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깊은 밤, 아이가 아빠의 사랑을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가슴속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었다.최수빈은 주예린에게 이미 여러 번 냉정하게 말했다.앞으로는 주민혁과 아무런 관계도, 인연도 없을 거라고.하지만 어린 마음은 그렇게 쉽게 정리를 할 수가 없었다.그 사람은 분명히 아빠였다.그런데 왜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 걸까?=어릴 적부터 뿌리내린 교육이 있었다.만약 지금 와서 주민혁이 아빠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주예린은 분명 상처받을 것이다.겉으로는 집에서 나와 사는 걸 담담히 받아들이는 듯 보였지만 정작 아빠와 새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 아파했다.아마도 주예린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아빠는 늘 오빠만 사랑하고 자기와 엄마는 사랑하지 않는다고.어린아이의 집착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이 모든 게, 최수빈에게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결국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주예린의 마음을 바꿀 수 없으니 다만 옆에서 최선을 다해 이끌어줄 뿐이었다.그녀는 일어나 조심스레 아이의 방에서 나와 인터넷으로 아동 심리 상담을 검색했다.하지만 늦은 밤이라 대부분은 이미 업무가 끝난 상태였다.최수빈은 베란다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어둠을 바라봤다.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술로 인한 두통은 파도처럼 간헐적으로 밀려왔다.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다음 날 아침.최수빈은 몸을 추스르고 주예린을 어린이집 데려다주었다.그런데 정문 앞에서 뜻밖에도 주민혁과 마주쳤다.편한 옷차림을 보니 바닷가 휴가에서 막 돌아온 듯했다.그는 좀처럼 아들을 직접 등교시키는 일이 없었다.주시후는 최수빈과 주예린을 보자마자 냉소를 흘리며 가방을 메고 성큼 걸어가 버렸다.주예린은 아빠를 보자 잠시 멍해졌다.시선을 고정한 채, 떨리는 눈으로 주민혁을 바라봤다.그도 딸아이의 눈빛을 알아챈 듯 고개를 숙여 물었다.“아침은 먹었니?”말투는 느긋하고 담담했다.주예린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긴장
“응.”육민성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최수빈은 숙취해소제 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눈빛이 잠시 멍해졌다.머릿속은 뒤죽박죽, 애써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그... 협상은 잘 됐어요? 상대 쪽 반응은 어땠어요?”“거의 마무리된 것 같아. 내일 다시 찾아가 보려고.”육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늘따라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최수빈은 온몸이 불편했다.팔다리가 납처럼 무겁고 머리도 무언가가 짓누르듯 아팠다.육민성이 대리운전을 불러 그녀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저녁 8시 반이었다.주예린은 엄마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와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곧장 다가와 아이가 물었다.“엄마...”주예린이 소파 옆에 서서 말했다.“예린이가 목욕물 받아줄게요.”최수빈은 팔을 짚고 앉아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주예린은 곧장 욕실로 달려가 뜨거운 물을 틀고 옷방에서 잠옷도 챙겨왔다.그러고는 엄마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내가 씻겨줄까요?”예전에도 최수빈은 종종 술자리에 나가곤 했었다.때문에 주예린에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다만 그때는 주민혁의 술자리를 대신 소화해야 했고 집을 나온 뒤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그런데 오늘 다시 이렇게 된 것이다.주예린은 또래보다 훨씬 일찍 철이 들었다.최수빈은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가, 엄마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자.”주예린은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그럼... 뭐 필요하면 꼭 불러줘요.”“응.”최수빈은 부드럽게 웃어주었다.“어서 가서 자.”졸음을 참지 못하던 주예린은 눈을 비비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친 뒤 조금 정신이 돌아온 최수빈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거실 탁자 위에 주예린의 휴대폰과 학습기가 놓여 있었다.그녀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다가가 정리했다.그런데 무심코 주예린의 휴대폰을 켜자 화면에 SNS 피드가 떴
박하린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어떻게 안 오겠어요? 이런 기회라면 달려와야 정상이지. 어쨌든 신세계 그룹은 업계의 에이스인데 기술 교류만 해도 그쪽들한테는 큰 공부가 될 거잖아요.”그녀는 곧 덧붙였다.“그동안 업계 행사라고는 다 쫓아다니던 사람들이잖아요. 결국 배우고 싶어서 그런 거였죠. 이렇게 좋은 자리가 마련됐는데 안 오면 좀 웃긴 거 아닌가요?”“급한 일이 생겼대.”주민혁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박하린과 진승우의 얼굴에는 동시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안 온다고요?”진승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도대체 뭔데 안 와요? 잘난 척은. 내기 계약 맺고 기분 상해서 일부러 안 오는 거잖아요.”박하린은 곁눈질로 주민혁을 보았다.남자의 표정은 차갑고 담담했다. 마치 오든 말든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하지만 주민혁이 직접 전화를 걸어 초대한 자리를 거절한다니, 그건 너무 무례했다.“아마 진짜 바쁜 걸 거예요. 작은 회사가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맡으니 돌아가서도 정신없겠죠. 내기 계약까지 맺었는데 불안해서 어디 밥 먹을 여유가 있겠어요?”박하린은 술잔에 술을 채우며 가볍게 웃었다.“우리가 지면야 별일 아니지만 그쪽이 지면? 쌓아온 모든 게 물거품이죠. 수년간의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되는 거니까.”생각해 보면 그랬다.‘능력도 없으면서 무리하게 판을 벌였으니 불안할 수밖에...’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박하린은 술잔을 들어 주민혁 앞에 건넸다.“그래도 전처잖아. 이번만큼은 좀 봐주는 게 어때?”남자는 고개를 숙여 술잔을 내려다볼 뿐,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진승우가 거들었다.“뭘 봐줘요? 애초에 그 여자가 하린 씨 자리를 뺏지...”그렇다면 지금 ‘주민혁의 부인’이라는 자리는 누구 것이 됐을까.그만큼 얄팍하고 계산적인 여자였다. 박하린만이 이렇게 대범하게 그녀를 두둔할 수 있었다.진승우는 속으로 오히려 최수빈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그런 여자가 업계에서 성공할 수 있을
최수빈의 속내를 육민성은 잘 알고 있었다.조금 전 정부 프로젝트 주도권을 두고 다투다 결국 내기 계약까지 체결했으니 양쪽이 그리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최수빈은 대답 대신 려운을 바라보며 말했다.“몇 시죠? 그때 맞춰 가겠습니다.”“저녁 여섯 시입니다.”려운이 떠나자 최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육민성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낮게 말했다.“막 내기 계약을 체결해서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이제 와서 밥을 사겠다니, 이게 무슨 꼴이야? 마치 프로젝트가 자기들 거라도 되는 양, 통 크게 굴어주는 척하는 거잖아. 먹든 안 먹든 이미 기분만 상했어. 주민혁, 진짜 하는 짓마다 도가 지나쳐.”그는 씁쓸히 덧붙였다.“부부의 인연은 하루만 이어져도 깊은 정이 남는다는데, 그 사람이 널 대하는 거 보면...”그에게는 눈곱만큼의 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가차 없었다.최수빈은 그 말에 헛웃음만 나왔다.주민혁 눈에 자신은 아내가 아닌, 그냥 함께 잠만 자는 가사도우미에 불과했을 것이다.그녀는 무심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어차피 언젠간 마주해야 할 사람들이잖아요.”이번 정부 프로젝트가 끝나면 천공은 한 단계 도약할 것이고 상장 이후에는 원하는 협력사를 직접 고를 수 있게 된다.물론 이번 프로젝트는 대규모라 천공 혼자 감당할 수는 없었다.입찰 서류만 해도 무게가 십수 킬로그램이었다.“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육민성이 말했다.최수빈은 그를 바라보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가 려운 비서님한테 간다고 했던가요?”육민성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깨달았다.지금 한창 바쁜 와중에 려운의 태도는 명백했다.그녀가 가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려운도 그냥 그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었다.그래서 일부러 던진 대답일 뿐이었다. 려운도 결국은 시킨 대로 움직이는 사람일 뿐이니.“언제 이렇게 얄궂게 굴 줄 알았어?”최수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썹을 올렸다.“이게 얄궂은 건가요?”그렇게 두 사람은 차를 몰아 천공으로 돌아왔다.사무실로 돌아오자마
남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조금 전의 대화를 얼마나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박하린이 순간 멍하니 굳더니 낮게 불렀다.“민혁 오빠.”주민혁의 검은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왜 그래?”그의 반응은 무심했다. 아까 전의 대화를 못 들은 듯했다.설령 들었다 해도 무슨 문제가 될까? 둘 사이의 대화는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었다.박하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수빈 씨가 이제 천공을 등에 업고 성격이 많이 세졌어. 우리가 쉽게 건드릴 상대는 아닌 것 같아.”주민혁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입꼬리를 옆으로 살짝 올렸다.“굳이 건드릴 일이 있어?”박하린은 잠시 숨이 막힌 듯 멈칫했다.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그렇다, 최수빈이 지금 아무리 커 봐야 아직 그들의 상대가 될 급은 아니었다.“가자.”주민혁이 말했다.박하린은 살짝 기뻐졌다.‘단순히 화장실에 들른 게 아니라 날 데리러 온 건가?’둘은 함께 밖으로 걸어 나왔다.박하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천공의 그 프로젝트는 나도 자신 있어. 그런데 이번에 저렇게 내기 계약을 맺어버리면...”일부러 말끝을 흐렸다.“저쪽에 맡기는 건 너무 모험적이지 않을까?”그 프로젝트를 자신이 주도했다면 안정적으로 큰 수익을 내고 1년 안에 넥스트 테크도 회복시킬 수 있었다.주민혁은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며 담담히 말했다.“내기 계약에 사인했다는 건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거겠지. 뭐가 불안해?”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깃 바라봤다.“그냥 배당금이나 받을 생각해.”박하린은 그 말을 듣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괜히 헤세 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수빈 씨는 실력도 없는데 육 대표님을 등에 업고 있을 뿐이잖아.”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협력은 서로 이익을 보는 거지.”그렇다, 협력이라면 어느 쪽이 주도하든 배당금이 돌아온다.그저 주도권을 놓쳤을 뿐, 지금의 박하린은 차라리 논문에 더 집중
최수빈이 입을 열었다.“처음에는 넥스트 테크 그룹과 체결하는 내기 계약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넥스트 테크가 지면 천공은 넥스트 테크의 지분 50%를 내놔야 합니다. 반대로 조건을 맞추기 위해 천공이 지면 신세계 그룹에 50%를 주는 것뿐 아니라 넥스트 테크의 지분 50%까지 넘겨야 하죠.”박하린과 진승우, 심지어 김재환까지 눈을 크게 떴다.‘저런 배짱도 있었나?’예로부터 지금까지 회사를 통째로 내놓고 판을 벌인 사람은 없었다.하지만 최수빈은 잘 알고 있었다.만약 50% 지분을 잃게 되면 그건 곧 천공 전체를 잃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머지 50%까지 걸어서 더 큰 이익을 노려보는 게 낫다고.‘판을 벌일 거라면 끝까지 가는 수밖에.’주민혁이 눈썹을 살짝 내리며 담담히 물었다.“확실합니까?”“주 대표님, 혹시 겁나서 못 하시는 겁니까?”최수빈은 결단의 순간에 두려움이 없었다.주민혁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변호사에게 보충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계약이 마무리되자 회의도 끝났다.김재환의 표정은 그야말로 구경거리였다.정부 도시에서 오랜 세월 일을 해왔지만 이렇게 대담한 내기 계약을 맺는 기업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이걸 초심자의 무모함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어리석음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각자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고 특히 박하린과 진승우는 더더욱 그랬다.잠시 뒤, 최수빈이 화장실로 향했고 박하린도 걸음을 옮겨 따라왔다.“배짱 하나는 대단하네요.”박하린이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육 대표님이 혹시 안 일러줬나요? 지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수빈 씨한테는 뒤봐줄 사람 하나도 없다는 거 알아요?”최수빈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담담하게 말했다.“충고 고마워요. 그런데 본인 일이나 잘 챙기세요.”박하린의 붉은 입술이 비틀리며 비웃음이 섞인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정말 최수빈이 우스워 보였다.이런 내기 계약은 아무리 자기 실력과 프로젝트에 자신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