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지원은 예전과 달리 메이크업에도 옷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얼굴도 약간 창백한 것이 수심에 잔뜩 녹아내린 모습이었다.박민정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예를 갖춘 채 먼저 눈웃음을 건넸다.며칠 전과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기고만장함이라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자리를 찾아 앉은 박민정은 따뜻한 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거의 다 모이게 되자, 과 반장이 나서서 바삐 돌기 시작했다.“자, 다들 얼른 자리 찾아 앉아. 이렇게 다시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더욱 즐겁게 지내도록 하자.”박민정 곁에 앉은 누군가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민정아, 얼마 전에 기사에서 그러던데, 네가 바로 그 유명한 작곡가 민 선생이라면서? 그게 사실이야?”“맞아. 그게 나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리를 듣고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박민정에게 시선을 쏠리게 되었다.저마다 다양한 시선과 표정으로 말이다.“민정아, 너 진짜 성공했구나!”“너 난청 환자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서 배워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민정이 네가 작곡가로 성공하다니 너무 놀랍고 대단한 것 같아!”“...”다들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재수 없어.’계속 듣기에 거북했던 하예솔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그딴 곡 몇 개 쓴 거 가지고 유난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다들?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하예솔의 말에 조금 전까지 박민정에게 칭찬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절대로 말려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말이다.그러나 오히려 예상치 못한 사람인 이지원이 박민정의 손을 잡고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민정아, 마음에 담아주지 마. 예솔이 여기로 오기 전에 술 좀 마셨거든 아마 취한 김에 하는 소리일 거야.”“지원아!”하예솔은 이지원을 부를 때 음을 길게 뺐다.“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 술 마시고 온 거 아니야. 취할
“그럴 리가.”박민정은 웃으면서 대답했다.그 웃음 한 번에 이지원은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다.“우리 계속 예전처럼 친한 사이로 지내는 건 어때?”이지원이 말하면서 천천히 다가가 박민정의 팔짱을 꼈다.그러나 박민정은 바로 이지원의 손길을 뿌리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그 이유가 뭔지 알아? 너한테 화낼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야.”“나 죽이려고 했었지? 나라고 너 가만히 둘 것 같아? 앞으로 넌 생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그대로 제자리에 굳어버린 이지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이지원은 곧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박민정, 나한테 얼마든지 복수해도 좋아. 근데 유남준도 연지석에게도 도움 청하지 마. 그건 좀 불공평하잖아.”이지원은 지금껏 박민정을 자기 상대로 여기지 않고 있다.박민정이 자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곁에 있는 남자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이지원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박민정은 권해신에게 납치를 당하고 나서 이지원도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유남준에게 알리지 않았다.이지원의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비아냥거리면서 웃었다.“걱정하지 마. 절대 그럴 리 없어.”머지않아 곧 그 보복을 당하게 될 이지원이니 말이다.남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고 확답을 듣게 되자 이지원은 박민정이 그리 무섭지 않았다.곧바로 가식적인 모습을 거두어들이고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앞장서서 테이블로 돌아갔다.어느 정도 분위기 무르익자, 사람들은 서서히 오락을 즐기려고 했다.본격적으로 2차를 시작하기 전에 과 반장이 운을 떼기 시작했다.“자, 다들 5년 전에 우리가 했었던 약속 기억나? 5년 후의 만남에서 그때 학교에서 찍었던 사진이랑 동영상 풀기로 했었잖아.”사람들은 서서히 기억이 떠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흥분하기 시작했다.동영상과 사진을 얼른 보여달라면서 다들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다.이윽고 과 반장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동영상을 틀기 시작했다.순간 대학교 시
과연 말을 뱉자마자 이지원은 후회하고 말았다.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산 이지원은 하예솔마저 잃을 수 없었다.하예솔이 또다시 뺨을 후려치려고 하자 이지원은 단번에 그 손을 막아버렸다.“예솔아, 이러지 마. 보는 눈도 많은데...”하예솔은 그제야 그동안 박민정이 느꼈던 그 감정을 알 것만 같았다.단 한 번도 후회라는 것을 한 적이 없는 하예솔인데, 지금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다.“이지원, 앞으로 나 그렇게 부르지 마. 우린 더 이상 친구도 뭐도 아니야. 난 평생을 널 원수로 생각하면서 살 거야!”역시나 당사자가 되어야만 당사자의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법인 듯싶다.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박민정에게 온갖 심한 말을 퍼부었던 하예솔의 언행을 옆에서 지켜봤었으니 말이다.유남준과 혼인 신고까지 마친 박민정에게 제삼자라고 했던 하예솔.이유를 불문하고 사랑받지 않는 쪽이 제삼자라고 주장했던 하예솔.그릇된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하예솔을 사람들은 도와줄 리가 없었다.이지원은 지금 하예솔과 사적으로 이 일을 해결하고 싶은 심정뿐이다.“예솔아, 우리 다른 데로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 제발 여기서 하지 말고 다른 데로 가자.”“꺼져!”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하예솔은 이를 악물고 덧붙였다.“지금 당장 진주시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생지옥이 뭔지 똑똑히 보여주고 말 거야!”홧김에 하는 말도 과장된 말도 아니다.하씨 가문에서 나서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니 말이다.애지중지 키운 자기 딸을 배신했다는 소리를 하예솔의 부모님이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제법 진지해 보이는 하예솔의 반응에 이지원은 주위를 훑어보았다.이윽고 이지원의 시선은 박민정에게 떨어졌다.“네가 꾸민 짓이지?”조금 전 화장실 앞에서 박민정이 했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이지원은 확신할 수 있었다.필경 과 반장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과 반장이 그럴 일은 전혀 없었다.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내
박민정 역시 자기도 모르게 롤스로이스에 시선이 쏠리게 되었다.어디서 많이 본 듯한 차인 것 같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자기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먼저 떠나려고 할 때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차 문이 열리고 서다희가 차에서 내려왔다.“사모님.”서다희는 성큼성큼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서다희가 바로 유남준의 비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의외라는 듯 눈이 동그래진 박민정이다.“서 비서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대표님도 함께 오셨습니다.”서다희는 눈으로 차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차창이 내려오자 깎아 놓은 듯한 완벽한 콧날과 남자다운 턱선이 시야로 들어왔다.“대표님께서 사모님과 함께 귀가하자고 하셨습니다.”서다희의 말을 듣고 난 뒤 사람들의 시선은 롤스로이스에 앉아 있는 유남준에게 쏠리게 되었다.다들 자기도 모르게 부러운 눈길로 박민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눈멀었다고 하지 않았어?’‘근데 왜 아무 일도 없어 보이지?’하물며 지금 유남준이 타고 온 롤스로이스는 실거래가 없는 한정판이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기를 직접 데리러 올 것으로 생각지 못했다.“네.”입꼬리를 올리면서 박민정은 동창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롤스로이스에 오른 박민정을 보고서 하예솔과 이지원은 마음이 꽤 복잡했다.그때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남준이 박민정을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유남준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지원이라고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어? 이지원과 유남준이야말로 찐사랑이라고 박민정이 제삼자라고 그러지 않았어?”그 말을 이지원과 하예솔이 했었다.지금 하예솔은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무척이나 수치스럽고 비할 데 없이 후회하고 있다.‘이지원 저 미친년의 말에 넘어가다니! 하예솔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이지원이 어디로 가든 유남준은 단 한 번도 직접 데리러 온 적이 없다.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덧붙였다.“앞으로 헛소리하는 거 듣지도 말고 대꾸도
두원 별장에 도착하자 유남준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목이 빠지게 유남준을 기다리고 있었던 추경은은 그를 보자마자 바로 달려갔다.“남준 오빠, 많이 늦었네? 어디서 오는 길이야?”활짝 웃으면서 말을 거는 그 순간 잇달아 내리는 박민정을 보고서 금세 입꼬리가 내려갔다.“새언니도 같이 오셨네요. 동창 모임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유남준이 이에 대해 모르고 있을까 봐 추경은은 일부러 ‘동창 모임’에 어세를 높여 말했다.‘난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박윤우에게만 말해줬던 일을 추경은 역시 알고 있어서 마냥 궁금하기만 했다.‘윤우가 말했나?’하지만 박윤우는 대놓고 추경은을 싫어하고 있다.그 말인즉슨, 절대 추경은에게 알려줄 리가 없다는 뜻이다.그 당시 동창 모임에 간다고 박윤우에게 말했을 때, 가정부도 옆에 함께 있었다.요즘 가정부는 추경은과 유난히 각별하게 지내고 있다.지난번 추경은한테 차 사고가 났을 때도 가정부는 추경은의 편을 들어 준 적이 있다.가정부와 함께 보내온 세월이 있는 박민정은 상대가 아주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종종 상황에 따라서 본다면 가정부는 지금 추경은의 말에 넘어가고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조만간 기회를 찾아 가정부 앞에서 추경은의 가면을 벗기겠다면서 박민정은 속으로 다짐했다.“네, 동창 모임 끝나고 오는 길이에요. 남준 씨가 직접 모임 장소까지 데리러 온 거 있죠.”추경은의 기분을 망치려고 박민정은 일부러 약을 올렸다.역시나 추경은은 단번에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남준 오빠 새언니한테 참 지극정성이네요. 저도 남준 오빠처럼 와이프만 바라보는 남자랑 결혼했으면 좋겠는데...”박민정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날카로운 모습으로 말했다.“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이 세상에 남준 씨는 딱 한 명이잖아요.”소리 없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유남준은 서서히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자기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한 박민정의
그 말을 듣고서 유남준은 오기가 발동했다.“네가 배우고 싶은 거 나 역시 가르쳐줄 수 있어.”유남우보다 못난 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유남준이다.안타깝게도 박민정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이불을 꼭 덮으면서 중얼거렸다.“알았어요. 앞으로 남준 씨한테 물어보도록 할 게요.”눈까지 감고서 성의 없이 대답하는 박민정의 태도에 유남준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하지만 또다시 ‘짜증 난다고요’라고 했었던 박민정의 말을 듣게 될까 봐 입을 다물었다.‘그래... 민정이 하고 싶은 대로 해.’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어도 유남우가 내내 신경 쓰였다.출근 시간에 맞추어 박민정은 일부러 알람까지 맞추어 놓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일찍 알람 소리가 울렸고 박민정은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자기보다 훨씬 더 일찍 준비를 마친 유남준이 보였다.“남준 씨, 출근 안 해요?”박민정은 의문이 가득한 두 눈으로 물었다.“앞으로 너랑 출퇴근 같이할 생각이야.”유남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아내를 직장까지 바래다주고 퇴근 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가는 건 남편으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물며 유남우에게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돈독하고 깊은지 보여주고 싶었다.“그럴 필요 없어요.”유남준의 마음도 모르고 박민정은 바로 거절해 버렸다.운전기사도 따로 있고 시간 낭비에 너무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유남준은 박민정과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일단 아침부터 먹어. 다 먹고 바래다줄게.”상대가 거절을 하든 말든 유남준은 자기 뜻대로 밀어붙였다.그 모습을 보고서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납치 사건으로 트라우마라도 생겼나? 내가 걱정되나?’“알았어요. 아침 먹고 올게요.”추경은은 오늘 유남준이 자기와 박민정을 회사까지 바래다준다는 것을 알고 아침부터 흥얼거렸다.박민정이 아침을 다 먹고 나오자마자 바로 달려 나와 가식을 떨었다.“새언니, 가방 저 주세요.”오늘따라 유난히 예쁘고 과하게 꾸민 추경은
차 안에서 유남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향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순간 박민정은 의문이 더 깊어져 갔다.“그게 아니라면 뭔데요?”“난 너랑 같이 출퇴근하고 싶은 거지 걔랑 하고 싶은 게 아니야.”유남준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다시 덧붙였다.“그리고 향수는... 네가 뿌린 거라고 한다면 참을 수 있어.”불과 30분밖에 안 되는 거리이기 때문에 박민정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흠 하나 잡을 데가 없이 완벽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 향수 뿌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두 사람은 30분 동안 이런저런 말을 가끔가다 주고받았다.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호산 그룹 문 앞에 멈춰 서게 되었다.이윽고 박민정이 차에서 내려왔다.오늘 유남준은 마이바흐를 몰고 나왔다.비록 어제 한정판인 롤스로이스만큼 비싼 차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한 마이바흐였다.사람들은 마이바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다음번에는 좀 저렴한 차를 몰고 왔으면 좋겠어...’회사 안으로 걸어가는 내내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이 느껴졌다.“너 저 사람 본 적 있어? 회사에 새로 온 고위직 아니야?”“고위직은 좀 그렇고... 바이어 아닐까?”“바이어라고 하기엔 얼굴이 너무 반칙이잖아. 내 직감으로는 어느 고위직의 아내거나 첩 같은 그런 ‘분’일 것 같아.”화장을 하지 않은 박민정이지만 오른쪽 얼굴에 흉터만 빼고 본다면 여전히 눈 부시는 존재였다.“예쁘긴... 오른쪽 얼굴 못 봤어? 흉터가 어마어마해.”“그러고 보니 흉터가 있었네.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미처 보지 못했어.”아래층으로 자료를 가지러 온 여직원들이 속닥속닥했다.보청기를 낀 박민정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 잠시 보청기를 빼버렸다.듣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굳이 그러한 말에 자기 기분까지 망칠 필요는 없다고 정신력이 강한 박민정이다.여직원 중 한 명은 호산 그룹 꼭대기 층 대표이사실의 비서다.비서는 바로
청아를 비롯한 여직원들은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순간 비서와 함께 이곳에 나타난 최현아를 보게 되었다.최현아는 지금 두 눈에 불쾌함이 가득하다.청아도 여직원들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고 말았다.회사에서 아주 명성이 자자한 ‘악질’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말도 통하지 않고 몹시나 이기적이면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극혐 그 자체가 바로 최현아이다.현재 최현아의 비서는 남자이다.전까지만 해도 모두 여자 비서였는데, 갖은 꼬투리를 잡아서 일일이 쫓아내 버렸다.“최 대표님,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저희는 대표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논하고 있었습니다.”청아는 대표이사실의 비서로서 반응이 꽤 빨랐다.“유남준 대표님 아내분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대표이사실로 와서 비서로 일하고 있으니 참 여러모로 입에 올릴 만한 말들이 많아서 저희끼리 잠깐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청아 역시 고위직의 호불호에 대해서 미리 알아본 바가 있다.그렇지 않고서야 유남우의 비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그 말인즉슨, 최현아가 박민정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실은 특별히 알아보지 않아도 추측만으로도 알 수 있다.다 같은 유씨 가문의 며느리이고 호산 그룹의 상속자로서 앞으로 분명히 경쟁하는 사이로 뒤틀어질 테니 말이다.최현아는 본래 수군거리고 있는 직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었다.하지만 청아의 말을 듣고 난 뒤 화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우리 동서 귀가 좀 멀잖아. 비서로 일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네.”청아를 비롯한 여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바로 대답했다.최현아는 그제야 만족하다는 듯이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최현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청아 일행은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그때 어느 한 여직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 저승사자가 웬일이래요? 오늘 죽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순히 넘어가네요?”“청아 언니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