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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율희
긴말을 쏟아내고 나서야 전지훈은 마치 속이 후련해진 듯 숨을 내쉬었다.

그는 셔츠 단추를 느슨하게 풀고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

“고아린, 넌 너무 강하고 너무 의심이 많아. 그게 나를 숨 막히게 만들어.”

공기가 얼어붙은 듯 방 안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전지훈은 담배를 꺼내 또다시 한 대를 피웠고 희뿌연 연기가 그의 얼굴을 가리며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순간, 고아린이 7년 동안 사랑해 왔던 그 얼굴이 연기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와 함께 그녀의 일방적인 7년 간의 사랑도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고아린은 침대 끝에 앉은 채 전지훈이 늘어놓는 자기합리화를 묵묵히 들었다.

‘내가 강해서? 내가 의심이 많아서?’

그의 말들이 공허하게 귓가를 스쳤다.

그녀는 잘 알았다.

전지훈이란 남자는 이미 썩어 있다는 사실을.

다만, 그게 처음부터 그랬던 건지, 아니면 함께한 세월 속에서 천천히 무너진 건지는 모르겠다.

담배 한 대가 다 타들어 가자 전지훈은 다시 다가와 마치 조금 전 독설을 쏟아낸 사람이 아닌 듯 억지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린아, 나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마. 조용히 좀 생각해. 내가 한 말들, 곰곰이 되새겨봐. 난 먼저 갈게.”

그는 무심하게 재킷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고아린은 그대로 무너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지훈... 역시 넌 다 잊었구나.’

3년 전,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던 사람도 전지훈이고 평생 자기를 챙겨달라고, 사랑한다고 하던 사람도 전지훈이다.

하지만 그는 다 잊어버렸다.

정말 남자란 다 똑같은 걸까.

사랑을 말하던 그 입으로 변명과 비난을 쏟아내는 게 그렇게도 쉬운 걸까.

그들은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대신 여자가 너무 완벽해서, 너무 강해서, 너무 많이 원해서 그렇다며 책임을 전가한다.

그리고 여자는 그때마다 바보처럼 믿었다.

남자의 말 한마디, 그 순간의 온기를 사랑이라 착각하며 결국 자신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창밖에 바람이 일더니 비가 흩날리며 창문을 부딪치며 소리가 났다.

고아린은 조용히 손가락의 반지를 빼내 들었다.

그 반지, 3년 전 끼워줄 때의 떨림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을 미세하게 떨며 반지를 던져버렸다.

“전지훈, 이제 우리는 끝이야.”

그녀는 눈물을 닦고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112죠? 음주 운전 신고하려고요. 차량 번호는...”

...

깊은 밤, 북산 별장.

서재 안엔 잔잔한 먹 향과 찻물이 끓는 소리만이 흘렀다.

탁자 위엔 김이 피어오르는 차가 놓여있었고 그 앞에서 붓을 쥔 남자, 강도윤이 앉아 있었다.

누렇게 빛바랜 스탠드 불빛이 그의 단정한 얼굴을 비추자 강도윤은 묵묵히 금박이 박힌 한지 위에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갔다.

[제305조, 말이 많으면 실수한다.]

[제311조, 선하지 않은 자와 사귀지 말라.]

[제318조, 결정을 내렸다면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말라.]

붓글씨를 써 내려가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강도윤의 머릿속엔 오후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웨딩숍에서 고아린이 넘어지던 순간, 그의 품에 안긴 부드러운 체온, 허리의 붉은 점, 붉어진 눈가.

붓이 다시 움직였다.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획마다 눌린 힘이 강해졌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식지 않는 생각들을, 억눌러야만 하는 감정을, 먹으로 덮어버리듯 필획으로 누르고 또 눌렀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삼촌.”

네 살배기 조카 강지민이 잠옷을 입은 채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아이는 분홍색 인형을 끌어안은 채 입가엔 쿠키 부스러기가 묻은 채로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삼촌, 또 뭐 잘못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

“엄마가 그랬어요. 삼촌은 잘못할 때마다 이걸 쓴다고.”

강지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계속 말했다.

“지난번엔 외할아버지 말 안 듣고 여자 친구도 안 찾아서 혼났다면서요! 그리고 또...”

“너희 엄마는 말이 너무 많네.”

강도윤은 아이의 말에 다 대답했지만 손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러자 강지민은 인형 귀를 꼬집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엄마가 그랬어요. 삼촌 몸속에는 작은 괴물이 숨어있다고!”

아이는 두 손을 세워 귀여운 발톱 흉내를 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에 강도윤의 손이 멈췄다.

붓끝이 한지 위를 찍었고 먹물이 동그랗게 번져나갔다.

그는 그 먹물 자국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묵묵히 글씨를 이어갔다.

한창 궁금한 게 많을 나이인 아이는 강도윤이 대답하지 않자 책상으로 다가가 글씨들을 뚫어져라 보기 시작했다.

“와, 삼촌! 이번엔 진짜 많이 쓰네요.”

책상 위 종이 더미가 자기 방 스티커보다도 두꺼워 보여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제 유치원에서 글자를 좀 배운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강도윤이 붓글씨를 쓸 때마다 하나씩 읽었다.

“강씨 가문 가훈 제321조, 남이 가는 길...”

아이의 동그란 눈이 더 커졌다.

‘어라? 이게 뭐지?’

강지민은 동그란 눈으로 삼촌을 바라보며 물었다.

“삼촌, 이게 무슨 뜻이에요?”

비록 강도윤이 몇 번이나 가훈을 쓰는 걸 목격했지만 강지민은 단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필경 아이의 엄마는 강씨 가문에서 강도윤을 빼고는 아무도 가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건 간다는 게 아니라 남이 어려울 때 그 틈을 타지 말라는 뜻이야.”

강지민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가훈까지 다 쓴 강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강씨 가문 가훈 제321조, 남의 약점을 이용하지 말라.”

그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했고 하나하나 이를 악물 듯 눌러썼다.

마치 그 말을 새기며 자신을 다잡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의 파동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바람이 불어와 종이가 들썩이자 그는 가벼운 도자기 하나를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강도윤의 시선은 종이 위 글자에 머문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삼촌.”

한편, 옆에 있던 아이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손에 들고 있던 인형마저 떨어질 듯 흔들렸다.

“삼촌, 왜 그 말을 계속하세요?”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곧, 강도윤은 조심스레 강지민을 안았고 아이는 나무늘보처럼 그의 어깨에 매달린 채 중얼거렸다.

“엄마는 아줌마랑 놀러 갔어요.”

강도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강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계속 들렸지만 상대는 받기 않았고 그는 짧게 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미 잠든 강지민을 품에 안은 채 그는 천천히 아이 방으로 걸었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주고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계속 속삭였다.

“남의 약점을 타지 마라. 남의 틈을 노리지 마라.”

이내 강도윤은 문을 닫고 나왔다.

서재로 돌아온 순간, 바람이 다시 들어와 종이를 들추었다.

그리고 그 아래, 얇은 한 장의 종이가 드러났다.

거기엔 날카롭고 흐트러진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빛나는 진주를 더럽힌 자, 그 죄는 예외로 한다.]

먹이 종이를 거의 찢을 만큼 짙게 스며 있었다.

창밖에는 꽃잎들이 강도윤의 고민을 안은 채 마구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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