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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작가: 금붕어
탁—

발치에 폭신한 무언가 떨어지는 순간, 최수빈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니 푸른 크림이 덕지덕지 발린 케이크가 보였다.

“엄마, 엄마가 만들어준 생일 케이크 싫다니까요!”

주시후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못생기고 맛도 없다고요. 제 말 못 알아듣겠어요?”

‘이건...’

최수빈은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다시...? 내가 정말 돌아온 거야?’

그녀는 1년 전 주시후의 생일 파티 때로 돌아왔다.

주시후는 여전히 투덜거렸다.

“저는 하린 이모가 만들어준 케이크를 먹을래요!”

“엄마, 예린이는 엄마가 해준 케이크가 맛있어요. 시후가 안 먹으면 예린이 혼자 먹을게요.”

딸의 앳된 목소리를 다시 듣는 순간, 최수빈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차오른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최수빈은 쭈그리고 앉아 딸의 작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그제야 자신이 1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번 생에는 절대 딸이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게 할 것이다.

주예린은 주시후를 바라보았다.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엄마가 앞으로는 네게 케이크를 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무섭지 않아?”

“먹으려면 너 혼자 먹어. 난 그딴 거 싫어.”

주시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한 뒤 박하린의 손을 잡았다.

“난 하린 이모가 내 엄마가 되게 할 거야. 하린 이모는 나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승마랑 암벽등반도 같이 해줬어. 하지만 엄마는 기마술이 뭔지도 몰라. 정말 창피해. 그리고 아빠도 하린 이모를 좋아하고 나도 하린 이모를 좋아해!”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가죽 재킷을 입은 박하린은 당당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주 친한 친구처럼 왼손으로 주민혁의 어깨를 감싸면서 다른 손으로는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아빠의 아내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나랑 네 아빠는 생사를 함께한 적이 있는 친구야. 그리고 시후야, 이모가 말했잖아.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이제 이모 말을 안 듣는 거야?”

주시후는 입을 비죽이면서 박하린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최수빈이 준 생일 선물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지만 엄마는 저한테 이렇게 값싼 만년필을 생일 선물로 준걸요. 심지어 장난감은 안 사줬어요. 반대로 하린 이모는 제게 직접 만든 비행기 모형을 선물로 줬어요. 심지어 그건 진짜 날 수도 있잖아요. 엄마가 준 생일 선물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요!”

주민혁이 그랬다. 앞으로 박하린은 비행기를 설계할 거라고, 그리고 앞으로 박하린이 설계한 비행기에 탈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이다. 너무 멋졌다.

반대로 최수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최수빈은 자신이 키운 아이가 박하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주시후는 박하린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박하린과 가까이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시후가 박하린이 자신의 친모라는 걸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주민혁의 환심을 사려고 주시후를 친아들처럼 여겼다.

그리고 모두가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주예린과 함께 그런 수모를 견딜 생각이 없었다.

최수빈은 바닥에 떨어진 만년필을 주었다. 엷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린 씨는 아이들과 정말 잘 놀아주네요. 그러면 앞으로 시후와 주민혁 씨는 하린 씨에게 부탁할게요.”

박하린은 당황했다. 그녀는 최수빈이 그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최수빈은 화를 내지도, 그녀와 싸우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굴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았다.

최수빈은 그저 한없이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박하린은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 오빠, 내 말 때문에 언니가 오해한 건 아닐까? 난 아무 말도 안 할게.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

주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많으면서 왜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주민혁은 티가 나게 박하린을 감싸고 들었다. 그는 최수빈이 자신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최수빈은 주민혁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한결같이 매정하고 쌀쌀맞았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티 나게 박하린의 편을 들어주며 최수빈에게 망신을 주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최수빈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번 생의 최수빈은 지난 생처럼 딸이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게 해주려고 수모를 견디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생일 파티에 끝까지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는데 지난 생처럼 똑같이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건 주예린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었다.

최수빈은 무심하게 시선을 옮긴 뒤 딸의 손을 잡았다.

“예린아, 가자. 엄마랑 같이 생일 파티 하러.”

이번 생에 최수빈은 주예린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거나 괴롭힘당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주예린은 주민혁을 힐끗 보더니 결국 엄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직원이 그들을 막았다.

“대표님께서 주시후 도련님의 생일 파티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수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자신을 막아선 직원을 바라보았다.

주민혁이 주시후를 얼마나 끔찍이 여겼으면 다들 주시후가 주민혁의 친아들이고 주예린은 사생아라고 여겼다.

주시후의 생일에 주민혁은 다른 사람들이 파티장을 먼저 떠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주민혁은 오늘이 주예린의 생일날이기도 하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과연 기억할까?

주예린을 낳을 때 최수빈은 난산으로 주예린과 함께 저세상으로 갈 뻔했는데 당시 주민혁은 박하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박하린에게 다른 가족이 없어서 자신이 챙겨줘야 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댔고 박하린은 아이를 낳자마자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해외 연수를 떠났다.

금융공학과 항공우주공학 석사 복수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박하린에게 수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박하린은 그중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는지 은산시의 항공기 연구원인 511 연구원의 항공기 설계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511 연구원은 채용 기준이 상당히 엄격했기에 주민혁은 박하린이 511 연구원에 들어갈 수 있게끔 힘을 썼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그러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주민혁에게만 신경을 썼기에 박하린의 커리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최수빈은 한심하게도 5년간 박하린을 대신하여 아이를 키웠고, 아이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조강지처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멍청했다.

최수빈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주 대표님의 명령이 있다고 해서 제 자유를 제한하면 되죠.”

예전에 최수빈은 주민혁을 깊이 사랑했기에 기꺼이 주민혁의 아내로 살았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주민혁 곁의 별 볼 일 없는 비서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원래 업계로 돌아가 딸을 데리고 멋지게 살 것이다.

주민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그의 기운 또한 차가워졌다.

최수빈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아마 주민혁도 의아할 것이다. 늘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던 순종적인 아내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그의 말을 거역하니 말이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정상이었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늘 당연하다는 듯이 희생을 감수하는 아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내 최수빈은 결혼반지를 빼서 바닥에 내팽개쳤고 결혼반지는 매끄러운 바닥에서 몇 번 튀어 올랐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주민혁 씨, 우리 이혼해요. 시후는 당신이 키우고 예린이는 내가 키울게요. 그리고 이혼 합의서는 내일 아침 당신 사무실로 보낼게요.”

주시후와 박하린이 그렇게 좋다면 이번 생에는 세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인생에서 빠져줄 것이다.

최수빈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을 벌이자 주민혁은 난감해졌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최수빈을 응시했다.

“최수빈, 언제까지 이렇게 심술부릴 거야? 예린이는 아직 어려. 이렇게 사소한 일로 이혼한다는 게 말이 돼?”

최수빈을 사랑하지 않는 주민혁에게 있어 최수빈의 모든 행동은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최수빈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딸과 함께 매정한 주민혁의 언행에 상처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양아들인 주시후를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주민혁과 주시후 둘 다 버릴 것이다.

“네.”

최수빈은 싸늘한 눈빛으로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비켜요.”

상황을 파악한 경호원은 당황스러워하며 길을 내주었다. 그는 더 이상 최수빈을 막지 않았다.

최수빈이 주예린의 손을 잡고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본 주민혁은 안색이 매우 나빴다.

“언니 혹시 우리 사이를 오해한 건 아닐까?”

박하린이 말했다.

“내가 해명할게. 오늘 일 쉽게 생각하지 마. 여자는 화가 나면 정말 가차 없어지니까.”

박하린은 그렇게 말하더니 초조한 얼굴로 최수빈을 붙잡으려고 했다.

“해명할 필요 없어.”

주민혁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최수빈이 나랑 이혼할 리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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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3화

    주민혁이 떠난 뒤, 최수빈도 곧장 복도를 벗어났다.육민성은 이미 남이준과 협력 논의를 약속해둔 상태였다.“어디 갔었어?”육민성이 그녀가 바깥에서 들어오는 걸 보고 물었다.“좀 바람 쐬고 왔어요.”“그럼 우리 먼저 가자.”육민성이 말했다.“남 대표님은 일에서는 전문성이 높으니 더 깊게 얘기할 수 있을 거야.”발표회장 안에는 귀빈용 접견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성안에서 내놓은 신소재는 활용도가 높아 협력이 성사되면 앞으로 많은 일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그들은 접견실로 향했다.직접 차를 우려내고 있던 남이준은 그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육 대표님, 수빈 씨. 앉으시죠.”자리에 앉자마자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천공연구원이 정부 입찰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남이준은 차를 따라 권하며 말을 꺼냈다.“네.”육민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최수빈을 소개했다.“이번 프로젝트 책임자는 최수빈 씨입니다.”남이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차를 한 모금 마시며 최수빈을 살펴보더니 차분히 잔을 내려놓았다.“육 대표님, 혹시 눈이 가려진 건 아닙니까?”그는 사실 육민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새로운 세대의 선두주자, 업계의 이끄는 인물, 하지만 그가 최수빈의 외모에 끌린 듯 행동하는 건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자신이 아는 최수빈은 집에서 아이만 돌보던 학부 출신의 여인일 뿐이었다.그런 사람이 어떻게 천공연구원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일을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단순히 그녀를 곁에 두고 사적인 자리에 동행시키는 정도라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방금 그녀를 ‘책임자’라고 소개한 건, 무책임하고 경솔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육민성은 시선을 내려 차가 거의 넘칠 듯 찰랑거리는 걸 바라보았다.차가 가득 차면 곧 손님을 내보낸다는 뜻이었다.남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스치듯 최수빈을 바라봤다.“육 대표님은 대단한 분이라고 존경했었는데... 결국 미인계에 무너져 철저히 타락하는군요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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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0화

    주시후는 애초에 그녀를 엄마로 여기지 않았으니 당연히 전화 따위 걸어올 리 없었다.최수빈은 육민성과 함께 성안 체크인 구역으로 들어갔다.서명대에 이름을 적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그 중앙에는 주민혁이 서 있었다.곧고 고고한 기세로 눈에 띄었고 그의 곁에는 박하린이 있었다.주위에는 수행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성안 측에서는 그를 위해 따로 인사를 나갈 정도였다.주민혁의 시선이 스치듯 그녀를 훑고 지나갔지만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딴 곳으로 옮겨졌다.최수빈도 태연히 시선을 거뒀다.그러나 바로 이어진 광경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멈췄다.박하린의 손목에 걸린 보석 팔찌, 여러 가지 보석을 꿰어 만든 그것은 분명 최수빈이 전날 주시후와 함께 정성껏 만든 팔찌였다.그녀가 직접 갈고 다듬은 조각들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렸다.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것이 고스란히 박하린의 손목 위에 있었다.그녀에게 건네는 선물이라니 실소가 나왔다.남편도, 아들도 진심은 한 번도 준 적 없었다.그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고 필요 없으면 밀쳐내는 가정부처럼만 대했을 뿐이었다.최수빈의 감정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하린 씨, 그 팔찌 특이하네요.”누군가 눈치 빠르게 말을 꺼냈다.보석 하나하나는 값이 꽤 나가 보였지만 디자인은 낯설고 투박했다.박하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아들이 오늘 아침, 어버이날 선물로 준 거예요.”“아? 벌써 아들이 있어요? 결혼하셨나요?”사람들이 놀라움에 웅성거렸다.그녀가 결혼했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박하린은 예의 바른 미소만 남기며 말을 아꼈다.“사적인 건 밝히지 않는 게 좋겠네요.”바로 그때, 주시후가 어린이집에서 빌린 전화로 전화를 걸어왔다.“엄마, 어버이날 축하해요.”박하린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주민혁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민혁 오빠, 오빠도 아들한테 한마디 해줘.”그 말에 모든 이들의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39화

    결혼 전, 한 번의 뜻밖의 사고로 그와 같은 침대에 누운 적이 있었다.그 일 때문에 지금껏 주민혁은 늘 그녀의 유혹과 계략이라 믿어 왔다.그래서 방금처럼 어색한 장면이 겹치자 최수빈은 그가 또다시 자신을 오해할까 두려웠다.하지만 남자는 무표정했다.그녀를 향해 곧바로 눈길을 주지도 어떤 오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그는 그저 옷방으로 가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갈 뿐이었다.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돌아왔는지, 왜 굳이 집에서 자려 하는지조차 설명할 의향도 없어 보였다.최수빈 역시 궁금해하지 않았다.그가 샤워하러 들어가자, 곧장 손님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다음 날 아침.아직 잠이 제대로 들지 못한 듯했는데 눈을 떠보니 날이 벌써 훤히 밝아 있었다.장수미가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사모님, 아침 드세요.”최수빈은 이 집에서 굳이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았다.세수를 마친 뒤에는 주예린을 깨우러 갔다.그러고 난 뒤, 계단을 내려오다 마침 주민혁과 마주쳤다.그는 서재에서 막 나온 듯 보였고 꼴을 보아하니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했다.주예린이 아빠를 보자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빠, 안녕하세요.”주민혁은 스치듯 한 시선으로 최수빈을 바라봤다.“같이 아침 먹어. 내가 직접 애 어린이집 데려다줄게.”웬일로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주예린의 눈빛이 반짝이며 은근한 기대를 내비쳤지만 끝내 입을 열진 않았다.“괜찮아요.”최수빈은 담담히 말했다.“제가 직접 데려다줄 거예요.”그녀는 주예린의 손을 잡고 도자기 꽃병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주민혁도 더는 막지 않았다.잠시 뒤, 주시후가 내려왔다.최수빈과 주예린이 이미 떠난 걸 보고 식탁에도 자기가 원하는 아침이 없자 입일 삐죽 내밀었다.“분명히 오늘 아침 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안 해줬잖아? 너무해...”주민혁은 고개를 들어 차갑게 쏘아붙였다.“너 누구한테 그런 거 배웠어?”주시후는 입술을 깨물었다.손에 쥔 젓가락까지 부들부들 힘이 들어갔다.예전에 주민혁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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