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윤하경이 손짓으로 사람들을 멈춰 세웠다.“우지원 씨 말이 사실이에요. 더는 막지 마세요.”곧바로 목소리가 단단해졌다.“하지만 오늘 일은 한 글자도 밖으로 새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보자, 윤하경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제 말 못 알아들으셨어요? 응?”한마디가 떨어지자 누구도 더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 이 집에서 강현우 대신 결정을 내릴 사람은 윤하경뿐이었다.“예, 사모님!”“좋아요, 모두 흩어지세요.”손짓하니 경호원들이 물러섰고, 윤하경은 잇따라 하인 두 사람을 불렀다.“침실은 전부 걷어내고 빨래부터 다시 하세요. 구석구석 하나도 남기지 말고, 처음부터 싹 다시 정리하세요.”조금 전 방을 샅샅이 훑었지만 수상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오싹했다. 집 안에만 들어오면 머리가 멍해지는 이유. 오건우가 무슨 수를 쓴 건지, 잠깐 서 있었을 뿐인데도 다시 머리가 무겁게 눌렸다. 아니었으면 벌써 침대에 쓰러졌을 것이다.사람들이 흩어지자 윤하경이 우지원을 돌아봤다.“어떻게 됐습니까? 찾으셨어요?”우지원이 짧게 숨을 고르고 고개를 저었다.“아직은... 못 찾았습니다.”윤하경은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강현우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제가 여기로 급히 돌아온 건, 형수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돼서였습니다.”윤하경은 그 말엔 답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확인했다.“그 사람... 정말 죽었어요?”“네.”우지원의 표정이 굳었다.“스스로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심장을 정확히 맞췄습니다.”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렸다.“자살이라니....”목숨 걸고 남의 얼굴까지 뒤집어쓴 이유가 그 정도였을 리 없다. 스스로 일을 끝냈다면 대체 무엇을 노린 건가. 생각할수록 앞뒤가 맞지 않았고, 의문만 더 깊어졌다.잠시 침묵 끝에 윤하경이 또렷하게 말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우 씨를 찾아 주세요.”“네, 반드시 찾겠습니다.”우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밖으로 새어
우지원은 오래 뒤졌지만 끝내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그는 이를 악문 채 시신을 걷어찼다. “젠장.”주변을 훑으며 고함쳤다.“멍하니 서 있지 말고 당장 사람부터 찾아!”호통이 떨어졌는데도 몇 명이 꿈쩍도 하지 않자 화가 치밀었다.“안 들려? 움직여!”“예, 예!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두 사람은 눈치껏 몸을 뺐다.들것에 실린 민진혁이 구급차에 올라타는 걸 본 우지원은 그제야 윤하경이 집에 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번쩍 떠올랐다. 우지원은 곧바로 차로 돌아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별장에 도착하자 하인들이 길을 막아섰다. 원래부터 잔뜩 곤두서 있던 신경이 그 자리에서 터졌다.“비켜.”“우지원 씨, 죄송합니다. 대표님 지시 없이는 오늘 들이실 수가 없습니다.”하인들 얼굴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 우지원과 강현우가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요 며칠 내려온 ‘절대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어기면 해고는 기본이고 더 큰 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우지원이 씁쓸하게 웃었다.“그래? 못 들어오게 하겠다?”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눈앞을 가로막은 경호원과 하인들에게 곧장 겨눴다.총구가 번쩍 드러나자 모두가 얼어붙었다. 누구도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경호원들과 하인들이 놀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중 한 경호원만 앞을 막아섰고 그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형님, 저희가 막으려는 게 아닙니다. 저희도 살고 싶습니다. 대표님께 전화 한 통만 해 보시죠. 들어오라 하시면 곧바로 모시겠습니다.”우지원이 씁쓸하게 웃었다가 주변을 훑고는 딱 잘라 말했다.“대표님?”그는 낮고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요 며칠 너희가 본 그 사람 대표님이 아니야. 정체 모를 놈이 이름 훔쳐 앉아 있는 거야.”순식간에 현관 앞 분위기가 얼어붙었다.ㅁ“말도 안 됩니다. 매일 뵙는 분이 대표님인데 어떻게 가짜예요. 대표님께 찍혀 쫓겨났다고 여기 와서 헛소리하십니까?”평소 오건우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 비웃으며 성큼 다가왔다.
탕!예상치 못한 총소리에 오건우가 멈칫했다.아직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았는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차 한 대가 미친 듯 속도를 올려 자신 쪽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조수석 창밖으로는 누군가가 총으로 곧장 오건우를 겨누고 있었다.끼익!차가 멈추자 우지원이 문을 박차고 내려왔다. 오건우를 노려보며 무슨 말을 하려던 우지원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민진혁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었다. 과다 출혈인지, 다른 충격 때문인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우지원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민진혁의 얼굴을 살폈다.“괜찮아? 내 말 들려?”대답이 없자 우지원의 눈이 핏발 섰다. 그는 번개처럼 고개를 들어 오건우를 겨눴다.“너 대체 누구야, 이 자식아. 오늘 여기서 끝내 주지.”우지원이 벌떡 일어나 권총을 들어 올리자 오건우가 코웃음을 쳤다.“해 봐. 나를 죽이면 강현우도 같이 죽는다.”오건우가 삐딱한 웃음을 지은 채 사람들을 쭉 훑었다. 이 인원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만큼은 태연했다.“잘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들켰네.”우지원이 앞으로 나가 오건우의 옷깃을 움켜쥐었다.“한 번만 더 지껄여 봐. 우리 형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우지원이 거의 광기처럼 몰아붙일수록, 오건우의 입가에는 더 기괴한 즐거움이 번졌다.“하하하하… 잘 생각해 봐.”오건우는 그 말을 던지자마자 주저함 없이 권총을 자신 가슴팍으로 가져갔다.탕!심장을 정확히 꿰뚫는 소리였다.바닥으로 무너지기 전, 오건우가 마지막으로 우지원을 비웃듯 올려다봤다.“내가 죽으면… 강현우도 같이 죽어.”이미 달아날 길은 없다는 걸, 오건우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강현우가 어떤 식으로 사람을 다루는지, 오건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붙잡히면 끝없이 고문당할 게 뻔했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 편이 나았다. 무엇보다 오건우가 스스로 숨을 끊어 버리면 진짜 강현우가 어디 있는지 더 이상 아무도 알 수 없다.그 사실을 우지원도 곧바로 깨달았다
“대표님, 여기서 뭘 하실 겁니까?”민진혁이 묻자 뒷좌석에서 낮은 웃음이 새었다.“그걸 몰라서 묻냐.”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얇은 쇠줄이 목을 타고 감겼다. 바로 뒤에서 오건우가 거칠게 잡아당기자 목이 뒤로 꺾이며 눈앞이 하얘졌다. 민진혁은 반사적으로 팔뚝을 목과 쇠줄 사이에 밀어 넣어 숨통을 틔웠고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이 훅 치고 들어왔다.오건우가 등 뒤에서 서늘하게 속삭였다.“역시 강현우의 충견이네. 여기까지 기어 오면 뭐가 달라질 줄 알았나.”민진혁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소리를 짜냈다.“너... 정체가 뭐야.”오건우가 코웃음을 쳤다.“맞혀 봐.”핏발 선 눈동자가 핏기로 번들거렸다.“강현우한테 제일 앞장서 아부하던 네가... 내가 누군지 한번 맞혀 보라고.”철사가 한층 더 조여 들었다. 팔의 힘줄이 솟고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팔뚝을 타고 흘러 시트 천이 서서히 붉게 번졌다.민진혁은 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한 손을 뽑아 운전석 등받이 레버를 힘껏 당겼다. 등받이가 확 꺾이며 몸이 뒤로 밀렸고 숨길이 트이자 철사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오건우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차라리 아까 칼부터 꺼낼걸.’철사가 풀리자마자 민진혁은 몸을 비틀어 주먹을 꽂았다. 좁은 차 안에서 둘은 숨 돌릴 틈 없이 엉켜 붙었고 주고받는 한 방마다 살기가 실렸다.민진혁의 몸놀림은 빨랐지만 팔뚝에 파인 두 줄 상처가 깊어 힘이 빠졌다. 강현우의 얼굴을 뒤집어쓴 남자와 버티기가 점점 힘겨웠다. 공간이 지나치게 비좁자 민진혁은 틈을 타 문을 밀치고 밖으로 굴러나왔다.몇 걸음 달리다 지금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몸을 돌렸다. 차 문을 벌컥 열어 끌어내리려는 순간, 운전석 너머로 보이는 오건우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고 입꼬리만 살짝 올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를 본 순간, 민진혁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오건우가 콘솔 수납함을 열어 권총을 꺼냈다. 총구가 곧장 민진혁을 겨눴고 입가에는 비뚤어진 웃
‘문제는 역시 집 안에 있는 걸까.’“대표님, 사모님. 도착했습니다.”윤하경이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민진혁이 차를 매끈하게 세웠다.“네.”윤하경이 짧게 답했다.저택으로 돌아오자 오건우가 다정한 체하며 윤하경을 침실까지 안내했다.“푹 쉬어.”이마에 입을 맞추려 고개를 기울이는 눈빛까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윤하경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약간 틀어 피하자 오건우의 눈빛이 순간 서늘해졌다.윤하경이 얼른 그의 팔을 잡으며 말을 잇는다.“또 나가세요?”오건우가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응. 금방 다녀올게.”그러고는 아이를 달래듯 낮게 속삭였다.“기다려.”“다녀오세요. 조심하고요.”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건우는 문턱으로 걸어가다 멈춰 서서 멀찍이 눈을 맞췄다. 잠깐의 침묵 뒤, 의미를 읽기 힘든 미소를 띠고 문을 닫았다.문이 ‘딸칵’ 닫히는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윤하경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방 안을 훑었다.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의도적으로 느린 동작으로 움직였다. 혹시라도 카메라가 있다면 그저 방안을 거니는 정도로만 보이게.한편, 오건우가 1층 차고로 내려오자 민진혁이 차 문에 기대 휴대폰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손끝에는 반쯤 태운 담배가 걸려 있었지만 오건우를 보자마자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끝으로 재빨리 껐다.“대표님.”민진혁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휴대폰은 자연스럽게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가자.”오건우가 스스로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올라탔다.민진혁의 눈빛이 짧게 번뜩였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백미러로 뒷좌석을 보며 물었다.“어디로 모실까요?”오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 동공이 어두워지더니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청림원.”“청림원...”지명을 듣는 순간, 민진혁의 손이 잠깐 굳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백미러 너머로 오건우를 한 번 훑어봤다.청림원은 낡은 주공단지였다. 남쪽 구도심에 붙어 있고 철거 공문이 내려간 지도 오래됐다. 주민은 거의 빠져나가 빈집만 줄지어 서 있었다.
배 속 아이만 무사히 있어 준다면 지금 겪는 일도 아직 최악은 아니라고 윤하경은 마음을 다잡았다.오건우는 옆에서 모니터 화면을 차갑게 응시했다. 어금니를 세게 물고 있었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윤하경은 시트 끝을 꼭 쥐었다. 매끈하던 천이 손끝에서 잔주름으로 구겨졌다. 오건우의 눈빛이 지나치게 어두워 배 속 아이까지 해칠 듯하여 미간이 저절로 모였다.의사가 진료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강 대표님, 사모님과 아기는 아주 건강합니다. 오늘 검사도 이상이 없습니다.”말은 끝마친 의사는 오건우를 본 순간, 싸늘한 표정에 눌려 축하한다는 말은 삼키고 머쓱한 미소만 지었다.“두 분 모두 별다른 문제 없으시면 이제 돌아가서도 됩니다.”윤하경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아이에 관하여 더 묻고 싶어 입을 떼려는 순간, 오건우가 먼저 말을 잘랐다.“가자.”집에서는 그나마 다정한 체했지만 오늘의 눈빛은 전혀 달랐고 기분이 몹시 상한 듯했다.윤하경은 의사가 건넨 검사지를 받아 들여다보았다. 초음파 사진 속 작은 손발이 또렷했고 윤곽도 분명했으며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눈가가 뜨거워지려는 것을 억누르며 문을 닫는 순간, 진료실 안에서 의사의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역시 재벌가 살림은 바깥에서 보던 것처럼 만만치 않네요. 오늘 보니 정말 그렇네요.”의사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TV와 뉴스에서 보던 얼굴이라서인지 오건우가 낯익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의사 머릿속에는 어느새 ‘재벌가에 시집가 홀대받는 아내’ 같은 장면이 그려졌다.문을 닫으려던 윤하경의 손이 잠깐 멈췄고 이유 없이 서러움이 치밀었다.진짜 강현우가 곁에 있었다면 오늘만큼은 분명 기뻐해 줬을 텐데.“뭐해?”앞서가던 오건우가 윤하경이 따라오지 않는 걸 보고 성급히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윤하경은 고개를 들고 낯선 기색이 어린 눈과 마주했다.“가요.”‘하경아, 조금만 더 버텨.’윤하경은 이를 꼭 깨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병원을 나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