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훈은 진해리의 어머니 이문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저는...”말을 꺼내려다 이를 악물었지만 정작 본인조차도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한심한지 잘 알고 있었다.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그는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봤다.곧이어 대기하던 경호원들이 여자를 끌고 들어왔다.손발이 꽁꽁 묶인 채 바닥에 내던져진 여자는 마치 짐짝처럼 구겨져 있었다.그제야 여자는 배지훈이 자신을 어떻게 처리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진씨 가문에 넘겨진 순간 끝장이라는 걸 뼈저리게 알았다.여자는 비틀거리며 몸을 끌어 배지훈 쪽으로 눈물 어린 시선을 보냈다.그러나 돌아온 건 냉정한 목소리뿐이었다.“이건 제 잘못입니다. 모든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배지훈은 진씨 부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해리에게 약을 먹인 사람은 이미 잡아 왔습니다. 두 분 뜻대로 처리하셔도 좋습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문주가 벌떡 일어나 여자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평소에는 우아하고 고상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여자의 얼굴이 옆으로 확 꺾이며 붉게 부풀어 올랐다.이문주는 손가락을 떨며 여자를 가리켰다.“네가 감히 어떻게 그런 짓을! 내 딸과 손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내가 가만뒀을 것 같아?”그녀의 목소리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고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여자는 입에 천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울먹이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배지훈은 그 광경을 보며 뭐라도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문주의 시선이 곧장 자신에게로 향했다.다음 순간, 그의 뺨에도 차가운 손길이 날아들었다.“그리고 너, 배지훈!”‘짝’ 하고 울린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우리 해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붙잡아 두는 거야! 싫으면 이혼하면 되잖아. 우리 진씨 가문은 해리를 충분히 지킬 수 있어. 그런데 네가 감히 우리 아이를 이런 식으로 짓밟아?”이문주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고 마지막에는 거의
강현우는 이마를 찌푸린 채 잠시 말을 고르고 나서 낮게 물었다.“사람은 찾았어?”뜻밖의 질문에 배지훈은 잠시 멍해졌다가 강현우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떠올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찾았어.”강현우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이번 일은 진씨 집안에 숨길 수 없어. 해리의 검사 결과가 이미 나왔으니 곧 진실을 캐물어 올 거야. 내 말을 따르려면 네가 먼저 고개 숙이고 잘못을 인정해. 그리고 그 여자를 진씨 집안에 넘겨.”차갑고도 단호한 말이 이어지자 배지훈은 순간 얼이 빠진 듯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거야?”배지훈이 한참이 지나서야 힘겹게 내뱉은 말이었다.강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짧게 웃었다.“왜, 아까워서 못 하겠어?”배지훈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니야.”그 여자를 떠올리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슴속에서는 천 번, 만 번을 찢어도 모자랄 만큼 증오가 끓어올랐다.배지훈은 이를 악물고 낮게 말했다.“내 말은... 꼭 해리랑 진씨 집안에까지 알려야 하냐는 거야.”강현우의 눈빛은 더 깊게 가라앉았다.“무슨 소리야. 일이 터졌다고 머리까지 굳어 버린 거냐? 말귀 못 알아듣겠으면 당장 꺼져.”차가운 목소리에 배지훈은 움찔했다. 강현우가 화를 내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곧 생각을 정리한 배지훈은 지금 상황에서 강현우의 말이 유일한 길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진씨 집안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었다.망설임을 거둔 배지훈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강현우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밖으로 나온 배지훈은 전화를 걸었고 잠시 뒤 건장한 경호원들이 여자를 끌고 왔다.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편이었지만 이미 거칠게 다뤄져 몰골은 형편없었다. 눈빛은 흐릿하게 흐려져 있었으나, 배지훈이 눈앞에 나타나자 순간적으로 반짝였다.“지훈 씨... 제발 저 좀 살려줘요...”여자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말투에는 가련한 애
배지훈은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완전히 기운이 빠져 있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손질하던 머리칼은 흐트러져 물에 젖은 듯 축 늘어졌고 땀이 줄줄 흘러내리며 바닥에 떨어졌다.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그러다 배지훈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바닥에 땀방울만이 아니라 눈물까지 섞여 떨어지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울 거면 나가서 울어.”강현우는 원래 남의 감정에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었다.한참을 침묵하던 배지훈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며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지만 성격은 극과 극이었다. 강현우가 언제나 냉정하고 신중했다면 배지훈은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였다.진해리와의 사랑도 단순히 이어진 게 아니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붙잡은 관계였다.사실 두 사람이 함께한다 했을 때 강현우는 내심 탐탁지 않아 했다. 그때 진해리와 거의 약혼까지 이야기가 오가던 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뒤늦게서야 배지훈이 진해리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걸 깨달았고 진해리 역시 일부러 강현우와의 만남을 이용해 배지훈의 마음을 자극했다.강현우가 그 연극에 응한 것도 오랜 인연 때문이지 달가워서가 아니었다.그런데 지금 벌어진 이 일은 전부 배지훈이 바깥에서 함부로 굴며 생긴 문제였다.그 틈을 타 다른 여자가 욕심을 부리다 결국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강현우가 배지훈을 두둔해 줄 이유는 없었다.강현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배지훈에게 차갑게 말했다.“정신 차려. 해리한테 솔직히 사과해. 해리가 받아주지 않으면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갚아.”평소라면 남의 일에 굳이 끼어들지 않을 강현우였지만 오래된 정 때문에 최소한의 조언은 건넨 셈이었다.하지만 말이 끝나자 배지훈은 벌떡 일어나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안 돼! 절대 해리한테는 들켜서는 안 돼.”그의 눈빛은 애원에 가까웠다.“현우야, 네가 방법 좀 찾아 줘. 이번 일... 해리한테는 비밀로 해 줘. 해리가 알면 그 성격에 날 끝내 버릴 거야. 게다가
윤하경은 결국 거절했다.게다가 막 배지훈의 일이 터진 뒤라 마음이 복잡해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저... 오늘은 너무 피곤해요.”윤하경은 목소리를 최대한 진솔하게 만들며 말했다.“그냥 좀 자고 싶어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고 막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윤하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의 곁을 빠져나갔다.강현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그녀의 작은 등이 보일 뿐이었다.그는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린 뒤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혹시 지금 오실 수 있습니까?”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민진혁의 급한 목소리였다.“배지훈이 사람 붙잡고 난리를 치는데 곧 사람 죽을 판입니다.”강현우는 짧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알았어. 너는 그 옆에 있어. 바로 갈게.”전화를 끊고 욕실을 나와 침실에 들어가자 윤하경이 이미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누워 있었다.머리만 살짝 내밀고 눈을 꼭 감은 모습은 언뜻 보면 벌써 잠든 듯했다.하지만 방에 들어온 지 고작 몇 분도 안 된 터라 강현우는 그녀가 눈을 감고 있는 게 연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그러자 강현우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배지훈 쪽에 문제가 생겨서 다녀와야겠어.”강현우가 낮게 말했지만 윤하경은 속눈썹만 파르르 떨 뿐 대답하지 않았다.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윤하경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는데 침실 문가에 강현우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기대 서 있었다.“연기 좀 더 하지 그랬어.”낮게 깔린 목소리가 묘하게 울렸다. 윤하경은 순간 얼어붙더니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쳤다.“저... 그게...”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말끝을 흐렸다.강현우는 비웃듯 짧게 웃고는 말을 남겼다.“돌아와서 얘기하자.”그제야 문을 열고 나간 강현우의 발소리가 멀어졌다.윤하경은 남겨진 방 안에서 스스로 이
윤하경은 지금 이 사실을 진해리에게 말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갓 아이를 낳은 진해리가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무너질 게 뻔했다.윤하경은 고개를 돌리며 생각을 밀어내려 했지만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슬프다고도 할 수 없고 화가 난다고도 할 수 없지만 묘하게 눌린 기분이 계속 가슴 한쪽에 걸려 있었다.윤하경은 집으로 돌아와 욕실에 들어갔다.욕조에 몸을 담근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잡생각이 떠올라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진해리의 상황을 곱씹다 보니 윤하경은 자신도 모르게 불안에 휩싸였다.윤하경은 자신이 강현우의 사랑을 믿고 그 곁에 남았지만 남자의 사랑이란 게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오늘은 뜨겁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내일은 언제든 마음을 돌려버릴 수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게다가 강현우 같은 사람이라면 지위와 권력을 쥔 만큼 유혹이 얼마나 많을지 윤하경은 뻔히 알았다.그 순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윤하경은 생각이 끊기자마자 반사적으로 욕조 속으로 몸을 움츠렸다.그리고 고개를 들자 욕실 안으로 들어서는 강현우가 눈에 들어왔다.천장에서 떨어지는 불빛이 강현우의 어깨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의 넓고 단단한 기운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강현우는 어디서든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었고 윤하경은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하지만 방금 전까지 떠올린 진해리의 일을 생각하니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마음을 전부 다 내어줄 수는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혹시라도 강현우가 언젠가 배지훈처럼 변한다면 자신이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불안이 그녀를 붙잡았다.강현우가 욕조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무슨 생각해?”윤하경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순간 눈이 마주치자 괜히 마음이 흔들려 시선을 피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윤하경은 급히 수건을 집어 몸을 감싸고 일어섰다.“저 씻었으니까 현우
“이 약물이 조산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혹시 진해리 씨가 모르고 뭘 잘못 드신 건 아닌가요?”의사의 말에 윤하경은 순간 얼어붙었다.곧바로 얼마 전 진해리와 함께했던 호텔 점심이 떠올랐다.윤하경은 강현우를 향해 다급히 말했다.“현우 씨, 호텔 지배인부터 확인해 보세요.”그 정도 급의 호텔이라면 지배인은 보통 얼굴만 비치고 간단히 인사하는 정도로 그친다.손님이 먹는 음식까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지배인이 직접 다가와 이것저것 챙겼고 괜히 친절한가 보다 하고 넘겼던 일이 이제 와서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더구나 식사 내내 지배인의 시선이 유독 진해리에게만 머물렀던 것도 분명 이상했다.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모든 정황을 합쳐 보니 답은 하나였다.다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목적만 알 수 없었다.배지훈은 그 얘기를 듣자 얼굴이 굳더니 곧바로 강현우의 사람들과 함께 호텔로 확인하러 사람을 보냈다.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민진혁이 직접 지배인을 붙잡아 끌고 왔다.비행기를 타고 도망치려던 순간이었다.그 무렵 윤하경은 출산을 막 끝낸 진해리 곁에 있었다.“아이는 건강합니다. 다만 조산이라 당분간 인큐베이터에서 지켜봐야 합니다.”의사의 설명에 진해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씁쓸한 빛이 스쳤다.“그동안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진해리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병실 문이 열리며 진씨 집안과 배씨 집안 어른들이 잔뜩 선물을 들고 들어왔다.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윤하경은 괜히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진해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병실을 나섰다.복도에는 강현우가 앉아 있었고 옆자리에는 배지훈이 고개를 떨군 채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윤하경은 배지훈을 외면하고 강현우에게 물었다.“사람 찾았어?”강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진혁이 공항에서 붙잡았어. 막 비행기 타려던 참이었대.”“쾅!”말이 끝나자마자 배지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예상치 못한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