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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청천
안유주는 씁쓸한 감정을 거두어들이고 덤덤히 말했다.

“아니요. 꽤 잘해줬어요.”

당시 안씨 가문은 안채원을 위해 안유주를 최민찬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처음에 안유주는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그녀는 강은규와 이미 약혼한 상태였고 사이도 꽤 좋았기에 만약 그때 그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강은규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안유주는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가다가 안채원과 함께 납치당했다.

안유주는 안채원이 무서워할까 봐 걱정되어 계속 안채원을 달래주었다.

그러나 납치범이 아빠에게 연락했을 때, 안채원이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안유주가 꾸민 짓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안유주는 그대로 넋이 나가버렸다.

평소 안유주는 안채원과 사이가 꽤 좋았기에 안채원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안채원은 2년 전 안유주의 엄마가 돌아가신 뒤 아빠와 재혼한 상대가 데려온 딸이었다. 안채원과 함께 지내며 안유주는 아빠가 안채원을 편애한다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안유주는 아빠가 그렇게 쉽게 안채원의 말을 믿어버릴 줄은 몰랐다.

특히 한때 그녀가 사랑했던 그녀의 약혼자 강은규는 직접 그녀를 멀리 수용소 같은 곳으로 보내버렸다.

5년 동안, 안유주는 그곳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그곳에서 안유주는 밥 한 끼 배불리 먹어본 적 없을 뿐만 아니라 매일 다른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그곳에 풀려났을 때 안색도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잇장처럼 삐쩍 말라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온 뒤에는 안채원을 대신하여 최민찬과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당시 안유주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겪어본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실 그녀는 최민찬과 결혼한 뒤에는 상황이 점점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최민찬은 겉으로 보기에는 냉담하지만 은근히 세심했고 안유주는 그런 그를 조금씩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유주는 지금까지도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권지율만 아니었어도 두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강은규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의 얼굴에서 혐오가 언뜻 보였다. 강은규는 긴 손가락으로 차 문을 열더니 안유주를 차에서 내쫓았다.

“그러면 이만 내려. 채원이는 내 차에서 다른 여자의 냄새가 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안유주는 별말 없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 뒤 떠났다.

강은규는 안유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른한 자태로 좌석에 기대었다. 그는 손에 쥔 염주를 천천히 굴리며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을 해 보였다.

운전기사 유민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아가씨를 데리러 갈까요?”

강은규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염주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

...

30일 뒤, 안유주는 출국할 것이기에 그동안 아무런 일도 없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최민찬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안유주는 짐들을 원래 자리에 놓은 뒤 허리를 짚고 서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우스웠다.

그녀는 언제 떠날지조차 결정할 수 없었다.

안유주는 짐들을 다 챙긴 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멍을 때렸다. 잠이 들 수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안유주는 금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안유주는 벨 소리를 들었다. 벨을 누른 사람은 바로 전여훈이었다.

검은색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전여훈은 유독 훤칠해 보였고 검은 테 안경은 그를 더 신사다워 보이게 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안유주는 잠기운 때문에 비몽사몽 시간을 확인했다.

겨우 아침 여덟 시였다.

안유주는 눈을 비비면서 전여훈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전여훈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하품을 했다.

“너한테 이혼합의서 가져다주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지. 그래서 아침도 먹지 못하고 바로 로펌으로 가봐야 해.”

안유주는 조금 미안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전여훈은 안유주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냥 칭찬받고 싶어서 한 말이야. 미안하다고 할 필요는 없어.”

안유주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전여훈과 항상 잘 맞았다.

“아침 먹고 가요.”

전여훈은 손을 젓더니 물 한 잔을 마신 뒤 바로 떠났다.

“시간이 없어. 안건 하나가 곧 재판을 앞두고 있는데 요즘 통 진전이 없어. 네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증거 수집을 빨리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안유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여훈의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침을 먹고 나니 최민찬이 권지율을 데리고 돌아왔다.

최민찬과 안유주는 권지율 때문에 한 번 싸웠었고 그 일로 최민찬은 권지율을 다른 별장으로 데려갔었다.

안유주는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들이 다른 별장에서 무슨 짓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처음엔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그런 역겨운 사이였다는 걸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최민찬이 어떠한 의도로 권지율을 데려왔을지는 뻔했다. 안유주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최민찬이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 안유주는 식탁 앞에 앉아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안유주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최민찬이 문을 닫았다.

“신발 갈아신어.”

권지율은 애교를 부리듯 최민찬의 팔에 팔짱을 꼈다.

“싫어요. 작은아빠, 여기 제 집이잖아요. 저는 제 신발 신고 제 집에 들어가고 싶어요.”

결혼한 지 6년이 지났으나 안유주는 그런 식으로 최민찬에게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최민찬은 틀림없이 그녀를 차갑게 대할 것이다.

그래서 안유주는 괜히 미움받을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최민찬은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을 해 보이며 권지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면 갈아신지 말고 그냥 들어가자.”

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게 말했다. 안유주는 코끝이 시큰했지만 애써 아침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안유주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다.

권지율은 가사도우미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간 뒤 안유주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방 청소해 주세요. 저 이 방 쓸 거거든요.”

권지율은 계단 입구에 서서 가사도우미에게 거만하게 말하면서 안유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민찬도 위로 올라갔다. 그는 안유주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가사도우미에게 안의 물건들을 치우라고 했다.

안유주는 위층에 뭔가가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가사도우미에게 멈추라고 했다.

“잠깐만요.”

최민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권지율의 앞에 서면서 말했다.

“안유주, 지율이는 얼마 전에 큰일을 겪어서 안정을 취해야 해. 그리고 상처도 다 낫지 않았어. 지율이 혼자 지내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당분간은 우리랑 같이 지내게 할 생각이야. 그래도 괜찮지?”

다 결정해 놓고 이제 와서 괜찮냐고 묻다니.

‘아니지.’

안유주는 웃었다.

최민찬은 그녀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통보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유주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민찬은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안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권지율은 최민찬을 밀어내고 안유주의 앞에 서더니 아주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전 꼭 이 방을 써야겠어요. 무슨 의견이라도 있어요?”

안유주는 늘 그랬듯이 다정했고,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날 병실에서 이혼 얘기를 꺼냈던 것이 최민찬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의견은 없어. 대신 조건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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