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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가까워진 거리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5 13:33:29

유지는 아침부터 거실 한쪽에 쌓여 있던 상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언니가 쓰던 물건이었다.

책이며 사진이며 자잘한 소품까지.

버릴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겠다고 시작했지만, 막상 상자를 열 때마다 손이 느려졌다.

도하는 맞은편에서 말없이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조용했다.

유지는 괜히 그의 쪽을 보지 않으려 했다.

어제 순간적으로 가까워졌던 거리 때문이었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넘어질 뻔했고, 도하가 잡아줬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목에 남았던 감각이 자꾸 떠올랐다.

“그쪽은 제가 할게요.”

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지는 고개를 들었다.

“왜요?”

“높잖아요.”

“이 정도는 해요.”

유지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의자를 끌어왔다.

책장 맨 위에 놓인 작은 상자 하나만 내리면 됐다.

“유지 씨.”

“괜찮다니까요.”

도하가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유지는 이미 의자 위에 올라섰다.

손끝이 상자에 닿았다.

조금만 더.

유지가 발끝을 세웠다.

그 순간 생각보다 묵직한 상자가 앞으로 기울었다.

“어…….”

손목에 힘이 풀렸다.

상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몸의 중심까지 앞으로 쏠렸다.

“조심해요.”

등 뒤에서 강한 팔이 들어왔다.

도하가 떨어지는 상자를 한쪽 팔로 받아내면서 다른 손으로 유지의 허리를 붙잡았다.

유지는 그대로 굳었다.

등이 도하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

양옆으로 뻗은 그의 팔 사이에 자신이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안 다쳤어요?”

바로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가까웠다.

유지는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네.”

손끝이 뜨거워졌다.

어제와 달랐다.

어제는 갑작스럽게 잡힌 것이었다면 지금은 몇 초째 그대로였다.

도하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유지는 그의 손이 아직 자신의 허리에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하 씨.”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둘 다 동시에 멈췄다.

유지가 가장 먼저 놀랐다.

늘 형부라고 불렀다.

언니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도하의 시선이 천천히 유지에게 내려왔다.

“……네.”

그 한마디 때문에 오히려 더 이상해졌다.

유지는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상자…….”

그제야 도하가 한 발 물러났다.

몸에서 그의 체온이 떨어졌다.

유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하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런 건 앞으로 부르세요.”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방금 떨어뜨릴 뻔했잖아요.”

“안 떨어뜨렸잖아요.”

“제가 받았으니까.”

유지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라 더 얄미웠다.

도하는 의자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다음부터 높은 데 올라가지 마세요.”

“왜 자꾸 명령해요?”

“다칠까 봐 그러는 겁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

유지가 도하를 바라봤다.

도하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듯 잠시 시선을 피했다.

“……유리였으면.”

유지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도하는 말을 멈췄다.

“언니였으면요?”

잠깐의 침묵.

도하는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도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자주 다쳤어요.”

그뿐이었다.

유지를 언니와 착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슴 한쪽이 묘하게 식었다.

아까까지 빨라졌던 심장이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래.

도하는 언니의 남편이었다.

자신에게 친절한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일 것이다.

유지는 바닥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이건 언니 사진들이네요.”

도하가 옆에 앉았다.

사진 여러 장이 나왔다.

그중 하나에는 유리와 도하가 함께 있었다.

둘은 웃고 있었다.

유지는 사진을 오래 보지 못했다.

“많이 행복해 보이네요.”

도하는 한참 뒤에 대답했다.

“그랬죠.”

짧은 대답이었다.

유지는 사진을 다시 상자 안으로 넣었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금 전 도하의 품 안에 있었던 몇 초가 갑자기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유지야?”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유지가 화들짝 일어났다.

도하 역시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가 거실로 들어오다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둘이 같이 있었어?”

“언니 물건 정리하고 있었어요.”

유지가 너무 빨리 대답했다.

어머니의 시선이 상자와 두 사람 사이를 한 번 오갔다.

“그래.”

그뿐이었다.

그런데 유지에게는 이상하게 그 짧은 시선조차 신경 쓰였다.

도하가 바닥에 남은 상자를 들었다.

“제가 이것만 옮겨놓고 가겠습니다.”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

“아까도 그 말 했잖아요.”

도하가 상자를 들고 지나갔다.

유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내렸다.

어머니가 물었다.

“왜 얼굴이 빨개?”

“더워서요.”

“오늘 별로 안 더운데.”

“정리해서 그런가 보죠.”

유지는 괜히 빈 상자 안을 뒤적였다.

잠시 뒤 도하가 현관으로 향했다.

“가겠습니다.”

유지는 고개만 들었다.

“네.”

도하가 문을 열었다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유지 쪽을 돌아봤다.

“손목.”

“네?”

“아까 상자 받을 때 꺾인 것 같던데.”

유지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괜찮아요.”

도하는 잠시 유지의 손을 바라봤다.

“저녁까지 아프면 연락하세요.”

“왜요?”

“약 가져다줄 테니까.”

그 말을 남기고 도하는 나갔다.

문이 닫혔다.

유지는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형부라서 챙기는 거야.

언니의 동생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했다.

그런데 휴대전화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을 바라보는 순간, 유지의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강도하.

아까 자신이 처음으로 불러본 이름.

유지는 화면을 껐다.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입안에는 아직 그 이름이 남아 있었다.

도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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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은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   23. 보고 싶지 않은 사진

    토요일 오후. 송유지는 엄마와 약속한 카페로 향하면서도 전날 밤 일을 계속 떠올렸다. 아파트 앞에서 한 시간 넘게 앉아 있던 채도하. 기다린 게 아니라고 끝까지 우기던 사람. 그리고 자신이 말했다. 누군가 자꾸 신경 쓰인다고. 좋아하는 건지 아직 모르겠다고. 도하는 그 말을 듣고도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냐고도. 그저. —잘 모르겠으면 급하게 결정하지 마. 그 말뿐이었다. 유지는 카페 문을 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엄마는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기.” 유지는 맞은편에 앉았다. “일찍 왔네.” “근처에 볼일 있어서.”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한동안 별것 아닌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엄마가 휴대전화를 만지며 말했다. “아, 맞다.” “뭐?” “도하 소개해주려고 했던 사람.” 유지의 손이 멈췄다. 또 그 이야기였다. “왜?” “사진 보여줄까?” “나한테 왜 보여줘.” 대답은 빨랐다. 엄마가 눈썹을 올렸다. “왜 그렇게 정색해?” “정색 안 했어.” “궁금하지도 않아?” “안 궁금해.” 거짓말이었다.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화면을 몇 번 넘겼다. “도하한테도 보냈는데.” 유지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휴대전화로 향했다. “봤대?” “응. 사진은 봤대.” 21화에서 도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진만 보고 뭘 알아. 그때는 별 관심 없는 것처럼 말했었다. 엄마가 휴대전화를 유지 쪽으로 돌렸다. “괜찮지?” 보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국 시선이 화면에 닿았다. 사진 속 여자는 단정한 인상이었다. 긴 머리. 차분한 미소. 잘 꾸민 사람. 그리고. 도하 옆에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여자였다. 유지는 바로 시선을 거뒀다. “괜찮네.” 말은 아무렇지 않게 했다. 하지만 가슴 한쪽이 묘하게 답답했다. “그렇지?” 엄마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성격도 좋대. 직장도 괜찮고.

  • 죽은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   22.기다린 적 없는데

    금요일. 송유지는 퇴근 준비를 하면서도 이상하게 휴대전화가 신경 쓰였다. 오늘은 강현민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리고 채도하는 말했다. 늦어지면 연락하라고. 현민이 데려다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도. 그래도 연락은 하라고. 유지는 그 말을 떠올리다 스스로 웃었다. “왜 내가 신경 쓰고 있어.” 채도하가 자신을 챙기는 건 이제 익숙했다. 문제는 그 익숙함이었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짧은 메시지 하나에도 요즘은 이유를 찾게 됐다. 도하도 알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행동이 유지에게 신경 쓰이게 한다는 걸.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왜일까. 유지는 그 질문을 애써 밀어냈다. 오늘은 현민을 만나는 날이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강현민은 오늘도 먼저 와 있었다. “오늘은 안 피곤해 보여요.” 유지가 웃었다. “지난번에 제가 그렇게 피곤해 보였어요?” “조금요.” “미안해요.” “왜 미안해요.” 현민은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줬다. “오늘 즐거우면 됐죠.” 좋은 사람이었다. 유지는 다시 한번 그렇게 생각했다. 현민은 자신을 헷갈리게 하지 않았다. 좋으면 좋다고 말했고. 만나고 싶으면 약속을 잡았다.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도 분명했다. 채도하와는 달랐다. 둘은 저녁을 먹고 근처를 조금 걸었다. 현민이 말했다. “요즘 유지 씨한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뭔데요?” “혹시 마음에 둔 사람 있어요?” 유지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가끔.” 현민은 웃었다. “저랑 있는데 다른 사람 생각하는 얼굴을 해서.” 유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제가요?” “제가 틀렸으면 좋겠는데.” 현민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책망하는 느낌도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유지는 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현민도 그걸 알아차린 듯 더 묻지 않았다. “괜찮아요.” “현민 씨.” “아직 제가 물어볼 단계도 아니잖아요.” 유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 죽은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   21.괜히 듣고 싶지 않은 말

    월요일 오전. 송유지는 출근하자마자 바빴다. 주말 동안 쌓인 메일을 확인하고,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팀장에게 수정안을 넘겼다. 정신없이 오전을 보내다 보니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휴대전화를 제대로 확인했다. 채도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점심 먹어. 유지는 화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도하는 여전히 이런 식이었다. 다정하게 묻기보다 짧게 말하고. 챙겨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 유지는 답장을 보냈다. —먹을 거예요. 몇 초 뒤 읽음 표시가 떴다. —진짜? 유지는 웃었다. —네. —사진 보내. 유지는 눈썹을 올렸다. —왜요? —안 믿겨서. 유지는 점심으로 받은 샐러드와 샌드위치 사진을 찍어 보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이건 밥 아니잖아. —샌드위치인데요. —저녁 제대로 먹어. —또 잔소리. —응. 유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도하와 이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그게 가장 문제였다. 오후 세 시쯤. 강현민에게 메시지가 왔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유지는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현민과는 이미 몇 번 만났다. 좋은 사람이었다. 부담스럽지 않았고, 대화도 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음 약속을 잡을 때마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좋아서 만나고 싶은 게 아니라. 만나도 되니까 만나는 느낌. 유지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네. 괜찮아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좋아요. 이번엔 제가 장소 정할게요. 유지는 짧게 웃었다. 그 순간 책상 위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채도하였다. —금요일 약속 있어? 유지는 그대로 멈췄다. 시간이 묘했다. 방금 현민과 약속을 잡은 직후였다. 물론 우연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지는 일부러 답장을 늦게 보냈다. —왜요? 읽음. 잠시 뒤. —그냥 물어봤어. 유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그냥

  • 죽은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   20.아무렇지 않은 얼굴

    일요일 저녁.송유지가 부모님 집에 도착했을 때, 채도하는 이미 와 있었다.거실 소파에 앉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테이블 한쪽에는 그가 가져온 과일 상자가 놓여 있었다.유지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잠깐 멈췄다.예상은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도하와 마지막으로 제대로 마주한 뒤 며칠이 지났다.연락은 했다.하지만 전처럼 자주 하지는 않았다.유지도 일부러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도하 역시 별다른 이유 없이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다.그래서 괜찮아진 줄 알았다.막상 마주 보니 아니었다.도하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왔네.”“네.”짧은 인사.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신경 쓰였다.“유지 왔니? 손 씻고 앉아.”주방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유지는 가방을 내려놓고 식탁 쪽으로 갔다.잠시 뒤 가족들이 자리에 앉았다.도하는 유지 맞은편이었다.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반찬을 더 꺼냈다.“도하 너 좋아하는 갈비 해놨어.”“많이 안 하셔도 되는데.”“뭘. 너 요즘 제대로 먹고 다니긴 해?”유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도하와 눈이 마주쳤다.그가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유지는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자신에게는 그렇게 밥을 먹으라고 잔소리하면서.정작 본인도 똑같았다.식사는 평범하게 시작됐다.회사 이야기.날씨 이야기.아버지가 요즘 시작한 운동 이야기.유지는 의도적으로 도하를 보지 않았다.그런데 신경을 안 쓰려고 할수록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더 잘 느껴졌다.컵을 드는 손.엄마 말에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잡채 접시가 비어갈 때쯤 아무 말 없이 접시를 유지 쪽으로 밀어놓는 행동까지.유지가 젓가락을 멈췄다.도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국을 먹고 있었다.“이거 왜 이쪽으로 줘요?”“좋아하잖아.”“도하 씨도 먹어요.”“난 됐어.”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도하는 예전부터 유지 먹는 건 잘 알더라.”유지의 손이 굳었다.도하도 잠깐 멈췄다

  • 죽은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   19. 그러면 안 되는 이유

    일요일 오전. 송유지는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 햇빛이 커튼 틈으로 길게 들어와 있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알림은 몇 개 있었지만, 채도하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유지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불을 걷어냈다. 어젯밤 통화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그리고. —내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으니까. 그 말이 가장 신경 쓰였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게 뭘까.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 현민을 신경 쓰는 것? 아니면. 그보다 더한 어떤 감정. 유지는 세면대 앞에 서서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생각하지 말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늦었다. 도하가 하지 않은 말까지 자꾸 상상하게 됐다. 점심 무렵.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니? 도하도 온대. 유지는 메시지를 보고 한참 멈춰 있었다. 도하도 온다. 별것 아닌 문장이 심장을 괜히 빠르게 만들었다. —응. 갈게. 답장을 보내고 나서 유지는 옷장을 열었다. 평소 같으면 아무 옷이나 골랐을 텐데, 오늘은 괜히 몇 벌을 꺼냈다 다시 넣었다. 그러다 스스로 어이가 없어졌다. “엄마 집 가는데 뭘.” 결국 가장 평범한 니트를 골랐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저녁 여섯 시. 유지가 집에 들어갔을 때 도하는 이미 와 있었다. 거실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하가 현관 쪽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왔어?” 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다. 유지도 평소처럼 대답했다. “네.” 끝. 그런데 이상하게 어젯밤 통화 때문에 모든 게 다르게 느껴졌다. 도하가 물을 마시는 것도. 소매를 한 번 접어 올리는 것도. 자신을 잠깐 바라보는 것도. 전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지야.” 어머니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응?” “접시 좀 가져다줄래?” “아, 응.” 유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릇을 꺼내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도하였다. “뭐 찾으세요?” “물.

  • 죽은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   18.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토요일 오후.송유지는 거울 앞에 서서 귀걸이를 한 번 만졌다.평소보다 조금 신경 쓴 옷차림이었다.너무 꾸민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나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정도.현민을 만나는 날이었다.유지는 가방을 들다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아무 연락도 없었다.채도하에게서도.당연했다.어제 자신이 말했다.헷갈리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고.도하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잘 만나고 오라고까지 했으니까.유지는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었다.“오늘은 진짜 신경 쓰지 말자.”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약속 장소에는 강현민이 먼저 와 있었다.유지를 발견한 현민이 웃었다.“오늘은 제가 먼저 왔네요.”“많이 기다렸어요?”“아니요. 한 오 분?”“그럼 다행이고요.”현민은 자연스럽게 레스토랑 문을 열어줬다.유지는 안으로 들어가며 가볍게 웃었다.편했다.현민과 있으면 어렵지 않았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됐고, 상대의 표정을 하나하나 읽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그게 좋은 점이었다.“지난번에 파스타 좋아한다고 했죠?”“기억했어요?”“그 정도는 기억하죠.”유지는 순간 멈칫했다.기억.별것 아닌 단어인데 또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오늘은 약속 없다고 했잖아.—그걸 기억해요?—기억나니까.유지는 바로 생각을 끊었다.“유지 씨?”“네?”“뭐 드실래요?”“아, 저는 이거요.”유지는 메뉴판을 가리켰다.현민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식사는 편안하게 이어졌다.현민은 회사 이야기를 했고, 유지는 적당히 웃었다.가끔 유리 얘기가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굳이 꺼내지 않았다.오늘만큼은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다.“요즘 좀 괜찮아 보여요.”현민이 말했다.“제가요?”“처음 봤을 때는 계속 어딘가 신경 쓰는 얼굴이었거든요.”유지가 웃음을 멈췄다.“그랬어요?”“네.”현민이 물잔을 내려놓았다.“누구 기다리는 사람처럼.”유지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똑같은 말을 나현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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