.”그 뒤 박민정과 유남준은 먹을거리 사러 갔다가 다시 병원에 돌아갔다.“푹 쉬어, 난 일하러 갈게.”“네.”유남준이 박민정에게 이불을 덮어주자 박민정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정수미는 옆에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유남준은 회사로 돌아왔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차 주인에 대해 물었다.“유남우의 차라고?”서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근처 CCTV를 확인해 보니 확실히 유남우 씨였습니다.
한 술집 안.고현문은 전화를 끊고 어두운 얼굴로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무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도련님, 무슨 일 있습니까?”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유남준이 나보고 유남우와의 협력을 끊으라고 했다.”“뭐라고요? 아니, 유남우는 유 대표 친동생 아닌가요?” 누군가 의아해했다.고현문이 답하기도 전에 다른 이가 나섰다.“재벌가가 다 그렇지. 혈육이고 뭐고 아무 의미 없어. 저 두 형제, 사실상 경쟁자잖아.”“그렇군.”고현문은 아예 흥미를 잃었고 술을 따라주던 여자를 거칠게 밀쳐내며 말했다.“다 꺼져.”그의 싸늘한 목소리에 여자들은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빠져나갔다.고현문의 이름을 모를 리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는 여자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1~2년 전에도 진씨 가문의 영애가 그와 얽혔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일이 있었다.“도련님, 너무 화내지 마세요. 어차피 두 사람 다 사촌 아닙니까? 그런데 누구 편을 드시려고요?”고현문은 당연히 유남우를 돕고 싶었다. 사촌이긴 해도 늘 유남준에게 밀려 비교당하는 신세였다. 이번 기회에 유남준을 뛰어넘어 가족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유남준과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없었다. 혹여 일이 틀어지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당연히 유남준 말대로 해야지.”그가 담담하게 답하자 주변에서도 맞장구쳤다.“그렇죠. 지금 유남준은 IM과 호산 그룹의 대표인데 유남우는 아직 한참 부족하죠.”그 말을 듣고도 고현문은 더 이상 술자리가 즐겁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방을 나섰다.한편, 유남우는 병원을 나선 뒤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차를 몰아 홍주영의 고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홍주영의 고향은 멀었는데 차로 네댓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그는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달렸다.그때, 고현문에게서 전화가 왔다.잠시 화면을 보던 그는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고현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유남준이 나보고 너랑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