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금붕어
탁—

발치에 폭신한 무언가 떨어지는 순간, 최수빈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니 푸른 크림이 덕지덕지 발린 케이크가 보였다.

“엄마, 엄마가 만들어준 생일 케이크 싫다니까요!”

주시후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못생기고 맛도 없다고요. 제 말 못 알아듣겠어요?”

‘이건...’

최수빈은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다시...? 내가 정말 돌아온 거야?’

그녀는 1년 전 주시후의 생일 파티 때로 돌아왔다.

주시후는 여전히 투덜거렸다.

“저는 하린 이모가 만들어준 케이크를 먹을래요!”

“엄마, 예린이는 엄마가 해준 케이크가 맛있어요. 시후가 안 먹으면 예린이 혼자 먹을게요.”

딸의 앳된 목소리를 다시 듣는 순간, 최수빈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차오른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최수빈은 쭈그리고 앉아 딸의 작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그제야 자신이 1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번 생에는 절대 딸이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게 할 것이다.

주예린은 주시후를 바라보았다.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엄마가 앞으로는 네게 케이크를 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무섭지 않아?”

“먹으려면 너 혼자 먹어. 난 그딴 거 싫어.”

주시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한 뒤 박하린의 손을 잡았다.

“난 하린 이모가 내 엄마가 되게 할 거야. 하린 이모는 나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승마랑 암벽등반도 같이 해줬어. 하지만 엄마는 기마술이 뭔지도 몰라. 정말 창피해. 그리고 아빠도 하린 이모를 좋아하고 나도 하린 이모를 좋아해!”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가죽 재킷을 입은 박하린은 당당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주 친한 친구처럼 왼손으로 주민혁의 어깨를 감싸면서 다른 손으로는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아빠의 아내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나랑 네 아빠는 생사를 함께한 적이 있는 친구야. 그리고 시후야, 이모가 말했잖아.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이제 이모 말을 안 듣는 거야?”

주시후는 입을 비죽이면서 박하린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최수빈이 준 생일 선물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지만 엄마는 저한테 이렇게 값싼 만년필을 생일 선물로 준걸요. 심지어 장난감은 안 사줬어요. 반대로 하린 이모는 제게 직접 만든 비행기 모형을 선물로 줬어요. 심지어 그건 진짜 날 수도 있잖아요. 엄마가 준 생일 선물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요!”

주민혁이 그랬다. 앞으로 박하린은 비행기를 설계할 거라고, 그리고 앞으로 박하린이 설계한 비행기에 탈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이다. 너무 멋졌다.

반대로 최수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최수빈은 자신이 키운 아이가 박하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주시후는 박하린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박하린과 가까이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시후가 박하린이 자신의 친모라는 걸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주민혁의 환심을 사려고 주시후를 친아들처럼 여겼다.

그리고 모두가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주예린과 함께 그런 수모를 견딜 생각이 없었다.

최수빈은 바닥에 떨어진 만년필을 주었다. 엷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린 씨는 아이들과 정말 잘 놀아주네요. 그러면 앞으로 시후와 주민혁 씨는 하린 씨에게 부탁할게요.”

박하린은 당황했다. 그녀는 최수빈이 그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최수빈은 화를 내지도, 그녀와 싸우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굴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았다.

최수빈은 그저 한없이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박하린은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 오빠, 내 말 때문에 언니가 오해한 건 아닐까? 난 아무 말도 안 할게.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

주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많으면서 왜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주민혁은 티가 나게 박하린을 감싸고 들었다. 그는 최수빈이 자신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최수빈은 주민혁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한결같이 매정하고 쌀쌀맞았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티 나게 박하린의 편을 들어주며 최수빈에게 망신을 주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최수빈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번 생의 최수빈은 지난 생처럼 딸이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게 해주려고 수모를 견디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생일 파티에 끝까지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는데 지난 생처럼 똑같이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건 주예린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었다.

최수빈은 무심하게 시선을 옮긴 뒤 딸의 손을 잡았다.

“예린아, 가자. 엄마랑 같이 생일 파티 하러.”

이번 생에 최수빈은 주예린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거나 괴롭힘당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주예린은 주민혁을 힐끗 보더니 결국 엄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직원이 그들을 막았다.

“대표님께서 주시후 도련님의 생일 파티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수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자신을 막아선 직원을 바라보았다.

주민혁이 주시후를 얼마나 끔찍이 여겼으면 다들 주시후가 주민혁의 친아들이고 주예린은 사생아라고 여겼다.

주시후의 생일에 주민혁은 다른 사람들이 파티장을 먼저 떠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주민혁은 오늘이 주예린의 생일날이기도 하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과연 기억할까?

주예린을 낳을 때 최수빈은 난산으로 주예린과 함께 저세상으로 갈 뻔했는데 당시 주민혁은 박하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박하린에게 다른 가족이 없어서 자신이 챙겨줘야 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댔고 박하린은 아이를 낳자마자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해외 연수를 떠났다.

금융공학과 항공우주공학 석사 복수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박하린에게 수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박하린은 그중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는지 은산시의 항공기 연구원인 511 연구원의 항공기 설계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511 연구원은 채용 기준이 상당히 엄격했기에 주민혁은 박하린이 511 연구원에 들어갈 수 있게끔 힘을 썼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그러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주민혁에게만 신경을 썼기에 박하린의 커리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최수빈은 한심하게도 5년간 박하린을 대신하여 아이를 키웠고, 아이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조강지처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멍청했다.

최수빈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주 대표님의 명령이 있다고 해서 제 자유를 제한하면 되죠.”

예전에 최수빈은 주민혁을 깊이 사랑했기에 기꺼이 주민혁의 아내로 살았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주민혁 곁의 별 볼 일 없는 비서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원래 업계로 돌아가 딸을 데리고 멋지게 살 것이다.

주민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그의 기운 또한 차가워졌다.

최수빈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아마 주민혁도 의아할 것이다. 늘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던 순종적인 아내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그의 말을 거역하니 말이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정상이었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늘 당연하다는 듯이 희생을 감수하는 아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내 최수빈은 결혼반지를 빼서 바닥에 내팽개쳤고 결혼반지는 매끄러운 바닥에서 몇 번 튀어 올랐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주민혁 씨, 우리 이혼해요. 시후는 당신이 키우고 예린이는 내가 키울게요. 그리고 이혼 합의서는 내일 아침 당신 사무실로 보낼게요.”

주시후와 박하린이 그렇게 좋다면 이번 생에는 세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인생에서 빠져줄 것이다.

최수빈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을 벌이자 주민혁은 난감해졌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최수빈을 응시했다.

“최수빈, 언제까지 이렇게 심술부릴 거야? 예린이는 아직 어려. 이렇게 사소한 일로 이혼한다는 게 말이 돼?”

최수빈을 사랑하지 않는 주민혁에게 있어 최수빈의 모든 행동은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최수빈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딸과 함께 매정한 주민혁의 언행에 상처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양아들인 주시후를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주민혁과 주시후 둘 다 버릴 것이다.

“네.”

최수빈은 싸늘한 눈빛으로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비켜요.”

상황을 파악한 경호원은 당황스러워하며 길을 내주었다. 그는 더 이상 최수빈을 막지 않았다.

최수빈이 주예린의 손을 잡고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본 주민혁은 안색이 매우 나빴다.

“언니 혹시 우리 사이를 오해한 건 아닐까?”

박하린이 말했다.

“내가 해명할게. 오늘 일 쉽게 생각하지 마. 여자는 화가 나면 정말 가차 없어지니까.”

박하린은 그렇게 말하더니 초조한 얼굴로 최수빈을 붙잡으려고 했다.

“해명할 필요 없어.”

주민혁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최수빈이 나랑 이혼할 리가 없으니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604화

    이제 주시후는 스스로도 자신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모두가 그를 작은 도련님이라 부르며 떠받들었으니 말이다.누구에게든 우쭐했고 그런 우쭐함은 어느새 타인을 깔보게 만들었으며 자신은 항상 남들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얘들아, 그만 싸우자. 아이들이 뭘 그렇게 심각하게...”누군가 말리려 했지만 주예린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오빠가 내 케이크 망가뜨렸잖아. 사과해야지.”“네 케이크?”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건 우리 집 거야.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거였지, 네가 먹을 자격은 없었거든? 지금은 내가 허락할 테니까 가서 케이크 다시 가져와도 돼.”눈앞에 있는 오빠가 너무 낯설게 느껴져 주예린은 굳은 표정으로 주시후를 바라봤다.예전에는 절대 이러지 않았는데 지금의 주시후는 점점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이해심도 없고 다정함도 사라진 채 점점 더 못되게 변해가고 있었다.그때, 두 아이가 다투는 걸 본 최수빈이 걸음을 재촉했다.“무슨 일이야?”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시후는 최수빈을 거칠게 밀쳤다.“참견하지 마요! 또 끼어들면 둘 다 우리 집에서 내쫓을 거예요!”최근 들어 주시후의 성격이 점점 더 폭력적이고 거칠어지고 있어 최수빈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약육강식의 세상, 아직 가치관이 자리 잡지 않은 아이들은 가르침 없이는 악함을 그대로 드러내기 마련이었다.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하다고 했던가.“주시후.”그 순간, 등 뒤에서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주시후는 화들짝 놀아 돌아보더니 곧장 주민혁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아빠! 저 사람들이 나 괴롭혔어요!”아이는 주예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울먹이며 말했다.“아까 쟤가 내 케이크 망가뜨리고 내가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내가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면서 나보고 당장 나가라고 했단 말이에요!”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입술을 삐죽이며 온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했다.주민혁은 고개를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603화

    “무슨 바람이요?”그때, 주선웅이 반대쪽에서 천천히 걸어오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무슨 이야기 중이야?”최수빈은 순간 당황했다. 지금 이 타이밍에 그가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주민혁은 그가 다가오는 걸 보며 싸늘하게 시선을 보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주선웅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바라보며 약간 웃는 얼굴로 말했다.“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저렇게 가버린 거야? 화나게 한 거야?”“화요?”최수빈은 주민혁이 그 정도 말에 화를 낼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주선웅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방금 내가 결혼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혹시 둘이 재혼이라도 하려고 하는 거야?”최수빈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일 없어요.”“그럼 다행이네.”주선웅은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민혁이 능력 있고 재능도 있지만 남편으로서는 결코 좋은 상대가 아니야. 민혁이의 형으로서 너희 결혼에 대해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도 내 책임이라고 할 수 있지. 그때는 민혁이가 아내한테 그렇게 냉정한 사람일 줄 몰랐거든.”“그 박하린이라는 여자랑 엮여 있다는 말이 들리던데... 지금은 박하린 일도 일절 나서지 않더라.”주선웅은 이미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그 이면에 숨은 주민혁의 의도는 최수빈조차도 알 수 없었다.“시간을 내서 따로 이야기해볼 생각이야. 좋아하는 여자를 그렇게 대하면 안 되지.”그는 최수빈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일단 가자. 할머니 생신 연회 곧 시작할 거야.”주선웅 앞에 선 최수빈은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그에게는 익숙함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건 낯섦이었다.익숙함은 과거, 어린 시절 주선웅에게 의지하던 기억에 머물러 있었고 지금의 그는 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깊어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사람이 성장하면 감정이란 것도 더 이상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그렇기에 최수빈도 가끔은 주선웅을 잘 모르겠다고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602화

    함께 들어가는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마치 어떤 관계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사람들 사이에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삽시간에 번져나가기 시작했다.어떤 이들은 최수빈이 이혼한 뒤 다시 주씨 가문에 들어가려 한다며 수군거렸고 어떤 이들은 그녀가 주씨 가문 차기 후계자에 대한 내막을 미리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인물을 자신의 남편으로 만들려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주씨 가문이 곧 세대교체를 앞두고 있기에 그녀가 주선웅에게 다시 시집가려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소문들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황당하게 변해갔다.그리고 그 소문은 결국 주민혁의 귀에도 들어갔다.“어이없네.”단 네 글자였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의 위압감은 그 네 글자만으로도 주변을 조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한편 최수빈이 생신 선물을 건네자 원금영은 웃음을 멈추지 못할 정도로 기뻐했다.“비록 너랑 민혁이는 이혼했지만 난 여전히 널 내 친손녀처럼 여겨. 주씨 가문은 여전히 네 집이야. 그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알고 있어요, 할머니.”최수빈은 딸과 함께 원금영 곁에 머무르며 잠시 담소를 나눴다.곧이어 또 다른 하객들이 인사를 드리기 위해 몰려들었고 그녀는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주예린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저택의 정원에서 주예린은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어릴 때부터 아이는 이 정원을 무척 좋아했고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주예린에게 특별한 일이었다.그런 주예린을 바라보던 주시후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굳어 있었다.한편, 최수빈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던 길에 화장실 문 앞에서 주민혁과 마주쳤다.그를 보자마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또 따라온 거예요?”이것은 과거 주민혁의 주변 사람들이 늘 그녀에게 하던 말이었다.어딜 가든 꼭 마주쳐 도대체 누가 누구를 따라다니는 건지 모르겠을 정도였다.주민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해?”뜬금없는 말에 최수빈은 고개를 살짝 젖히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601화

    아직도 배후의 공범을 찾지 못했다는 생각에 최수빈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하지만 이런 일은 조급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다음 날.오늘은 원금영의 생신 연회가 열리는 날이라 주선웅이 저택에서 차를 끌고 직접 내려와 최수빈을 데리러 왔다.그가 다가오는 걸 본 최수빈은 곧장 물었다.“오빠, 몸은 다 나은 거예요? 어떻게 직접 운전을... 병원은 언제 퇴원했어요?”주선웅은 두 손을 핸들에 걸친 채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질문이 한두 개가 아니네. 어느 것부터 대답해야 할까?”말을 마치고 안전벨트를 푼 그는 차에서 내려 주예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예린아, 큰아빠 기억나?”주예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큰아빠 안녕하세요.”눈앞의 남자가 아빠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였을까, 주예린은 주선웅을 유독 잘 따랐고 그 애착은 육민성보다도 더했다.주선웅은 주예린을 만날 때마다 이것저것 학용품부터 생활용품, 장난감까지 빠짐없이 챙겨줬다.“이런 건 다 집에 있고 예린이 부족한 거 없어요. 그러니까 이럴 필요 없어요, 오빠.”“아냐. 내가 예린이 곁에 없던 시간이 몇 년인데 이제 그만큼 더 채워줘야지.”그는 웃으며 물었다.“다 챙겼지?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자.”최수빈은 주선웅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오늘 원금영의 생신 연회날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꽤 많았다.대부분 주씨 가문과 오래 인연을 맺어온 집안 사람들이거나 사업상 왕래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주기훈의 지인들도 몇몇 자리하고 있었다.주선웅은 주예린과 최수빈을 데리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고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최수빈이 주민혁과 이혼했다는 건 이미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런 그녀가 이혼 후에도 여전히 주민혁의 형과 함께, 그것도 딸까지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온 모습은 누가 봐도 입에 오르내릴 만한 상황이었다.최수빈은 자신이 어떤 시선에 노출될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600화

    그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바짝 굳더니 최수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좋게 얘기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건 너야. 처음부터 정식으로 대화를 나눴다면 내가 이런 방식으로 협박하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내가 네 약점 쥐고 있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네 엄마는 이혼을 원하지만 나는 싫어. 그래서 이렇게 몇 년을 질질 끌어온 거고.”“하지만 지금 네가 조금만 손을 써준다면, 기꺼이 이혼에 응할게. 그 재산들도 다 포기할 수 있어.”최수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진식을 노려보았다.“조윤미 씨랑 박하린이 아빠한테 뭘 줬어요? 도대체 뭘 받았기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죠?”최진식은 이제는 이혼 이야기까지 꺼내며 거래를 하려 들었다.평생 욕심내던 재산도 포기할 수 있다며 박하린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단 말투였다.최진식은 분명히 최수빈의 약점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엄마가 수년째 이혼을 원했지만 그는 절대 응하지 않았고 그들의 오랜 결혼 생활은 수많은 재산과 문제들로 얽혀 있었다.만약 이혼이 진행된다면 분명 집안 재산의 절반은 최진식의 손에 들어갈 터였다.그런데도 그는 이혼을 거부해왔었는데 결국 지금은 이혼을 협박의 카드로 쥐고 나온 것이었다.겁날 게 없으니 저토록 당당하고 무례한 태도도 가능한 것이었다.최수빈은 이를 악문 채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계속 말 없으면 난 네가 동의한 거로 간주할 거야. 공식적인 문서로 계약서도 쓸 수 있어. 조건은 단 하나, 하린이만 무사히 나온다면, 나도 이혼할게.”최수빈은 조용히 말했다.“박하린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네요.”그 말에 최진식의 눈썹이 꿈틀했다.최수빈의 표정이 지나치게 평온하고 담담했는데 그 침착함이 오히려 최진식을 흔들었다.“하린이는 너보다 훨씬 효도하고 훨씬 내 딸로서 잘 어울려. 게다가 넌 이미 성공했잖아. 굳이 하린이까지 밟고 올라가야 하겠니?”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자신의 친아버지가, 박하린을 위해선 뭐든지 하겠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599화

    주예린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입을 열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엄마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엄마는 이 남자를 무척 싫어했다.그래서 주예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것이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저항이자 단호한 거절이었다.최수빈은 그런 딸을 자신의 등 뒤로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더니 말투도 표정도 차갑게 했다.“더 이상 볼일 없으면 돌아가세요. 저랑 제 딸 방해하지 마시고요.”최진식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눈앞의 이 여자는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애초에 자기 딸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그래도 내가 네 아빠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비록 우리 사이에 정이 깊지 않다 해도 네가 지금 이만큼 성공한 건 내 유전자의 덕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잖아?”그는 또박또박,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세상 그 어떤 것도 혈연은 못 끊어. 아무리 네가 씻어내려 해도 네 몸에는 내 피가 흐르고 있어. 내가 어떤 인간이든 넌 결국 내 딸이야.”최수빈은 눈빛을 가라앉혔다.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복받쳤다.그는 평소에는 찾아오지도 않았고 오직 무슨 목적이 있을 때만 이렇게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것도 아마 이유는 뻔했다.“나는 지금도 하린이를 내 딸처럼 생각해. 어떻게 보면 너희 둘은 자매나 다름없는 사이잖아?”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수빈은 뒷목에 싸한 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불쾌감이었다.“너는 네 동생이 감옥에 들어가는 걸 그냥 두고 보겠단 말이야? 하린이는 너처럼 미래가 창창한 애야. 밝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고!”최진식은 눈썹을 찌푸렸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애한테 네가 가진 자원과 인맥이 있었다면 넌 상대도 안 됐을 거다. 너는 눈 뜨고 과학계의 천재가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최수빈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