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모처럼의 휴일 아침이었지만, 집안의 공기는 평일보다 더 무겁고 습했다. 얇은 슬립 잠옷 위에 카디건 하나만 걸친 채 거실로 나선 인아는 멈칫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전화를 두드리는 여자, 시누이 장자영이 보였다. 서른여덟, 히스테릭한 노처녀 특유의 날 선 기운이 거실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인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 언제 오셨어요?”
자영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꼬고 있는 다리를 까닥거리며 그녀의 시선이 인아에게 닿았다. 순간, 자영의 눈동자가 질투와 모멸감으로 뒤틀렸다.
잠결에 살짝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인아의 얼굴은 얄밉도록 또렷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민낯임에도 잡티 없는 투명한 피부와 짙은 눈썹, 도톰한 입술은 청초하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자영의 신경을 가장 거슬리게 한 것은 인아의 몸매였다. 카디건 사이로 드러난 얇은 슬립 천 너머로, 인아의 풍만한 가슴이 탄력 있게 솟아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출렁이는 볼륨과 잘록한 허리,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골반은 자영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타고난 무기였다.
‘저년은 선생질하는 년이 몸뚱이는 왜 저렇게 천박해?’
자영은 자신의 빈약한 가슴과 대비되는 인아의 압도적인 볼륨에 치밀어 오르는 열등감을 숨기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뭐야, 이제 일어나는 거야? 이 집은 며느리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빠져 자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나 보지?”
인아는 순간 숨이 막혔다. 모처럼 쉬는 날조차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며 시어머니 강미숙이 기다렸다는 듯 걸어 나왔다. 그녀는 자영의 편에 서서 인아를 몰아붙였다.
“아니, 자영이가 오랜만에 왔는데 새아기 너는 인사도 제대로 안 하니? 도대체 친정에서 예의는 어떻게 배워먹었길래 이 모양이야?”
부모님까지 들먹이는 독설에 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여기서 울면 더 큰 모욕이 떨어질 것을 알기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어머님. 일어나셨어요? … 그리고 안녕하세요, 언니.”
그 순간, 자영이 휴대전화를 소파에 내던지며 인아를 노려보았다. 인아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자신의 콤플렉스인 낮은 코와 짝눈을 비웃는 듯해 견딜 수 없었다.
“엎드려 절받기 싫거든? 그리고 언니? 네가 지금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니까 세상이 다 네 밑으로 보여? 그 잘난 얼굴이랑 몸뚱이로 애들 꾀는 거야?”
옆에 있던 강미숙이 거들며 인아에게 손가락질했다.
“애야! 언니라니? 격식 있게 형님이라고 불러야지! 선생질하는 년이 기본적인 예법도 몰라? 네 어미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두 여자의 파상공세에 인아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결혼 전, ‘가족이 하나 더 생겼다’라는 믿음은 산산조각이 난 지 오래였다. 이 집에서 그녀는 그저 장성봉의 씨받이 후보이자, 두 여자의 스트레스 배출구, 그리고 자영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질투의 대상에 불과했다.
바로 그때 현관 도어록 소리가 들렸다. 당직 근무를 마친 성봉이 들어서자, 조금 전까지 인아를 잡아먹을 듯하던 두 여자의 태도가 소름 끼치게 돌변했다. 자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성봉을 반겼다.
“어머, 우리 동생 왔어? 피곤하지? 엄마랑 내가 방금 올케 칭찬하고 있었어. 얼마나 싹싹하고 예쁜지 모른다고. 그치, 엄마?”
강미숙 역시 인아의 손을 다정하게 맞잡으며 뻔뻔하게 맞장구를 쳤다.
“그럼, 우리 새아기가 참 잘하지. 내가 얼마나 예뻐하는데. 성봉아, 너 장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갔다.”
인아는 순간 모공마다 닭살이 돋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멸시하던 입에서 나오는 가증스러운 찬사.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성봉은 싱글벙글 웃으며 인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역시 우리 인아는 최고라니까. 누나랑 엄마가 이렇게 좋아해 주니 내가 다 뿌듯하네.”
성봉의 멍청한 미소 뒤로 자영과 강미숙이 인아를 향해 비릿한 비웃음을 지었다. 인아는 차가운 현실에 몸서리를 쳤다. 이 지옥 같은 연극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그녀는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
임신 소식은 지옥 같던 집안의 공기를 단숨에 바꾸어 놓았다. 산부인과에서 받아온 산모 수첩을 본 강미숙은 광기에 가까운 환희를 보였다.
“어머머! 이게 무슨 복이니! 내가 드디어 손주를 보게 됐구나!”
그날부터 시어머니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인아의 풍만한 몸매를 ‘천박하다’라며 멸시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배 속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녀를 우대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우리 새아기가 우선이다. 네가 편해야 배 속의 아기도 힘을 차리는 법이야. 알았지?”
하지만 그 호의는 인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주말마다 들르던 시누이 자영이 냉소적으로 툭 던진 말에 본심이 드러났다.
“임신했다고 벌써 상전 대접이네? 아직 성별도 안 나왔잖아.”
“아휴! 네가 뭘 알아? 이 어미 태몽이 얼마나 영험한데 그런 소리를 해. 십중팔구 고추 달린 손자야, 손자!”
강미숙은 인아의 손을 꼭 잡으면서도 눈은 자영을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너, 임신한 올케한테 함부로 하면 동티난다. 장차 네 조카가 될 애를 가졌는데 말이 그게 뭐니? 그러니 네가 그 나이 먹도록 혼자지!”
인아는 소름이 돋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딸 자영의 비위를 맞추던 시어머니가, ‘손자’라는 가능성 하나에 딸을 밀쳐내며 판을 새로 짰다. 자영은 가방을 챙겨 일어나며 인아를 흘겨보았다.
“너, 지금 운 좋은 줄 알아.”
자영이 나가자 강미숙은 인아를 다독였다. 하지만 인아는 아랫배를 감싸 쥐며 속으로 빌었다.
‘아가야, 만약 네가 딸이면… 그때 엄마는 정말 혼자가 되겠구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몇 달 후, 병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인아는 넋이 나간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초음파 속 아이는 딸이었다.
절도있는 거수 경례와 함께 유라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8월 25일 자로 제주 광역수사대, 발령받은 김유라 경사입니다. 신고합니다!”책상에 비스듬히 앉아 서류를 보던 문부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문 과장의 눈은 서류가 아닌, 유라의 잘록한 허리와 그 아래 팽팽하게 솟구친 둔부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려갔다.“아, 김유라 경사. 소문은 익히 들었지. 실력보다… 하드웨어가 아주 훌륭하다고.”문부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라에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진한 위스키 향과 비릿한 스킨로션 냄새가 유라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문부열은 유라의 앞에 멈춰 서서,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그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단순한 격려라기엔 손가락 끝의 힘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제복이 좀 타이트한 것 같은데? 경찰학교 예산이 부족했나, 아니면 김 경사 몸이 예산보다 더 넘치는 건가?”문부열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유라의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권총 홀스트가 닿아있는 허벅지 근처까지 문부열의 손이 슬쩍 스쳐 지나갔다. 유라는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상관의 ‘스킨십’이라는 명분 앞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열심히 하겠습니다, 과장님.”“그래, 그래야지. 제주 바다는 육지보다 훨씬 거칠 거든. 김 경사처럼… 탐스러운 사냥개는 내가 특별하게 관리가 필요할 것 같군.”문부열은 유라의 귓가에 낮게 읊조리며, 그녀의 셔츠 깃을 정리해주는 척 손가락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 쇄골 근처의 살결을 툭 건드렸다. 순간 8년 전 폐건물에서 느꼈던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이 유라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유라는 심리분석가로서 문부열의 눈에서 번들거리는 노골적인 음침함을 읽었다. 문 과장은 주동치를 잡으러 온 수사관을 환영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영지에 새로 들어온 보기 귀한 여자를 감상하고 있었다.신고식을 마치고 집무실을 나오는 유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주동치라는 짐승을 잡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그녀는 벌써 또 다른 포식자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왔음을 직감
백합처럼 순진무구했던 명문대 신입생 김유라가 폐건물의 곰팡냄새 속에서 짐승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후,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날 밤, 콘크리트 바닥에 흩뿌려졌던 처녀의 선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유라의 심장 깊은 곳에 응축되어, 놈의 목줄을 끊어버릴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김포공항 로비, 제주행 여객기를 타기 위해 걷는 유라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춰 섰다.선글라스를 벗어 가슴팍에 꽂는 그녀의 이목구비는 이제 단아함을 넘어 서늘한 칼날 같았다. 하지만 정작 남성들의 본능적인 침을 삼키게 만드는 것은, 경찰학교의 혹독한 훈련과 트레이닝으로 빚어진 그녀의 압도적인 하드웨어였다.타이트한 검은색 슬랙스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경찰학교 조교들과 거친 격투로 다져진 그녀의 둔부는 말 근육처럼 단단하면서도 풍만하게 솟아올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지 밑단이 뜯겨나갈 듯 위태로웠다. 8년 전, 짐승의 위협에 사시나무처럼 떨던, 길고 가늘었던 그 다리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의 허벅지는 놈의 허리를 조여 질식시킬 만큼 탄탄하고 묵직한 힘을 품고 있었다.“하아…!.”지나가는 사내들의 눈길이 그녀의 비대칭 허리에 머물렀다. 한 손에 잡힐 듯 잘록한 허리는, 오히려 그 위로 솟구친 비현실적인 볼륨감을 더욱 극대화했다.얇은 실크 블라우스 위로 비치는 유라의 가슴은 8년 전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풍만해져 있었다. 브래지어 컵이 감당하기 힘든 듯 정면으로 툭 불거져 나온 가슴의 무게감은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출렁이며 시각적인 압박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 탐스러운 살결 안쪽, 왼쪽 쇄골 근처에 자세히 보면 8년 전 짐승의 칼날이 남긴 흉터가 낙인으로 남겨 있었다.유라는 자신을 훑는 음란한 시선을 서늘한 눈빛 한 번으로 베어버렸다.‘덤벼봐. 내 몸에 손을 댄 짐승은 어떻게 파멸하는지.’제주 공항에 내리는 순간 습한 바닷바람이 유라의 뺨을 때렸다. 얇은 실크 블라우스가 바람에 밀착되며 터질 듯
김유라에게 1년 전 상하이 뒷골목은 단순한 범죄 현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했던 그녀의 인생을 단숨에 사지로 몰아넣고 영혼을 도살한 지옥의 입구였다.전도가 창창한 대기업 전략기획실과 경찰 공무원 수석합격을 동시에 거머쥔 재원.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매,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서늘한 미모는 가는 곳마다 사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진로를 고민하며 홀로 떠난 상하이 여행길에서, 그녀는 평생의 영혼을 갉아먹을 악마와 마주하고 말았다.비릿하고 습한 공기가 가득했던 상하이의 어두운 골목. 주동치의 억센 손아귀가 멱살을 낚아채 벽으로 짓눌렀다."이 씨팔 년, 감히 어디를 째려봐?"블라우스 단추가 뜯겨 나가고 얇은 천 너머로 살점을 파고드는 압박감이 전신을 꿰뚫었다. 최루 스프레이를 뿌리고 사타구니를 짓밟은 뒤 악착같이 도망쳤지만, 귀국 후의 삶은 이미 지옥이었다. 샤워실에 들어설 때마다 놈의 손길이 닿았던 가슴과 목덜미, 허벅지를 수세미로 살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박박 문질러 닦았다. 피가 배어 나와도 멈출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우면 놈이 옷을 찢어발기던 환청과 함께 아랫배 밑바닥이 공포로 떨려왔다.‘죽여버릴 거야. 내 손으로 직접, 그 짐승의 숨통을 끊어놓겠어.’결국, 유라는 화려한 대기업의 길을 버리고 스스로 '사냥개'의 삶을 선택했다. 경찰학교 34주 합숙 교육 동안 남성 교육생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고강도 훈련을 버텨냈다. 매일 밤 땀에 젖은 거울을 볼 때마다 놈이 움켜쥐었던 신체 부위를 더욱 단단하고 치명적인 무기로 단련하며 복수심을 태웠다.범죄심리분석관 경사로 임용된 그녀에게 운명처럼 전달된 대륙의 국제범죄 브리핑 자료. 6개 성을 떠돌며 서른 명이 넘는 여자를 살육한 연쇄 강간살인마, 상하이의 그 괴물이었다.“주동치···!!”놈의 이름을 씹어뱉는 순간, 1년 전 놈의 손길이 스쳤던 아랫배가 지독하게 떨려왔다.‘네놈이 감히 제주로…’놈이 위조 여권을 들고 제주도로 밀항 입국했다는 첩보를 확인하자마자, 유라는 망설임 없이 모두
김인아는 부쩍 조바심이 났다. 임신부 특유의 짙어진 체취와 비릿한 바다 내음이 섞여 그녀의 어지러움을 부추겼다.“오빠··· 우리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요. 바람이··· 바람이 너무 신경이 쓰여요.”인아가 사르르 떨리는 손으로 성봉의 셔츠 깃을 붙잡았다. 간절한 호소였다. 그러나 성봉의 눈은 이미 렌즈 너머의 허상에 고정되어 있었다.“에이! 인아 당신은 걱정도 팔자라니까! 이 정도 파도가 딱 스릴 있고 좋은 거야. 우리 아롱이도 뱃속에서 바다 구경하니까 기분 좋아서 발길질하는 것 봐.”성봉은 오히려 인아의 허리를 낚아채 철제난간으로 더 바짝 밀어붙였다. 만삭의 배가 차가운 철제난간에 압박당하는 줄도 모르고, 그는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인아, 거기 잠깐만! 지금 원피스가 몸에 착 붙어서 몸매가··· 와, 장난 아니다. 진짜 섹시해. 아롱이 낳기 전 최고의 베스트 컷이라니까! 자, 좀 더 활짝 웃어봐!”성봉의 철없는 환호 뒤로, 갑판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던 주동치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이미 인아의 하얀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바람에 젖어 원피스 위로 도드라진 가슴의 굴곡과 팽팽한 복부에 꽂혀 있었다.‘씨팔··· 저 정도로 부풀었으면 한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겠군.’주동치는 혀끝을 내밀어 갈라진 입술을 핥았다. 155cm의 단신임에도 그가 뿜어내는 살의는 갑판의 공기를 순식간에 동결시켰다. 그는 대륙에서 임신한 여자를 짓밟았을 때의 감촉을 떠올렸다. 배를 짓누를 때마다 터져 나오던 그 눅눅한 신음과 임신한 아기를 보아 살려달라며 울부짖던 여자의 절망적인 눈망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바지 주머니 속 주동치의 손이 비정상적으로 맥동하는 자신의 흉물을 훑었다.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수천 번 인아의 옷을 찢어발기고, 그 거대한 배 위로 제 몸을 겹치는 상상을 마친 상태였다.그때였다.쿵-!마치 수중 폭탄이 터진 듯, 낚싯배 밑창 전체가 들썩이며 묵직한 충격음이 배를 흔들었다.“악!”갑작스러운 요동에 성봉이 손에 쥐고 있던
낚싯배의 엔진이 비릿한 매연을 뱉으며 공회전했다. 조타석에 앉은 도진이 서늘한 눈빛으로 갑판의 세 사람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출항 전, 각자 신분증을 제시해 주세요. 해경에 승선자 출항 신고용입니다.”성봉은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아유, 요즘 당연히 하는 절차죠?”그는 싹싹하게 자신과 인아의 신분증을 내밀었다. 도진의 시선이 인아의 이름 석 자와 증명사진에 머물다, 이내 마지막 인물에게 향했다.“그쪽 분은요?”구석에 먼바다만 보고 있던 주동치는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웠다. 도진이 한 걸음 다가가 재차 재촉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품 안에서 낡은 여권을 꺼냈다.도진은 여권 사진과 왜소한 남자를 날카롭게 대조했다. 자신의 머리 하나보다 작아 보이는 단신, 가늘게 찢어진 눈에 특징 없는 얼굴. 하지만 도진의 냉철한 감각은 놈의 눈동자 속에 숨겨진 짐승의 기운에 순간 움찔했다.“괘도한 씨, 확인됐습니다.”도진은 앱으로 정보를 전송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동치는 안도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다. 수십 명의 여자를 유린하고 도살하면서도 단 한 번도 꼬리가 밟히지 않았던 ‘왜소한 체구, 돌아서는 순간 기억나지 않는 얼굴’. 그것이 그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귀중품은 선교에 보관하겠습니다. 분실 위험이 있으니 맡겨주시죠.”성봉이 가방을 건네자, 옆에 있던 인아가 작은 손가방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아이들이 선물했다는 손바닥 모양의 메달이었다. 물건을 건네받는 순간, 도진과 인아의 손끝이 스쳤다.‘···어디서 봤는데.’인아는 도진의 강렬한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도진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메달을 소중히 받아 넣었다.이윽고 출항을 알리는 짧은 경적이 울렸다. 배가 선착장에서 멀어지자, 주동치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춰진 흉포한 본색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무심하게 바다를 보는 척했으나, 모든 신경은 오직 한 곳, 김인아에게 쏠려 있었다.‘씨팔, 보면 볼수록 물건이네.’
주동치였다.열도의 무인도로 탈출하기 위해 밀항선을 물색하던 주동치의 눈에 인아의 뒷모습이 들어온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만삭의 배를 감싸 쥔 채 위태롭게 걸어가는 인아의 정갈한 목덜미와 폭발적인 몸매의 굴곡을 발견한 순간, 주동치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상하이의 어두운 골목에서 자신에게 최루 스프레이를 뿜고 사타구니를 짓밟았던 김유라. 주동치의 시야 속에서 인아의 관능적인 실루엣은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던 유라의 잔상과 기괴하게 겹쳐졌다.유라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라를 압도할 만큼 청초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아이를 잉태한 채 무방비로 떨고 있다는 사실이 놈의 뒤틀린 정복욕과 복수심을 광적으로 자극했다.‘찾았다… 김유라, 네년 대신 저 청순한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주마.’상하이에서 당했던 모멸감을 저 완벽하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분풀이하겠다는 가학적인 쾌감이 놈의 전신을 지배했다. 열도의 무인도로 밀항 따위는 머릿속에서 소멸한 지 오래였다. 놈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굶주린 짐승의 신경 세포가 박동하는 순간 바지춤 안의 비정상적인 흉물이 흉포하게 요동쳤다. 놈은 입술을 비릿하게 핥으며 청풍 3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조타실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도진의 등줄기에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존재감 없는 사내의 눈빛 속에 담긴 짙은 광기. 그것은 오직 피 냄새와 여자의 비명을 쫓는 짐승의 안광이었다.검푸른 바다 위로 습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수평선 너머에서 기어오는 먹구름은 마치 악마의 아가리처럼 낚싯배를 노리고 있었다.청풍 3호의 갑판에 오른 주동치는 허름한 점퍼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땀에 젖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요동쳤지만, 그것은 공포가 아닌 짐승이 사냥 직전에 느끼는 비정상적인 도파민이었다.‘잡히면··· 바로 총살형이지.’수없이 복기했던 장면이었다. 차가운 벽 앞에 무릎 꿇린 채 뒤통수에 와닿는 총구의 서늘함. 하지만 주동치는 죽음 앞에서조차 반성이 없었다. 오히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