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일을 전부 없었던 걸로 하자고?유남준은 그 서류를 낚아채 조목조목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마다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두 사람이 더 이상 관계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가서, 배상액을 보는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1조 6천억!이렇게나 많은 돈을...박민정이 이 많은 돈을 어디서 났단 말인가.유남준은 진즉에 박민정의 회사를 조사했다. 유동자산이 많아 봐야 천억 정도밖에에 안 되었고, 그 회사를 통째로 판다 해도 이 많은 돈을 모으기엔 턱 없이 모자란다.냉소를 흘리며 유남준은 그 서류를 휴지통에 처박았다.“허, 왜 내가 여기에 사인할 거라 생각해요?”“제 의뢰인이 얘기한 바 있습니다. 유 대표님이 사인을 안 하시게 되면 이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옛날 일들을 전부 없던 일로 하자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요.”장명철은 목소리를 낮추며 동시에 무게를 실었다.“그러니까 앞으로 그 일을 들먹여서 박민정 씨의 목을 조르지 마세요. 당신이 싫다고 한 것이지, 박민정 씨가 갚지 않겠다고 한 게 아니란 걸 잊지 말란 말씀입니다.”박민정을이 어릴 때부터 쭉 봐온 셈인 장명철은 전부터 그녀를 대신해 유남준한테 시원하게 욕을 날리고 싶었다.영락없이 얻어맞으며 쫓겨날 줄 알았는데 유남준은 그가 한 말에는 별로 화가 난 눈치가 아니었고 이렇게만 말했다.“걱정 마세요. 앞으로 그 일 다시 꺼내지 않을 테니까.”너무 순순히 나오자 장명철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하지만 유남준은 여느 때보다도 정신이 또렷했다. 박민정이 어처구니없는 금액의 큰돈을 서슴없이 내놓으면서까지 자신을 떠나려는, 자신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결심이 얼마나 견결한지를 그는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장명철이 가고 난 후 유남준은 음침한 소리로 서다희한테 물었다.“널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변심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서다희는 자기 여자 친구를 떠올리며 물음에 대답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난 그녀를 반드시 후회하게 할 겁니다.”그래, 그
유남준은 입구에 서서 집 안에 있는 너무나 익숙해 마지않은 얼굴을 바라봤다.분명 못 본 지 겨우 반달 남짓 되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경호원들은 대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유남준만 집안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자 실내의 기압마저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내가 분명히 다 얘길 한 줄로 아는데요.”박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의 코앞까지 와서 우뚝 선 유남준은 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색을 살필 수가 없었다.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깊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며 시선을 한시도 떨구지 않았다.데일 것만 같은 따가운 시선에 박민정은 저도 몰래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장명철 변호사님한테서 돈 받았죠? 그러니까 우린 이제 끝난 사이에요.”여전히 말이 없는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박민정의 모습만 박혀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으려고 했으나 박민정은 놀란 표정으로 그의 손을 피해 연거푸 몇 발짝이나 물러났다.그러고는 긴 숨을 들이쉬며 그녀가 물었다.“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허공에 떠 있는 손 그대로 유남준은 한 글자씩 또렷하게 내뱉었다.“나랑 집에 돌아가자.”“집이요?”박민정은 자조적으로 웃었다.“무슨 집이요? 두원 별장 말하는 거예요? 거긴 여태껏 내 집인 적이 없어요.”과거에 유남준은 이렇게 그녀와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젠 박민정이 그한테 그대로 돌려줄 차례였다.유남준은 박민정 때문에 상처받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고작 한마디 말뿐인데 가슴이 바늘로 찌르듯이 아팠다.“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허울뿐이잖아요!”박민정은 망설이지도 않고 받아쳤다.순간일순 큰 바위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느낌에 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어 잡았다. 눈빛에서는 불씨가 타오르는 듯하며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허울뿐?! 너 지난달까지만 해도 내 침대에 있었어. 너 기분 좋을 때 어떤 소리 내지르는지 내가 한 번 실감 나게 질러줘 봐?”쨕!박민정은 손을 들어 그의 뺨
한참 후 유남준과 연지석의 얼굴에는 누구 하나 더 낫다 할 것 없이 골고루 상처가 나 있었다.하지만 전에 상처를 입은 연지석은 유남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남준의 주먹이 또 날아오자 박민정은 두 팔을 벌려 연지석을 보호하며 막아섰다.“그만해요, 이제!”그녀는 차갑게 유남준을 바라보며 그를 저지했다.유남준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다 터진 입가로부터 묵직한 통증이 전해져오며 빨간 피가 흘러나왔다.엄지손가락으로 피를 쓱 닦아내며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이만 가요, 안 그러면 나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고 그한테 경고했다.그 순간의 기분은 대체 어떤 것인지 유남준도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게 누구든 항상 제일 먼저 그의 편에 섰던 그녀였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다른 이를 선택했다.유남준은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묵묵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가 떠나자 박민정은 얼른 연지석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그녀의 손이 연지석의 팔에 닿자마자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어, 괜찮아.”연지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소매에서 피가 스며져 나와 그녀의 손끝까지 붉게 물들인 것을 발견했다.“네 팔에서 피가 나오고 있어.”연지석은 곧장 외투를 벗어 다부진 팔근육을 드러냈다. 흉측한 칼자국 상처가 조금 전의 싸움으로 인해 다시 벌어져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는 얼른 옷으로 그곳을 눌렀다.“전옛날에 난 상처인데, 혹시 놀랐어?”유남준이 주먹을 꽤 잘 쓰는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때 그가 데려온 사람도 집안에 들어왔다. 모두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얼굴들이었다.연지석이 다친 걸 보자 그 중 한 사람이 달려와 그에게 상처를 싸매주었다.“병원으로 가실까요?”“아니야, 너희들은 먼저 나가 있어.”연지석은 그 일행을 밖에 내보내고서는 박민정에게 시선을 돌렸다.“유남준이 널 다치게 하진 않았어?”박민정은 고개를 저었
저녁이 되자 박민정은 취침하러 방에 들어갔다.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건만 머릿속에는 유남준이 떠날 때의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릴 때 그가 속았다는 걸 알고 나서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보지 못했다.마음속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불안감 때문에 박민정은 선잠을 잤다.한편, 유남준은 박민정의 집과 멀지 않은 한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싸늘한 표정으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연지석은 여기가 진주가 아닌 유남준의 구역을 벗어난 곳이라고 안심했지만, 사실 진주에 있을 때 유남준은 오히려 행동 가짐에 더 유의를 기울이는 편이었다.이제 외국에 왔으니 그는 더 거리낄 게 없었다.사고가 발생한 후 연지석의 가족들은 그를 밤새 데려갔고 모든 소식을 차단했다.그리하여 박민정은 연지석이 사고 난 걸 모르고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사람을 불러 문부터 수리했다.이 기간에 그녀는 여기에 잠시 머무르며 곡을 계속 쓰다가 유남준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되면 다시 은정숙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아침에 장보러 가려고 문을 열고 밖에 나오자 마이바흐 차를 세워놓고 그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유남준을 보게 되었다.남자는 그녀를 보자 얼른 담뱃불을 눌러 끄고 한쪽 휴지통에 꽁초를 버렸다.박민정은 그를 못 본척하며 그가 있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유남준은 몸에서 담배 냄새가 사라지길 조금 기다렸다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그녀를 쫓아왔다.”“민정아!”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어제 한 얘기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예요? 그럼 오늘 한 번 더 얘기해줄까요? 난 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발 놔줘요. 우리 좀 좋게 좋게 헤어져요.”유남준의 눈동자에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너 없어지고 나서 내가 하루도 잠을 제대로 푹 잔 적이 없다는 걸 알아?”박민정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잠을 잘 못 잔다고요? 그럼 의사를 찾아가야지.”결혼한 지 3년 되는 시간 동안 그녀는
박민정은 유남준이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제풀에 나가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그는 뜻밖에도 오르후스에 지사를 설립했다.위치도 그녀의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유남준이 비즈니스 귀재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사업수완은 여전했고 어디에 가나 잘 먹히는 모양이었다. 며칠 되지도 않는 새에 그는 이 도시의 부자들과 친목을 쌓으며 소위 말하는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그리고 매일 아침 박민정의 집에는 꽃다발과 값비싼 선물이 배달됐다. 하지만 그것들은 매번 그녀에 의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였다.이날에 유남준은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 전체를 사버리고 그녀의 옆집으로 이사왔다.테라스에 서 있기만 하면 서로 마주 볼 수 있었다.박민정은 야외 테라스에서 곡을 쓸 때 그와 마주쳤다.“너 여기 사는 게 좋으면 앞으로 우리 여기서 살자.”유남준이 그녀한테 말했다. 박민정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악보를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다른 한편, 서다희는 인테리어업체 사람을 데리고 왔다가 유남준이 혼자 테라스에 서서 맞은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민정이 보고 싶어 저러고 있다는 걸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대표님, 옆집은 이미 샀습니다. 사모님이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가셔도 됩니다.”박민정에 대한 유남준의 마음을 알고 나서부터 서다희는 박민정에 대한 호칭을 바꿨다.박민정은 자가가 아니라 셋집이었다.서다희는 금방 받은 박민정네 집 열쇠를 유남준한테 넘겨주었다.유남준은 그 열쇠를 건네받으며 힐끔 보고는 물었다.“국내 상황은 어때?”“회사 원로들의 반발은 이미 전부 수그러들었는데 유성혁과 최현아가 아직도 물밑에서 꼼수를 부리고 있습니다.”유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 둘은 신경 안 써도 돼.”유남준의 상대로 그들 둘은 자격 미달이었다. 서다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유남우는?”유남준이 또 묻자 서다희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진주시를 떠나고 나서 유남우도 저택을 떠났
박민정은 문득 가슴이 조여왔다.그가 누군가의 남편이 되는 것도 처음은 맞지만 자신도 누구의 아내가 처음인 건 마찬가지 아닌가?박민정의 눈빛은 더 차가워졌다.“남준 씨, 진주로 돌아가요. 당신이 미워지기 전에.”그녀를 안고 있는 유남준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나 안 돌아가. 널 기다릴 시간과 인내심 충분히 있어.”박민정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당신 나 안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날 붙잡고 안 놔줘요, 대체 왜?”유남준의 목울대가 잘게 떨렸다.“난 이혼은 생각도 안 해봤으니까!”말하고 나서 그는 이불을 열어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났다.“필요하면 날 찾아와. 이제부터 너희 집주인은 나야.”이 말에 박민정은 눈이 휘둥그레져 그가 언제 떠났는지도 모르고 그 전의 집주인한테 연락하느라 바빴다. 집주인은 이 집을 팔았다고 했다.하는 수 없이 박민정은 일단 문을 도어락으로 바꿨다....새로 쓴 곡의 판권을 어떤 사장님이 구매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마침 그 사장님도 이곳에 있어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다.박민정은 이른 아침부터 나갈 채비를 마쳤다. 이번 계약을 꼭 성사시키고 싶었다.거액을 유남준한테 주고 나니 자금 운용에 차질이 조금 생겼는데 이번 계약을 무사히 마칠 수만 있다면 매년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가장 가까운 5성급 호텔에 약속 장소를 잡았는데 상대 회사의 책임자는 LA 사람이고 재력이 어느 정도 되며 그를 우리말 이름으로 용 사장님이라고 불러주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그는 노멀한 정장 슈트 차림을 한 노란 머리, 파란 눈동자의 체구가 큰 외국인이었다.“민 선생님?”인터넷에서 아주 유명한 작곡가 민 선생이 여자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용 사장은 그녀를 보자 조금 뜻밖이라는 기색과 놀라워하면서도 살짝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도 그가 우리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네, 맞습니다. 반가워요, 용 사장님.”그녀는 손을 내밀며 그와 악수를 청했다.용
그러나 뜻밖에도 그 외국인들은 쫓아오지 않았다.밖에 나오자마자 박민정은 크게 들숨 날숨을 쉬었다. 그러다 고개를 드는 순간, 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된 거야?”박민정은 그가 벌리는 입 모양을 보고 대충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이런 시기에 그와 길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어 그녀는 남자의 손을 놓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향해 걸어갔다.그러나 유남준은 몇 발짝 성큼 걸어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뭐야, 너 맞았어?”요즘 그는 줄곧 박민정을 따라다녔다. 오늘도 호텔에 가는 것을 보고 따라왔다가 복도에서 그런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놔요.”박민정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유남준은 놔주지 않고 오히려 큰 손으로 그녀의 턱밑을 감싸쥐고 그녀 얼굴에 있는 상처를 살폈다. 얼굴에는 아주 선명한 손가락 자국이 남아있었다.그가 호텔 입구를 다시 뒤돌아보자 그 두 외국 남자는 여전히 그들 쪽을 향해 보고 있었다.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유남준은 박민정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번쩍 안아 차 안에 밀어 넣었다.그녀의 보청기가 이미 떨어져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며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으로 한 사람한테 주소를 문자로 전송하고는 또 전화를 걸었다.“사람을 데리고 와서 여기 이곳을 전부 에워싸. 누가 민정이한테 손찌검했는지 반드시 알아내고! 한 놈도 도망가게 하지 마!”전화를 끊고 그는 운전기사한테 근처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박민정은 멀지 않은 곳에 병원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서 스쳐 갔다.“나 병원 안 가요. 차에서 내릴 거예요.”병원에 가서 혹시라도 임신한 것을 들키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꽉 쥐고 단호하게 타일렀다.“말 들어!”“병원 안 간다니깐요. 빨리 나 내려줘요!”박민정은 너무 급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유남준은 조
유남준은 순간 심장마저 쫄깃쫄깃해졌다.그러나 서다희가 하는 말을 듣게 되자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혈연관계가 없다고 나왔습니다.”친자가 아니라고...그러니 정말로 박민정의 말대로 두 사람의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윤우와 또 다른 아이는 그녀와 연지석이 아이라고?!주먹을 꽉 쥐고 있는 그의 손마디 뼈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목구멍은 불에 타고 있는 듯했다.“알았어.”유남준은 전화를 끊었다.차내의 공기는 삽시에 차가워져 시베리아가 따로 없었다. 유남준은 손등에 남은 잇자국을 바라보며 얼굴이 차갑기만 했다.박민정이 자신을 속인 줄로만 알았는데.인제야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게 되었다.그는 기사한테 거처가 아닌 근처 술집으로 가자고 했다....박민정은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그때, 은정숙한테서 전화가 왔다.“엄마.”“엄마.”두 아이가 휴대폰 화면에 나타났다.박민정은 바깥을 두리번거리며 유남준이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아이들한테 대답했다:“어, 그래. 예찬아, 윤우야. 엄마 뽀뽀.”박민정은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쓰며 똑똑한 아이들이 눈치를 못 채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엄마 언제 와?”윤우가 큰 눈동자를 깜박깜박하며 묻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갈 거야.”“엄마, 나랑 형이 엄마 너무 보고 싶어.”“엄마도 너희들 보고 싶어.”그때 박예찬이 카메라 앞에 고개를 들이밀었다.“엄마, 저녁에 우유 마시는 거 잊지 마. 비타민도 꼭 섭취해야 해.”“알았어...”.한 배에서 난 아이지만 한 아이는 성숙하고 한 아이는 장난스럽고 귀엽다.박민정은 두 아이와 얘기하는 동안 너무 행복했다. 또 그들이 있기에 두려운 마음도 많이 덜해지는 것 같았다.혼자 두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그녀는 강해져야 하고 위험에 직면했을 때 잘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그리하여 그녀는 스스로 방어하는 법을 배우고 호신용 무기라도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