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여기서 시간을 끌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도망칠 방법도 없었다.어쩔 수 없이 그녀는 샤워를 마친 척 몸에 목욕가운을 두르고 문을 열었다.유남우는 그녀의 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스캔했다.박민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는 분명 유남준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유남우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현재 모든 것이 변했다.“민정아, 진작에 널 가지지 못한 게 한스러워.”유남우가 다가오려 하는 순간 박민정은 한 걸음 물러섰다.“남우 씨도 샤워 좀 하시는 게 어때요?”유남우는 걸음을 멈추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장난해? 내가 샤워하는 사이에 도망치려는 작전이지?”이를 들은 박민정은 미소를 지었다.“싫으시다면 말고요. 그냥 한번 물어본 것뿐이에요.”그녀가 적극적으로 유남우에게 다가갔다.“정말 저를 아직도 좋아하는 거예요? 저를 얻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실 수 있나요? 주영 씨가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해 본 적이 있어요?”유남우는 그녀의 시선에 마음이 허탈해졌다.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고개를 숙여 박민정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포기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민정은 마음을 가다듬고 와인이 놓인 테이블 쪽으로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쨍그랑!”깨진 유리잔의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졌다.박민정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유남우에게 겨눴다.“다가오지 마요!”박민정은 병목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정말로 죽여버릴 거예요.”유남우는 이미 그녀가 거부할 것이란걸 예상하였다.그는 두려워하지 않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섰다.“그래? 어디 한번 찔러봐.”박민정이 내민 병 조각이 유남우의 목덜미를 스쳤다.수척한 피부는 쉽게 찢어져 핏방울이 맺혔다.그는 숨을 들이쉬었다.“민정아, 넌 정말 내 예상을 뛰어넘어.”평소에 남과 다툰 적조차 없었던 그녀에게 이 같은 폭력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제발 다가오지 마요.
유남우가 박민정을 감싸고 있던 팔이 확 굳어버렸다.그 변화를 느낀 박민정이 말을 이었다.“소현이와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전 주영 씨가 남우 씨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제삼자인 저도 눈치챘는데, 남우 씨는 몰랐다는 거예요?”유남우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박민정은 그의 속내를 어렴풋이 읽었다.“이미 알고 있었죠? 그때는 그냥 모른 척한 거죠.”속내가 들통난 유남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민정은 이를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역시 제 예상이 맞았군요. 전에는 주영 씨의 마음을 외면하더니, 이제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 마음이 변했다고 하는 거예요?”“예전에는 제가 사람을 잘못 알아봐서 남우 씨에게 상처를 줬을지 몰라도, 주영 씨는 남우 씨에게 잘못한 게 없잖아요.”유남우는 목구멍이 살짝 움찔했다.박민정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면서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민정아, 전에는 네가 말을 이렇게 잘한다는 걸 왜 몰랐을까?”그가 고개를 숙여 박민정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을 내뿜었다.박민정은 소름이 끼쳤다.“남우 씨, 이러지 마세요.”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내려왔다.“뭘 이러지 말라는 건데?”박민정은 이를 악물었다.유남우는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걸 알아? 지금 후회되는 게 있어. 왜 그렇게 온화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는지. 그래서 내 사랑을 끝내 가질 수 없었어.”박민정은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너를 원해!”유남우가 말했다.“내가 이토록 오래 널 사랑했는데, 정작 너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게 말이 돼?”유남우의 눈빛이 사나워졌다.“오늘 연지석 씨랑 재미있게 놀았지? 예전에 단둘이 있을 때부터 이미 연지석 씨의 사람이었지?”“말도 안 돼요!”박민정이 소리쳤다.“내가 틀린 말 했어? 오해하고 있었던 거야?”“저랑 지석이는 그냥 친구예요. 친구로서 지켜야 할 선을 절대 넘지 않았어요.”박민정은 모멸감에 얼굴이 붉어졌다.유남우는 잠시 침묵했
설인하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박민정은 약간 민망해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노는 동안 이미 많은 남자가 설인하를 위해 그 인형을 잡아주려고 시도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했다.설인하는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아이를 둔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성들이 끊이지 않았다.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오락실 사장에게 물었다.“저 인형을 그냥 저희에게 그냥 팔 수 있을까요?”“그건...”오락실 사장은 일부러 난색을 보였다.“저희 가게 원칙상 직접 뽑아가셔야 해서요.”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지석이 입을 열었다.“이 게임 코인들은 환급하지 않을 거예요. 이게 그 인형값은 될까요?”그가 물었다.오락실 사장은 쌓여있는 게임 코인을 보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넉넉해요. 되고도 남아요! 이렇게 많은 코인인데 안 될 리가요.”곧바로 직원을 불러 그 인형을 꺼내 설인하에게 건네주었다.설인하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연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부사장님 정말 대단하세요.”“별일 아니에요.”연지석이 대답했다.설인하는 인형을 꼭 안고 환하게 웃었다.박민정은 그녀를 보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들이 이곳에서 논 시간이 적어도 두세 시간은 됐을 텐데 설인하는 정말 이 한대의 인형뽑기 기계 앞을 지키며 오로지 이 인형 하나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가요, 돌아가 푹 쉬어요.”그들은 정민기가 예약해 둔 호텔로 돌아갔다.길에는 이미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박민정은 자신의 룸 카드를 받고 다른 사람들과 헤어져 방으로 들어갔다.어두운 방 안에서 그녀가 카드를 삽입하기도 전에 갑자기 거대한 손이 그녀를 낚아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민정아!”익숙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박민정은 몸서리치며 소리쳤다.“유남우 씨! 이거 놔요!”그는 비웃으면서 말을 이었다.“내 목소리를 알아듣다니. 예전엔 내 얼굴도 구분 못 하더니.”박민정은 허둥지둥 그의 품에서
연지석의 말에 박민정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녀가 그런 말을 했던 건 사실이다. 줄곧 마음에 없는 상대에게 희망을 주면 안 된다고 믿어왔었다.‘하지만 그건 낯선 사람을 상대로 말한 건 아닌데. 그 여자와 아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는데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적어도 돈을 그렇게 허비하지 않도록 말이야.’“됐어. 그래 네 말 맞아.”박민정이 말했다.연지석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우리 계속해.”그는 아무 일도 없듯이 방금 그 여성이 떠난 자리에 앉더니 순식간에 그녀가 잃어버린 게임 코인을 전부 되찾아왔다.박민정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조하랑이 인형으로 가득 찬 큰 봉투 여러 개를 어깨에 걸치고 나타났다.그 많은 인형을 들고 오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쏠렸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소리쳤다.“와, 저 이모가 인형을 저렇게나 많이 잡았어요! 대박이에요!”아이들은 조하랑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녀가 게임 코인을 산더미처럼 쏟아부은 결과였다.자신을 칭찬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조하랑은 기쁨에 겨워 봉투를 열며 말했다.“자, 마음에 드는 거 골라 가!”오락실에 있던 아이들은 하나둘 모여들어 줄을 지어 신나게 인형을 받아 갔다.오락실 사장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이대로라면 진짜로 적자 날 판이었다.조하랑은 아이들에게 인형을 나눠준 후 사장에게 말했다.“사장님, 저기 기계에 인형을 다시 채워주세요. 저 더 잡을 거예요.”오락실 사장은 억지로 웃으면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사장은 곧바로 직원에게 재고 보충을 지시했다.조하랑은 다시 인형 뽑기에 열중했다.한편 설인하는 여전히 자신이 한 번도 못 잡은 그 특정 인형만을 노리며 미친 듯이 기계를 조작하고 있었고 민수아는 여러 게임기 사이를 옮겨 다니며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박민정은 여전히 연지석의 옆자리에 앉아 게임을 이어갔다.연지석이 곁에 있는 한 그녀는 게임 코인이 떨어질 걱정 없이 게임
박민정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연지석의 뒷모습이 보이자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아니요. 우리는 그냥 친구예요.”“친구요?”여성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여성은 박민정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박민정은 어리둥절했다.‘뭐가 고맙다는 거지?’여성은 박민정에게 감사 인사를 마친 후 연지석을 향해 걸어갔다.그녀가 떠나자 주변에서 그 대화를 엿들었던 다른 여성들도 하나둘 연지석을 쳐다보며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박민정은 여성이 연지석에게 말을 거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아, 지석이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구나.’연지석은 비록 서른이 넘었지만 TV 속 아이돌보다도 더 빛나는 외모에 연예인들을 압도하는 당당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박민정은 몇몇 여성들이 연지석에게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지석이도 이제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그녀는 다시 게임에 집중하며 더 이상 그쪽을 신경 쓰지 않았다.한편 연지석은 약간 머리가 아팠다.눈앞에 있는 여성들은 모두 그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하나같이 홀딱 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연지석은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싸늘하게 거절해 버렸다.하지만 몇몇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의 주변에서 맴돌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연지석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 곁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말했다.“아까 뭐라고 한 거야? 왜 내 옆에서 맴도는 거야?”“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묻길래 친구라고 했지.”박민정이 대답했다.연지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 지금 나를 골탕 먹이려는 거지?”“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그럴 이유가 있어?”박민정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녀의 모습을 보고 연지석은 할 말을 잃었다.“잘 들어, 나 연애 안 할 거야. 이 여성들을 보면 알겠지만 다 내 얼굴만 보고 접근하는 거야.”박민정은 웃음을 터뜨렸다.“너 자신을 잘 알고 있네.”연지석은 게임을
오락실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 각자 취향에 맞는 게임을 찾아 나섰다.설인하는 인형 뽑기 기계 속에 있는 사랑스러운 토끼 인형을 발견하자 잡아서 방은정에게 줘야겠다고 결심했다.옆에서 지켜보던 조하랑도 뽑기 게임에 합류했고 민수아는 혼자서 물고기 잡기 게임 코너로 향했다.연지석은 박민정과 나란히 걸으며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게임 할래?”박민정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코인 푸시 게임을 선택했다.다행히 자리가 몇 군데 비어 있었고 연지석은 그녀 옆에 앉아 함께 게임을 시작했다.코인 푸시란 한 개의 코인으로 쌓여 있는 코인 더미를 밀어 떨어진 만큼을 플레이어가 가져가는 게임이다.물론 대부분은 적게 떨어지기 마련이라 가게 주인은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시스템이었다.박민정은 자리에 앉아 게임에 집중했고 가끔 연지석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이런 게임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연지석은 그저 박민정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그녀는 오랜만에 만나도 변함없는 모습이었다.쨍그랑!얼마 후 코인 산더미가 한꺼번에 쏟아지며 굉음을 냈다.코인이 떨어지는 소리에 박민정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연지석을 바라보았다.“세상에... 너 이거 다 떨궜어?”이런 상황이 처음이었기에 박민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응.”연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생각보다 쉬운데? 아마 사장님이 기계 설정을 깜빡했나 봐.”박민정은 눈빛에 반짝이는 감탄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어릴 때부터 너 이 게임 잘했잖아. 지금도 여전하네!”과거의 연지석은 고아였다.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던 어느 날 박민정이 그에게 돈을 건넸다. 그 돈으로 그는 게임 코인을 사서 게임을 시작했고 많은 게임 코인을 따내면 다른 아이들에게 싸게 팔았다.연지석은 그렇게 번 돈으로 항상 박민정과 함께 맛있는 것을 사 먹었다.“그때 일을 아직 기억하다니.”연지석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듯 목소리를 낮췄다.박민정은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당연하지. 그런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