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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청천
안유주가 미소 띤 얼굴로 예전과 다름없이 온화하게 굴자 최민찬의 싸늘하던 표정이 조금 풀렸고 말투 또한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원하는 게 뭐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해줄게.”

최민찬의 말에 안유주는 잠깐 넋이 나갔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최민찬은 처음엔 아주 차갑다가 천천히 다정해졌고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그렇게 안유주는 어느샌가 최민찬을 사랑하게 되었다.

최민찬은 안유주에게 늘 무심한 듯 보였으나 사실 두 사람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적어도 안유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모든 것은 안유주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안유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했다.

그녀는 방 안에서 조금 전 전여훈이 가져다준 이혼합의서를 꺼냈는데 그 위에는 부동산 증여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안유주는 그것을 최민찬에게 건넸다.

“난 내 명의로 된 집을 원해.”

그 말은 진심이었다. 앞으로 이혼하게 되었을 때 교진시에 집 하나 없다면 너무 처량할 것 같았다.

안유주는 그에게 집을 달라고 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능해?”

안유주의 맑은 두 눈동자는 늘 그렇듯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한때 최민찬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자주 넋을 잃곤 했다.

최민찬은 얼마 전 일 때문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기념일에 안유주를 혼자 내버려두고 권지율과 여행하러 가서 열기구를 탔고, 사고가 일어난 뒤 안유주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 안유주는 오랫동안 그 때문에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 보상은 당연히 해줘야 했다.

그래야 그의 마음도 조금은 편했다.

“그래. 그렇게 할게.”

최민찬은 서류를 잘 읽어보지도 않고 사인을 했다.

사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전여훈이 서류를 가져왔을 때까지만 해도 안유주는 최민찬이 이혼합의서에 사인하게 할 좋은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실 서류에는 ‘이혼합의서’라는 다섯 글자가 꽤 크게 적혀 있었다. 최민찬이 조금만 유심히 살펴봤더라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민찬은 제대로 보지 않았고 사인을 마친 뒤에는 안유주를 무시하고 곧장 가사도우미에게 분부했다.

“안에 있는 짐들 다 빼고 지율이 짐을 옮겨 놓으세요.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리고 부족한 것들은 다 채워 넣으세요.”

최민찬은 몸을 돌려 안유주에게서 등을 돌렸고, 권지율은 반짝이는 두 눈을 깜빡이며 자연스럽게 최민찬의 팔에 팔짱을 꼈다.

“작은아빠, 저 가구는 직접 고르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쓰던 거 쓰고 싶지 않아요.”

최민찬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래. 내 카드로 원하는 거 사.”

신난 권지율은 안유주의 앞에서 최민찬의 뺨에 뽀뽀를 하더니 도발하는 듯한 눈빛으로 안유주를 바라보았다.

권지율은 마치 최민찬의 마음속에는 그녀가 없다는 듯한 눈길로 안유주를 바라보았다.

안유주는 덤덤한 얼굴로 무심히 웃어 보였다.

병실 앞에서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권지율은 안유주의 반응이 탐탁지 않았다.

‘왜 아무 반응도 없지? 설마 작은아빠를 굳게 믿는 걸까?’

권지율은 홀로 신경전을 펼쳤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최민찬에게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

“작은아빠, 저 침대까지 안아주면 안 돼요? 저 너무 힘들어요.”

최민찬은 애정 어린 표정으로 권지율의 코를 꼬집더니 고개를 돌려 안유주를 힐끗 보았다.

“지율이는 아직 어리니까 마음에 두지 마.”

그렇게 말하고는 안유주의 반응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권지율을 안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유주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안유주는 최민찬에게 묻고 싶었다. 몇 살쯤 되어야 다 큰 거냐고.

권지율은 이미 스물둘이었으나 최민찬은 여전히 권지율을 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걸 핑계로 부부 사이에만 할 법한 일들을 모조리 했다.

예전에 안유주는 보고도 못 본척하며 그저 권지율이 최민찬에게 너무 의지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단순히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아주 더럽고 추악한 감정들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안유주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손에는 최민찬의 사인이 있는 이혼합의서가 들려 있으니 말이다. 불안하던 마음도 마침내 평온을 되찾았다.

안유주는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이혼합의서를 챙겨 가정법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이혼합의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인 마쳤습니다. 최민찬 씨는 볼일이 있어 직접 올 수가 없어요. 관련 서류는 챙겨왔습니다. 이혼의사확인서 작성해 주시고 1개월의 이혼숙려기간이 지난 뒤 이혼신고 진행하겠습니다.”

안유주가 합의이혼 과정을 정확히 알고 있자 판사는 살짝 당황했다.

“마음을 굳히신 건가요?”

안유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안유주는 확고했다.

그녀는 절차를 다 밟은 뒤 그곳에서 나왔다.

바로 전여훈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으나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확인해 보니 그녀의 딸 최아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최아진은 다급하게 말했다.

“엄마, 지금 어디예요?”

안유주는 순간 불안해졌다. 딸이 그런 말을 할 때면 그녀는 마치 본능처럼 최아진을 걱정했다.

“아진아, 왜 그래? 엄마 지금 일 때문에 좀 바쁜데.”

최아진이 말했다.

“엄마, 빨리 돌아와요! 저 급한 일이 있어요!”

안유주는 그 말을 듣자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 지금 당장 갈게. 할머니 집으로 가면 되는 거지?”

최아진은 몇 번 더 재촉한 뒤 전화를 끊었고 안유주는 당황했다.

1분도 되지 않는 통화 기록을 본 안유주는 마음이 아렸다.

최아진은 조금 큰 뒤로 그녀와 대화하는 시간이 점점 더 줄었다.

그럼에도 안유주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돌아갔다.

최씨 가문 본가.

최아진은 이미 옷을 다 챙겨입고 안유주를 기다리고 있었고 최아진의 증조할머니 정미선은 지팡이를 쥔 채 옆에 앉아 있었다.

“아진아, 집에 돌아가면 꼭 이 증조할머니한테 연락해.”

최아진은 아쉬운 얼굴로 증조할머니를 꼭 안은 뒤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댔다.

“증조할머니, 보고 싶을 거예요.”

곧 안유주가 도착했다.

정미선은 부랴부랴 도착한 안유주를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부산을 떨어? 여자가 정숙해야지. 민찬이가 평소에 그렇게 가르쳤니? 아진이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안유주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녀는 늘 정미선을 무서워했다.

최민찬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미선은 안유주를 매우 탐탁지 않아 했었고 안씨 가문이 주제넘게 최씨 가문을 넘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최민찬은 꼭 안유주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그래서 정미선은 최민찬이 안유주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또 안씨 가문도 형편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결혼을 막지 않았다.

그러나 최민찬은 결혼 후 안유주를 은근히 멀리하면서 거리를 두었고 두 사람은 부부임에도 생판 남처럼 굴었었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야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래서 정미선은 줄곧 최민찬이 안유주의 협박 때문에 그녀와 결혼한 거라고 생각했고, 그 뒤로 안유주에게 매우 까칠하게 굴었다.

안유주는 예의를 갖추며 미소 지어 보였다. 그녀는 손주며느리로서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그 탓에 정미선은 그녀에게서 흠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할머니. 제가 조금 급히 와서요. 이건 할머니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정미선은 일부러 쌀쌀맞게 굴었다.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무슨 선물까지 사 와? 우리가 남이니?”

안유주는 선물을 챙겨오지 않았더라면 정미선이 자신을 나무랐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안유주가 뭘 하든 그것은 모두 잘못이 된다.

최아진이 안유주에게 다가갔다.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얼른 가요. 지율 고모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권지율의 이름이 들리자 안유주는 당황했다.

“아진아, 방금 뭐라고 했어?”

최아진은 안유주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줄 알고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

“지율 고모 돌아왔다면서요? 그래서 엄마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엄마가 너무 늦게 와서 저 혼자 돌아갈 뻔했잖아요.”

그 순간 안유주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최아진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권지율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쥐듯 마음이 아파서 안유주는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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