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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리가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송유지는 언니가 살던 집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갈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면 언니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올 것 같았고, 거실에는 언니가 좋아하던 쿠션이 그대로 놓여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집에는 아직 채도하가 살고 있었다. 언니의 남편. 유지에게는 형부였던 사람. 휴대전화 화면에는 며칠 전 도하에게서 온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리 물건을 조금 정리하려고 해. 짧은 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유지는 그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언니가 죽은 뒤 도하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였다. 도하는 말수가 줄었고, 유지 역시 일부러 거리를 뒀다. 같은 사람을 잃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정말 네가 갈 거니?” 엄마가 물었다. 유지는 신발을 신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물건 정리한다잖아.” “내가 가도 되는데.” “엄마는 못 버리잖아.”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지는 애써 웃었다. “금방 다녀올게.” 도하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심장이 이상하게 빨라졌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올라갈수록 숨이 답답했다. 17층. 문이 열렸다. 유지는 천천히 현관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문이 먼저 열렸다. 채도하였다. 일 년 만에 제대로 마주 보는 얼굴이었다. “왔네.” 예전보다 조금 말라 있었다. 늘 단정했던 머리는 조금 길어졌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져 있었다. 유지는 잠시 말을 잊었다. “들어와.” 도하가 옆으로 비켰다. 유지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을 보는 순간 걸음이 멈췄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언니가 골랐던 커튼. 언니가 좋아했던 화병. 소파 위에 놓인 노란 쿠션까지. “그대로네요.” 유지가 말했다. 도하는 잠시 거실을 바라봤다. “못 바꿨어.”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커피 마실래?” “괜찮아요.” “여전히 단 거 좋아하지?” 유지는 그를 바라봤다. “그걸 기억해요?” 도하가 희미하게 웃었다. “유리가 네 얘기 많이 했으니까.” 언니 이름이 나오자 둘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도하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 “미안.” “왜 사과해요?” “그냥.” 유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유리의 드레스룸 앞에 섰다.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퍼졌다. 유지는 숨을 들이켰다. 언니 냄새였다. 옷걸이마다 유리가 입었던 옷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이걸 다 그대로 뒀어요?” “응.” “일 년 동안요?” “응.” 도하는 짧게 대답했다. 유지는 옷들을 바라봤다. “그럼 오늘은 조금씩만 해요.” “그래.” 둘은 말없이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지는 옷을 분류하고, 도하는 상자를 옮겼다. 한참이 지나자 방 안에 상자가 하나둘 쌓였다. 유지는 의자 위에 올라가 위쪽 선반을 정리했다. 그때 발끝이 미끄러졌다. “어.” 몸이 뒤로 기울었다. 순간 도하가 다가와 유지의 허리를 받쳤다. “괜찮아?” 유지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도하의 팔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너무 가까웠다. 숨이 닿을 것 같은 거리. 예전에도 형부와 가까이 선 적은 있었다. 언니와 셋이 여행을 갔을 때도, 가족 사진을 찍을 때도.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채도하는 그냥 언니의 남편이었다. 가족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유지는 아주 짧은 순간, 그를 ‘언니의 남편’이 아니라 한 남자로 느꼈다.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심장이 세게 내려앉았다. 유지는 화들짝 몸을 뺐다. “놔주세요.” 도하가 곧바로 손을 놓았다. “미안.” “아니에요.” 유지는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 넘어질 뻔해서 놀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 자신을 붙잡았던 손의 감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유지는 일부러 상자를 하나 더 끌어당겼다. “이건 엄마한테 가져다드릴게요.”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도하는 그런 유지를 잠시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정리가 이어졌다. 유지는 그 이후로 일부러 도하와 거리를 두었다. 가까이 서지 않으려고 했고, 물건을 건넬 때도 손이 닿지 않게 조심했다. 그럴수록 조금 전 일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게 싫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정리가 끝났다. 유지는 현관 앞에 쌓인 상자를 바라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그래.” “다음 주에 한 번 더 올게요.” 도하가 잠시 멈췄다. “그래도 돼?” 유지는 그를 바라봤다.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그게 아니라.” 도하는 말을 멈췄다. 유지가 기다렸지만 그는 더 이어 말하지 않았다. “뭔데요?” 도하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유지는 신발을 신었다. 문을 열려는데 도하가 뒤에서 불렀다. “유지야.” 유지가 돌아봤다. “네?” 도하는 현관 안쪽에 서 있었다. 집 안의 불빛이 그의 얼굴 한쪽에만 닿았다. “너까지 안 오면 이 집에 정말 아무도 없어.” 유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하는 웃지 않았다. 그저 너무 외로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순간 유지의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아렸다. 불쌍해서라고 생각했다. 언니를 잃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마음이 쓰이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줄 알았다. “다음 주에 올게요.” 유지는 짧게 말하고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깊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집에 돌아온 뒤에도 이상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유지는 천장을 바라봤다. 오늘 하루가 자꾸 되감기듯 떠올랐다. 언니의 옷. 향수 냄새. 달라지지 않은 집.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붙잡았던 채도하의 손. 유지는 눈을 감았다. 그 장면을 지우려 했는데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왜 이래.” 작게 중얼거렸다.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관 앞에 서 있던 도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까지 안 오면 이 집에 정말 아무도 없어. 그 목소리까지. 유지는 다시 눈을 떴다. 이상했다. 오늘 언니의 물건을 그렇게 오래 정리했는데. 언니의 옷을 만지고. 언니의 향수를 맡고. 언니가 살던 집에 몇 시간이나 있었는데. 침대에 누운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언니가 아니었다. 채도하였다. 유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쳤나 봐.” 심장이 또 빠르게 뛰고 있었다. 넘어질 뻔했던 순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도하가 너무 외로워 보여서 마음이 쓰인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변명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오늘 자신은 처음으로 채도하를 형부가 아닌 남자로 봤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서웠다. 채도하는 언니의 남편인데. 자신이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그런데 오늘 자신이 가장 오래 떠올린 사람은, 언니가 아니었다. 채도하였다.돌아온 열넷째 날.송유지는 거울 앞에 앉아 자기 머리를 한참 바라봤다.오늘은 미뤄뒀던 미용실에 가는 날이었다.해외에 있는 동안에는 머리를 묶는 게 전부였다.회사.숙소.회의.출장 준비.다시 회사.정신없이 지내다 보니.자기 모습을 오래 들여다볼 일이 거의 없었다.채도하가 출근 준비를 하다 물었다.“오늘 미용실?”“응.”“얼마나 자르게.”유지가 손으로 어깨 아래를 가리켰다.“아직 몰라요.”“많이?”“가서 정하려고.”도하가 웃었다.“그것도 안 정해?”유지가 거울 너머로 그를 봤다.“요즘 제 특기잖아요.”“좋네.”“근데.”유지가 몸을 돌렸다.“많이 자르면 싫어요?”“네 머린데 내가 왜 싫어.”“그래도 남편 의견.”도하는 잠깐 유지 머리를 봤다.“얼굴 보이면 돼.”“뭐야.”“진짜.”유지가 웃었다.“도움 하나도 안 되네.”미용실에 도착해서도.유지는 바로 스타일을 정하지 않았다.상담을 받고.지금 머리 상태를 보고.결국 길이는 크게 줄이지 않되.층을 조금 내고 분위기만 바꾸기로 했다.거울 속에서 머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동안.유지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그냥 자기 마음에 들고 싶어서 하는 일이었다.시술이 끝난 뒤.유지는 거울을 한동안 봤다.“괜찮다.”혼잣말이 나왔다.미용실을 나온 뒤.도하에게 사진을 보낼까 하다가 멈췄다.‘아니.’오늘은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대신 메시지만 보냈다.—끝났어요.곧 답이 왔다.—어때.—비밀.—왜.—집에서 봐요.잠시 뒤.—궁금한데.유지 입꼬리가 올라갔다.—참아요.오후에는 회사 자료도 보지 않았다.근처를 조금 걷다가.혼자 늦은 점심을 먹었다.그러다 문득.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봤다.머리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조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유지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봤다.해외 프로젝트를 끝낸 송유지도 맞고.곧 새 자문을 시작할 송유지도 맞지만.오늘은 그냥.머리를 하고.혼자 밥을 먹
다음 날 아침.송유지는 식탁에 앉자마자 채도하를 빤히 바라봤다.도하가 커피를 마시다 물었다.“왜.”“어제 사람들.”“응.”“다 괜찮던데요.”“그랬어?”“응.”유지는 빵을 한입 먹었다.“특히 기획 쪽.”도하가 눈썹을 올렸다.“누군지 알아?”“어제 여보랑 제일 많이 얘기했다던 사람.”“아.”“말 진짜 많더라.”도하가 웃었다.“그랬지.”유지는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이제 여보가 회사에서 누구 얘기하면 좀 알 것 같아요.”“얼굴?”“응.”“좋아?”“생각보다.”도하가 컵을 내려놓았다.“나도 네 현지 팀 만났을 때 그랬어.”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예전에는.도하가 회사 이야기를 하면.직책과 이름만 들었다.이제는 달랐다.누가 말을 많이 하는지.누가 조용한지.누가 도하에게 먼저 질문하는지.조금씩 그림이 생겼다.*도하가 출근한 뒤.유지는 본사에서 보내온 사전 미팅 자료를 확인했다.토요일에 참석하지 않았던 미팅.회의록과 핵심 내용이 간단하게 정리돼 있었다.유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10분도 걸리지 않았다.“이거면 됐네.”굳이 토요일을 반납하지 않아도.필요한 내용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첫 번째 지역은 승인 과정이 지나치게 길었다.두 번째 지역은 담당자마다 기준이 달랐다.유지는 메모했다.**같은 문제처럼 보여도 원인은 다름.**그리고 바로 파일을 닫았다.*오전 11시쯤.본사 담당자에게 메시지가 왔다.—사전 자료 확인하셨을까요?유지는 답했다.—네. 확인했습니다. 정식 첫 회의에서는 개선안을 먼저 제시하기보다 각 지역 담당자 의견부터 듣겠습니다.잠시 뒤.—좋습니다. 그 방향으로 진행하겠습니다.끝.유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예전 같으면.미팅에 참석하지 않은 만큼 더 많이 준비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지금은.안 간 시간을 죄책감으로 메우지 않았다.*점심을 먹고 있을 때.도하에게 메시지가 왔다.—어제 봤던 사람 기억나?유지가 바로 답했다.—누구요.—
수요일 저녁.송유지는 거울 앞에서 귀걸이를 고르다가 멈췄다.채도하가 뒤에서 재킷을 입으며 물었다.“왜.”“너무 꾸민 것 같아요?”“아니.”“진짜?”“응.”유지는 귀걸이를 다시 내려놓았다.“아니야. 그냥 이거 할래.”도하가 웃었다.“긴장돼?”“제가 왜요.”“내 팀 사람들 처음 보잖아.”유지는 거울로 도하를 봤다.“여보가 제 얘기를 너무 많이 해놨다며.”“많이는 아니고.”“해외 프로젝트.”“응.”“자문.”“응.”“출장 다닌 거.”“응.”“쉬는 법 배운 것도.”도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건 조금.”유지가 한숨처럼 웃었다.“그 정도면 거의 소개 자료인데.”식당에는 도하의 새 팀 사람 4명이 먼저 와 있었다.유지가 들어가자.한 사람이 바로 일어났다.“아, 안녕하세요.”유지도 웃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송유지입니다.”“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유지가 옆에 선 도하를 돌아봤다.“역시.”도하가 태연하게 말했다.“인사해.”“집 가서 봐요.”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자리에 앉고 나니 분위기는 생각보다 편했다.한 사람이 유지에게 물었다.“해외에서 35일 계셨다면서요?”“네.”“원래는 더 길었다고 들었는데.”“42일이었어요.”“그런데 일찍 돌아오신 거예요?”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없어도 현지에서 돌아갈 수 있게 돼서요.”옆에 있던 사람이 감탄했다.“그게 제일 어려운 거 아닌가요?”유지는 잠깐 생각했다.“저도 처음엔 반대로 생각했어요.”“어떻게요?”“계속 제가 필요해야 잘하고 있는 줄 알았거든요.”도하가 옆에서 물을 따르다 슬쩍 유지 쪽을 봤다.유지는 그 시선을 알아챘다.“왜요.”“아니.”“또 제가 성장했다고 생각했죠?”도하가 웃었다.“조금.”“아.”식사가 조금 진행된 뒤.이번에는 도하 이야기가 나왔다.“채 팀장님 새 프로젝트 오고 많이 달라졌어요.”유지가 눈을 크게 떴다.“어떻게요?”도하가 바로 말했다.“굳이 안 들어도 돼.”“아니. 듣고 싶어요
일요일 오후.송유지는 거실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채도하는 소파에서 휴대전화를 보다가 말했다.“유지야.”“응.”“수요일 저녁 뭐 해?”유지가 책에서 눈을 들었다.“수요일?”“응.”“아무것도 없는데.”“그럼 저녁 같이 갈래?”“어디요?”“우리 팀 사람들 몇 명이 배우자도 같이 저녁 먹자고 해서.”유지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새 프로젝트 팀?”“응.”“몇 명인데요?”“아직 정확히는 모르고.”도하는 자연스럽게 말했다.“너 지금 쉬는 기간이니까 괜찮을 줄 알았어.”그 순간.유지 표정이 아주 조금 멈췄다.“음.”도하가 바로 눈치챘다.“왜.”“아니.”“싫어?”“그건 아닌데.”유지는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었다.“여보.”“응.”“저 쉬고 있긴 한데.”“응.”“쉬고 있다고 해서 항상 시간이 비어 있는 건 아니잖아요.”도하가 잠깐 조용해졌다.유지가 말을 이었다.“수요일에 약속이 있다는 건 아니에요.”“응.”“근데 방금.”“응.”“제가 쉬니까 당연히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서.”도하는 휴대전화를 내려놨다.“그렇게 들렸어?”“조금.”“그건 미안.”유지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싸우자는 건 아니고.”“알아.”“저도 해외에 있을 때 여보 일정 물어보고 결정했잖아요.”“응.”“그러니까 저도.”유지는 조금 웃었다.“쉬는 중이어도 먼저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요.”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진짜?”“응.”도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내가 네 시간을 너무 비어 있다고 생각했네.”유지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 말이 정확해요.”잠깐 뒤.도하가 다시 물었다.“그럼 처음부터 다시.”유지가 웃었다.“뭔데요.”“수요일 저녁.”“응.”“내 팀 사람들이 배우자 같이 밥 먹자는데.”“응.”“네가 괜찮으면 같이 갈래?”이번에는 유지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몇 시예요?”“7시쯤.”“목요일은?”“너 일정 없어.”유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또 제 일정 다 알고 있
다음 날 아침.송유지는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옆에서 채도하는 이미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유지가 눈을 반쯤 뜬 채 물었다.“몇 시예요.”“9시 조금 넘었어.”“오늘 출근 안 해요?”“일요일.”“아.”유지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도하가 웃었다.“어제 기다리느라 늦게 잤지.”“안 기다렸다니까.”“11시 넘어서까지 책 읽고 있었잖아.”“읽고 싶어서 읽은 거예요.”“응.”“진짜.”“알겠어.”그 대답이 더 얄미웠다.유지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회식에서 제 얘기 더 했죠?”도하가 잠깐 멈췄다.“조금.”“봐.”“왜.”“어제 다 말 안 했네.”거실로 나온 뒤.유지는 커피를 내리는 도하 뒤를 따라다녔다.“뭐라고 했어요.”“별거 없어.”“구체적으로.”“한 사람이 물어봤어.”“뭘.”도하는 컵을 하나 유지 앞으로 밀었다.“너도 회사 다니냐고.”“그래서.”“일한다고 했고.”“또.”“해외 프로젝트 다녀왔다고.”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다음?”“이번에 원격 자문도 시작한다고.”유지가 눈을 크게 떴다.“그것까지?”“왜.”“제 이력 소개했어요?”도하가 웃었다.“물어보길래.”“여보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어떤 사람.”“회사에서 아내 자랑하는 사람.”도하가 잠깐 유지 얼굴을 봤다.“자랑 맞는데.”유지 손이 그대로 멈췄다.“아.”도하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커피를 마셨다.“왜.”“아침부터 왜 이래.”유지는 괜히 빵을 뜯었다.“그래서 사람들이 뭐래요.”“대단하다고.”“진짜?”“응.”“여보는 뭐라고 했는데.”도하는 잠깐 생각했다.“일 많이 한다고.”유지가 바로 쳐다봤다.“좋은 얘기 하다가 왜.”“사실이잖아.”“또.”“근데 요즘은 좀 덜 한다고.”유지는 입을 다물었다.도하가 이어 말했다.“쉬는 법 배웠다고.”유지가 웃음을 터뜨렸다.“그것까지 말했어요?”“응.”“저 없는 데서 제 성장 보고를 다 했네.”“틀린 거 있어?”“없어서 더 뭐라 못 하겠
채도하가 회식에 간 뒤.송유지는 정말 혼자 남았다.처음 30분은 책을 읽었다.그다음에는 냉장고를 열어봤다.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다.“좀 있다 먹지 뭐.”다시 소파로 돌아왔다.휴대전화는 테이블 위에 뒀다.일부러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오늘은 도하가 새 팀 사람들과 처음 제대로 섞이는 날이었다.연락이 늦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그걸 알면서도.8시 12분.한 번.8시 46분.또 한 번.유지는 시간을 확인했다.그리고 혼자 웃었다.“그래도 보긴 보네.”9시쯤.메시지가 하나 왔다.—잘 먹고 있어.유지 입꼬리가 올라갔다.—재밌어요?잠시 뒤.—응.그 뒤로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누구랑 있는지.몇 명인지.언제 끝나는지.묻지 않았다.대신 냉장고에서 간단한 걸 꺼내 저녁을 먹었다.책도 조금 더 읽고.샤워까지 했다.10시 30분쯤 되자.도하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조금 늦을 것 같아.유지는 바로 답했다.—얼마나?—11시 반 전에는 갈게.유지는 잠깐 생각하다가.—응. 천천히 와요.전송했다.그리고 침실로 들어가지는 않았다.거실 조명만 낮춰두고 소파에 앉았다.기다리는 건 맞았다.하지만 초조하게 현관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11시 17분.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유지는 책에서 눈을 들었다.문이 열리고.도하가 들어왔다.“왔어요?”“응.”유지는 시계를 한번 봤다.“벌점 없음.”도하가 웃었다.“11시 반 전.”“약속 지켰네.”도하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유지가 가까이 가서 얼굴을 봤다.“술 마셨어요?”“조금.”“많이?”“두 잔.”유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진짜?”“응.”“확인해볼까.”도하가 웃었다.“어떻게.”유지는 가까이 갔다가 멈췄다.그리고 피식 웃었다.“냄새 별로 안 나네.”“검사 끝?”“응.”도하는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유지가 물었다.“재밌었어요?”“응.”“사람들은?”“괜찮더라.”“누구랑 제일 많이 얘기했어요?”“기획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