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학부모들과 학부모 위원회의 얘기를 꺼낸 다음부터 그들의 움직임을 쭉 관찰했다.분명 그날 밤에는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이튿날에는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인스타그램을 언팔로우하기도 했다.심상치 않은 행동에 박민정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내일이면 월요일이다. 곧 새로운 학부모 위원회 회장을 선거할 텐데, 학부모들이 갑자기 말을 바꾸지는 않을까?박민정은 시험 삼아 한 학부모에게 문자를 보내 가방이 어떠냐고 물었다.한참 있다가 그 학부모가 대답했다.[어머나, 죄송해요. 이 가방은 나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한 번만 들고 나갔는데 이제는 안 들고 나갈 것 같네요.]박민정은 다른 학부모한테도 문자를 했다. 그들은 물건이 별로라고 하거나 혹은 아직 안 써봤다고 둘러댔다.박민정은 내일 이 사람들이 분명 말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마도 누군가가 최현아한테 이 사실을 알린 것이 틀림없다.박민정은 미간을 짓눌렀다. 이번은 확실히 그녀가 실수했다.이 사람들이 처음 보는 박민정 때문에 최현아를 배신할 거라고 생각한 게 문제였다.유남준은 간밤 자지 못해 아주 늦게 깨어났다.박민정은 유남준을 보면서 물었다.“이제야 깼어요?”유남준은 보통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늦어도 일곱 시에는 일어나던 그가 오늘은 아홉 시 반에 일어났다.“아침에 할 일이 없어서.”어젯밤 찬물로 샤워했기 때문인지 지금 감기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그는 박민정의 옆에 가서 앉았다.“밥은 먹었어?”“네. 먹었어요. 당신도 얼른 먹어요.”“입맛이 없어. 나가서 좀 걷자.”유남준이 얘기했다.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 되는 박민정은 산책을 하자는 유남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나름 어제저녁 옆에 있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랄까.“그래요.”잠시 학부모의 일은 접어두고 유남준과 함께 나가 걷기로 했다.밖에서는 시원한 바람에 꽃향기가 섞여서 불어왔다. 곧 봄이 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박민정은 옷을 여몄다.“올해는
이렇게 보면 학부모들이 박민정을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박민정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이때 서다희가 또 얘기했다.“하지만 투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다 날리게 되어있어요. 며칠 못 버틸 겁니다. 사모님, 혹시 유치원에 친한 학부모가 있으면 절대 투자하지 말라고 말려야 합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그래요? 확실해요?”서다희가 대답하기 전에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성혁이 하려는 공동구매는 주요하게 채소나 육류야. 하지만 이런 건 신선하게 저장하기도 힘들고 운비도 많이 들지. 지금 많은 회사들이 유성혁과 경쟁하고 있어. 말이 경쟁이지, 사실은 돈을 써서 소비자들에게 낮은 가격을 제공해 시장을 빨리 점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다른 회사들의 시장까지 먹어치울 수 있거든.”그는 흠칫하다가 결국 그의 회사도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았다.채소와 육류는 사람들의 생활과 연관이 된다. 이렇게 큰 시장에서 누가 먼저 우세를 점한다면, 다른 회사들은 거의 희망이 없었다.박민정도 요새 배달을 시킬 때 채소와 육류의 공동구매가 아주 가격이 낮다는 것을 발견했다.“요새 공동구매가 핫한 모양인데, 신선도를 유지해야하는 이런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아요.”박민정은 자기의 생각을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약간 놀랐다. 그는 박민정이 그것까지 알 줄은 몰랐다.“그래. 오래 못가지.”서다희는 깜짝 놀랐다.유남준이 박민정의 말에 동의하다니. 그렇다면 왜 굳이 밑지면서까지 유성혁과 경쟁하는 거지?이 프로젝트에 적지 않은 돈을 썼다. 만약 돈을 벌지 못한다면 그냥 돈을 바닥에 던지는 것과 같다.“예찬이 유치원에서 내일 학부모 위원회의 회장을 선거해요. 나도 참가할 거예요. 서다희 씨, 이 업계에 관한 자료를 분석해서 나한테 줄 수 있어요?”박민정은 아까 서다희가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이미 자료 분석을 끝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 자료를 들고 다른 학부모들에게 최현아의 사업
지원 엄마는 약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박민정이 걸어오자 약간 허를 찔린 것처럼 안절부절 못했다.“예찬 엄마, 이렇게 일찍 왔어요?”“네. 오늘 학부모 위원회 회장 선거잖아요. 당연히 일찍 와야죠. 날 투표해준다고 했잖아요.”“당연하죠.”지원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폈다.어차피 투표는 무기명이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학교 회의실에 도착한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러다 박민정이 들어오자 다들 갑자기 박민정의 시선을 피하면서 박민정을 못 본 것처럼 했다.박민정은 신경 쓰지 않았다.조금만 기다리면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니까.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도한 엄마가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예찬 엄마, 왔어요?”“네.”박민정이 웃어보였다.도한 엄마도 지원 엄마와 같은 사람인지, 박민정을 알 수 없었다.도한 엄마는 그녀를 끌고 가서 낮은 소리로 얘기했다.“예찬 엄마, 오늘 그냥 선거에 참가하지 마요.”박민정은 도한 엄마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왜요?”도한 엄마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제가 일찍 와서 들었는데 다들 최현아 씨한테 투표할 거라고 했어요... 아마도 약속한 것 같아요. 만약 경선에 참가한다면...”도한 엄마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박민정이 물었다.“나를 선거하는 사람이 적어서 내가 창피당할까 봐 그래요?”도한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은 그제야 도한 엄마가 진심으로 그녀를 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걱정하지 마요. 창피한 건 괜찮아요. 하지만 경선을 포기하면 그거야 말로 가장 창피한 일이겠죠. 내 아들을 위해서 한번 노력해 볼 거예요.”박민정은 어젯밤 예찬이한테 친구들과 선생님이 여전히 그를 무시하냐고 물었다.예찬이는 선생님이 바뀐 이후로 많이 나아졌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그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자기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박민정은 박예찬이 그렇게 말하는게 박민정이 걱정할까 봐서라는 것을 알았다.그렇게 어린 아이가 어떻게 친구들의 무시를 견
이 유치원에서 학부모 위원회의 회장은 전체 학년을 포함한 회장이라 다른 반의 학부모 위원회 멤버도 참석한다.지난번 박민정은 몇몇 사람을 알게 되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그들 중에서 집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최현아에게 비밀리에 협력 제안을 받았었다.이는 도한 엄마가 다른 학부모들이 배신한 것을 전혀 몰랐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야 우연히 듣게 되었다.그녀 집안은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에 최현아가 그녀를 찾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최현아는 돈 없는 집안의 투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신임 회장 선출이 시작되기 전 최현아는 박민정 앞으로 다가가고는 공개적으로 도발했다.“동서, 장애인이 학부모 위원회 회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아?”그녀는 박민정이 착용한 보청기를 가리키며 말했다.“만약 다른 사람이 발언할 때 보청기가 고장 나면 어쩔 건데? 설마 우리더러 새 보청기를 바꿀 때까지 기다리게 할 건 아니지?”박민정은 그녀의 도발에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반면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했다.“장애인보다 심보가 고약한 사람이 학부모 위원회 회장이 되는 게 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 학부모 위원회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데 심보가 고약한 사람은 아이를 해치려고만 할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무슨 소리야? 분명 네 아들이 먼저 우리 지훈이를 해쳤잖아!”최현아는 벌컥 역정을 냈다.박민정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도대체 누가 누굴 해치려고 했는지 형님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유지훈이 친구를 데리고 윤우 집에 찾아가서 복수를 시도했는데 최현아는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더 부추겼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최현아는 박민정과 더 논쟁하려 했지만 선생님과 원장이 다가와 그녀를 말려 일단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원장이 도착한 후 현장에 있는 학부모 위원회 멤버들에게 작년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학부모 위원회 회장을 선출하는 투표를
박민정은 스테이지 위에서 다른 학부모들의 무례한 태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저는 예찬이 엄마, 박민정입니다. 원장님께서 이미 소개해 주셨으니 다시 자기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학부모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박민정을 무시했다.도한 엄마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박민정을 막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지금 박민정은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박민정은 이런 상황에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USB를 꺼냈다.“원장님, 혹시 이걸 스크린에 띄워주실 수 있을까요?”원장은 그 말을 들은 후 바로 그녀를 도와 내용을 스크린에 띄우려 했다.거기에 바로 관심이 쏠린 일부 학부모들은 박민정을 비웃기 시작했다.“준비는 철저하게 했네. PPT라도 보여줄 건가 봐?”“준비를 그렇게 철저하게 하면 뭐해? 회장이 되려면 PPT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걸로는 부족할 텐데.”“나도 저렇게 돈이 많았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지. 아들을 아예 다른 학교로 보냈을 거야.”최현아는 주변 학부모들이 박민정을 비웃는 걸 보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박민정도 참 멍청하네. 일반 학교라면 학부모 위원회 회장은 도움이 되기 위해 다양한 능력을 갖추어야 하겠지만 여기는 일반 학교가 아니라고. 내가 회장이 되면 이런 일을 하나 똑똑히 봐. 난 회장의 권력만 누릴 거라고.’다들 박민정이 어떻게 망신을 당할지 기대하고 있을 때 스크린에 USB 내용이 떴다. PPT가 아닌 재무제표였다.“이게 뭐야?”누군가 재무제표에 적힌 법인이 유성혁인 걸 발견했다.“유성혁 씨 회사 재무제표인 것 같은데요?”누군가가 말했다.최현아는 순간 당황했다.박민정은 천천히 재무제표를 확대했는데 특별히 손실 부분을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해 유성혁의 회사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모든 사람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했다.“박민정, 지금 뭐 하는 거야?”최현아가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물었다.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들
최현아의 말을 들은 학부모들은 안심한 듯 보여 박민정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투표가 끝난 후 예상대로 최현아가 회장으로 당선되었다.하지만 뜻밖에도 박민정에게 상당한 표가 들어왔는데 전체 인원의 4분의 1이나 되었다.박민정도 약간 놀랐다.이때 학부모 중에서 단정하고 세련된 한 여인이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는 모습을 발견했다.회의가 끝난 후, 그 여인은 박민정에게 다가갔다.“예찬 엄마, 고마워요.”“고맙다고요?”박민정은 어리둥절했다.그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성훈 엄마 기억해요?”성훈 엄마라는 말에 박민정은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예찬이가 사람을 때렸다며 선생님이 학교에 오라고 했었다.성훈은 맞은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성훈 엄마는 특히 눈에 띄는 몸매를 가졌는데 불륜녀인 듯했다.박민정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지원 엄마가 준 자료 덕분이었다.화끈한 성격의 모델인 그녀는 남편의 전처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또 그 전처가 화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당연히 기억하죠.”박민정이 대답했다.“그런데 누구시죠?”“성훈이 아빠 전처예요.”그 여인이 나지막이 대답했다.박민정은 깜짝 놀랐다.눈앞의 여인은 몸매가 성훈 엄마보다 좋지 못하겠지만 얼굴이나 분위기는 성훈 엄마보다 훨씬 우월했다.여인이 계속 말했다.“저는 손연서라고 합니다.”박민정은 그녀를 전혀 몰랐다. 왜냐하면 그녀는 최현아가 주최하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지원 엄마도 손연서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었다.“고마워요. 민정 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하루도 평온한 날을 보낼 수 없었을 거예요. 이곳에 나타날 일은 더더욱 없었겠죠.”손연서가 말하면서 또 설명했다.“지금은 성훈 엄마로서 투표에 참여한 거예요.”“그러시구나.”박민정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저도 고마워요. 덕분에 제가 그렇게 창피하게 지지 않았네요.”박민정은 오늘 몇 표나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뜻밖에도 4분의 1이나 되는 표를 얻게 되어 전혀 창피해하지
유지훈은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화가 나서 손을 들어 박예찬을 때리려 했다.박예찬이 차가운 시선을 보이자 유지훈은 바로 손을 내리고는 씁쓸하게 자리를 떴다.싸워서 이길 수도 없고, 말로도 이길 수 없다는 느낌에 유지훈은 자괴감이 들었다.두 사람의 관계는 꽤 좋았었는데 이제 이렇게 어색해져 유지훈은 조금 후회가 되었다.하원해서 집에 돌아온 유지훈은 우울한 얼굴을 한 채 소파에 엎드렸다.최현아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아들, 왜 그래?”“엄마, 예찬이한테 사과하고 싶어요.”유지훈은 윤우를 미워할 뿐이지, 그의 형인 예찬이는 싫어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최현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왜 사과해? 넌 내 아들이야. 그런데 왜 그런 쓰레기 같은 자식에게 사과해야 해?”유지훈은 벌컥 화를 내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더는 사과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최현아가 또 그를 설득했다.“지훈아, 그 두 쓰레기 같은 자식과는 친구가 될 수 없어.”“다 같은 유씨 가문 사람이잖아. 네 아빠는 이미 유남준과 유남우에게 눌려 기를 못 펴고 있어. 너도 커서 그렇게 되고 싶어?”유지훈이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 저는 유앤케이 그룹의 대표가 될 거예요.”최현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그래야 내 아들이지. 절대 아빠처럼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면 안 돼.”“네.”유지훈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노력할게요.”“좋아. 저녁 먹고 공부하러 가렴.”최현아는 유지훈의 성적이 박예찬보다 더 좋게 하기 위해 그에게 개인 과외를 붙여 매일 밤 10시까지 공부를 시켰다.자기 아들이 그 어떤 면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유지훈이 밥을 먹고 있을 때 유성혁이 기운 없이 집에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여보, 오늘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어요?”최현아가 물었다.유성혁이 소파에 털썩 앉고는 머리를 문지르더니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망했어.”“뭐가 망했어요?
박민정도 아침에 일어나 최현아가 보낸 문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최현아는 남을 탓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모두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성인이라 돈을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단톡방은 잠시 조용해졌고 최현아에게 따지는 사람도 더는 없었다.그들의 아이들은 최현아의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고, 또 그들은 같은 진주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최현아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돈을 이렇게 날리는 건 그들도 용납할 수 없었다.이때 그들은 박민정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그녀에게 사과 문자를 보내면서 내년 학부모 위원회 회장 선거에서 반드시 박민정을 회장으로 뽑겠다고 약속했다.박민정은 그들의 문자를 보고도 답장하지 않았다.도한 엄마도 문자를 보내왔다.“예찬 엄마, 단톡방 문자 봤어요? 지금 배신한 사람들이 모두 후회하고 있겠죠?”박민정은 도한 엄마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문자를 보냈는지 캡처를 보내주었다.도한 엄마는 엄지척을 내민 이모티콘을 보냈다.박민정은 휴대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지금 바로 문자를 보내온 학부모들에게 답장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선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유남준이 소파에 앉아 평소 잘 보지도 않던 TV를 켜놓은 것을 발견했다.TV에서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박민정이 자세히 보니 광고에 나오고 있는 연예인이 바로 에리였다.에리는 햇살처럼 밝은 얼굴로 아프리카 땅 위에 서 있었고 주변에는 흑인 미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하지만 에리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그리고 멘트도 꽤나 충격적이었다.“몸이 허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박민정은 그제야 이게 남성 발기부전 치료제 광고라는 것을 알아챘다.박민정은 비록 연예인이 아니었지만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에리는 젊은 아이돌 스타로서 이런 광고를 찍었으니 여성 팬이 많이 떠날 것이고, 또 많은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