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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 명의 여자

Author: 미친개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3 09:12:04

그날 저녁, 식탁 위에는 비릿한 증오가 감돌았다. 평소 화려하던 식단은 사라졌다. 강미숙은 인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수저만 놀렸다. 정적을 깬 것은 시누이 자영의 비아냥이었다.

“아이고, 어떡해? 가끔 의사가 성별을 헷갈리는 일도 있다니까 벌써 실망하지 마. 그치, 엄마?”

“그랬으면 좋겠다만… 장씨 가문의 첫 손주가 하필이면 딸이라니. 조상님 뵐 낯이 없다.”

강미숙의 낮은 목소리가 주방에 울렸다. 인아는 모래를 씹는 기분으로 밥을 넘겼다. 목구멍이 막혀 오는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밥상에 숟가락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도대체 너는 어째 그러니? 하는 짓이 성의도 없고 싹싹하지도 못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미 노릇이나 하겠어?”

“맞아. 시집 잘 와서 운 좋게 배만 불러놓고선 공주님이라도 된 줄 알았나 봐.”

자영이 한술 더 뜨자 인아의 숟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주방 문틈 사이로 남편 성봉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아내가 난도질당하는 장면을 관전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인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재빨리 문틈을 닫아버렸다.

방으로 돌아오자 성봉은 이미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 속 주식 화면에 몰두해 있었다. 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다 들었죠?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해줘요?”

“엄마도 그냥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야. 네 마음 나도 아는데, 지금은 그냥 넘어가자. 임신 중이잖아. 괜히 예민하게 굴지 말고 잠이나 자.”

성봉은 귀찮다는 듯 등을 돌렸다. 인아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이 남자는 끝까지 내 편이 아니라, 잠재적 가해자인 남의 편이었다.

며칠 뒤, 거실에서의 폭언은 절정에 달했다.

“새아가, 네가 이 집안에 해준 게 뭐가 있니? 딸 하나 가졌다고 유세 부리는 거야? 대를 이을 아들이 있어야지!”

“엄마, 그만 좀 해요. 인아 산전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잖아.”

성봉이 마지못해 나섰지만, 자영은 과일을 깎던 과도를 테이블에 던지며 차갑게 웃었다.

“요즘은 애만 가지면 다 산전 우울증이래. 내 참, 유세는!”

인아는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맑은 날인데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자신의 손등을 꼬집어 보았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혼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침묵만이 가득한 침실. 인아는 벽을 향해 돌아누운 채 태아의 태동보다 더 무거운 절망을 견디고 있었다. 임신 후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 감각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남편의 망설임조차 살갗을 파고드는 불쾌한 소름으로 다가왔다. 그때, 성봉이 침대 끝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인아, 우리··· 제주도 다녀올까?”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성봉은 비굴할 정도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인아 너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래. 분위기도 좀 바꿀 겸, 둘이서만 바람 좀 쐬고 오자. 엄마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게···.”

인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성봉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때는 그 눈빛에 설레고 그 품에서 영원을 꿈꿨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저 낯선 가면을 쓴 괴물에 불과했다. 성봉은 아내의 서늘한 시선에 당황하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대체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는데.’

성봉의 내면에서는 억울함이 치밀었다. 그는 본인이 효심 깊은 아들이자, 아내의 기분까지 맞춰주려 애쓰는 ‘백 점짜리 남편’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둘이서만 가자니까?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아롱이 추억도 만들어주고···.”

인아의 입가에 얇고 서늘한 쓴웃음이 걸렸다.

‘아롱이? 내 배 속의 아이 이름을 부를 자격이 당신한테 있을까? 내가 어머니와 누나에게 난도질당하던 그 날, 문틈 너머로 비겁하게 숨죽이고 있던 당신을 보았는데···.’

차마 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뜨겁게 걸렸다. 인아는 다시 몸을 돌려 남편에게 차가운 등을 보였다. 벽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차라리 남편의 비겁한 온기보다 정직하게 느껴졌다.

“여행 말고··· 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요.”

성봉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말문이 막혔다. 냉담을 넘어 명백한 혐오가 서린 목소리. 그는 인아의 앙상한 등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태아가 딸이라서 엄마랑 누나가 좀 서운한 소리 했다고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 일인가? 나도 중간에서 피곤해 죽겠는데, 여행 가자는 성의까지 무시해?’

성봉은 끝내 깨닫지 못했다. 아내에게 필요했던 건 화려한 여행이 아니라, 지옥 같은 거실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 끌어내 줄 단 한 번의 기개였다는 사실을. 그는 죽어도 알 리 없었다. 인아의 망막에는 문틈 너머로 아내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던 성봉의 비겁한 눈동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성봉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인아, 미안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정말로 아롱이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정 혼자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

성봉은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닫기 전, 그는 침대 위의 작은 실루엣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롱이 생각해서라도 인아가 예전처럼 좀 웃어주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굴까.’

문이 닫히고 적막이 찾아오자, 인아는 참아왔던 숨을 깊게 내뱉었다.

“행복?”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난도질당해 죽어버린 마음에서 행복을 바라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숨을 쉬라는 말과 같았다. 어두운 방 안, 그녀의 손은 어느덧 볼륨감이 무색하게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감싸 쥐었다.

이제 이 지옥을 끝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남편이 제안한 그 제주도. 그곳이 비상구가 될지, 아니면 영원한 안식처가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인아에게는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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