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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율희
다음 날 아침, 회사에 들어서는 순간 수많은 시선이 고아린에게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의 반짝이는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검은 정장, 깔끔한 셔츠, 단정한 똘똘함.

늘 그랬던 고아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은 달랐다.

5년 만에 처음으로 그 검은 유니폼을 벗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짧고 경쾌한 하이힐 소리가 사무실 바닥을 따라 울렸다.

비서팀,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공지연.

그녀는 몇몇 동료에게 둘러싸인 채, 카푸치노 장미를 품고 있었다.

연한 커피색 꽃잎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금방 배달된 아주 비싼 꽃다발.

그리고 포장, 꽃, 향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전지훈,

‘경찰서에 끌려가서도 꽃은 꼭 챙겨 보냈구나.’

“와, 남자 친구 진짜 대박이네요. 며칠에 한 번씩 꽃 선물이라니!”

“그러니까요. 제 남자 친구는 이런 센스가 없어요, 꽃이라면 싸구려 카네이션이 전부라니까요.”

공지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흐뭇해하고 있었다.

“제 남자 친구도 처음엔 잘 몰랐는데 제가 카푸치노 장미 좋아한다고 말한 뒤로 이제는 매번 이 꽃만 보내요.”

그 말이 고아린의 귀에 그대로 박혔다.

‘아, 그랬구나. 기억을 못 한 게 아니라 애초에 나에겐 관심이 없었던 거야.’

전지훈이 보내던 이유 없는 핑계들.

헷갈려서, 바빠서 잊었다는 그 모든 말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향기로운 장미 냄새가 코끝을 찔렀지만 이젠 향이 아니라 독처럼 매캐했다.

고아린은 소파 팔걸이를 잡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지연 씨, 그 목걸이 혹시 A사 신상 아니에요? 이거 천만 원은 기본일걸요? 예약도 3개월 전에 해야 된다던데...”

동료의 말에 공지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목에 걸린 로즈골드 하트 목걸이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네. 며칠 전에 선물 받았어요. 남자 친구가 이게 저한테 제일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 반짝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고아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3개월 전 생일이 임박할 무렵, A사 공식 사이트를 구경하다 그 목걸이를 봤던 날.

전지훈이 다가와 그녀를 뒤에서 안고 턱을 어깨에 걸치며 물었었다.

“이거 마음에 들어? 생일 때 선물해 줄까?”

고아린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작은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생일날 전지훈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예약제라 이미 다 팔렸어. 그리고 넌 비서잖아. 그렇게 화려한 건 어울리지도 않아.”

그날 그가 내민 건 화려한 색의 스카프였다.

“이게 더 네 이미지랑 잘 어울려.”

그 한마디에 고아린은 감격해 스카프를 보물처럼 간직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리석었다.

아마 그 스카프는 목걸이를 포장할 때 딸려 온 사은품이었을 것이다.

‘정말 바보 같았네.’

고아린은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그대로 굳어버렸다.

5년 동안 공지연의 몸에는 자주 보였던 명품들, 그리고 액세서리들은 단 한 번도 고아린의 손에 쥐어진 적이 없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귀하의 고급 홈케어 서비스가 진행 중입니다. 하단 링크를 통해 실시간 현장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 소리가 사무실에 울리자 다른 직원, 임지수가 고하린을 제일 먼저 발견했다.

“아린 언니?”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고 모두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변화는 충격적이었다.

평소 단정하게 묶던 머리는 부드럽게 풀려 파도처럼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옅은 블루 원피스는 허리를 섬세하게 감싸고 깊은 V넥 사이로 은은한 목선이 드러났다.

게다가 은색 하이힐이 빛나며 고아린의 키가 한층 더 높아진 것 같았다.

“세상에, 오늘 왜 이렇게 예뻐요?”

“진작 이렇게 입지 그랬어요!”

“와, 이건 완전 반칙이네요.”

곧, 임지수가 웃으며 달려왔다.

“언니, 이 원피스 혹시 샤넬 신상 아니에요? 요즘 구하기 힘들다던데...”

고아린은 씩 웃으며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이내 공지연의 손에 구겨진 꽃 포장지가 눈에 들어왔다.

“눈썰미 좋네요.”

“헐, 설마... 그거 약혼자가 사준 거예요?”

고아린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 3달 전 그녀가 스스로에게 선물한 옷이었다.

생일날 아무도 축하하지 않았던 그날, 그녀 혼자 자신을 위해 샀던 유일한 기억.

그 옷을 입고 나니 오랜만에 진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맞아. 굳이 남자가 사주지 않아도 돼. 내가 나한테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사람들 눈에는 묵인으로 보였다.

그 순간, 또 한바탕 환호가 터졌고 조금씩 굳어가는 공지연의 표정을 보며 고아린은 미소만 지었다.

“언니, 이렇게 예쁘게 입은 거 보니까 오늘 데이트 있으신가 봐요?”

임지수가 장난스럽게 묻자 그 한마디에 공기가 살짝 얼어붙었다.

회사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고아린에게 오래된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그리고 얼마 전 약혼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누군가 고아린의 약혼자는 중년의 벼락부자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그런 뜬소문들 속에서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나 이런 소문에 상처받고, 자존심이 상해하기 마련이지만 전지훈은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는 걸 싫어했는지 늘 이렇게 말했었다.

“고아린, 남들 말 신경 쓰지 마. 지금 공개하면 좋을 게 없잖아. 나도 널 사랑하지만 회사에 알려지면 내 커리어에 타격이 있을 거야.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래서 그녀는 그 모든 말을 다 믿었고 묵묵히 기다렸다.

그리고 5년 동안, 그 기다림은 기대에서 체념으로, 체념에서 무감각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게 다 거짓이었다.

무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아린은 전지훈의 그림자, 비밀, 숨겨진 존재로 남았다.

심지어 결혼을 앞두고도 세상 누구에게도 자신이 전지훈의 여자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오히려 다른 여자랑 놀아나고 있었다.

만약 전에 동료한테 결혼반지를 들키지 않았다면 아무도 고아린이 곧 결혼한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그래, 결혼할 사이였는데 왜... 왜 나는 숨어있어야 하는 사람이지?’

고아린의 침묵에 분위기는 점점 이상해졌고 공지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린 언니, 설마... 헤어진 거예요? 오늘 반지도 안 끼셨네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손으로 쏠렸다.

정말 손가락에 반지는 없었다.

고아린은 반지를 꼈던 손가락을 어루만지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 반지요? 조만간 좀 더 큰 걸로 바꾸려고요.”

그럼에도 공지연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언니, 그럼 완벽한 약혼자 좀 보여주세요. 저희 한 번도 못 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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