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방금 전까지도 잔뜩 부풀어 있던 기대가 한순간에 꺼져버린 느낌이었다.모든 증거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수철이 끝내 임수연을 믿기로 한 것이다.‘사랑이라는 게, 참 감동적이네.’임수연은 이미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단단히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임수연이 전화를 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임 감독님?”30분 후. 거실은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임수연은 고개를 들어 윤수철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말했다.“여보, 들으셨죠? 정말 단순한 촬영이었을 뿐이에요.”윤수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때, 임수연이 고개를 살짝 돌려 윤하연에게 눈짓을 보냈다.윤하연은 눈빛을 읽고 곧바로 앞으로 나와 윤수철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아빠, 이젠 다 밝혀졌잖아요. 엄마 용서해 주세요, 네? 제발요.”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전 같았으면 윤수철은 벌써 무너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그는 무거운 눈빛으로 윤하연을 내려다보았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소파 팔걸이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이걸로 끝내버릴까...? 아니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이렇게 쉽게 끝나선 안 되지.’임수연이 이런 정도로 쉽게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었다.그녀는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윤하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듯, 무심하게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오늘부터, 네가 ‘서해당’ 아파트로 이사 가.”그런데 바로 그때 윤수철의 차가운 목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렀다. 계단을 오르려던 윤하경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고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내가 진실을 확인하기 전까지, 집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 만약 네가 날 속였다면 다시는 이 집
윤하연은 갑작스러운 따귀에 얼이 빠져 멍하니 있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아!”짜증 나는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윤하경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번엔 반대쪽 뺨까지 한 대 더 후려쳤다.이제야 좌우가 균형이 맞아 보였다.“닥쳐.”윤하경의 목소리는 서늘했다.“다시는 내 엄마에 대해 입에 올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처참하게 될 거야.”강현우와 오래 엮이다 보니 그의 차가운 분위기를 본능적으로 흉내 내게 된 것 같았다. 심지어 지금 표정도 강현우가 분노할 때와 똑 닮아 있었다.그 차가운 기운에 눌린 윤하연은 순간적으로 반격하는 것도 잊고 주춤했다.윤하경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섰다.그날 저녁, 저택에서 식사를 한 사람은 윤하경 혼자였다.윤수철은 서재에 틀어박혔고 윤하연은 기가 죽었는지 방으로 숨어버렸고 임수연은 이미 집에서 쫓겨났다.집안의 공기가 한결 상쾌했다. 그래서인지 저녁도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한편, 윤하연은 집을 나오자마자 구지호와 자주 만나던 호텔로 곧장 향했다.오늘도 원래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인해 늦어져 버렸다.도착했을 때, 구지호는 이미 방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구지호를 본 윤하연은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냈다.“지호 오빠...”구지호는 담배를 물고 있다가 그녀의 부어오른 뺨을 보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일이야.”윤하연은 입술을 앙다물고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언니를 화나게 했더니... 그래서...”그러자 구지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그는 곧 그 감정을 감추고 손을 뻗어 윤하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칠고 뜨거운 손가락이 붉게 부어오른 뺨을 부드럽게 훑었다. 윤하연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지호 오빠, 아파...”그녀는 의도적으로 마치 침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가늘고 부드럽게 내밀
윤하연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구지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구지호는 그녀의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매서운 기운이 스치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차가워졌다. 그 변화에 윤하연도 움찔하며 살짝 긴장했다. “오빠, 설마 아직도 포기 못 했어?” 윤하연은 눈을 아래로 깔며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가볍게 눈가를 훔쳤다. “난 그저 오빠를 위해서야. 언니가 오빠를 그렇게 차갑게 내쳤는데... 오빠가 이렇게 조용히 있는 게 말이 돼? 오빠, 나 언니를 진짜 해칠 생각은 없어. 단지, 오빠를 배신한 대가가 뭔지 알게 해주고 싶을 뿐이야.” 그녀는 팔을 뻗어 구지호의 목을 감싸안으며 살짝 몸을 기대어 애교스럽게 속삭였다. 구지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잠시 침묵한 후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좋아. 네 말대로 해.” 윤하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역시 오빠뿐이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들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막 닿으려던 순간, 구지호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오빠?” 윤하연은 당황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구지호는 벌써 몸을 일으켜 외투를 걸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얼굴 다친 상태잖아. 이런 건 급해할 거 없어.”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천천히 하면 돼. 앞으로도 기회는 많잖아?” 윤하연은 얼굴을 굳히며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다. ‘뺨 맞은 게 무슨 상관이람? 설마 또 내가 못생겨 보이는 건가?’ 그녀가 뭔가 말하려 하자, 구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따가 의사 부를 테니까 치료받아.” 그는 그녀 앞으로 다가와 손가락 끝으로 살짝 그녀의 뺨을 스쳤다. “여자 얼굴은 중요하니까.” 그 말에 윤하연의 표정이 풀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오빠, 고마워.” 역시, 아직도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것 같아 윤하연은 내심 만족하며 그를 올
윤하경은 입술을 오므렸다.휴대전화를 쥐고 있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고 관절이 하얗게 변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소지연은 그녀가 계속 답장을 안 하자 또 메시지를 보냈다.[너와 강현우는 끝났어?]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각자 필요에 의해 엮인 관계니 끝났다고 할 것도 없어.][그럼 다행이야. 강현우 같은 바람둥이와는 그냥 잠자리만 가지면 돼.]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한 가지 요점을 소홀히 한 것을 발견했다.[근데 넌 어쩌다 강현우를 만났어?]소지연과 강현우는 절대 어울릴 수 있는 교점이 없으니 같은 공간에 있을 리가 없었다.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소지연도 이 방에 있는 것 같았다.소지연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말했다.[시간 나면 다시 얘기해. 너 일단 쉬어.]윤하경은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다시 소식을 보내도 소지연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윤하경은 신경 쓰기가 귀찮아서 다시 강현우의 사진을 클릭해 보았다.그녀는 자신과 강현우의 관계가 침대 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침대 위의 사이일 뿐 감정적인 문제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광경을 보면 마음이 다소 답답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실컷 놀아 강현우. 놀다가 큰 코 다치지.”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나와서 잘 준비를 하는데 뜻밖에도 휴대폰에 메시지가 하나 더 있는 것을 보았다.확인해보니 강현우의 메시지였다.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간단명료했는데 두 글자밖에 없었다.“어디?”윤하경은 입술을 오므리고 화가 난 듯 답장하지 않았다.그러나 침대에 누워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머릿속은 아까 소지연이 보낸 사진이 아니라 강현우와 함께 한 순간들이 가득했다.족히 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얼굴을 두드렸다.“윤하경!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와 그 사람은 절대 불가
깜짝 놀란 윤하경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남자의 힘이 더 컸다.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윤하경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그녀는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려 별장 쪽을 돌아보았다.이제 겨우 분풀이를 한 셈인데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잡혀 전쟁의 불길이 자신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왜? 무서워?”강현우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윤하경이 말을 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거리가 가까워지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서 약간 코를 찌르는 와인 냄새를 맡았다.그리고 어렴풋한 향수 냄새도 났다.강현우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그녀는 이 향기가 강현우의 것도 아니고 자신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갑자기 머릿속에서 아까 강현우의 품에 엎드린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바쁘신 강 대표님께서 저는 왜 찾아오셨죠? 시간이 이미 늦었어요. 대표님 몸에 상처도 다 안 나았으니 얼른 돌아가 쉬세요.”그녀가 울적하게 말하자 강현우는 코웃음을 쳤다.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차 문을 열고 윤하경을 차에 밀어 넣은 다음 몸을 숙여 들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지금 나 쫓아내는 거야? 내 허리가 고장 났어? 아니면 네가 겁이 없어진 거야?”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영리한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강현우가 정말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난 좋은 맘으로 한 말이니 대표님께서 듣기 싫으면 그냥 못 들은 거로 하세요.”이곳은 윤씨 저택이라 그녀는 감히 강현우에게 맞서지 못했다.강현우 같은 미치광이가 무슨 일을 할지 전혀 통제할 수 없으니 절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말투가 바로 누그러졌다.강현우는 그녀의 가슴에 있는 잔머리를 쓸어넘기고 손을 들어 차 문을 두드렸다.밖에 서 있던 민진혁이 즉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떠났다.윤하경은 어리둥절했다.“나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강현우는 아예 온몸으로 그녀의 몸을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눈을 떴을 때, 강현우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약간 의아해했다.강현우의 뒤로 민진혁의 얼굴이 초조해 보였다.“대표님, 아가씨,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네?”윤하경은 어리둥절했고 서둘러 강현우의 얼굴을 툭툭 쳤다.“대표님, 일어나세요.”강현우의 얼굴을 만지자마자 그가 열이 심하게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이 사람 열나고 있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민진혁은 움찔 놀랐다. 강현우의 곁을 지키면서 그는 작은 질병도 겪지 않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민진혁은 급히 차 문을 열어 강현우를 윤하경에게서 일으켜 세웠다.“아마 상처 감염으로 인한 발열일 거예요. 어서 의사를 부르세요.”“하지만 사모님께서 이미 별장까지 거의 다 오셨어요. 만약 대표님께서 여기 계신 걸 알면 따져 물으실 거예요.”민진혁은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다는 의사가 확실했다.윤하경은 떨떠름하다가 강현우의 한쪽 팔을 부축했다.두 사람이 강현우를 침대에 눕히자마자 누군가 문을 열었다.“현우야, 왜 아직도 안 일어났어?”윤하경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선아가 들어오는 순간 바로 강현우의 침대 밑으로 도망갔다.민진혁이 넋을 잃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그리고 민진혁은 한선아를 보며 답했다.“대표님께서 열이 있는 것 같습니다.”한선아는 그제야 주절주절하던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일이야?”민진혁은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며칠 전에 대표님께서 부상을 입으셨어요. 아마 상처 감염 때문인 것 같습니다.”한선아는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말했다.“그럼 빨리 의사를 불러야지 뭐 하고 있어?”“네.”민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밑의 위치를 보았다.윤하경에게 행운을 빈다는 눈빛을 보내고 돌아섰다.침대 밑에 숨어 있는 윤하경은 감히 숨도 쉬지 못하고 한선아가 절대 자신을 발견하지 않기를 빌었다.강씨 가문은 엄격하기로 소문이 났다. 윤하경은
윤하경이 기어 나오자 의사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민진혁은 의사를 돌아보고 조용히 말했다.“아무것도 못 보신 겁니다.”의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강씨 가문의 가정의사 일을 하며 그도 많은 일을 겪었다.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민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윤하경에게 말했다.“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윤하경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는 강현우를 힐끗 보고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은 괜찮은 거죠?”그녀의 관심 어린 말에 민진혁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깊은 뜻을 담은 눈빛이었다.똑똑한 윤하경이 그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난 그냥 내 돈줄을 관심하는 것뿐이에요. 강 대표님처럼 씀씀이가 큰 돈줄은 드무니까요.”민진혁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기타부타 말이 없었다.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툭하면 한빛 그룹에 주식을 선물하는 돈줄은 정말 찾기 어려웠다.의사는 그녀의 뒷말을 못 들은 듯 대답했다.“열만 내리면 대표님은 괜찮으시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민진혁에게 말했다.“그럼 저 좀 데려다주세요.”가는 길에 그녀는 민진혁에게 자신이 사는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윤씨 저택으로 향했다.그녀가 잠옷 차림으로 외박하고 돌아온 걸 본 윤수철이 화구를 그녀에게 향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윤하경이 집에 돌아온 시간은 이미 아침 10시였고 별로 이른 편이 아니었다.윤수철과 윤하연은 아직 출근 전이었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자 윤하연이 윤수철의 옆에 앉아서 나지막이 애교를 부리는 걸 보았다.“아빠, 내가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정말 사실이었어요.”“아빠를 그렇게 사랑하는 엄마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내일은 제 생일이잖아요. 엄마가 와서 제 생일을 함께 보내게 하면 안 돼요?”윤하연의 목소리
“윤하경!”윤하연이 그 말을 듣고 윤하경을 가리켰다.아마 자리에 윤수철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윤하경에게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그만해!”윤수철은 고함을 지르고 윤하경을 힐끗 쳐다보고 입을 벌렸지만 뭐라고 꾸짖어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다시 고개를 돌려 윤하연을 바라보았다.“하경이 말이 맞아. 이 일이 명확히 밝혀지기 전에 네 엄마는 집에 돌아올 수 없어.”“아빠!”윤하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그녀가 이렇게 애교를 부리면 윤수철은 평소 같으면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이번 일은 그의 체면과 관련이 있어서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이건 남자의 자존심이었다.그는 일어나서 윤하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일은 네 생일이니 가서 엄마와 같이 보내도 돼.”윤하연은 멍해졌다.생일을 이 집안에서 보내지 말라는 뜻이었다.“회사에 일이 있어서 난 먼저 가보마.”윤하연이 멍해 있는 틈을 타 윤수철은 이미 일어나 떠났다.윤수철의 차가 멀어지고 나서야 윤하연은 이를 악물고 윤하경을 바라봤다.“이제 만족해?”윤하경은 눈을 희번덕거렸다.“그 말은 어제도 물었었어.”“난 아주 만족해.”윤하경은 웃으며 대답하고는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고 윤하연 혼자 거실에 앉아 화를 냈다.계단을 오르던 윤하경은 갑자기 뭔가 떠올라 계단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아래층에 있는 윤하연에게 소리쳤다.“모녀 사이 정이 깊은 것 같으니 너도 아예 엄마 집에 가서 같이 살아.”“날 쫓아내려고? 꿈도 꾸지 마!”윤하연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웃었다.“그리고 아빠도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그래?”윤하경은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네 맘대로 해.”“하지만 네 엄마가 다시 집에 돌아올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보여.”“그게 무슨 말이야?”윤하연은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갔다.윤하연이 궁금해하는 모습에 윤하경은 일부러 뒷말을 잇지 않고 신비롭게 웃었다.“맞춰봐.”그리고 윤하연을 신경 쓰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의 손에는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