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작가: 금붕어

제1화

작가: 금붕어
“최수빈 씨, 죄송합니다. 최수빈 씨 따님은 2월 15일 새벽 1시 13분에 사망하셨습니다.”

최수빈은 토끼 인형을 손에 쥔 채 무감한 표정으로 수술실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딸을 보내줘야 했다.

최수빈은 수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딸의 작은 손을 그러쥐었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손이었다.

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최수빈은 응급실로 실려 가기 전 딸이 힘없는 목소리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엄마, 아저씨 아직도 안 왔어요?”

주예린이 말한 아저씨는 주예린의 생부 주민혁이었다. 주민혁은 주예린에게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으면서 정작 그의 첫사랑인 박하린의 아들에게는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게 했다.

주예린의 생일 소원은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내는 것, 그리고 주민혁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면역력이 약한 주예린은 지난해 겨울 찬바람 속에서 주민혁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기를 기다리다가 독감에 걸려 폐렴까지 앓게 되었다. 그러다 올해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오늘도 혹독히 추운 날이었다. 주예린은 또다시 최수빈 몰래 밖으로 나가 주민혁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최수빈은 주예린이 정신을 잃은 걸 뒤늦게 발견하고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최수빈은 주민혁에게 연락해 딸의 생일날만이라도 함께 있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주민혁은 또 한 번 약속을 저버렸다.

최수빈은 딸의 작고 야윈 몸을 끌어안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 이젠 아프지 않겠네.”

이제 더는 병마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아빠에게 미움받거나 영원히 받지 못할 아빠의 사랑을 갈망할 필요도 없었다.

“엄마, 아저씨는 왜 아빠라고 부르게 못 하는 거예요? 저랑 다르게 오빠는 아빠라고 부를 수 있잖아요...”

“엄마, 하린 이모가 오빠를 좋아해서 아빠도 오빠를 좋아하는 거예요?”

딸의 천진난만한 질문이 아직도 최수빈의 귓가를 맴돌았다.

너무 어렸던 주예린은 아빠가 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지, 왜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지 몰랐다. 단순했던 주예린은 본인이 오빠만큼 잘나지 않아서 아빠가 자신을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6년 전, 최수빈은 주민혁과 얼떨결에 관계를 가졌다가 임신하게 되어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

주예린을 낳을 때 최수빈은 난산으로 인해 과다 출혈까지 했지만 주민혁은 그녀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날 주민혁은 그녀와 똑같은 날 출산하는 박하린의 곁을 지켰다. 그 점만 보아도 주민혁이 누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박하린은 아들을 낳은 뒤 주민혁에게 아이를 맡기고 해외로 출국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주민혁을 오랫동안 짝사랑한 최수빈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박하린의 아이를 데려와 친아들처럼 살뜰히 키웠다.

주민혁은 딸은 아빠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했으면서 박하린의 아들은 끔찍이 여겼다. 차별 대우였다.

난산이었을 때 깨달아야 했다. 주민혁은 평생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심지어 주예린이 오전에 먼저 태어났는데도 주민혁은 아들을 첫째로 정해서 주씨 가문의 장손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들 주예린을 사생아라고 생각했다.

의사는 최수빈의 뒤에 서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이 아빠는 아직 안 왔나요?”

주예린이 입원하고 나서 지금까지 의사는 단 한 번도 주예린의 아빠를 본 적이 없었다.

최수빈은 차가운 눈빛을 해 보이며 자조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아빠는 본인의 사생아와 함께 아이 엄마를 보러 갔어요. 그 아이의 생일을 함께 축하해 주겠다면서요.”

매년 그랬다.

그런데 최수빈은 멍청하게도 4년 동안 남의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웠다.

두 아이는 생일이 같은데 오직 주예린만이 냉대를 받았다.

의사는 당황했다. 그는 눈앞의 가련한 여자를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몰랐다.

...

주예린이 세상을 떠난 날, 최수빈은 주예린을 위해 모든 걸 정리했다.

은산시에서 화장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 양쪽의 사인이 필요했고, 최수빈은 해운 별장으로 돌아가 주예린의 유품들을 정리했다.

이때 아래층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언제 엄마를 버리고 하린 이모랑 결혼할 거예요? 저는 하린 이모가 제 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

주민혁은 겉옷을 팔뚝에 걸치더니 허리를 숙이며 아이의 뺨을 꼬집었다.

“시후야, 너는 하린 이모를 엄마라고 불러도 돼.”

위층에 있던 최수빈은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가슴이 저려 눈을 감으면서 심호흡했다.

“가서 엄마한테 씻겨달라고 해. 그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하린 이모 마중 나가자.”

주시후는 기뻐서 방방 뛰었다.

“좋아요!”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주시후는 울상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만약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 가지 못하게 하면 어떡해요? 엄마 진짜 싫어요. 바깥 음식들을 못 먹게 하잖아요!”

주민혁은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뭐라고 하면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해.”

시선을 드는 순간, 주민혁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최수빈과 눈이 마주쳤다.

주시후는 달려가서 최수빈의 손을 잡아당겼다.

“엄마, 저 씻겨주세요. 저 이따가 나갈 거예요.”

최수빈은 손을 빼낸 뒤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주민혁 씨, 뭐 잊은 것 없어요?”

주민혁은 덤덤한 눈길로 최수빈을 힐끗 보았다.

“뭐?”

그동안 주민혁은 늘 최수빈과 주예린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최수빈은 자조하듯 피식 웃었다.

주민혁이 주예린과 주시후의 생일이 같다는 걸 기억할 리가 없었다.

매년 주시후의 생일 때마다 그는 주시후를 데리고 박하린을 만나러 가서 주시후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반대로 주예린은 매년 생일 때마다 찬바람 속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주민혁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나 할 말 있어요.”

주민혁은 코웃음을 쳤다.

“오늘 시간 없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최수빈이 말했다.

“여기 두 서류에 사인만 해주면 돼요.”

최수빈은 서류를 들고 사인해야 할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민혁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짜증 난다는 듯이 말이다.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대충 사인한 뒤 그녀에게 서류를 건넸다.

“오늘 나랑 시후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내일 아침에 예린이에게 시후 대신 선생님께 얘기 전하라고 해. 시후는 오전 수업을 듣지 못한다고 말이야.”

최수빈은 이를 악물고 서류를 꽉 쥐었다. 힘을 너무 많이 주어서 관절 쪽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주민혁이 조금이라도 서류 내용에 신경을 썼다면 그 서류 중 하나는 이혼 합의서이고 다른 하나는 주예린의 화장 동의서라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주민혁은 서류에 사인할 때마저 무심했다.

“그리고 예린이에게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해.”

최수빈은 차갑게 웃었다.

주예린은 그에게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주민혁은 평소와 다른 주예린의 모습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것인지 박하린 쪽에서 그들에게 연락하여 언제 오냐고 물었다.

주시후는 샤워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주민혁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저 오늘 밤에는 새엄마한테 씻겨달라고 할 거예요.”

주민혁은 애정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최수빈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녀는 집에 있던 자신과 주예린의 소지품들을 전부 정리해서 불태웠다.

그리고 주예린의 시신을 화장하러 화장터로 향했다.

유골을 받았을 때 최수빈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예린아, 조금만 기다려. 엄마도 곧 갈게...”

...

다른 한편, 주민혁은 주시후를 데리고 박하린의 귀국 축하 파티에 참석했다.

세 사람은 마치 진짜 가족처럼 화기애애했다. 다들 그들의 사이가 좋아 보인다면서 최수빈이 염치없이 주민혁의 아내 자리를 꿰차고 있으면서 방해꾼 노릇을 한다고 나무랐다.

이때 누군가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주민혁의 앞에 섰다.

“대표님, 사모님과 따님이 오늘 화장될 겁니다. 화장터로 가서 유골을 챙기셔야 합니다.”

주민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질투 때문에 이런 유치한 짓을 벌여?”

“하지만 화장 동의서에 사인한 것은 대표님이십니다. 그리고 이혼 합의서에도 사인을 하셨으니...”

주민혁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라고?”

주민혁은 미친 듯이 달려 화장터에 도착했고 아내와 딸이 화장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주민혁은 심장 한 군데가 찢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화장터 직원은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주민혁을 보았다.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3화

    주민혁이 떠난 뒤, 최수빈도 곧장 복도를 벗어났다.육민성은 이미 남이준과 협력 논의를 약속해둔 상태였다.“어디 갔었어?”육민성이 그녀가 바깥에서 들어오는 걸 보고 물었다.“좀 바람 쐬고 왔어요.”“그럼 우리 먼저 가자.”육민성이 말했다.“남 대표님은 일에서는 전문성이 높으니 더 깊게 얘기할 수 있을 거야.”발표회장 안에는 귀빈용 접견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성안에서 내놓은 신소재는 활용도가 높아 협력이 성사되면 앞으로 많은 일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그들은 접견실로 향했다.직접 차를 우려내고 있던 남이준은 그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육 대표님, 수빈 씨. 앉으시죠.”자리에 앉자마자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천공연구원이 정부 입찰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남이준은 차를 따라 권하며 말을 꺼냈다.“네.”육민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최수빈을 소개했다.“이번 프로젝트 책임자는 최수빈 씨입니다.”남이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차를 한 모금 마시며 최수빈을 살펴보더니 차분히 잔을 내려놓았다.“육 대표님, 혹시 눈이 가려진 건 아닙니까?”그는 사실 육민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새로운 세대의 선두주자, 업계의 이끄는 인물, 하지만 그가 최수빈의 외모에 끌린 듯 행동하는 건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자신이 아는 최수빈은 집에서 아이만 돌보던 학부 출신의 여인일 뿐이었다.그런 사람이 어떻게 천공연구원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일을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단순히 그녀를 곁에 두고 사적인 자리에 동행시키는 정도라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방금 그녀를 ‘책임자’라고 소개한 건, 무책임하고 경솔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육민성은 시선을 내려 차가 거의 넘칠 듯 찰랑거리는 걸 바라보았다.차가 가득 차면 곧 손님을 내보낸다는 뜻이었다.남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스치듯 최수빈을 바라봤다.“육 대표님은 대단한 분이라고 존경했었는데... 결국 미인계에 무너져 철저히 타락하는군요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2화

    주민혁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그는 무심히 그녀가 적고 있는 노트를 흘끗 봤다. 발표회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고 있었다.“알아듣고 적는 거야?”남자가 불쑥 물었다.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살짝 틀어 더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박하린이 옆에서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딱 봐도 육 대표님 자료 정리 도와주러 온 것 같네요.”학부생이 이런 걸 알아듣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그래서 모든 수치와 자료를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하고 자기 의견은 전혀 담지 않았겠지.’최수빈이 몸을 피하자 주민혁은 입꼬리를 옅게 올려 웃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무대 위에서 남이준이 우연히 그 장면을 보았다.주민혁이 말을 걸자 최수빈이 대놓고 등을 돌려 무시하는 모습에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여기까지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다니...’자료 시연이 끝난 뒤, 최수빈은 주민혁 일행이 언제 빠져나갔는지도 몰랐다.발표회장은 인파로 북적거려 숨이 막힐 정도였다.그녀는 바람이라도 쐬려 복도로 나왔다.그런데 멀리서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주민혁이 보였다.최수빈은 사실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결혼 후 내내, 그녀 앞에서는 거의 피우지 않았으니 말이다.주민혁도 최수빈이 나오는 걸 보았다.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무심했고 곧 고개를 돌려 담배를 태우기만 했다. 인사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최수빈은 숨을 고르며 다가갔다.어젯밤 신혼집에서 원래는 이혼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분위기가 도무지 맞지 않아 입을 떼지 못했었다.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남자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느긋하게 옷매무새를 털었다.“무슨 일 있어?”“네.”최수빈이 입을 열었다.“우리 문제에 대해서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주민혁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히 그녀를 보았다.“우리 문제라니?”최수빈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법원에서 받은 소환장 날짜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하지만 재판으로 가면 시간만 오래 끌릴 터였다.차라리 그와 직접 합의를 보고 동사무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1화

    주민혁은 최수빈이 보는 앞에서도 박하린과 여러 번 대놓고 사람들 앞에 붙어 다녔다.이건 그녀를 사람 취급조차 안 하는 것이었고 본처의 체면을 진창에 짓밟는 일이었다.아무리 거만해도 그렇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육민성조차 최수빈이 아깝다고 느꼈다.하지만 최수빈은 이미 마음을 비워버린 지 오래였다.“소송까지 가서 결국 합의 이혼할 건데 굳이 지금 자극할 필요 없어요.”애초에 그들의 결혼은 숨겨진 관계였다.주민혁과 박하린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고 어떤 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최수빈과 결혼하게 된 거였다.뿌리를 따지고 올라가면 사정은 매우 복잡했다.게다가 최수빈이 이를 공개하는 건 곧바로 박하린에게 모욕이 되는 일이니 그러면 당연히 천공연구원과 이씨 가문을 겨냥당하게 될 터였다.최수빈은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때로는 복수하지 않는 게 아니라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군자는 복수를 서두르지 않는다.아직 날개가 다 자라지 않았는데 함부로 덤빌 이유는 없었다.그들이 자리에 막 앉자 저쪽에서 박하린과 주민혁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다가왔다.최수빈 자리 앞에 이르자 주최 측 관계자가 순간 멈칫했다. 얼굴이 낯설었기 때문이다.조심스럽게 물었다.“실례지만 아가씨, 여긴 VIP 구역인데 혹시...?”박하린은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이 업계에서 통하는 건 결국 ‘큰손’이었다.아무리 천공연구원에 몸담고 있는다 해도 최수빈에게는 명분이 없었다.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업계의 인재들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었는데 최수빈은 조회가 불가한 사람이었다.최수빈은 스스로 신분을 밝혔다.주최 측은 곧 육민성을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넸다.그러고는 최수빈을 육민성의 조수나 비서 정도로 여겼다.보통 비서나 조수는 자리에 앉을 수 없지만 이미 그녀가 자리를 잡은 이상 억지로 내쫓기도 곤란했다.그들은 주민혁을 최수빈 옆자리에 앉혔고 박하린은 주민혁 옆에 앉았다.결국 그녀와 박하린이 주민혁의 양옆에 나란히 자리하게 된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0화

    주시후는 애초에 그녀를 엄마로 여기지 않았으니 당연히 전화 따위 걸어올 리 없었다.최수빈은 육민성과 함께 성안 체크인 구역으로 들어갔다.서명대에 이름을 적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그 중앙에는 주민혁이 서 있었다.곧고 고고한 기세로 눈에 띄었고 그의 곁에는 박하린이 있었다.주위에는 수행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성안 측에서는 그를 위해 따로 인사를 나갈 정도였다.주민혁의 시선이 스치듯 그녀를 훑고 지나갔지만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딴 곳으로 옮겨졌다.최수빈도 태연히 시선을 거뒀다.그러나 바로 이어진 광경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멈췄다.박하린의 손목에 걸린 보석 팔찌, 여러 가지 보석을 꿰어 만든 그것은 분명 최수빈이 전날 주시후와 함께 정성껏 만든 팔찌였다.그녀가 직접 갈고 다듬은 조각들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렸다.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것이 고스란히 박하린의 손목 위에 있었다.그녀에게 건네는 선물이라니 실소가 나왔다.남편도, 아들도 진심은 한 번도 준 적 없었다.그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고 필요 없으면 밀쳐내는 가정부처럼만 대했을 뿐이었다.최수빈의 감정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하린 씨, 그 팔찌 특이하네요.”누군가 눈치 빠르게 말을 꺼냈다.보석 하나하나는 값이 꽤 나가 보였지만 디자인은 낯설고 투박했다.박하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아들이 오늘 아침, 어버이날 선물로 준 거예요.”“아? 벌써 아들이 있어요? 결혼하셨나요?”사람들이 놀라움에 웅성거렸다.그녀가 결혼했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박하린은 예의 바른 미소만 남기며 말을 아꼈다.“사적인 건 밝히지 않는 게 좋겠네요.”바로 그때, 주시후가 어린이집에서 빌린 전화로 전화를 걸어왔다.“엄마, 어버이날 축하해요.”박하린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주민혁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민혁 오빠, 오빠도 아들한테 한마디 해줘.”그 말에 모든 이들의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39화

    결혼 전, 한 번의 뜻밖의 사고로 그와 같은 침대에 누운 적이 있었다.그 일 때문에 지금껏 주민혁은 늘 그녀의 유혹과 계략이라 믿어 왔다.그래서 방금처럼 어색한 장면이 겹치자 최수빈은 그가 또다시 자신을 오해할까 두려웠다.하지만 남자는 무표정했다.그녀를 향해 곧바로 눈길을 주지도 어떤 오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그는 그저 옷방으로 가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갈 뿐이었다.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돌아왔는지, 왜 굳이 집에서 자려 하는지조차 설명할 의향도 없어 보였다.최수빈 역시 궁금해하지 않았다.그가 샤워하러 들어가자, 곧장 손님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다음 날 아침.아직 잠이 제대로 들지 못한 듯했는데 눈을 떠보니 날이 벌써 훤히 밝아 있었다.장수미가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사모님, 아침 드세요.”최수빈은 이 집에서 굳이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았다.세수를 마친 뒤에는 주예린을 깨우러 갔다.그러고 난 뒤, 계단을 내려오다 마침 주민혁과 마주쳤다.그는 서재에서 막 나온 듯 보였고 꼴을 보아하니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했다.주예린이 아빠를 보자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빠, 안녕하세요.”주민혁은 스치듯 한 시선으로 최수빈을 바라봤다.“같이 아침 먹어. 내가 직접 애 어린이집 데려다줄게.”웬일로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주예린의 눈빛이 반짝이며 은근한 기대를 내비쳤지만 끝내 입을 열진 않았다.“괜찮아요.”최수빈은 담담히 말했다.“제가 직접 데려다줄 거예요.”그녀는 주예린의 손을 잡고 도자기 꽃병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주민혁도 더는 막지 않았다.잠시 뒤, 주시후가 내려왔다.최수빈과 주예린이 이미 떠난 걸 보고 식탁에도 자기가 원하는 아침이 없자 입일 삐죽 내밀었다.“분명히 오늘 아침 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안 해줬잖아? 너무해...”주민혁은 고개를 들어 차갑게 쏘아붙였다.“너 누구한테 그런 거 배웠어?”주시후는 입술을 깨물었다.손에 쥔 젓가락까지 부들부들 힘이 들어갔다.예전에 주민혁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38화

    그러나 그 뒤로 그 공예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었다.문 여는 소리가 나자, 주시후가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보았다.“같이 해요. 이 보석들은 아빠랑 외국에서 골라온 거예요. 다 만들면 올해 어버이날에 엄마한테 선물할 거예요.”“아빠도 이게 엄마한테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최수빈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박하린에게 줄 선물이었구나.’그녀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이 시점부터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촘촘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그러니 결국 이 공예품이 자취를 감춘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전생의 자신이 너무도 둔했을 뿐이었다.“치워. 잘 시간이야.”주시후도 피곤했는지 하품을 했다.“오늘 밤은 같이 자요. 나랑 같이 안 잔 지 너무 오래됐잖아요.”솔직히 그는 최수빈이 그리웠다.그러나 최수빈은 담담했다.“먼저 자.”그러자 아이가 침대에 오르며 말했다.“꼭 와야 해요.”최수빈은 대꾸하지 않고 방 불을 껐다....주시후의 방을 나서보니 휴대폰에 메시지가 여러 통 와 있었다.송미연이었다.[오늘 옆 도시 매장에서 새 가방이 들어왔다길래 잠깐 들렀는데 거기서 박하린이랑 주민혁을 봤어.][두 사람 아주 알콩달콩하더라. 주민혁은 정말 그 여자한테 진심인 것 같아. 늘 곁에서 챙겨주고.]최수빈은 메시지를 읽으며 입꼬리를 씩 비틀었다.‘출장이라더니 결국 데이트였나.’그녀는 담담히 중얼거렸다.[맘대로 하라 그래.]...그날 한재준에게 다녀온 뒤, 최수빈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와 멈출 수 없었다.노트북을 품에 안고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마지막 입력을 마치고 노트북을 덮은 그녀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짐을 정리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끝내고 난 뒤, 그녀는 타월을 두르고 머리를 닦으며 걸어 나왔다.안방 대신 곧장 손님방으로 향했다.그곳은 이제 사실상 박하린과 주민혁의 안방이었기 때문이다.머리를 말리려다 보니 드라이기가 안방 화장대 위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