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철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야?” 임수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보, 그래도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아직 완전히 끝난 일도 아니잖아요.” 윤수철은 냉소를 흘리며 쏘아붙였다. “기회? 무슨 기회가 더 남았다는 거야?” 임수연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일, 저한테 맡겨봐요. 제가 하경이랑 제대로 이야기해 볼게요.” 사실, 그녀는 이미 다른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윤하경이 원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그녀를 그 길로 가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눈빛이 반짝이며 속으로 계산을 마친 임수연은 빠르게 윤수철의 휴대전화를 낚아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편, 윤하경은 그 두 사람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고 생각을 비우고 싶은데 머릿속은 복잡했고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시간을 맞춰 소지연이 사무실로 들어왔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윤하경을 보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하경은 빠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녀는 소지연이 걱정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요즘 회사 수익이 꽤 좋잖아. 예전에 유럽 여행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다녀와. 며칠 동안은 내가 회사에서 버틸 수 있어.” 그러자 소지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됐어. 엄마 수술비도 아직 다 못 갚았잖아.” 윤하경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소지연이 미리 손을 흔들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알아,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하지만 난 원래 철저하게 계산하는 사람이야. 이 돈, 반드시 다 갚을 거야. 네가 안 받겠다면 그냥 나보고 나가라는 거지?” 그 말에 윤하경은 입을 다물었다. 이때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고 확인해 보니 배경빈이었다. 그가 설계도를 완성했다며 만날 약속을 잡자고 했고 윤하경은 시간
“저를요?” 윤하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요?”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상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빚을 갚으라고 하네요.” “빚이요?” 윤하경은 당황해서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전 빚진 적 없는데요. 누군가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려는 거라면 경찰을 부르세요.” 그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확성기로 바꾼 듯, 여러 명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고 이내 전화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이번엔 굵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 맞지?” “들어둬, 네가 나한테 진 빚 6억 원. 당장 갚아. 안 갚으면 이 집, 네가 손댈 생각도 하지 마라. 들리는 말로는 리모델링하려고 한다던데? 그래, 한번 해보시지?” 남자의 말투는 건방지고 거칠었으며 노골적으로 협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야?” “누군지는 직접 와서 보면 알겠지.” 남자는 비아냥거리듯 웃으며 덧붙였다. “알겠어. 기다려.” 통화를 끊은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일이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았고 본능적으로 임수연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녀가 해온 짓거리를 생각해 보면 이 일과도 무관할 리 없을 터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요?” 배경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요.” 그녀는 가방을 챙기며 대답했다. 덜컥! 주차장에 도착해, 운전석에 앉으려던 순간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이미 안전벨트를 착용 중인 배경빈이 보였다. “저기... 급한 일이라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는 배경빈의 안전벨트를 힐끗 보며 말했지만 배경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까 전화하는 거 들었어요. 별장 쪽으로 가는 거 맞죠? 마침 저도 며칠 전에 체크 못 한 부분이 있어서 같이 가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유를
“허허!” 남자는 윤하경의 담담한 태도를 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주머니에서 구겨진 서류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좀 봐. 네 엄마가 이 집을 담보로 내 걸고 내게 4억을 빌린 계약서야. 이자까지 쳐서 이제 6억을 갚아야지.” 그는 가볍게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계약서에 명확히 적혀 있거든? 지금 집 명의가 네 거라지만 우리 돈을 못 받으면 이 집은 내 거야. 그리고 너, 인테리어 공사한다고? 한번 해보라지.” 윤하경은 계약서에 적힌 선명한 검은 글씨와 서명을 보며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삼켰다. ‘역시, 임수연. 너라는 인간은 끝까지 더럽고 치사하구나.’ 이 집을 양도받을 때 명확하게 법적 문제는 없다고 확인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임수연이 집을 담보로 6억을 빌렸다는 사실을 숨겼다니? ‘이 집이 고작 6억짜리인 줄 아나?’ 이곳의 가치가 얼마인데 감히 이렇게 더러운 방법을 써서 자신을 옭아매려는 걸까. 윤하경은 분노를 삭이며 서류를 사진으로 찍었다. 잠시 침묵한 후, 윤하경은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이 집은 내 명의야. 그리고 계약을 맺은 건 임수연과 윤하연이지, 나랑은 전혀 관계없어. 돈을 받고 싶으면 그 두 사람한테 직접 가서 달라고 해.” 남자는 비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너희 한 가족 아니야? 지난번에도 걔가 담보 잡고 속여서 명의 이전까지 해놓고 이젠 쏙 빠지겠다고? 내가 그 속임수에 또 넘어갈 거 같아?” 그의 표정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윤하경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이라고? 미친 소리하지 말고 꺼져.”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순간 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단단했다. 만약 평범한 여자였다면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벌써 겁을 먹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하경은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았다. “누가 돈을 빌렸으면 그 사람한테 가서 받
남자의 주먹이 배경빈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고 윤하경은 깜짝 놀라 배경빈의 손을 잡아당겼다. “경빈 씨, 싸우지 마세요!” 상대는 숫자가 많았고 괜히 개입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그런데 배경빈은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먹을 향해 전진했다. 윤하경의 우려와는 달리 배경빈은 생각보다 훨씬 능숙하게 싸움을 받아쳤다. 첫 번째 공격을 가볍게 흘리더니 상대의 팔을 잡아 그대로 비틀어버렸다. 남자는 고통에 신음을 내뱉으며 휘청거렸다. 배경빈은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연속된 움직임으로 차례차례 상대방을 제압해 나갔다. 심지어,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정확해서 윤하경조차도 그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상대가 숫자로 밀어붙이려 했지만 배경빈은 단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 결국, 넘어진 남자들은 겁을 먹고 더 이상 덤벼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눈앞의 남자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실감할 뿐이었다. 싸움이 끝난 뒤, 배경빈은 넘어진 남자 위에 올라타 그를 꾹 눌렀다. 그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어때? 이제 좀 얌전히 굴 생각이 들어?”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우리 그냥 돈 받으러 온 것뿐이었어요!”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때, 윤하경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석양빛 아래, 배경빈이 가볍게 웃으며 상대를 내려다보는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인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위압적인 분위기가 있었고 마치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입니다! 여기서 불법 집회 및 소란이 있다는 신고를 받았습니다!” 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윤하경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경찰을 향해 말했다. “경찰관님,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제 집을 불법으로 침입해 난동을 피웠습니다. 자세한 건 신고 내
윤하경은 경찰서 대기석에서 배경빈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소독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입가에 난 상처는 더 부어올랐고 그녀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많이 아프세요?” 솜에 소독약을 묻혀 살살 문지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배경빈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시선은 계속 윤하경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그의 시선은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듯했다.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쳤다. “왜 그러세요? 많이 아파서 말도 못 하시는 건가요?” 배경빈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웃음을 흘렸고 윤하경은 그의 반응이 신경 쓰여서 미간을 좁혔다. “어디 불편하세요?” 그러자 배경빈이 입술을 가볍게 핥으며 조용히 물었다. “정말 저를 기억 못 하세요?” 윤하경의 손이 멈칫했다. “우리... 만난 적 있었나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녀는 배경빈과 마주했던 기억이 없었다. 윤하경도 나름 괜찮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배씨 가문 같은 명문가와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서로 얼굴을 아는 정도야 가능했겠지만 이렇게까지 뚜렷한 기억이 없다면 아예 교류가 없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녀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경빈은 살짝 웃으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윤하경이 들고 있던 소독약 솜을 쥐고 있는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배경빈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윤하경은 그가 마치 서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배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고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자,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 앞에 서 있는 강현우는 그녀의 손목을 예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어렴풋한 노기가 서려 있
윤하경은 오늘이 강현우와 약속한 날이라는 걸 깨달았고 원래라면 지금쯤 그와 함께 있어야 했을 시간이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혹시 강현우가 이 일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배경빈이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하경 씨, 저 기분이 아주 안 좋아요.” “네...?” 생각이 복잡했던 탓에, 윤하경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왜요?” 배경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날 잊었다는 사실이요.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들어요.” 그 순간, 강현우는 문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배경빈과 윤하경이 가까이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깊고 차가웠다. 그때, 배지훈이 한 걸음 다가와 배경빈의 팔을 붙잡았다. 배경빈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배경빈이 반항해 봤자 소용없었다. 아무리 배지훈과 갈등이 있어도 그와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배지훈이 배경빈을 끌고 나가자, 그 자리에는 강현우와 윤하경만 남았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백색 조명이 그의 얼굴을 더욱 차갑게 보이게 했다. 윤하경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강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여기서 밤이라도 새울 생각이야?” “그게 아니고...” 윤하경은 변명하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조차 없었고 그냥 몸을 돌려 바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윤하경은 재빨리 그를 따라갔다. 그의 차는 바로 경찰서 앞에 세워져 있었고 말 한마디 없이 차에 올라탔다. 윤하경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그의 차에 함께 올라탔다. “현우 씨,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오늘은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서...” 그런데 그녀의 말을 강현우가 단칼에 끊었다. “배경
한편, 배지훈은 배경빈을 돌아보며 그가 입은 상처를 확인한 뒤 얼굴을 굳혔다. “앞으로 윤하경이랑 멀리해.” 배경빈은 원래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배지훈을 바라봤다.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인데?” 배지훈은 차갑게 대꾸했다. “나랑은 상관없어. 하지만 강현우랑은 상관있지. 너도 봤잖아. 강현우의 여자야.” 배경빈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결혼이라도 했대?” 배지훈은 미간을 좁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걸 떠나서 강현우가 윤하경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모르겠냐? 강현우가 언제 여자를 신경 쓴 적 있었어? 그런데 오늘 너랑 함께 있다는 소식에 직접 경찰서까지 따라왔다고. 너도 알잖아. 강현우 성격상 건드릴 사람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괜히 엮이지 마라.” 그러나 배경빈은 그런 경고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입가의 상처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배지훈은 더 깊게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윤하경한테 관심 있어?” 배경빈은 피식 웃었다. “그건 형이 맞혀봐.” 배지훈은 입술을 꾹 눌렀다. “배경빈, 함부로 하지 마.” 마침 차가 멈춰 섰고 배경빈은 문을 열며 차에서 내리기 직전 말했다. “형이 강현우를 두려워하는 건 알겠는데 난 별로 상관없어.” 배지훈은 그 말에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는 차 안에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강현우의 방에 들어섰다. 그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있었고 그녀가 들어오자 한 손을 등받이에 올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왜? 내가 직접 안아서 욕실에 데려다줘야 해?” 강현우는 넥타이를 살짝 풀어 헤쳤고 그 태도는 마치 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이 없다는 듯 보였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직설적이었고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늘 일은 그녀가 먼저 잘못한 게 맞
강현우는 그녀의 당황한 표정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입가를 살짝 올렸다. 마치 그녀의 반응이 꽤 흥미롭다는 듯,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손을 들어 윤하경의 턱을 가볍게 잡았다. 그의 손은 크고 힘이 셌기에 윤하경의 작고 섬세한 얼굴이 그의 손아귀에 잡히면서 살짝 일그러졌다. 오늘 자신이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강현우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강현우 같은 사람에게 반항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는 본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윤하경은 짧은 순간 고민했지만 무리하게 반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가벼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현우 씨, 뭘 하고 싶으신데요?” 강현우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너랑 침대에서...” 그의 직설적인 말에 보통이라면 얼굴이 빨개질 법도 했지만 윤하경은 이미 이런 말에 익숙했기에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면 먼저 씻어야겠네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덧붙였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몸이 좀 더럽네요.” 강현우가 깔끔한 성격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 그가 잠시나마 그녀를 놔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그녀를 가뿐히 들어 올려 욕실 앞 세면대 위에 올려놨다. 마치 가벼운 인형을 다루듯,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흔들렸고 반사적으로 강현우의 셔츠를 움켜잡았다. “아...” 당황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그런데 강현우는 오히려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좋아. 방금 소리, 나쁘지 않은데? 이따가도 그렇게 해.” “...” 그날 밤,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고 강현우는 평소보다 더 가차 없었다. 욕실에서 침실까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