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금붕어
탁—

발치에 폭신한 무언가 떨어지는 순간, 최수빈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니 푸른 크림이 덕지덕지 발린 케이크가 보였다.

“엄마, 엄마가 만들어준 생일 케이크 싫다니까요!”

주시후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못생기고 맛도 없다고요. 제 말 못 알아듣겠어요?”

‘이건...’

최수빈은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다시...? 내가 정말 돌아온 거야?’

그녀는 1년 전 주시후의 생일 파티 때로 돌아왔다.

주시후는 여전히 투덜거렸다.

“저는 하린 이모가 만들어준 케이크를 먹을래요!”

“엄마, 예린이는 엄마가 해준 케이크가 맛있어요. 시후가 안 먹으면 예린이 혼자 먹을게요.”

딸의 앳된 목소리를 다시 듣는 순간, 최수빈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차오른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최수빈은 쭈그리고 앉아 딸의 작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그제야 자신이 1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번 생에는 절대 딸이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게 할 것이다.

주예린은 주시후를 바라보았다.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엄마가 앞으로는 네게 케이크를 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무섭지 않아?”

“먹으려면 너 혼자 먹어. 난 그딴 거 싫어.”

주시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한 뒤 박하린의 손을 잡았다.

“난 하린 이모가 내 엄마가 되게 할 거야. 하린 이모는 나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승마랑 암벽등반도 같이 해줬어. 하지만 엄마는 기마술이 뭔지도 몰라. 정말 창피해. 그리고 아빠도 하린 이모를 좋아하고 나도 하린 이모를 좋아해!”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가죽 재킷을 입은 박하린은 당당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주 친한 친구처럼 왼손으로 주민혁의 어깨를 감싸면서 다른 손으로는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아빠의 아내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나랑 네 아빠는 생사를 함께한 적이 있는 친구야. 그리고 시후야, 이모가 말했잖아.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이제 이모 말을 안 듣는 거야?”

주시후는 입을 비죽이면서 박하린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최수빈이 준 생일 선물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지만 엄마는 저한테 이렇게 값싼 만년필을 생일 선물로 준걸요. 심지어 장난감은 안 사줬어요. 반대로 하린 이모는 제게 직접 만든 비행기 모형을 선물로 줬어요. 심지어 그건 진짜 날 수도 있잖아요. 엄마가 준 생일 선물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요!”

주민혁이 그랬다. 앞으로 박하린은 비행기를 설계할 거라고, 그리고 앞으로 박하린이 설계한 비행기에 탈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이다. 너무 멋졌다.

반대로 최수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최수빈은 자신이 키운 아이가 박하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주시후는 박하린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박하린과 가까이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시후가 박하린이 자신의 친모라는 걸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주민혁의 환심을 사려고 주시후를 친아들처럼 여겼다.

그리고 모두가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주예린과 함께 그런 수모를 견딜 생각이 없었다.

최수빈은 바닥에 떨어진 만년필을 주었다. 엷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린 씨는 아이들과 정말 잘 놀아주네요. 그러면 앞으로 시후와 주민혁 씨는 하린 씨에게 부탁할게요.”

박하린은 당황했다. 그녀는 최수빈이 그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최수빈은 화를 내지도, 그녀와 싸우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굴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았다.

최수빈은 그저 한없이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박하린은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 오빠, 내 말 때문에 언니가 오해한 건 아닐까? 난 아무 말도 안 할게.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

주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많으면서 왜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주민혁은 티가 나게 박하린을 감싸고 들었다. 그는 최수빈이 자신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최수빈은 주민혁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한결같이 매정하고 쌀쌀맞았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티 나게 박하린의 편을 들어주며 최수빈에게 망신을 주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최수빈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번 생의 최수빈은 지난 생처럼 딸이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게 해주려고 수모를 견디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생일 파티에 끝까지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는데 지난 생처럼 똑같이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건 주예린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었다.

최수빈은 무심하게 시선을 옮긴 뒤 딸의 손을 잡았다.

“예린아, 가자. 엄마랑 같이 생일 파티 하러.”

이번 생에 최수빈은 주예린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거나 괴롭힘당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주예린은 주민혁을 힐끗 보더니 결국 엄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직원이 그들을 막았다.

“대표님께서 주시후 도련님의 생일 파티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수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자신을 막아선 직원을 바라보았다.

주민혁이 주시후를 얼마나 끔찍이 여겼으면 다들 주시후가 주민혁의 친아들이고 주예린은 사생아라고 여겼다.

주시후의 생일에 주민혁은 다른 사람들이 파티장을 먼저 떠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주민혁은 오늘이 주예린의 생일날이기도 하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과연 기억할까?

주예린을 낳을 때 최수빈은 난산으로 주예린과 함께 저세상으로 갈 뻔했는데 당시 주민혁은 박하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박하린에게 다른 가족이 없어서 자신이 챙겨줘야 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댔고 박하린은 아이를 낳자마자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해외 연수를 떠났다.

금융공학과 항공우주공학 석사 복수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박하린에게 수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박하린은 그중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는지 은산시의 항공기 연구원인 511 연구원의 항공기 설계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511 연구원은 채용 기준이 상당히 엄격했기에 주민혁은 박하린이 511 연구원에 들어갈 수 있게끔 힘을 썼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그러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주민혁에게만 신경을 썼기에 박하린의 커리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최수빈은 한심하게도 5년간 박하린을 대신하여 아이를 키웠고, 아이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조강지처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멍청했다.

최수빈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주 대표님의 명령이 있다고 해서 제 자유를 제한하면 되죠.”

예전에 최수빈은 주민혁을 깊이 사랑했기에 기꺼이 주민혁의 아내로 살았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주민혁 곁의 별 볼 일 없는 비서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원래 업계로 돌아가 딸을 데리고 멋지게 살 것이다.

주민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그의 기운 또한 차가워졌다.

최수빈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아마 주민혁도 의아할 것이다. 늘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던 순종적인 아내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그의 말을 거역하니 말이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정상이었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늘 당연하다는 듯이 희생을 감수하는 아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내 최수빈은 결혼반지를 빼서 바닥에 내팽개쳤고 결혼반지는 매끄러운 바닥에서 몇 번 튀어 올랐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주민혁 씨, 우리 이혼해요. 시후는 당신이 키우고 예린이는 내가 키울게요. 그리고 이혼 합의서는 내일 아침 당신 사무실로 보낼게요.”

주시후와 박하린이 그렇게 좋다면 이번 생에는 세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인생에서 빠져줄 것이다.

최수빈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을 벌이자 주민혁은 난감해졌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최수빈을 응시했다.

“최수빈, 언제까지 이렇게 심술부릴 거야? 예린이는 아직 어려. 이렇게 사소한 일로 이혼한다는 게 말이 돼?”

최수빈을 사랑하지 않는 주민혁에게 있어 최수빈의 모든 행동은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최수빈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딸과 함께 매정한 주민혁의 언행에 상처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양아들인 주시후를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주민혁과 주시후 둘 다 버릴 것이다.

“네.”

최수빈은 싸늘한 눈빛으로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비켜요.”

상황을 파악한 경호원은 당황스러워하며 길을 내주었다. 그는 더 이상 최수빈을 막지 않았다.

최수빈이 주예린의 손을 잡고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본 주민혁은 안색이 매우 나빴다.

“언니 혹시 우리 사이를 오해한 건 아닐까?”

박하린이 말했다.

“내가 해명할게. 오늘 일 쉽게 생각하지 마. 여자는 화가 나면 정말 가차 없어지니까.”

박하린은 그렇게 말하더니 초조한 얼굴로 최수빈을 붙잡으려고 했다.

“해명할 필요 없어.”

주민혁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최수빈이 나랑 이혼할 리가 없으니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010화

    “사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다른 뜻은 전혀 없었고 그냥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라고....”초조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최수빈의 마음에도 옅은 온기가 번졌다.육강민은 선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 마음에 그녀가 응답해 줄 수는 없었다.최수빈은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강민 씨,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 퇴사는 강민 씨와 아무 상관 없어요. 은산시로 돌아가서 예린이를 돌보면서 일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덧붙였다.“강민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성품이 곧고 따뜻하고 일에도 성실하죠. 분명 저보다 더 잘 맞는 사람을 만나서 자기만의 행복을 찾게 될 거예요.”육강민은 보고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 제가 경솔했네요. 제 생각을 수빈 씨에게 억지로 주입하려 했어요. 은산시에서도 모든 일이 잘 풀리길 바랍니다. 예린이도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고요.”“고마워요.”최수빈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프로젝트 마무리하는 동안에는 아직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해요. 정리하면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바로 상의드릴게요.”“네.”육강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실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조금 느린 걸음이었다.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최수빈은 마음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누군가의 호의를 거절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래 아픈 것보다는 짧게 아픈 편이 낫다. 괜한 희망을 남기느니, 지금 분명히 선을 긋는 게 서로를 위한 선택이었다.이후 최수빈은 프로젝트 마무리에 모든 힘을 쏟았다.매일 늦게까지 남아 데이터를 정리하고 인수인계 절차를 세세하게 정리해 각 단계의 주의 사항을 빠짐없이 적어 내려갔다.육강민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으나 일에서는 변함없이 그녀를 도왔다. 두 사람의 호흡은 여전히 잘 맞았지만, 예전의 잡담은 사라지고 말과 태도에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009화

    “예린이 쪽에 혹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면 집에 있는 이모님한테 부탁해서 조금 더 자주 오게 할 수 있어. 아니면 미연 씨 불러서 같이 있어도 돼.”마음이 따뜻해진 최수빈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예린이는 워낙 얌전해서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다만... 선배를 조금 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할 뿐이에요.”“나한테 그런 말 할 필요 없어.”육민성이 웃으며 말했다.“일단 퇴사 절차부터 잘 정리해. 혹시 문제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고.”...이틀 뒤, 최수빈은 항공우주 연구원 진호성의 사무실을 찾았다.문을 열자 진호성은 기술 보고서를 보고 있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곧바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수빈 씨, 왔구나. 루머도 잘 정리됐다니 다행이야.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앉아. 차 한 잔 마시자고. 비서한테 바로 가져오라고 할게.”최수빈은 소파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원장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제 퇴사 신청 건 때문에 왔어요.”진호성이 들고 있던 찻잔이 허공에서 멈췄다. 얼굴에 떠 있던 미소도 그대로 굳어 버렸다.“퇴사라고?”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농담하는 거지? 연구원이 수빈 씨한테 어떻게 했는데. 무인기 프로젝트도 이제 막 성과가 나올 단계야. 지금 떠나는 건 너무 아깝잖아.”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진지하게 말했다.“수빈 씨는 내가 은산시에서 반년이나 공들여 데려온 인재야. 수빈 씨의 프로젝트를 위해 우리 연구원이 투입한 자원도 적지 않다는 거, 수빈 씨도 잘 알잖아. 지금이야말로 수빈 씨의 커리어가 가장 치고 올라갈 시기야. 그런데 갑자기 왜 퇴사를 생각하게 된 거야? 혹시 전에 있었던 그 루머 때문이야? 연구원에서 이미 사과했고 곧 공식 표창도 있을 거야.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그의 다급한 표정을 보자 최수빈은 마음 한켠이 무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008화

    최수빈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거실로 나왔다. 그때 휴대폰 화면에 육민성이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루머는 완전히 정리됐어. 이제 마음 놓고 쉬어.]그녀는 짧게 ‘네’라고 답한 뒤 휴대폰을 내려놓고 베란다로 향했다.이윽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이 이렇게까지 차분해진 건 오랜만이었다....주예린이 깊이 잠든 뒤, 최수빈은 거실 소파에 앉아 항공우주 연구원과 천공 연구원의 자료를 번갈아 펼쳐 들었다.항공우주 연구원에 몸담은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최수빈의 노력과 꿈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무인기 프로젝트도 곧 중요한 단계에 접어들 예정이었다. 조금만 더 버틴다면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은 분명 컸다.하지만 연구 현장의 생활 리듬을 떠올리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끝이 보이지 않는 야근, 잦은 출장,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기술적 문제들...얼마 전 주예린이 고열로 아팠을 때도 프로젝트가 급하다는 이유로 송미연에게 아이를 맡겨 병원에 보내야 했다.학교 학부모 모임 역시 여러 번 놓쳤다.이대로 항공우주 연구원에 남는다면 앞으로 딸과 함께하는 시간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일과 가정에서 균형을 이루는 건 사실상 그녀에게 불가능한 과제처럼 느껴졌다.최수빈은 휴대폰을 들어 오늘 주예린이 그린 그림을 다시 꺼내 보았다.종이 위에는 포니테일을 한 여자와 작은 여자아이가 손을 맞잡고 있었고 그 옆에는 ‘엄마와 나’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아이의 서툰 글씨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가가 천천히 젖어 들었다.그녀는 뛰어난 항공 엔지니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딸의 곁에서 함께 성장해 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그때 휴대폰 화면이 다시 켜졌다. 육민성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천공의 우주항공 부품 연구 실험실이 거의 완공됐어. 네가 돌아온다면 실험실장 자리는 계속 비워둘 생각이야. 근무 시간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고 예린이랑 충분히 시간 보낼 수 있도록 보장할게.]메시지를 읽는 사이, 그녀의 마음속 저울은 점점 한쪽으로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007화

    공식 입장문이 공개된 날 아침, 최수빈은 송미연의 전화 소리에 잠에서 깼다.휴대폰 너머로 송미연의 들뜬 목소리가 쏟아졌다.“지금 당장 인터넷 봐! 육 대표님 진짜 대단하다. 하룻밤 사이에 루머를 전부 잠재워버렸어!”최수빈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켰다.소셜 플랫폼 실시간 검색어 상단에는 ‘최수빈 루머 해명’, ‘주시후 친자 확인’ 등과 같은 키워드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육민성 팀이 배포한 장문의 해명 자료는 주요 언론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고 글에는 친자 감정 결과, 당시 주민혁의 공식 입장문, 변호사 명의의 내용증명까지 첨부돼 있었다. 증거가 촘촘히 맞물려 있어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댓글 창에서는 그동안 악성 댓글을 달던 이들이 앞다퉈 사과를 남겼고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다. 심지어 일부 네티즌들은 임하은의 과거 행동을 파헤치며 그녀가 오히려 루머를 퍼뜨린 장본인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그때 육민성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주요 언론사들에 추가 해명 기사까지 연계해 놨어. 마케팅 계정 쪽도 다 정리됐고 더 이상 이상한 말 나올 일은 없을 거야. 예린이랑 마음 편히 있어.]최수빈은 짧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그렇게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어보니 항공우주 연구원 노조위원장과 진호성의 비서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과일과 영양제를 든 채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수빈 씨, 많이 힘드셨죠.”“연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빈 씨를 믿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서 잠시 휴가를 권했던 거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노조위원장은 위로문 한 통을 건네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내부 회의를 거쳐 공식 입장을 낼 예정입니다. 근거 없는 소문을 바로잡고 그동안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공로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치하할 거예요. 혹시라도 이 일로 다시 불편을 겪게 되면 연구원이 앞장서서 책임지고 보호하겠습니다.”최수빈은 위로문을 받아 들며 가슴에 남아 있던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는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006화

    “아무래도 그 사람들이 노린 게 그냥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수준은 아닌 것 같아요.”육민성은 테이블 위에 있던 미지근한 물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눈빛에는 한층 무거운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네 말이 맞아. 저쪽은 여론을 이용해서 네 명성을 망가뜨리려는 거야. 원래 소수만 알고 있던 일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밖으로 퍼졌다는 건, 상대가 네 과거를 꽤 잘 알고 있고 어떻게 해야 가장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야. 항공우주 연구원 소속 엔지니어라는 건 개인 평판에 대한 요구 수준이 아주 높아. 도덕적인 흠결이 사실로 굳어지면 지금 하는 일도, 앞으로의 진로도 전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잠시 말을 멈춘 그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혹시 이게 임하은 개인의 판단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해봤어? 너는 항공우주 연구원에서도 직급이 높고 나이도 어린 데다, 맡고 있는 건 핵심 무인기 프로젝트잖아. 딱 커리어가 치고 올라가는 시기지. 이 분야에서는 누군가의 밥그릇을 건드렸거나 길을 막아섰다면 표적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야.”최수빈은 물컵을 쥔 손을 잠시 멈칫했다.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육민성의 말이 그녀를 번쩍 일깨워줬기 때문이다.그동안 그녀는 임하은과 주민혁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었고 정작 직장 내부의 경쟁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항공우주 연구원은 인재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녀가 짧은 시간 안에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까지 올라온 만큼 시기와 질투를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그러니 이번 소동의 이면에는, 어쩌면 훨씬 더 복잡한 조직 내 이해관계와 힘겨루기가 얽혀 있을지도 몰랐다.“정말로 일이 버겁고 마음이 힘들면 천공으로 돌아와.”육민성은 침묵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천공은 지금 우주항공 부품 연구개발 쪽을 본격적으로 키우고 있어. 너처럼 경험 있는 핵심 인력이 딱 필요한 상황이야. 네 역량이면 와서 바로 새 프로젝트를 맡아도 되고, 조건이나 성장 가능성도 항공우주 연구원에 뒤지지 않을 거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005화

    최수빈의 남자친구가 다름 아닌 육민성일 줄, 임하은은 정말로 상상도 못 했었다.주민혁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손등의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만큼이었다.그는 육민성이 자연스럽게 최수빈의 어깨를 감싸는 모습을, 그리고 그 품 안에서 한결 편안해 보이는 최수빈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가슴 어딘가가 날카롭게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그동안 그는 최수빈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아무 말이나 꺼낸 줄로만 알았다.설마 정말 새로운 사람이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상대가 다른 이였다면 그는 얼마든지 거짓이라고 넘길 수 있었다.하지만 육민성만은 달랐다.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상대였다.“육... 대표님?”임하은은 동요하는 속마음을 숨기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육민성은 차 안의 두 사람을 담담하게 바라봤다.표정은 평온했지만 말투에는 분명히 거리를 두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여자친구 데리러 왔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그 한마디는 임하은의 뺨을 정면으로 후려치는 것처럼 느껴졌다.곧 그녀가 입을 열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주민혁이 눈빛으로 제지했다.주민혁은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끝내 내뱉은 말은 단 한마디였다.“...조심해서 가.”이 말을 끝으로 주민혁은 시동을 걸었고 차는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임하은은 뒤돌아 육민성이 우산을 받쳐 들고 최수빈을 보호하며조금 떨어진 검은색 차량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민혁 씨, 봤어요? 수빈 씨 남자친구가... 육 대표님이었어요.”주민혁은 앞만 바라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굴빛은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그의 머릿속은 완전히 뒤엉켜 있었다. 최수빈과 육민성이 나란히 서 있던 장면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 떠올랐다.너무도 선명해서 도저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한편, 육민성은 최수빈을 보호하듯 차에 태우고 휴지를 꺼내 그녀의 얼굴에 묻은 빗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다음에 이런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