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 저녁, 식탁 위에는 비릿한 증오가 감돌았다. 평소 화려하던 식단은 사라졌다. 강미숙은 인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수저만 놀렸다. 정적을 깬 것은 시누이 자영의 비아냥이었다.
“아이고, 어떡해? 가끔 의사가 성별을 헷갈리는 일도 있다니까 벌써 실망하지 마. 그치, 엄마?”
“그랬으면 좋겠다만… 장씨 가문의 첫 손주가 하필이면 딸이라니. 조상님 뵐 낯이 없다.”
강미숙의 낮은 목소리가 주방에 울렸다. 인아는 모래를 씹는 기분으로 밥을 넘겼다. 목구멍이 막혀 오는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밥상에 숟가락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도대체 너는 어째 그러니? 하는 짓이 성의도 없고 싹싹하지도 못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미 노릇이나 하겠어?”
“맞아. 시집 잘 와서 운 좋게 배만 불러놓고선 공주님이라도 된 줄 알았나 봐.”
자영이 한술 더 뜨자 인아의 숟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주방 문틈 사이로 남편 성봉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아내가 난도질당하는 장면을 관전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인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재빨리 문틈을 닫아버렸다.
방으로 돌아오자 성봉은 이미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 속 주식 화면에 몰두해 있었다. 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다 들었죠?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해줘요?”
“엄마도 그냥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야. 네 마음 나도 아는데, 지금은 그냥 넘어가자. 임신 중이잖아. 괜히 예민하게 굴지 말고 잠이나 자.”
성봉은 귀찮다는 듯 등을 돌렸다. 인아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이 남자는 끝까지 내 편이 아니라, 잠재적 가해자인 남의 편이었다.
며칠 뒤, 거실에서의 폭언은 절정에 달했다.
“새아가, 네가 이 집안에 해준 게 뭐가 있니? 딸 하나 가졌다고 유세 부리는 거야? 대를 이을 아들이 있어야지!”
“엄마, 그만 좀 해요. 인아 산전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잖아.”
성봉이 마지못해 나섰지만, 자영은 과일을 깎던 과도를 테이블에 던지며 차갑게 웃었다.
“요즘은 애만 가지면 다 산전 우울증이래. 내 참, 유세는!”
인아는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맑은 날인데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자신의 손등을 꼬집어 보았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혼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침묵만이 가득한 침실. 인아는 벽을 향해 돌아누운 채 태아의 태동보다 더 무거운 절망을 견디고 있었다. 임신 후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 감각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남편의 망설임조차 살갗을 파고드는 불쾌한 소름으로 다가왔다. 그때, 성봉이 침대 끝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인아, 우리··· 제주도 다녀올까?”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성봉은 비굴할 정도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인아 너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래. 분위기도 좀 바꿀 겸, 둘이서만 바람 좀 쐬고 오자. 엄마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게···.”
인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성봉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때는 그 눈빛에 설레고 그 품에서 영원을 꿈꿨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저 낯선 가면을 쓴 괴물에 불과했다. 성봉은 아내의 서늘한 시선에 당황하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대체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는데.’
성봉의 내면에서는 억울함이 치밀었다. 그는 본인이 효심 깊은 아들이자, 아내의 기분까지 맞춰주려 애쓰는 ‘백 점짜리 남편’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둘이서만 가자니까?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아롱이 추억도 만들어주고···.”
인아의 입가에 얇고 서늘한 쓴웃음이 걸렸다.
‘아롱이? 내 배 속의 아이 이름을 부를 자격이 당신한테 있을까? 내가 어머니와 누나에게 난도질당하던 그 날, 문틈 너머로 비겁하게 숨죽이고 있던 당신을 보았는데···.’
차마 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뜨겁게 걸렸다. 인아는 다시 몸을 돌려 남편에게 차가운 등을 보였다. 벽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차라리 남편의 비겁한 온기보다 정직하게 느껴졌다.
“여행 말고··· 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요.”
성봉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말문이 막혔다. 냉담을 넘어 명백한 혐오가 서린 목소리. 그는 인아의 앙상한 등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태아가 딸이라서 엄마랑 누나가 좀 서운한 소리 했다고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 일인가? 나도 중간에서 피곤해 죽겠는데, 여행 가자는 성의까지 무시해?’
성봉은 끝내 깨닫지 못했다. 아내에게 필요했던 건 화려한 여행이 아니라, 지옥 같은 거실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 끌어내 줄 단 한 번의 기개였다는 사실을. 그는 죽어도 알 리 없었다. 인아의 망막에는 문틈 너머로 아내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던 성봉의 비겁한 눈동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성봉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인아, 미안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정말로 아롱이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정 혼자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
성봉은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닫기 전, 그는 침대 위의 작은 실루엣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롱이 생각해서라도 인아가 예전처럼 좀 웃어주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굴까.’
문이 닫히고 적막이 찾아오자, 인아는 참아왔던 숨을 깊게 내뱉었다.
“행복?”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난도질당해 죽어버린 마음에서 행복을 바라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숨을 쉬라는 말과 같았다. 어두운 방 안, 그녀의 손은 어느덧 볼륨감이 무색하게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감싸 쥐었다.
이제 이 지옥을 끝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남편이 제안한 그 제주도. 그곳이 비상구가 될지, 아니면 영원한 안식처가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인아에게는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조철호 팀장이 결재판을 들고 문부열 과장의 집무실을 나섰을 때, 그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유라가 그에게 달려갔다.“팀장님, 결재 났습니까? 주동치, 그놈 괘도한이라는 위조한 여권으로 우리 관할에서 활보하고 있다고요. 지금 안 잡아들이면 어떤 짓을 할지 몰라요!”조 팀장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유라에게 내밀었다. 빨간 펜으로 그어진 것이 유라의 심장을 난도질했다.“김 경사, 과장님이 퇴짜 놓으셨다. 짐승을 잡으려면 놈보다 월등해야 하는데, 나약한 여경을 사지로 보내서 어떤 욕을 먹으려는 거냐고… 나까지 호되게 닦달당했어.”유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여경이라서 안 된다는 편견,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문부열의 음흉한 의도를 유라는 본능적으로 읽어냈다. 유라는 조 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문부열의 집무실을 거칠게 열고 들어갔다.“과장님! 허락해주십시오. 제가 놈을 체포할 자신이 있습니다!”문부열은 돋보기를 내리며 서늘하게 웃었다. 문 과장은 이미 유라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느긋하게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자신감만으로 짐승을 잡을 순 없지, 김 경사. 주동치는 사람 멱을 따는 걸 취미로 삼는 놈이야. 자네처럼… 가녀린 몸뚱이로는 놈의 장난감밖에 안 돼.”문부열의 시선이 유라의 제복 위로 도드라진 가슴과 탄탄한 골반을 끈적하게 훑었다. 그의 눈에는 보호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가학적인 흥분이 서려 있었다.“과장님…”“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자네의 월등함을 증명해봐. 마침 우리 팀에 만년 형사 강태호 경장이 있지? 이번 진급에서 자네 같은 어린 여자한테 밀려서 배알이 꼴릴 대로 꼴린 친구야. 가만, 강 형사는 유도, 합기도 도합 10단이 넘는 인간 병기지.”문부열은 비릿한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매트 위에서 강 경장을 상대로 최소한 버티거나 이겨봐. 그럼 내 직권으로 자네가 단독 수사하는 것을 허락해주지. 아, 대신 부상은 각오해야 할 거야. 강 경장은 지금 자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거든.”이것
절도있는 거수 경례와 함께 유라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8월 25일 자로 제주 광역수사대, 발령받은 김유라 경사입니다. 신고합니다!”책상에 비스듬히 앉아 서류를 보던 문부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문 과장의 눈은 서류가 아닌, 유라의 잘록한 허리와 그 아래 팽팽하게 솟구친 둔부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려갔다.“아, 김유라 경사. 소문은 익히 들었지. 실력보다… 하드웨어가 아주 훌륭하다고.”문부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라에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진한 위스키 향과 비릿한 스킨로션 냄새가 유라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문부열은 유라의 앞에 멈춰 서서,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그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단순한 격려라기엔 손가락 끝의 힘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제복이 좀 타이트한 것 같은데? 경찰학교 예산이 부족했나, 아니면 김 경사 몸이 예산보다 더 넘치는 건가?”문부열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유라의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권총 홀스트가 닿아있는 허벅지 근처까지 문부열의 손이 슬쩍 스쳐 지나갔다. 유라는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상관의 ‘스킨십’이라는 명분 앞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열심히 하겠습니다, 과장님.”“그래, 그래야지. 제주 바다는 육지보다 훨씬 거칠 거든. 김 경사처럼… 탐스러운 사냥개는 내가 특별하게 관리가 필요할 것 같군.”문부열은 유라의 귓가에 낮게 읊조리며, 그녀의 셔츠 깃을 정리해주는 척 손가락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 쇄골 근처의 살결을 툭 건드렸다. 순간 8년 전 폐건물에서 느꼈던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이 유라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유라는 심리분석가로서 문부열의 눈에서 번들거리는 노골적인 음침함을 읽었다. 문 과장은 주동치를 잡으러 온 수사관을 환영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영지에 새로 들어온 보기 귀한 여자를 감상하고 있었다.신고식을 마치고 집무실을 나오는 유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주동치라는 짐승을 잡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그녀는 벌써 또 다른 포식자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왔음을 직감
백합처럼 순진무구했던 명문대 신입생 김유라가 폐건물의 곰팡냄새 속에서 짐승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후,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날 밤, 콘크리트 바닥에 흩뿌려졌던 처녀의 선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유라의 심장 깊은 곳에 응축되어, 놈의 목줄을 끊어버릴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김포공항 로비, 제주행 여객기를 타기 위해 걷는 유라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춰 섰다.선글라스를 벗어 가슴팍에 꽂는 그녀의 이목구비는 이제 단아함을 넘어 서늘한 칼날 같았다. 하지만 정작 남성들의 본능적인 침을 삼키게 만드는 것은, 경찰학교의 혹독한 훈련과 트레이닝으로 빚어진 그녀의 압도적인 하드웨어였다.타이트한 검은색 슬랙스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경찰학교 조교들과 거친 격투로 다져진 그녀의 둔부는 말 근육처럼 단단하면서도 풍만하게 솟아올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지 밑단이 뜯겨나갈 듯 위태로웠다. 8년 전, 짐승의 위협에 사시나무처럼 떨던, 길고 가늘었던 그 다리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의 허벅지는 놈의 허리를 조여 질식시킬 만큼 탄탄하고 묵직한 힘을 품고 있었다.“하아…!.”지나가는 사내들의 눈길이 그녀의 비대칭 허리에 머물렀다. 한 손에 잡힐 듯 잘록한 허리는, 오히려 그 위로 솟구친 비현실적인 볼륨감을 더욱 극대화했다.얇은 실크 블라우스 위로 비치는 유라의 가슴은 8년 전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풍만해져 있었다. 브래지어 컵이 감당하기 힘든 듯 정면으로 툭 불거져 나온 가슴의 무게감은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출렁이며 시각적인 압박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 탐스러운 살결 안쪽, 왼쪽 쇄골 근처에 자세히 보면 8년 전 짐승의 칼날이 남긴 흉터가 낙인으로 남겨 있었다.유라는 자신을 훑는 음란한 시선을 서늘한 눈빛 한 번으로 베어버렸다.‘덤벼봐. 내 몸에 손을 댄 짐승은 어떻게 파멸하는지.’제주 공항에 내리는 순간 습한 바닷바람이 유라의 뺨을 때렸다. 얇은 실크 블라우스가 바람에 밀착되며 터질 듯
김유라에게 1년 전 상하이 뒷골목은 단순한 범죄 현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했던 그녀의 인생을 단숨에 사지로 몰아넣고 영혼을 도살한 지옥의 입구였다.전도가 창창한 대기업 전략기획실과 경찰 공무원 수석합격을 동시에 거머쥔 재원.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매,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서늘한 미모는 가는 곳마다 사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진로를 고민하며 홀로 떠난 상하이 여행길에서, 그녀는 평생의 영혼을 갉아먹을 악마와 마주하고 말았다.비릿하고 습한 공기가 가득했던 상하이의 어두운 골목. 주동치의 억센 손아귀가 멱살을 낚아채 벽으로 짓눌렀다."이 씨팔 년, 감히 어디를 째려봐?"블라우스 단추가 뜯겨 나가고 얇은 천 너머로 살점을 파고드는 압박감이 전신을 꿰뚫었다. 최루 스프레이를 뿌리고 사타구니를 짓밟은 뒤 악착같이 도망쳤지만, 귀국 후의 삶은 이미 지옥이었다. 샤워실에 들어설 때마다 놈의 손길이 닿았던 가슴과 목덜미, 허벅지를 수세미로 살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박박 문질러 닦았다. 피가 배어 나와도 멈출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우면 놈이 옷을 찢어발기던 환청과 함께 아랫배 밑바닥이 공포로 떨려왔다.‘죽여버릴 거야. 내 손으로 직접, 그 짐승의 숨통을 끊어놓겠어.’결국, 유라는 화려한 대기업의 길을 버리고 스스로 '사냥개'의 삶을 선택했다. 경찰학교 34주 합숙 교육 동안 남성 교육생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고강도 훈련을 버텨냈다. 매일 밤 땀에 젖은 거울을 볼 때마다 놈이 움켜쥐었던 신체 부위를 더욱 단단하고 치명적인 무기로 단련하며 복수심을 태웠다.범죄심리분석관 경사로 임용된 그녀에게 운명처럼 전달된 대륙의 국제범죄 브리핑 자료. 6개 성을 떠돌며 서른 명이 넘는 여자를 살육한 연쇄 강간살인마, 상하이의 그 괴물이었다.“주동치···!!”놈의 이름을 씹어뱉는 순간, 1년 전 놈의 손길이 스쳤던 아랫배가 지독하게 떨려왔다.‘네놈이 감히 제주로…’놈이 위조 여권을 들고 제주도로 밀항 입국했다는 첩보를 확인하자마자, 유라는 망설임 없이 모두
김인아는 부쩍 조바심이 났다. 임신부 특유의 짙어진 체취와 비릿한 바다 내음이 섞여 그녀의 어지러움을 부추겼다.“오빠··· 우리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요. 바람이··· 바람이 너무 신경이 쓰여요.”인아가 사르르 떨리는 손으로 성봉의 셔츠 깃을 붙잡았다. 간절한 호소였다. 그러나 성봉의 눈은 이미 렌즈 너머의 허상에 고정되어 있었다.“에이! 인아 당신은 걱정도 팔자라니까! 이 정도 파도가 딱 스릴 있고 좋은 거야. 우리 아롱이도 뱃속에서 바다 구경하니까 기분 좋아서 발길질하는 것 봐.”성봉은 오히려 인아의 허리를 낚아채 철제난간으로 더 바짝 밀어붙였다. 만삭의 배가 차가운 철제난간에 압박당하는 줄도 모르고, 그는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인아, 거기 잠깐만! 지금 원피스가 몸에 착 붙어서 몸매가··· 와, 장난 아니다. 진짜 섹시해. 아롱이 낳기 전 최고의 베스트 컷이라니까! 자, 좀 더 활짝 웃어봐!”성봉의 철없는 환호 뒤로, 갑판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던 주동치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이미 인아의 하얀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바람에 젖어 원피스 위로 도드라진 가슴의 굴곡과 팽팽한 복부에 꽂혀 있었다.‘씨팔··· 저 정도로 부풀었으면 한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겠군.’주동치는 혀끝을 내밀어 갈라진 입술을 핥았다. 155cm의 단신임에도 그가 뿜어내는 살의는 갑판의 공기를 순식간에 동결시켰다. 그는 대륙에서 임신한 여자를 짓밟았을 때의 감촉을 떠올렸다. 배를 짓누를 때마다 터져 나오던 그 눅눅한 신음과 임신한 아기를 보아 살려달라며 울부짖던 여자의 절망적인 눈망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바지 주머니 속 주동치의 손이 비정상적으로 맥동하는 자신의 흉물을 훑었다.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수천 번 인아의 옷을 찢어발기고, 그 거대한 배 위로 제 몸을 겹치는 상상을 마친 상태였다.그때였다.쿵-!마치 수중 폭탄이 터진 듯, 낚싯배 밑창 전체가 들썩이며 묵직한 충격음이 배를 흔들었다.“악!”갑작스러운 요동에 성봉이 손에 쥐고 있던
낚싯배의 엔진이 비릿한 매연을 뱉으며 공회전했다. 조타석에 앉은 도진이 서늘한 눈빛으로 갑판의 세 사람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출항 전, 각자 신분증을 제시해 주세요. 해경에 승선자 출항 신고용입니다.”성봉은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아유, 요즘 당연히 하는 절차죠?”그는 싹싹하게 자신과 인아의 신분증을 내밀었다. 도진의 시선이 인아의 이름 석 자와 증명사진에 머물다, 이내 마지막 인물에게 향했다.“그쪽 분은요?”구석에 먼바다만 보고 있던 주동치는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웠다. 도진이 한 걸음 다가가 재차 재촉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품 안에서 낡은 여권을 꺼냈다.도진은 여권 사진과 왜소한 남자를 날카롭게 대조했다. 자신의 머리 하나보다 작아 보이는 단신, 가늘게 찢어진 눈에 특징 없는 얼굴. 하지만 도진의 냉철한 감각은 놈의 눈동자 속에 숨겨진 짐승의 기운에 순간 움찔했다.“괘도한 씨, 확인됐습니다.”도진은 앱으로 정보를 전송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동치는 안도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다. 수십 명의 여자를 유린하고 도살하면서도 단 한 번도 꼬리가 밟히지 않았던 ‘왜소한 체구, 돌아서는 순간 기억나지 않는 얼굴’. 그것이 그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귀중품은 선교에 보관하겠습니다. 분실 위험이 있으니 맡겨주시죠.”성봉이 가방을 건네자, 옆에 있던 인아가 작은 손가방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아이들이 선물했다는 손바닥 모양의 메달이었다. 물건을 건네받는 순간, 도진과 인아의 손끝이 스쳤다.‘···어디서 봤는데.’인아는 도진의 강렬한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도진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메달을 소중히 받아 넣었다.이윽고 출항을 알리는 짧은 경적이 울렸다. 배가 선착장에서 멀어지자, 주동치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춰진 흉포한 본색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무심하게 바다를 보는 척했으나, 모든 신경은 오직 한 곳, 김인아에게 쏠려 있었다.‘씨팔, 보면 볼수록 물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