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빙구리’란 자기 몸을 얼음판 위에 뉘여 녹힌 후 잉어를 잡는다는 말이다. 박예찬은 지금 유남준을 일부러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은정숙도 그걸 눈치 채고 막 거절하려는데 유남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응, 오늘 밤 물고기 잡으러 가려고.”박민정은 의아했다. 유남준은 왜 갑자기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그러나 은정숙은 이렇게 추운 겨울날에 강물이 얼어서 물고기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이렇게 큰소리를 치다니. 역시 이 세상에 돈으로 해결 못할 건 없다.그날 밤 10시쯤, 누군가 금방 잡은 싱싱한 물고기를 보내왔다. 바로 은정숙이 좋아하는 민물고기였다.유남준이 그 물고기를 박민정에게 건네자 그녀는 바로 가져가서 국을 끓여 어르신께 드렸다. 방금 잡은 물고기라 유난히 싱싱했다.남은 부분은 남겨서 이제 다른 이웃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그러나 박민정은 유남준이 어떻게 물고기를 잡았는지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돈이 많으니 당연히 도와주려는 사람도 많았을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은정숙은 국을 마시려 하지 않았다.“이게 유 대표님이 잡은 거야?”“정확히 말하면 돈 주고 산 거죠.”박민정이 말했다.그러자 은정숙은 고개를 저었다.“대표님에게 빚지고 싶지 않아.”박민정은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손을 뻗어 은정숙을 껴안았다.“그런 생각하시지 마세요. 남준 씨가 아줌마 집에서 지내면서 물고기쯤이야 준비해드릴 수도 있죠.”박민정은 은정숙이 자신이 작은 일로 감동하고 유남준에게 미안해할까 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녀의 설득에 은정숙은 드디어 국을 먹으려고 했다.“역시 우리 쪽 민물고기가 비린 냄새도 안 나.”은정숙은 이 순간 처음 느껴보는 행복감이 마음속으로 밀려왔다.예전에 그녀는 자신이 나이 들었을 때 이렇게 딸과 손자가 옆에 있어줄 줄은 몰랐다.저녁이 되어 은정숙은 또 국을 마시고는 다시 누워서 잤다.박민정은 나날이 여위어 가는 은정숙의 가냘픈 몸을 보고 마음이 아파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사실 박민정은 은정숙이 떠
차는 천천히 시즌 호텔 앞에서 멈춰 섰다.조하랑은 차 안에서 호텔 안을 들여다봤는데 마음이 복잡했다.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박예찬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박민정도 뒤따라 내려왔다.박예찬은 시계를 바라보고 시간이 됐는데 왜 아직 아무도 안 오는지 의아해했다. 돈을 받고 싶지 않은 건가? 이렇게 책임감이 없어도 되는 건지 싶었다.만약 리뷰를 남길 수 있다면 무조건 낮은 점수를 매겼을 것이다.조하랑은 원래도 박예찬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어린 아이일 뿐인데 어떻게 강연우보다 더 멋진 파트너를 찾아줄 수 있겠는가?“민정아, 나 너무 긴장돼.”조하랑은 고개를 돌려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박민정은 앞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겁내지 마. 내가 여기 있잖아.”수년 동안 조하랑은 강연우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한국으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강연우를 찾아가는 것이었는데,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여자 친구가 있는 상태였다.이제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있고 강연우는 조하랑에게 청첩장까지 보냈다. 심장이 찢기는 느낌이었다.박민정의 위로를 받은 조하랑은 마침내 한 걸음 내딛고 호텔로 들어섰다.연회가 열리는 로비 밖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신랑 신부의 웨딩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신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강연우의 곁에 꼭 붙어 서있었다.박민정도 신부의 외모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조하랑과 비슷했다.“신부가 너무 예쁘네.”조하랑은 중얼거렸다.박민정은 더욱 안타깝게 생각했다.“우리 하랑이가 더 예쁜데.”박예찬도 조하랑의 손을 잡았다.“맞아요, 엄마가 더 예뻐요.”‘엄마’라는 말에 정신을 차린 조하랑은 자신을 아끼는 두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그래, 내가 더 예쁘지. 어서 들어가자.”조하랑은 한 손으로 박예찬을, 다른 한 손으로는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 옆에 남자가 없어도 괜찮았다.세 사람
강연우의 어머니는 조하랑이 대표님의 딸이니 자신의 아들이 계속 그녀와 연락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마음속의 생각을 확실히 하고 강연우 앞에서 전혀 그들 모자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아, 그렇군요. 아줌마는 정말 대단한 어머니네요. 아들이 결혼하는데 애인을 찾아주시고 말이에요. 며느리가 될 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박민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덧붙였다.“우리 하랑이는 아드님에게 마음이 남아 있어서 결혼식에 참석하러 온 게 아니라 아줌마네 가족이 다른 집의 착한 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걱정돼서 왔어요.”그렇게 말한 후 박민정은 강연우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강 변호사,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죠. 어머님이 저런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데 당신이 변호사라는 호칭을 들을 자격이 있나요?” 박민정은 여기 오기 전에 강연우의 부모님이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고 그저 강연우가 정 없는 사람이란 것만 알고 있었다.강연우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했다.“엄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전 평생 해인이랑만 함께할 거고, 해인이만 사랑할 거예요.”박민정의 뒤에 서 있던 조하랑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예전의 자신이 그저 그가 놀다 버린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한때 강연우와 함께 허름한 호텔에서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을 껴안으며 말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나 강연우는 이번 생에 오직 조하랑과 함께할 것이며, 그녀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조하랑은 감정을 억누르며 그에게 따지지 않으려고 애썼다.강연우의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는 박민정을 매섭게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 아들이 이렇게 뛰어난데 여자 몇 명 만나는 게 뭐가 문제야? 요즘 어떤 회사 대표가 여자 한 명밖에 없어? 어떤 사람은 포기하지 못하겠지. 내 아들을 떠나면 누가 저 놀다 버린 년을 만나려 고 하겠어?”강연우의 어머니는 조하랑과 강연우가 오래 전에 이미 호텔도 다니며 함
호텔의 어느 한 방 안에서는 홀 현장 라이브를 띠우고 있었다.서다희는 어리둥절했다.“박예찬은 왜 또 조하랑의 아들이 된 거지?”유남준은 진주시로 온 다음 서다희더러 몰래 박민정을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이건 보호 차원에서 시키는 일이지 절대 미행이 아니라고 했다.그래서 경호원들이 아래 결혼식장에서 박민정 일행을 찍고 있어서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유남준은 서다희의 말을 듣고도 전혀 이상하게 생가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절친이니 아들을 빌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그런데 ‘아빠’라니? 진주시에서 가장 센 사람이라면 자신이 등장할 차례인 건가?하지만 지금은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아들은 빌릴 수 있어도 남편은 절대 안 된다.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유남준은 서다희에게 지시했다.“내려가서 지금 이 일 좀 수습해 봐.”박민정의 친구는 그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러니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 당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네, 알겠습니다.”강연우는 변호사가 맞지만 돈으로 해결 못하는 것은 없다.아래층 결혼식장에서.신랑 측 손님과 신부 측 손님들은 모두 문 앞에서 발생한 일 때문에 놀라서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강연우는 깜짝 놀라 어머니를 부축하여 일으켰다.강연우 어머니는 조하랑에게 이렇게 큰 아들이 있는 줄은 몰랐고 이제 알게 되자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두 사람은 연애를 했었고 아들은 이제야 결혼하는데 조하랑에게 이렇게 큰 아들이 있었다니.지난번에 조하랑을 만난 건 작년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 아이는 네 살 쯤 돼 보이는데, 그렇다면 조하랑이 아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아들 강연우를 만났다는 뜻이다.“진주시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고? 네 엄마가 너를 속인 것 같구나.”강연우 어머니는 박예찬에게 말했다.“네 아빠가 널 버린 거 아니니? 그래서 네 엄마가 내 아들에게 집착하는 거 같구나. 너희에게 말하는데, 내 아들은 너희 모자를 받아줄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강연우
박예찬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사람은 어떻게 내가 보낸 초대장을 가진 거지?’게다가 자신의 실속을 챙기려 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다.“아빠, 말씀하신 것이 다 맞아요.”이 순간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걸 보면 정말로 한 가족 같았다.강연우는 눈앞의 아름다운 장면을 바라보며 눈이 부셨다.하지만 그는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말했다.“도련님, 죄송합니다. 접대가 부족했습니다.”김인우는 그 말을 듣고는 실눈을 뜨고 뼛속까지 차가울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접대만 부족한 게 아닙니다. 당신들은 제 아내와 아들을 모욕했습니다. 이건 어떻게 갚겠습니까?”“당신은 변호사죠? 자신의 소송에서는 이길 자신이 있나요?”김 씨 가문에게 강연우를 없애려 한다면 마치 하찮은 개미를 죽이는 것처럼 쉬웠다.강연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김인우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하랑, 예찬, 그리고 박민정에게 말했다. “우리 돌아가요, 이런 결혼식에는 참석할 필요 없어요.”사람들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강연우의 잘생긴 미간을 좁혔다. 김인우를 아는 사람 중에서 돈이 조금 있는 친척들은 결혼식에 더 참석할 엄두를 못 내고 모두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떠났다. 강연우의 어머니가 그들을 막으며 말했다. “식사도 안 하고 왜 가려고들 하십니까?” 그중 한 사람이 불만을 토로했다. “김씨 가문을 건드렸는데, 누가 감히 여기서 식사를 하겠어요.”강연우의 어머니는 자신이 매우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호텔을 나서는 길에 김인우와 조하랑은 함께 걸었고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예찬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하다니요. 말해봐요, 내가 친자 확인을 할 때 어디에 손을 썼어요?”김인우는 친자 확인을 할 때 조하랑이 박예찬을 찾아왔던 것을 기억했다. 하여 그는 전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김인우는 세 사람이 떠나는 걸 바라보면서 잘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네.”그는 다시 차에 앉았다.이때 호화로운 차 안에는 흰머리가 가득한 노신사가 있었다. “너 이 쓸모없는 녀석, 사람들이 차에 안 타는데 넌 왜 쫓아가지 않니? 끈질기게 굴 줄 몰라?”말하는 사람은 바로 김인우의 할아버지로, 그의 결혼 문제에 정말 마음을 썼다.오늘 김인우가 우연히 박예찬이 쓴 쪽지를 언급하며 아빠를 찾는 말을 할아버지가 들었다.할아버지는 꼭 여기에 와야 한다고 했고 가지 않으면 반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그래서 김인우가 구원하러 온 것이다.“제가 그렇게 끈질기게 굴 사람이에요?” 김인우가 말했다.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들어 그를 때리려고 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하랑이만 며느리로 인정해. 네가 어떤 방법을 쓰든지, 반드시 하랑이와 결혼해야 해.”조하랑을 처음 본 이후, 주변 사람들을 시켜 이 여자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녀의 인간관계는 매우 깨끗하다는 것을 알았다. 변호사 자격증이 취소된 후에도 낙심하지 않고 단순한 사무직 일을 하면서도 열심히 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조하랑이 자신의 손자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김인우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도대체 조하랑의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옆에서 그저 동조할 뿐이었다.한편, 서다희는 사건이 성공적으로 해결된 후 유남준에게 결과를 보고하러 갔다. 박민정 일행은 임대 주택에 도착한 후에도 여전히 김인우가 왜 결혼식 현장에 나타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조하랑은 갑자기 지난주에 예찬이 자신을 위해 강연우보다 더 멋진 남자를 찾아주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예찬아, 김인우 아저씨가 바로 네가 찾은 더 멋진 남자야?”박예찬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죠.” “그럼 네가 찾은 더 멋진 남자는 어디에 있어?”조하랑의 물음에 박예찬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박민정은 두 사람
비서가 언급한 사람은 당연히 박민정이었다. "박민정?" 고영란은 비서를 바라보며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추측을 했지만, 예찬이 박민정의 아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혹시 예찬의 아빠가 박민정의 어떤 친척이 아닐까?” 비서도 그 말을 듣고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박민정의 어머니와 동생이 진주시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고영란은 한수민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또 우리 유씨 가문의 피를 빨아먹으려고 하지 않을까요?”비서는 한수민이 해외의 부자인 윤 씨 성을 가진 상인과 결혼해 이제 돈 걱정이 없다고 고영란에게 전했다. 고영란은 한수민을 더욱 경멸했다. 그녀가 남자에게 의존해야만 살아남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잠시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옮겨가자 고영란은 예찬의 일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남준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 “도련님은 거의 외출하지 않고 매일 집에만 있습니다.”비서는 한때 자신만만하고 오만했던 유남준이 이렇게까지 타락한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고영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애가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야. 만약 그 애가 일찍 자식을 가졌다면, 나도 그 애를 그런 외진 곳에 버리지 않았을 거야.”더욱이 그녀는 유남준이 유남우의 가짜 신분을 폭로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면 유씨 가문에서 그녀 고영란의 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내일이 바로 동지잖아? 회사에 새로운 계획이 있어?” 비서는 최근의 활동 프로젝트 계획을 모두 고영란에게 보여주었다. “사모님, 최근에 해외 유명 작곡가 민 선생이 새로운 곡을 발표하고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상이 이 곡을 사들일 수 있다면 신규 드라마에 쓰든, 가수에게 주든 모두 큰 인기를 끌 수 있을 겁니다. 전에 이지원의 문제로 주상의 명성이 많이 손상되었잖아요.”“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고영란이 대답했다. “네.”... 다음 날 아침 일찍, 박민정은 먼저 예찬을 유치원에 데려다준 후 신림으
“당신 뭐 하는 거야? 놔요.” 박민정이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유남준은 그녀를 더 꽉 안았다. 그의 손이 박민정의 작은 손을 잡았다. “움직이지 마, 우리 아기 다쳐.”말을 마친 후, 그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벌써 거의 3개월이 된 거 아니야? 오늘 산부인과로 가자.” 인제야 산부인과로 갈 생각을 하다니, 박민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했어요. 아기는 건강해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아기는 당신 아이가 아니에요.” 유남준은 신경 쓰지 않고 박민정을 안아 들어 계단을 올라갔다. “남준 씨, 내려놔요. 방에 안 갈 거예요.” 박민정이 그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유남준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박민정은 요즘 유남준이 점점 더 지나치다고 느꼈다. 유남준은 그녀를 안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말 들어.” 박민정은 말없이 혀를 찼다. 그가 눈이 멀었어도 체력적으로는 자신이 상대되지 않는다는 건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유남준에 대해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유남준은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 그녀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방을 나섰다. 서다희는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차 문을 열었다. 차는 신림현에서 가장 호화로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전국에서 가장 정상급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곳에 있었고 많은 장비도 갖추어져 있었다. 유남준은 한 장비에 누워 계속 치료를 받았다. 최근 그의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그는 더욱 외로움을 느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 기억이 회복되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박민정과의 과거가 떠올랐다. 두 사람이 결혼하는 순간, 자신이 속았던 순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자신을 비웃는 눈빛과 말들이 떠올랐다.갑자기 눈을 번쩍 뜬 유남준의 얼굴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유 대표님, 괜찮으십니까?”의사가 급히 물었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