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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작가: 금붕어
저녁이 되고 생일 파티가 끝났다.

주시후는 차 안에서 기분이 좋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오늘 저녁에는 엄마가 없어서 그의 일에 간섭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일 파티 때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그를 예뻐해 주는 박하린도 있었다. 주시후는 박하린이 최수빈보다 훨씬 좋았다.

별장 앞에 차가 멈춰 서자 주시후는 입을 비죽이며 미련 가득한 얼굴로 주민혁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주시후는 매번 놀러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기가 싫었다. 집에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하린은 주시후에게 엄마의 모든 성과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주시후는 박하린의 말을 잘 들으면 다음번에 더 많은 흥미로운 것들을 놀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주민혁도 주시후에게 최수빈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번에 박하린과 함께 놀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주시후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아빠, 저 내일도 하린 이모랑 같이 놀고 싶어요. 하린 이모한테 출국하지 말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앞으로 엄마도 제 일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요.”

주민혁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하린이는 이제 곧 해외로 떠날 거야. 그리고 다음에 돌아오면 떠나지 않고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주민혁과 최수빈은 결혼한 지 6년이 되었다. 그동안 최수빈은 주민혁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고 그의 말이라면 늘 고분고분 따랐다. 그러나 최수빈이 뭔가 요구하는 게 있다면 주민혁은 대부분 거절했다.

반대로 박하린이 뭔가를 요구한다면 최대한 다 들어주었다.

주시후 또한 주민혁과 박하린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기에 주민혁의 말을 듣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주시후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 저 씻겨주세요. 저 우유 목욕할 거예요!”

오늘 박하린은 주시후의 몸에서 우유 향이 난다면서, 주민혁의 어릴 때 향기와 비슷하다면서 칭찬했다.

이때 가정부 장수미가 그들을 맞이하며 말했다.

“도련님, 오늘 밤에는 사모님이 집에 안 계셔서 제가 대신 씻겨드려도 될까요?”

주민혁은 무심하게 물었다.

“수빈이 어디 갔어요?”

“모르겠어요. 오늘 사모님과 아가씨 모두 돌아오시지 않았어요.”

장수미는 서류봉투를 꺼내며 말했다.

“사모님께서 대표님께 이걸 전달하라고 하셨어요.”

시선을 내려뜨린 주민혁은 서류봉투를 건네받더니 그것을 테이블 위에 던져두고 주시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머니한테 씻겨달라고 해.”

주시후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엄마랑 예린이 모두 집에 없으니까 앞으로 장난감 방은 제 거네요!”

주민혁은 싱긋 웃으면서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다 네 거야.”

“주예린이 선물로 준 블록이랑 장난감은 앞으로 가지고 놀지 않을래요. 재미없어요. 저는 하린 이모가 선물로 준 장난감들을 전부 장난감 방으로 가져갈 거예요. 그리고 주예린이 놀지 못하게 할 거예요!”

주예린이 박하린을 좋아하지 않고 최수빈만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촌스러운 최수빈이 뭐가 좋단 말인가?

“아빠, 엄마 집에 없는데 하린 이모한테 저랑 같이 자달라고 해주면 안 돼요?”

“안 돼.”

주민혁이 말했다.

“하린 이모는 아주 바빠.”

주시후는 입을 비죽거리다가 씻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장수미는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본인의 짐과 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떠나신 것 같았어요. 친정으로 돌아가신 것 같아요...”

주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최씨 가문은 최수빈에게 별로 좋은 곳이 아니었기에 최수빈은 주씨 가문을 제외하면 갈 곳이 없었다.

최수빈은 그동안 늘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주시후가 박하린과 만나는 것을 반대한 적도 없었다.

오늘은 잠시 기분이 상해서 투정을 부린 것뿐이니 시간이 흘러 화가 풀린다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주민혁은 소파에 앉아 업무 메일을 하나 처리한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 씻으려다가 조금 전 테이블 위에 던져두었던 서류봉투에 시선이 닿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서류봉투를 열어 보았고 그 순간 이혼 합의서라는 다섯 글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주민혁은 덤덤한 얼굴로 조항들을 살펴보았다.

최수빈이 원하는 건 10억과 주예린의 양육권뿐이었다.

주민혁은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면서 서류를 쓰레기통 안에 넣었다.

최수빈은 화가 풀리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

최수빈은 짐을 챙겨 주예린을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 그녀는 당분간 딸과 함께 호텔에서 머무를 생각이었다.

“예린아, 엄마랑 같이 밖에서 지내는 거 괜찮아?”

주예린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최수빈은 쭈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우리 예린이, 아빠랑 오빠랑 떨어져 있는 게 싫은 거지?”

주예린은 주민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기를, 오빠와 함께 놀 수 있기를 바랐다.

예전에 최수빈은 주시후와 주민혁이 식사하러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들을 기다렸다. 그러다 음식이 다 식은 뒤에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아 주예린을 부르면 주예린은 몇 젓가락만 먹고는 배부르다고 했다.

주예린은 배가 고프면서도 늘 주민혁과 주시후를 기다리려고 했다.

그게 습관이 되다 보니 한창 클 때인데도 불구하고 주예린은 점점 야위어 가면서 건강도 나빠졌다.

최수빈은 처음엔 주예린이 어려서 밥을 많이 먹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뒤늦게 주예린이 사실은 주민혁, 주시후와 함께 밥을 먹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주예린은 시선을 들고 맑은 눈으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엄마, 아저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엄마도 좋아하지 않는 거겠죠...”

주예린의 말을 듣는 순간 최수빈은 마음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괴로워졌다.

“예린아, 너는 정말 훌륭한 아이야. 아저씨가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아저씨가 사람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야.”

최수빈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예린아, 엄마랑 같이 있어도 괜찮겠어?”

“네...”

주예린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아저씨랑 오빠가 보고 싶지만 저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엄마라는 걸 저는 알아요. 저는 엄마가 가는 곳에 따라갈래요.”

최수빈은 눈시울을 붉히며 딸을 끌어안았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딸을 지켜줄 것이다.

별장으로 돌아간 최수빈은 본인과 주예린의 옷을 몇 벌 챙겼다.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민혁은 정기적으로 매달 1억씩 돈을 입금해 주었고 최수빈은 그 돈으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을 꾸렸다.

그러면서 주민혁은 늘 몰래 주시후에게 용돈을 챙겨주었고,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면 항상 주시후를 위해 비싼 옷과 액세사리를 사줬다. 주시후의 친아빠는 죽었고 주시후의 엄마는 주시후를 버렸다고, 주시후는 사실 아주 불쌍한 아이라면서 말이다.

지난 생에 주민혁을 죽도록 사랑했던 최수빈은 그의 요구라면 모두 들어주었고 그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주민혁과 아이에게만 신경을 쓰다 보니 대부분의 돈도 그들을 돌보고 가정을 꾸리는 데 쓰였고, 평소 재벌가 사람이 집에 찾아오거나 할 때도 그녀가 다 챙겨야 했다.

그래서 그녀의 수중에는 돈이 얼마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련하고 한심한 삶이었다.

최수빈은 주예린을 씻기고 달래서 재운 뒤 씻으러 가려고 했는데 그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장수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우유 목욕을 하고 싶으시다는데 비율은 어떻게 해야 하고 물 온도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될까요? 제가 해봤는데 도련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네요.”

“박하린 씨에게 전화해서 시후를 씻겨주라고 하면 돼요.”

장수미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그녀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장수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그녀에게 다시 한번 연락했다.

“저 주민혁 씨랑 이혼해요. 시후는 주민혁 씨 아들이고 저랑은 아무 상관 없으니까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최수빈은 차분하게 말한 뒤 다시 전화를 끊었다.

“...”

주민혁은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장수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고 해요? 언제 돌아온대요?”

“사모님께서...”

장수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어갔다.

“사모님께서 본인은 곧 대표님과 이혼할 거라서 박하린 씨를 불러 도련님을 씻겨주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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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3화

    주민혁이 떠난 뒤, 최수빈도 곧장 복도를 벗어났다.육민성은 이미 남이준과 협력 논의를 약속해둔 상태였다.“어디 갔었어?”육민성이 그녀가 바깥에서 들어오는 걸 보고 물었다.“좀 바람 쐬고 왔어요.”“그럼 우리 먼저 가자.”육민성이 말했다.“남 대표님은 일에서는 전문성이 높으니 더 깊게 얘기할 수 있을 거야.”발표회장 안에는 귀빈용 접견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성안에서 내놓은 신소재는 활용도가 높아 협력이 성사되면 앞으로 많은 일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그들은 접견실로 향했다.직접 차를 우려내고 있던 남이준은 그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육 대표님, 수빈 씨. 앉으시죠.”자리에 앉자마자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천공연구원이 정부 입찰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남이준은 차를 따라 권하며 말을 꺼냈다.“네.”육민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최수빈을 소개했다.“이번 프로젝트 책임자는 최수빈 씨입니다.”남이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차를 한 모금 마시며 최수빈을 살펴보더니 차분히 잔을 내려놓았다.“육 대표님, 혹시 눈이 가려진 건 아닙니까?”그는 사실 육민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새로운 세대의 선두주자, 업계의 이끄는 인물, 하지만 그가 최수빈의 외모에 끌린 듯 행동하는 건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자신이 아는 최수빈은 집에서 아이만 돌보던 학부 출신의 여인일 뿐이었다.그런 사람이 어떻게 천공연구원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일을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단순히 그녀를 곁에 두고 사적인 자리에 동행시키는 정도라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방금 그녀를 ‘책임자’라고 소개한 건, 무책임하고 경솔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육민성은 시선을 내려 차가 거의 넘칠 듯 찰랑거리는 걸 바라보았다.차가 가득 차면 곧 손님을 내보낸다는 뜻이었다.남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스치듯 최수빈을 바라봤다.“육 대표님은 대단한 분이라고 존경했었는데... 결국 미인계에 무너져 철저히 타락하는군요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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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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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40화

    주시후는 애초에 그녀를 엄마로 여기지 않았으니 당연히 전화 따위 걸어올 리 없었다.최수빈은 육민성과 함께 성안 체크인 구역으로 들어갔다.서명대에 이름을 적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그 중앙에는 주민혁이 서 있었다.곧고 고고한 기세로 눈에 띄었고 그의 곁에는 박하린이 있었다.주위에는 수행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성안 측에서는 그를 위해 따로 인사를 나갈 정도였다.주민혁의 시선이 스치듯 그녀를 훑고 지나갔지만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딴 곳으로 옮겨졌다.최수빈도 태연히 시선을 거뒀다.그러나 바로 이어진 광경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멈췄다.박하린의 손목에 걸린 보석 팔찌, 여러 가지 보석을 꿰어 만든 그것은 분명 최수빈이 전날 주시후와 함께 정성껏 만든 팔찌였다.그녀가 직접 갈고 다듬은 조각들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렸다.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것이 고스란히 박하린의 손목 위에 있었다.그녀에게 건네는 선물이라니 실소가 나왔다.남편도, 아들도 진심은 한 번도 준 적 없었다.그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고 필요 없으면 밀쳐내는 가정부처럼만 대했을 뿐이었다.최수빈의 감정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하린 씨, 그 팔찌 특이하네요.”누군가 눈치 빠르게 말을 꺼냈다.보석 하나하나는 값이 꽤 나가 보였지만 디자인은 낯설고 투박했다.박하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아들이 오늘 아침, 어버이날 선물로 준 거예요.”“아? 벌써 아들이 있어요? 결혼하셨나요?”사람들이 놀라움에 웅성거렸다.그녀가 결혼했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박하린은 예의 바른 미소만 남기며 말을 아꼈다.“사적인 건 밝히지 않는 게 좋겠네요.”바로 그때, 주시후가 어린이집에서 빌린 전화로 전화를 걸어왔다.“엄마, 어버이날 축하해요.”박하린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주민혁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민혁 오빠, 오빠도 아들한테 한마디 해줘.”그 말에 모든 이들의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39화

    결혼 전, 한 번의 뜻밖의 사고로 그와 같은 침대에 누운 적이 있었다.그 일 때문에 지금껏 주민혁은 늘 그녀의 유혹과 계략이라 믿어 왔다.그래서 방금처럼 어색한 장면이 겹치자 최수빈은 그가 또다시 자신을 오해할까 두려웠다.하지만 남자는 무표정했다.그녀를 향해 곧바로 눈길을 주지도 어떤 오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그는 그저 옷방으로 가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갈 뿐이었다.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돌아왔는지, 왜 굳이 집에서 자려 하는지조차 설명할 의향도 없어 보였다.최수빈 역시 궁금해하지 않았다.그가 샤워하러 들어가자, 곧장 손님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다음 날 아침.아직 잠이 제대로 들지 못한 듯했는데 눈을 떠보니 날이 벌써 훤히 밝아 있었다.장수미가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사모님, 아침 드세요.”최수빈은 이 집에서 굳이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았다.세수를 마친 뒤에는 주예린을 깨우러 갔다.그러고 난 뒤, 계단을 내려오다 마침 주민혁과 마주쳤다.그는 서재에서 막 나온 듯 보였고 꼴을 보아하니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했다.주예린이 아빠를 보자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빠, 안녕하세요.”주민혁은 스치듯 한 시선으로 최수빈을 바라봤다.“같이 아침 먹어. 내가 직접 애 어린이집 데려다줄게.”웬일로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주예린의 눈빛이 반짝이며 은근한 기대를 내비쳤지만 끝내 입을 열진 않았다.“괜찮아요.”최수빈은 담담히 말했다.“제가 직접 데려다줄 거예요.”그녀는 주예린의 손을 잡고 도자기 꽃병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주민혁도 더는 막지 않았다.잠시 뒤, 주시후가 내려왔다.최수빈과 주예린이 이미 떠난 걸 보고 식탁에도 자기가 원하는 아침이 없자 입일 삐죽 내밀었다.“분명히 오늘 아침 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안 해줬잖아? 너무해...”주민혁은 고개를 들어 차갑게 쏘아붙였다.“너 누구한테 그런 거 배웠어?”주시후는 입술을 깨물었다.손에 쥔 젓가락까지 부들부들 힘이 들어갔다.예전에 주민혁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38화

    그러나 그 뒤로 그 공예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었다.문 여는 소리가 나자, 주시후가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보았다.“같이 해요. 이 보석들은 아빠랑 외국에서 골라온 거예요. 다 만들면 올해 어버이날에 엄마한테 선물할 거예요.”“아빠도 이게 엄마한테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최수빈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박하린에게 줄 선물이었구나.’그녀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이 시점부터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촘촘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그러니 결국 이 공예품이 자취를 감춘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전생의 자신이 너무도 둔했을 뿐이었다.“치워. 잘 시간이야.”주시후도 피곤했는지 하품을 했다.“오늘 밤은 같이 자요. 나랑 같이 안 잔 지 너무 오래됐잖아요.”솔직히 그는 최수빈이 그리웠다.그러나 최수빈은 담담했다.“먼저 자.”그러자 아이가 침대에 오르며 말했다.“꼭 와야 해요.”최수빈은 대꾸하지 않고 방 불을 껐다....주시후의 방을 나서보니 휴대폰에 메시지가 여러 통 와 있었다.송미연이었다.[오늘 옆 도시 매장에서 새 가방이 들어왔다길래 잠깐 들렀는데 거기서 박하린이랑 주민혁을 봤어.][두 사람 아주 알콩달콩하더라. 주민혁은 정말 그 여자한테 진심인 것 같아. 늘 곁에서 챙겨주고.]최수빈은 메시지를 읽으며 입꼬리를 씩 비틀었다.‘출장이라더니 결국 데이트였나.’그녀는 담담히 중얼거렸다.[맘대로 하라 그래.]...그날 한재준에게 다녀온 뒤, 최수빈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와 멈출 수 없었다.노트북을 품에 안고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마지막 입력을 마치고 노트북을 덮은 그녀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짐을 정리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끝내고 난 뒤, 그녀는 타월을 두르고 머리를 닦으며 걸어 나왔다.안방 대신 곧장 손님방으로 향했다.그곳은 이제 사실상 박하린과 주민혁의 안방이었기 때문이다.머리를 말리려다 보니 드라이기가 안방 화장대 위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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