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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Автор: 금붕어

제1화

Aвтор: 금붕어
“최수빈 씨, 죄송합니다. 최수빈 씨 따님은 2월 15일 새벽 1시 13분에 사망하셨습니다.”

최수빈은 토끼 인형을 손에 쥔 채 무감한 표정으로 수술실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딸을 보내줘야 했다.

최수빈은 수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딸의 작은 손을 그러쥐었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손이었다.

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최수빈은 응급실로 실려 가기 전 딸이 힘없는 목소리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엄마, 아저씨 아직도 안 왔어요?”

주예린이 말한 아저씨는 주예린의 생부 주민혁이었다. 주민혁은 주예린에게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으면서 정작 그의 첫사랑인 박하린의 아들에게는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게 했다.

주예린의 생일 소원은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내는 것, 그리고 주민혁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면역력이 약한 주예린은 지난해 겨울 찬바람 속에서 주민혁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기를 기다리다가 독감에 걸려 폐렴까지 앓게 되었다. 그러다 올해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오늘도 혹독히 추운 날이었다. 주예린은 또다시 최수빈 몰래 밖으로 나가 주민혁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최수빈은 주예린이 정신을 잃은 걸 뒤늦게 발견하고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최수빈은 주민혁에게 연락해 딸의 생일날만이라도 함께 있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주민혁은 또 한 번 약속을 저버렸다.

최수빈은 딸의 작고 야윈 몸을 끌어안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 이젠 아프지 않겠네.”

이제 더는 병마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아빠에게 미움받거나 영원히 받지 못할 아빠의 사랑을 갈망할 필요도 없었다.

“엄마, 아저씨는 왜 아빠라고 부르게 못 하는 거예요? 저랑 다르게 오빠는 아빠라고 부를 수 있잖아요...”

“엄마, 하린 이모가 오빠를 좋아해서 아빠도 오빠를 좋아하는 거예요?”

딸의 천진난만한 질문이 아직도 최수빈의 귓가를 맴돌았다.

너무 어렸던 주예린은 아빠가 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지, 왜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지 몰랐다. 단순했던 주예린은 본인이 오빠만큼 잘나지 않아서 아빠가 자신을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6년 전, 최수빈은 주민혁과 얼떨결에 관계를 가졌다가 임신하게 되어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

주예린을 낳을 때 최수빈은 난산으로 인해 과다 출혈까지 했지만 주민혁은 그녀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날 주민혁은 그녀와 똑같은 날 출산하는 박하린의 곁을 지켰다. 그 점만 보아도 주민혁이 누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박하린은 아들을 낳은 뒤 주민혁에게 아이를 맡기고 해외로 출국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주민혁을 오랫동안 짝사랑한 최수빈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박하린의 아이를 데려와 친아들처럼 살뜰히 키웠다.

주민혁은 딸은 아빠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했으면서 박하린의 아들은 끔찍이 여겼다. 차별 대우였다.

난산이었을 때 깨달아야 했다. 주민혁은 평생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심지어 주예린이 오전에 먼저 태어났는데도 주민혁은 아들을 첫째로 정해서 주씨 가문의 장손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들 주예린을 사생아라고 생각했다.

의사는 최수빈의 뒤에 서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이 아빠는 아직 안 왔나요?”

주예린이 입원하고 나서 지금까지 의사는 단 한 번도 주예린의 아빠를 본 적이 없었다.

최수빈은 차가운 눈빛을 해 보이며 자조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아빠는 본인의 사생아와 함께 아이 엄마를 보러 갔어요. 그 아이의 생일을 함께 축하해 주겠다면서요.”

매년 그랬다.

그런데 최수빈은 멍청하게도 4년 동안 남의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웠다.

두 아이는 생일이 같은데 오직 주예린만이 냉대를 받았다.

의사는 당황했다. 그는 눈앞의 가련한 여자를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몰랐다.

...

주예린이 세상을 떠난 날, 최수빈은 주예린을 위해 모든 걸 정리했다.

은산시에서 화장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 양쪽의 사인이 필요했고, 최수빈은 해운 별장으로 돌아가 주예린의 유품들을 정리했다.

이때 아래층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언제 엄마를 버리고 하린 이모랑 결혼할 거예요? 저는 하린 이모가 제 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

주민혁은 겉옷을 팔뚝에 걸치더니 허리를 숙이며 아이의 뺨을 꼬집었다.

“시후야, 너는 하린 이모를 엄마라고 불러도 돼.”

위층에 있던 최수빈은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가슴이 저려 눈을 감으면서 심호흡했다.

“가서 엄마한테 씻겨달라고 해. 그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하린 이모 마중 나가자.”

주시후는 기뻐서 방방 뛰었다.

“좋아요!”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주시후는 울상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만약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 가지 못하게 하면 어떡해요? 엄마 진짜 싫어요. 바깥 음식들을 못 먹게 하잖아요!”

주민혁은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뭐라고 하면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해.”

시선을 드는 순간, 주민혁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최수빈과 눈이 마주쳤다.

주시후는 달려가서 최수빈의 손을 잡아당겼다.

“엄마, 저 씻겨주세요. 저 이따가 나갈 거예요.”

최수빈은 손을 빼낸 뒤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주민혁 씨, 뭐 잊은 것 없어요?”

주민혁은 덤덤한 눈길로 최수빈을 힐끗 보았다.

“뭐?”

그동안 주민혁은 늘 최수빈과 주예린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최수빈은 자조하듯 피식 웃었다.

주민혁이 주예린과 주시후의 생일이 같다는 걸 기억할 리가 없었다.

매년 주시후의 생일 때마다 그는 주시후를 데리고 박하린을 만나러 가서 주시후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반대로 주예린은 매년 생일 때마다 찬바람 속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주민혁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나 할 말 있어요.”

주민혁은 코웃음을 쳤다.

“오늘 시간 없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최수빈이 말했다.

“여기 두 서류에 사인만 해주면 돼요.”

최수빈은 서류를 들고 사인해야 할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민혁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짜증 난다는 듯이 말이다.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대충 사인한 뒤 그녀에게 서류를 건넸다.

“오늘 나랑 시후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내일 아침에 예린이에게 시후 대신 선생님께 얘기 전하라고 해. 시후는 오전 수업을 듣지 못한다고 말이야.”

최수빈은 이를 악물고 서류를 꽉 쥐었다. 힘을 너무 많이 주어서 관절 쪽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주민혁이 조금이라도 서류 내용에 신경을 썼다면 그 서류 중 하나는 이혼 합의서이고 다른 하나는 주예린의 화장 동의서라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주민혁은 서류에 사인할 때마저 무심했다.

“그리고 예린이에게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해.”

최수빈은 차갑게 웃었다.

주예린은 그에게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주민혁은 평소와 다른 주예린의 모습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것인지 박하린 쪽에서 그들에게 연락하여 언제 오냐고 물었다.

주시후는 샤워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주민혁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저 오늘 밤에는 새엄마한테 씻겨달라고 할 거예요.”

주민혁은 애정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최수빈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녀는 집에 있던 자신과 주예린의 소지품들을 전부 정리해서 불태웠다.

그리고 주예린의 시신을 화장하러 화장터로 향했다.

유골을 받았을 때 최수빈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예린아, 조금만 기다려. 엄마도 곧 갈게...”

...

다른 한편, 주민혁은 주시후를 데리고 박하린의 귀국 축하 파티에 참석했다.

세 사람은 마치 진짜 가족처럼 화기애애했다. 다들 그들의 사이가 좋아 보인다면서 최수빈이 염치없이 주민혁의 아내 자리를 꿰차고 있으면서 방해꾼 노릇을 한다고 나무랐다.

이때 누군가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주민혁의 앞에 섰다.

“대표님, 사모님과 따님이 오늘 화장될 겁니다. 화장터로 가서 유골을 챙기셔야 합니다.”

주민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질투 때문에 이런 유치한 짓을 벌여?”

“하지만 화장 동의서에 사인한 것은 대표님이십니다. 그리고 이혼 합의서에도 사인을 하셨으니...”

주민혁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라고?”

주민혁은 미친 듯이 달려 화장터에 도착했고 아내와 딸이 화장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주민혁은 심장 한 군데가 찢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화장터 직원은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주민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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