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청천
안유주는 최아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최민찬과 권지율의 집으로 말이다.

어젯밤 안유주는 이미 쓸모없는 것들을 전부 처리했고 곧 떠날 거라는 걸 숨기기 위해 어떤 물건들은 여전히 밖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안유주는 이미 반지를 뺐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최민찬은 단 한 번도 결혼반지를 껴본 적이 없었다. 안유주는 최민찬이 여전히 권효영을 잊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천천히 그의 마음을 녹여보려고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그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유주는 그동안 최민찬이 그 반지를 낄 때까지 기꺼이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안유주는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최민찬이 스스로 반지를 끼는 날이 오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반지를 빼버렸다.

안채원을 위해, 그리고 그녀 자신을 위해.

최아진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권지율의 방으로 들어갔고 이내 들뜬 목소리가 침실 쪽에서 들려왔다.

“지율 고모, 왜 이제야 돌아왔어요? 정말 보고 싶었다고요!”

문 앞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된 안유주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아진은 이미 다섯 살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최아진은 점점 더 안유주와 대화를 나누지 않으려고 했다.

최아진이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안유주는 최아진과 관련된 일이면 뭐든 직접 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매일 방과 후 최아진은 안유주의 손을 잡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얘기했다.

딸의 신난 표정을 볼 때면 안유주는 매우 기뻤다. 비록 최민찬과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귀여운 딸을 낳았으니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권지율과 알게 된 이후로 최아진은 안유주에게 불만이 점점 쌓여갔다.

최아진은 안유주가 사준 핑크색 원피스를 전부 쓰레기통 안에 버리고 침대 위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 저 앞으로는 이렇게 애 같은 옷들 안 입을래요!”

옷장 문을 열어 보니 안에 검은색의 개성 있는 옷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최아진은 매일 아침 옷장 앞에서 삼십 분씩 옷을 골랐고 안유주가 재촉하면 짜증을 내며 그녀를 쫓아냈다.

안유주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그 옷들이 권지율이 사준 옷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꽤 오래 유학한 권지율은 자유를 중요시하는 해외의 교육 스타일을 선호하여 돌아와서 최아진에게 그 얘기를 해주었고, 최아진은 그 뒤로 안유주가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최아진은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겨서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한 편이었기에 안유주는 음식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늘 같은 시각에 정량의 음식을 먹였고 본인도 최아진과 똑같이 식사를 했다.

그러나 최아진이 보기에 안유주는 치킨이나 햄버거, 음료수 등 맛있는 것들을 먹지 못하게 하는 나쁜 엄마였다.

가끔 권지율은 최아진에게 몰래 인스턴트 음식들을 먹였고 그때마다 최아진은 배가 아파서 자다가 깨어나 불쌍하게 엄마를 계속 부르며 안유주의 손을 잡았다.

안유주는 마음이 매우 아팠다.

그리고 그 일로 최민찬과 여러 번 싸우기도 했었다.

최민찬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율이도 애야. 걔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걔가 너 때문에 죽어야 만족할 거야?”

안유주는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최민찬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안유주는 숨을 제대로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진이는 당신 딸이야. 아진이 지금 아파서 잠도 못 자고 있어. 권지율 때문에!”

최민찬은 짜증을 내며 안유주의 손을 뿌리쳤다.

“그만해. 안유주, 아진이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지율이도 좋은 마음으로 아진이한테 맛있는 걸 사준 거야. 그런데 네가 이런 태도로 나오면 앞으로 아진이가 어떻게 지율이랑 잘 지내겠어?”

무기력함이 안유주의 마음을 잠식했다.

안유주는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뒷걸음질 치다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안유주는 최아진이 그런 것들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걸 권지율에게 이미 얘기했었다. 그러나 권지율이 또 그런 음식들을 먹였다는 것은 고의성이 다분했다. 권지율은 최아진이 배가 아프길 바라서 일부러 그런 것이다.

그런데 최민찬은 안유주를 탓했다.

그리고 권지율을 달래주겠다고 바로 떠나버렸다. 그렇게 안유주는 혼자 방 안에 남아 정말로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닌지 반성했다.

안유주는 밤새 최아진의 곁을 지키다가 최아진이 잠이 든 뒤에야 딸의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딸은 안유주에게 왜 권지율을 탓했냐고 따져 물으면서 자기가 아픈 이유는 안유주가 예전에 그런 것들을 먹이지 않아 몸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부터 계속 먹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

안유주는 기가 막혔다.

피가 섞이지 않은 최민찬이 그런 말을 하면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핏줄로 이어진 딸이 그런 말을 하니 가슴이 쿡쿡 쑤셨다. 그래도 차마 딸에게 못된 말을 할 수는 없어 조용히 반성했다.

그 이후로는 매주 두 번씩 그런 음식들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안유주는 그것을 기회로 최아진과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최아진은 매번 권지율을 찾아갔다.

안유주는 지쳤고 그 뒤로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딸의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유주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최민찬이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안유주는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본 뒤 싱긋 웃으며 말했다.

“됐어. 두 사람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안유주는 말을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본 최민찬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마음속의 무언가가 조용히 유실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예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착각이겠지.’

최민찬은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아진은 최민찬을 보자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빠!”

최민찬은 다정하게 최아진을 품에 안고 물었다.

“아빠 보고 싶었어?”

최아진의 앳된 목소리가 방문을 뚫고 흘러나왔다.

“당연히 보고 싶었죠!”

최아진이 권지율을 향해 팔을 뻗었다.

“지율 고모, 여기서 일해 주시는 할머니들, 그리고 구름이도 보고 싶었어요!”

최아진이 손가락을 꼽으면서 별장에 있는 모든 사람과 동물의 이름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중에 안유주의 이름은 없었다.

최민찬은 잠깐 멈칫했다가 말했다.

“뭐 빠뜨린 건 없어?”

최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

“없어요. 아진이는 다 얘기했어요!”

최민찬은 최아진의 뺨을 꼬집었다.

“아진이는 엄마가 안 보고 싶었어?”

안유주는 과일을 들고 문 앞에 섰다가 그 질문을 듣고 멈칫했다.

잠시 뒤 최아진의 앳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아, 엄마요? 안 보고 싶었는데요. 엄마는 잔소리만 하고 제 일에 간섭만 하잖아요. 맛있는 것도 못 먹게 하고요.”

안유주는 과일이 담긴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

좋지 않은 타이밍에 안유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최아진은 그런 그녀를 평온히 바라봤다. 조금 전처럼 들떠 있지는 않았다.

최아진은 최민찬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마치 안유주가 자신을 최민찬에게서 떼어놓는 것이 걱정된다는 듯 말이다.

“엄마, 저 오늘은 아빠랑 지율 고모랑 같이 잘 거예요.”

예전이었다면 자신을 멀리하는 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안유주는 그저 덤덤히 웃었다.

“그래.”

최아진은 기쁜 얼굴로 최민찬의 목에 팔을 둘렀다.

“좋아요! 오늘은 아빠랑 고모랑 같이 잘 수 있게 됐어요!”

안유주는 과일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먹어.”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으니 최대한 존재감을 낮추는 편이 나았다.

안유주는 바로 방에서 나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지독한 열병   제30화

    문채리는 안유주가 돌아와서 매우 기뻤다.그녀는 사무실에서 안유주를 위해 차를 따랐다.“마셔 봐. 며칠 전에 우리 고객님이 가져다주신 거야. 유주 씨 예전에 차 마시는 거 좋아했잖아.”안유주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그동안 안유주는 시댁 식구들을 돌보는데 온 신경을 쏟아붓느라 정작 본인은 옷 한 벌, 화장품 하나 사본 적이 없었다.최민찬은 안유주를 아끼지 않았다. 그저 일상에서 남편으로서 적당히 챙겨줄 뿐이었고 그마저도 사실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런 것들을 사준 적이 없었다.안유주는 사려 깊은 사람이라 그동안 가족들을 잘 돌봤다.누구든 안유주를 봤다면 그녀를 현모양처라고 칭찬했을 것이다.다들 안유주를 자랑할 거리로만 생각했지 그녀를 독립적인 개체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예전에 안유주는 그런 삶이 싫지 않았다. 인생이란 게 사실은 별것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심지어 최민찬과 평생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었다.그러나 최민찬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그저 체면을 챙기기 위함이었다.만약 언젠가 최민찬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일이었다.안유주는 차를 받으며 말했다.“너무 감사해요. 제가 알아서 마시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문채리가 안유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안유주가 그녀를 구해준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안유주가 재능 넘치는 세원의 엘리트로서 백전백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내가 그동안 유주 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이렇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뭔가를 떠올린 문채리가 물었다.“그런데 일 시작하면 남편이랑 아이는 어쩌려고?”안유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사실 저 이혼하려고요.”순조롭게 이혼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직접 자신의 이혼 소송을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다.문채리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녀는 절대 말을 돌려 하지 않는 직설적인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 지독한 열병   제29화

    주예은은 그녀가 바로 문채리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문채리가 틀림없을 것이다.설마 권지율이 최민찬에게 부탁해 문채리가 직접 그녀를 맞이하러 온 것일까?그런 생각이 들자 주예은은 우쭐해졌다. 그러면서 역시 안유주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미소 띤 얼굴로 문채리에게 다가갔다.“문채리 씨, 저를 데리러 직접 내려오실 필요는 없는데...”그러나 문채리는 주예은을 지나쳐 안유주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멈춰요.”문채리가 호통을 치면서 싸늘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이내 우뚝 멈춰 섰고 경호원들이 그들을 제압해서 옆으로 치웠다.주예은은 넋이 나갔다.문채리는 안유주에게 다가가더니 근엄한 표정이 아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안유주의 손을 잡고 말했다.“유주 씨, 드디어 왔네. 나 유주 씨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얼이 빠졌다.대체 어떻게 된 걸까?문채리는 주예은을 맞이하러 내려온 게 아니었던 걸까?문채리는 정말로 이력서조차 내놓지 못하는 안유주와 아는 사이인 듯했다.주예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가서 말했다.“문채리 씨,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것 아닌가요? 제가 주예은인데요.”문채리의 얼굴에 언짢음이 스쳤다.“주예은? 그게 누구죠?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인데요. 제가 누구를 맞이하러 나왔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주예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안유주는 주예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웃으면서 문채리에게 말했다.“데리러 와줘서 고마워요.”문채리는 안유주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며 그녀를 아주 화려한 방식으로 환영하고 싶었으나 안유주가 요란스러운 것을 싫어해 그러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이 안유주를 괴롭힌 듯했다. 그래서 문채리는 당당하게 말했다.“유주 씨는 내가 직접 모셔 온 엘리트 변호사예요. 유주 씨에게 무례하게 구는 건 내게 무례하게 구는 것과 다름없죠. 우리 세원은

  • 지독한 열병   제28화

    그러나 이내 주예은은 안유주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전업주부인 안유주가 문채리처럼 대단한 사람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큰소리치는 것일 테다.안유주가 이곳에서 일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갈 테니 문채리는 절대 안유주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안유주는 너무 뻔뻔했다.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 걸까? 역시 뻔뻔한 사람은 천하무적이었다.주예은은 안유주가 주제 파악을 못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경멸했다.“허풍 떨지 말아요. 안유주 씨가 가정주부인 거 여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매일 가족들 보살피느라 바쁠 텐데 문채리 씨를 어떻게 알겠어요? 게다가 문채리 씨한테 전화하겠다고요? 참나, 어이가 없어서.”주예은의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우습네요. 가정주부면 얌전히 집에나 있지 이런 곳은 왜 왔대요? 무슨 자격이 있다고.”“만약 내 아내였다면 바로 뺨을 때렸을 거예요. 집에서 아이나 챙길 것이지 이런 곳에 와서 큰소리나 치다니 정말 집안 망신이네요.”“하마터면 믿을 뻔했어요. 오늘 이곳에 온 걸 보면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운 걸 텐데 돌아가면 아마 남편한테 된통 혼나겠죠.”주예은은 그런 말들을 들으며 우쭐해했다. 역시 아무도 안유주의 말을 믿지 않았다.안유주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말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리고 계속 그들을 상대할 생각도 없었기에 곧장 문채리에게 연락했다.잠시 뒤 문채리가 전화를 받았고 이내 여자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주 씨, 벌써 도착한 거야? 미안해. 방금 회의하고 있었거든. 여훈 씨 얘기 들어 보니까 돌아올 생각이라면서? 진짜 너무 기쁘네. 예전에 유주 씨랑 여훈 씨 우리 로펌에서 전설 같은 존재였잖아. 어떤 문제든 두 사람이 나서면 순조롭게 해결돼서 말이야.”안유주가 일을 그만두고 주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로펌에 큰 파문이 일었었다. 문채리 등 사람들은 그녀를 극구 뜯어말렸으나 그럼에도 사랑에 눈먼 안유주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그랬

  • 지독한 열병   제27화

    주예은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팔짱을 끼면서 오만한 표정으로 안유주를 바라보았다.“당신이 뭔데 나한테 명령하는 거예요?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요?”안유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그쪽 아빠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누가 그쪽 아빠를 관리할 수 있는지는 알아요.”안유주는 말을 마친 뒤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예은이 안유주의 휴대폰을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미쳤어요? 사진 한 장 찍은 것뿐인데 일을 그렇게 키워야겠어요?”주예은은 빈정대며 말했다.“왜요? 내가 인터넷에 당신 사진을 올리면 인맥을 이용해 면접 보러 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키게 될까 봐 걱정돼요?”안유주는 압박감 넘치는 눈빛으로 주예은을 바라봤다. 안유주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주예은 씨, 주예은 씨는 방금 한 말로 법적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어요.”주예은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거만하게 말했다.“그딴 말 하지 말아요. 가정주부인 당신이 무슨 능력으로 여기 면접을 보러 와요? 그렇게 자신 있으면 이력서라도 꺼내보든가요. 당신 경력이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 더 뛰어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안유주는 오늘 급히 나오느라 이력서를 챙기지 못했다. 게다가 면접을 보는 것도 형식적인 거라 이력서를 챙길 이유가 없었다.그리고 안유주는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다.안유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내 이력서를 보고 싶다고요? 혹시 내 경력을 표절하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주예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누가 당신 경력을 표절한다고. 당신이 무슨 경력이 있어요? 뭐, 밥 짓는 경력도 경력이라고 치나요?”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안유주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들과 논쟁을 벌일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우선 주예은 씨는 내 허락도 없이 내 사진을 찍어서 초상권을 침해했으니 내게는 사진을 삭제해

  • 지독한 열병   제26화

    안유주는 당분간 목걸이를 복원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걸 포기하려고 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다음 날, 안유주는 로펌에 면접을 보러 갔고 전여훈은 전화를 받고 유쾌한 말투로 말했다.“난 너 오늘 안 오는 줄 알았어.”안유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저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요.”전여훈은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해결했어?”안유주가 말했다.“아니요. 하지만 급하지 않아요. 언젠가는 해결될 거예요.”안유주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을 믿었다. 권지율이 그녀의 것을 망가뜨린 대가로 최민찬은 그녀에게 20억을 주었다.지금 안유주에게는 돈이 필요했기에 손해는 아니었다.안유주는 하늘에 계시는 엄마도 자신을 용서해 줄 거라고 믿었다.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랄 테니 말이다.전여훈은 조금 걱정되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내가 안 도와줘도 되겠어?”안유주는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저 다 도착했으니까 금방 올라갈게요. 오늘 면접 보는 사람들 많아요?”그 말에 전여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오늘 면접 보러 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들의 로펌은 교진시에서 가장 권위 있는 로펌이었고 패배한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안유주가 있을 때는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그래서 그들의 로펌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이 그들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았고 경험이 부족한 이들도 수두룩했다.전여훈은 한숨을 쉬었다.“왜 다들 이력서를 넣기 전에 채용 공지에 쓰인 자격 요건을 확인하지 않는 걸까?”안유주는 웃었다.“사람들은 원래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니까요. 다들 자기가 남들보다는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죠. 경험이 없다고 해도 면접을 보게 되면 자신이 채용될 거라는 자신이 있을 거예요. 자신감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한 번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전여훈는 안유주의 말에 흔들렸다.“휴, 알겠어. 얼른 올라와. 오늘

  • 지독한 열병   제25화

    최민찬은 안유주의 글썽이는 눈을 보자 왠지 모르게 목이 타들어 갔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안유주를 번쩍 안아서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한동안 안유주와 관계를 갖지 못해 그는 조금 안달이 나 있었다.그런데 몸을 돌리자마자 권지율이 눈물을 머금은 채 입술을 깨물며 계단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최민찬은 뭔가 켕기기라도 한 건지 흠칫하며 안유주를 내려놓았다.권지율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울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최민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고 안유주는 다정하게 말했다.“가서 달래 줘.”최민찬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안유주를 바라보았다.안유주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화가 난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처음에 최민찬은 안유주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천천히 살펴보고 난 뒤에야 그녀가 진심으로 그가 권지율을 달래주길 바란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이 정도로 마음 넓은 여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최민찬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날 이렇게나 많이 사랑하는 거야?’최민찬은 휴대폰을 꺼내 또 안유주에게 10억을 입금했다.안유주는 더 기뻤다.최민찬은 안유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착하지. 조금만 기다려.”말을 마친 뒤에는 성큼성큼 위층으로 올라갔다.안유주는 싸늘한 눈빛으로 최민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기다리라고?’그럴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갑자기 20억을 얻게 된 안유주는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목걸이도 되찾았고 엄마 사진도 찾았으니 사람을 찾아 복원시키기만 하면 되었다.그러나 많은 곳을 알아봤지만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처음의 희열도 서서히 사라졌다.안유주는 심란한 마음으로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들은 돈으로도 회복되지 않았다.안유주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DM을 보냈다.[복원하고 싶은 물건이 있으신 건가요?]안유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람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