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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시계를 들여다보니 마침 10시 정각이었다.

유남준은 그녀에게 전화해 도착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박민정이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주르륵 내리는 가랑비 속에 앙상하게 마른 그녀는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

금방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박민정은 밝고 긍정적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운 표정과 뼈만 남은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그는 우산을 들고 박민정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뒤늦게 유남준을 발견했다.

3년 동안 유남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넘치며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3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또 자신의 일생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

유남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어서 사과하길 기다렸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됐지!

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정반대였다.

“남준 씨 일하는 데 방해되겠어요. 얼른 들어가요.”

유남준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표정이 얼어붙었다.

“너 후회하지 마.”

그는 이 한마디만 내던지고 가정법원으로 들어갔다.

박민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했다.

후회?

그런 건 모르겠고 이젠 지쳐버렸다.

한 사람이 떠날 결심을 했을 땐 아마 일말의 희망도 얻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인 실망이 너무 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겠지.

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그녀의 확고한 눈빛에 유남준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수속을 마치고 한 달이란 숙려기간이 있어 두 사람은 한 달 뒤에 또 이리로 와야 한다.

만약 이 한 달 동안 오지 않으면 이혼 신청도 자동으로 폐지된다.

가정법원을 나선 후 박민정이 유독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다음 달에 봐요. 잘 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빗속으로 뛰쳐들어가 택시를 잡고 떠나가 버렸다.

유남준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이건 아마도 해탈이겠지.

더는 그녀와 얽힐 필요도 없고 장애인 아내와 산다는 사람들의 야유도 들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때 마침 김인우가 그에게 전화했다.

“남준아, 다 했어?”

“응.”

“이혼 숙려기간이 한 달이라며? 너 절대 그 귀머거리한테 마음 약해지면 안 돼. 걔 분명 꼼수 부릴 거야.”

일리 있는 말이다.

박민정이 십여 년을 유남준에게 집착하다가 갑자기 손을 놓는다는 게 말이 돼?

...

택시 안에서.

박민정은 차창에 기대 도어 너머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멍하니 넋 놓았다.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그녀를 힐긋 바라봤는데 귓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화들짝 놀란 기사는 재빨리 그녀를 불렀다.

“이봐요, 손님!!!”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기사는 냉큼 차를 세웠다.

‘아직 다 못 왔는데 왜 차 세웠지?’

박민정은 어리둥절한 눈길로 기사의 입 모양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또 안 들린다는 걸 알아챘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기사는 휴대폰에 문자를 찍어서 그녀의 상황을 알려줬다.

천천히 귀를 만져보니 손끝에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미 적응한 듯 대답했다.

“괜찮아요, 자주 이래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난청 환자이지만 처음엔 이렇게 피를 흘리진 않았다.

계기는 바로 2년 전 한 파티 장소에서 유남준의 절친 김인우가 그녀를 수영장에 밀어 넣었고 수영할 줄 모르는 그녀는 고막이 부어올라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병원에 실어간 후 그녀는 이런 후유증이 남았다.

전에는 분명 치료가 잘 됐는데 요즘 들어 웬일인지 자꾸만 재발한다...

기사는 시름이 안 놓여 인근 병원으로 향했다.

박민정은 택시기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홀로 병 보이러 들어갔다.

오늘 의사는 마침 그녀가 쭉 보였던 담당 의사였다.

“의사 선생님, 제가 요즘 기억력도 나빠지고 가끔 뭘 하고 있는지도 깜빡해요.”

그녀는 오늘 아침 모텔에서 깨어났을 때 또 한 번 블랙아웃이 왔다. 한참 후에야 오늘 유남준과 이혼하는 날이라는 게 생각났다.

이어서 그녀는 아침 일찍 가정법원에 도착해 유남준을 기다렸다.

또 깜빡할까 봐 그가 보낸 문자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의사는 박민정의 최근 진단서를 훑어보더니 걱정스러운 눈길로 말했다.

“민정 씨, 다른 검사도 받아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예를 들어 정신과 검사라던가.”

정신과라...

박민정은 의사의 건의대로 정신과 검사를 받았다.

진단서가 나왔는데 그녀는 우울증까지 있었다.

중증 우울증 환자의 경우 기억력도 어느 정도 저하된다고 한다.

모텔로 돌아온 그녀는 노트북과 펜을 꺼내 요즘 발생한 모든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걸 머리맡에 두면 아침에 깨자마자 볼 수 있으니까.

침대에 누워 휴식할 때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우울증 치료를 검색해보았는데 그중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 치유하도록 최선을 다하세요, 이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을 구원할 수 없으니.」

박민정은 그 문장을 다 읽은 후 휴대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유남준과 이혼하는 일로 삶이 아주 시끌벅적해졌다.

그날 밤 한수민이 수없이 전화했지만 그녀는 한 통도 못 들었다.

다음날 깨고 보니 엄마의 문자가 수두룩했다.

「너 지금 어디야?」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니? 이혼을 해도 남준이가 먼저 말을 꺼내게 했어야지!」

「집안 말아먹는 년! 애초에 결혼할 때 네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인제 와서 이혼하면 우리 집안 망하라는 거야 뭐야?!」

그녀는 이런 문자들에 일찌감치 적응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답장을 보냈다.

「엄마, 우리 앞으로 자력갱생해요, 남에게 너무 의지하지 말고요.」

곧이어 한수민의 문자가 도착했다.

「양심도 없는 년! 애초에 널 낳지 말았어야 했어!」

박민정은 더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생각했다.

‘한 달 후에 남준 씨랑 이혼 절차 마무리하고 진주시를 떠나서 새 출발 해야지.’

...

그 뒤로 며칠 동안 그녀의 몸은 나날이 악화됐다.

종종 청력을 잃었고 가끔은 한참이 지나야 다시 청력을 회복한다.

기억력도 마찬가지로 쇠퇴해지고 있다.

어제 밖에서 밥 먹을 때 그녀는 심지어 모텔로 돌아오는 길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휴대폰을 챙겨서 내비게이션 앱으로 모텔까지 찾아갔다.

청력은 고칠 수 없지만 우울증은 가망이 있다.

최대한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분주하게 돌아치면 된다.

인터넷으로 자원봉사를 신청하여 독거노인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했는데 그들이 도움받는 모습에 그녀도 삶의 의미를 되찾은 것 같았다.

며칠 후 어느 날 아침.

박민정은 늘 하던 대로 깨자마자 옆에 놓아둔 노트북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보육원으로 갈 채비를 했다.

휴대폰을 챙겨 들었을 때 읽지 않은 문자가 수두룩했다.

엄마, 남동생, 그리고 이지원까지...

맨 처음엔 엄마 한수민의 문자였다.

「네 소원대로 우리 집안 망했어.」

그다음은 동생 박민호의 푸념이다.

「계속 피해 있어. 누나처럼 무자비하고 나약한 사람은 없다고.」

이지원의 비아냥대는 문자도 빠질 수 없다.

「민정 씨, 참 유감스럽네요. 하지만 바움 그룹은 남준 오빠 손에 있어야 더 잘 생존해나갈 수 있어요.」

「박씨 일가에서 한때 나를 서포트해준 걸 봐서 뭐 도울 거 있으면 도울게요.」

박민정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바탕화면으로 돌아갔는데 상단에 자동으로 인기 기사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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